가족, 행복, 사랑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 김덕기는 행복한 기억과 아름다운 풍경들을 캔버스에 저장한다. 먹에서 출발한 활동 초기 작품의 서정적 표현부터 색채의 마법이라고 불리는 최근작까지 김덕기 작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행복’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어느 감독의 유명한 말처럼, 김덕기 작가의 가장 개인적인 행복은 관람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그저 작품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포스코미술관에서 오는 3월 10일까지 <김덕기-눈부신 햇살 아래서>展을 개최하는 김덕기 작가를 만나 이번 전시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Q 2002년 포스코 미술관에서 전시를 연 이후 이번이 4번째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를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2002년도에 ‘세 그루의 나무’라는 주제로 포스코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연 적이 있어요. 개인전 외에도 <행복한 선물>展, <포스코 50주년 기념>展 등 포스코와 인연을 맺고 여러 번 전시에 참여했었죠. 최근 미술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관람객과 소통하는데요. 그러던 중 2020년 포스코 달력 삽화 작업하게 되면서 본 전시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Q 이번 전시는 작가님의 20년간의 작업을 총망라하는 자리이죠. 작품도 50점이나 되고요. 이 중에서 관람객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A 먼저 초기작들을 꼽고 싶어요. 전시장 입구를 지나면 ‘세 그루의 나무(2001)’라는 작품이 있어요. 제가 최근 주로 다루는 가족이나 사람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분위기 속에 새벽과 여명이 드러나는 풍경화입니다. 전형적인 동양화(수묵화)죠.
두 번째는 ‘숨바꼭질(2002)’이라는 작품이에요. 분홍색 배경에 엄마가 나무 뒤에 숨어있고, 아빠와 아들이 엄마를 찾는 그림이에요. 그리고 다음은 ‘가족-함께하는시간(2014)’이라는 제목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연작이에요. 이제 곧 봄이 되는데, 노란색 배경이 펼쳐진 대작을 보면 ‘어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요즘처럼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많은 분들이 이 그림을 보고 따뜻한 기운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고요.
마지막으로는 여행 작품 중 ‘플로리다 키웨스트 – 아름다운 해돋이(황금빛 아침)(2019)’라는 작품이에요. 키웨스트는 헤밍웨이가 몇 년간 머물며 집필했던 지역이에요. 실제로는 보기 힘든 멋진 해돋이를 그림으로 감상하면서 좋은 기운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어요.
Q 이번 포스코미술관 전시에서 ‘가족-즐거운정원’을 스틸로 작업하셨는데요. 철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작업해본 소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A 저는 주로 물감과 같은 부드러운 소재로 작업을 해왔어요. 그런데 철은 누군가의 기술이 없다면 물에 녹일 수 없고, 절단할 수도 없죠. 스틸은 그동안 다뤄온 재료의 성질과 달라서 더욱 흥미로웠어요. 이번 작품은 ‘가족-즐거운 정원(2019)’이라는 기존 작품을 모티브로 입체적으로 만들었어요. 만약 다른 공간에서 전시를 진행했다면 철을 활용할 엄두가 안 났을 텐데, 포스코미술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어요. 철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 경험은 처음이라 이 기회는 제게 뜻밖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Q 타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비교했을 때 포스코미술관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이번 전시를 열면서 특별한 인상을 받으셨다고요?
A 포스코미술관은 우선 규모 면에서 상업 갤러리와 차이점이 있어요. 도심 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상당히 큰 공간 규모를 갖고 있어요. 또한 이곳은 생업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이 많이 찾아주셔서 전시장 분위기가 꽤 활발합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쪼개 잠시 들러서 꼼꼼하게 유심히 관람하는 관람객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Q 작가님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셨죠. 작품 초기엔 먹을 활용하시다가, 이후 아크릴을 사용하면서 작품 느낌이 밝아졌어요. 작업 스타일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전공이 있지만 타 전공에도 관심을 갖곤 하죠. 우리 일상 자체가 관계로 얽혀있고 단조롭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따져보면 저는 아빠, 남편, 사위이기도 하고, 밖에서는 어떤 이들은 제게 선생님이라 부르고 화백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Q 그런 다양한 사회적 역할과 일상들이 작품에도 드러난 것이군요.
A 네 맞아요. 작품으로 따져보면 한지 작업의 평면적이면서 묵상적이고, 관념적인 점이 참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사람을 표현하는 데는 노란색, 분홍색, 붉은색 등 직접적인 색감이 필요하더라고요. 일상을 표현하는 데 ‘색’만한 게 없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지에서 캔버스 작업으로 옮겨오게 되었어요. 2007년 즈음엔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 여주로 작업실을 옮겨왔어요. 시골에서 생활하니까 사계절 변화가 더욱 뚜렷이 보이더라고요. 이 시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공기와 계절의 변화를 색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답니다.
Q 작가님 작품에는 꼭 어떤 사연들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더 흥미롭고 궁금해집니다. 특히 더욱 특별한 사연이 있는 작품들은 무엇인가요?
A 이번 전시에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저의 유년시절을 표현한 ‘웃음소리-행복한 순간들’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황토 흙과 먹을 사용해 완성했죠. 유년시절 아버지와 논에 있을 때,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기에 내 발을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호기심이 일어서 그 안에 발을 집어 넣었다가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 경기도 여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작품입니다. ‘에즈빌리지-지중해가 보이는 풍경(2019)’도 저에겐 뜻깊은 사연이 있어요. 제 아들과 저축한 돈을 모아서 간 남프랑스가 배경인데, 작품에 저와 아들을 처음 끼워 넣어봤어요. 이렇게 작품 속에서 숨은 의미를 찾아보시는 것도 이번 전시를 즐겁게 관람하는 노하우랍니다.
Q 작가님 그림 속에는 ‘가족’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작가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저에게 가족은 늘 그리워하는 단상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여주는 집 근처에 남한강이 흐릅니다. 강변에는 자갈밭과 고운 모래밭이 있었죠. 모래성을 소중히 쌓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친구들과 한바탕 놀고 돌아오면 이 모래성이 바람에 날리고 햇볕에 말라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하지만 제 기억엔 모래성 쌓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던 아버지 또한 제가 예술 공부를 시작했던 고등학생 시절 돌아가셨어요. 이후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제가 경험한 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쳐주었죠. 저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함께 하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리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Q 이번 전시회에서 특히 가족의 모습이 담긴, 그리고 풍경이 아름다운 작품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요. 배경 선정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하얀 캔버스나 흰 종이에 형태, 선, 점, 색을 입히고 여러 가지 요소를 배치시킬 때 많은 고민이 있어요. 저는 여행을 하거나 시내를 다닐 때 그림 같은 풍경을 포착하는 것을 즐겨요. ‘너무나 아름답다’, ‘눈부시다’ 하는 장면이 있으면 작업실에 와서도 계속 떠올려보죠. 작업을 할 때만큼은 ‘오너’가 되어서 캔버스 공간을 ‘운영’해요. 빈 캔버스를 보고 있을 땐 막막하기도 하지만 중간 과정부터는 형태를 완성해가면서 점차 기쁨을 느껴요. 빈 캔버스 속에 아름다운 장면과 풍경을 꺼내면서 관람객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Q 전시장 한 공간에서는 영상도 감상할 수 있는데요. 이 작품은 무엇인가요?
A 2015년 김선영 다큐멘터리 감독과 함께 작업한 65분 분량의 ‘아티스트’라는 영상 작품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작가 김덕기가 부산, 제주도, 안동, 여주 작업실 등을 돌아다니며 작품의 영감을 얻는 과정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기록한 것인데요. 저의 초기 작품부터 당시 최근작까지 소개되는 아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작품은 제5회 로마오버룩국제영화제(Overlook – 5th CinemAvvenire Film Festival)에 초청되어 다큐멘터리 경쟁부분 감독상을 수상했고, 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초청 상영되었어요. 평면적인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 김덕기’가 등장하는 영상을 통해 화가들도 소재가 되어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Q 전시회 입구에 ‘삶이 내게 무엇을 하냐고 물으면 나는 오늘 그림을 그린다’로 시작하는 글귀가 눈에 띄는데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A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즉흥적으로 쓴 한 편의 짤막한 글이에요. 요즘 여러 가지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뒤숭숭하지만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어딘가에서 필요한 존재라면, 비록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시대를 살더라도 ‘삶이 내게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관람객에게 이 글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한 번은 여행을 다녀와서 보니 작업실에 붓이 물감과 엉겨 붙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붓을 빠는데, 물감이 후두둑 떨어지면서 곧 엉킴이 없어졌어요. 잠시 행복했던 여행의 추억도 그렇게 사라지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 기억이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서 그림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김덕기 작가의 작품은 2020년 포스코그룹 캘린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술관에서 캘린더에 실린 작품을 찾아볼 수 있으며, 미술관을 찾은 시민들에게는 김덕기 작가의 작품이 실린 2020년 포스코그룹 탁상 캘린더를 제공할 계획이다(1인 1매, 소진 시까지). 생기발랄한 색채와 동화 같은 서사로 꾸며진 이번 전시는 코로나19로 무거워진 사회 분위기 속 메마른 관람객의 마음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따뜻하게 위로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