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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장 인터뷰] #2. 삶의 기로마다 성찰의 물음표를 던지다, 김공영 명장

[대한민국 명장 인터뷰] #2. 삶의 기로마다 성찰의 물음표를 던지다, 김공영 명장

2015/09/30

‘대한민국 명장’. 산업현장 종사자 가운데 최고의 숙련 기술자에게 수여하는 상이자, 기술인들 중 ‘최정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데요. 바로 이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된 자랑스러운 포스코인을 차례로 만나보는 ‘대한민국 명장 인터뷰’ 시리즈,그 두 번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포철공고 재학 시절부터 ‘철강 장인’을 꿈꾸며 외길을 걸어온 김공영 명장을 만나볼 텐데요. 그가 명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영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부터 함께 보시죠! 🙂

명장과의 첫 만남, 그의 손을 잡다

김공영 (포항 스테인리스제강부 4제강공장)

1987년 포스코에 입사. 포철공고 재학 시절 ‘우향우 정신’에 크게 감명받아 철강 장인의 꿈을 품었습니다. 스테인리스강 생산이 시작된 89년 스테인리스 AOD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현재는 전로를 이용한 스테인리스강 취련작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내에서는 학습동아리인 마이스터를 결성하고 사외에서는 직무전문가로 위촉되어 국가직무능력표준을 제·개정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모든 비즈니스 만남은 악수로 시작됩니다. 김공영 명장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가 덥석 건넨 손을 잡는 그 순간, 의례적인 악수는 이례적인 장악이 돼버렸습니다. 투박한 듯 섬세하면서 뭉툭한 듯 예리한 명장의 손은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죠.

이렇듯 불과 3초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제 머릿속을 메워버린 물음표는 인터뷰 내내 그가 걸어온 여정을 더듬어 가는 지팡이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줄곧 자연스러운 이끌림을 선사했던 그의 삶 또한 스스로와 세상에 대한 물음표로 점철돼 있었습니다. 근무복은 황색에서 청색으로 바뀌었을지언정 김 명장은 스테인리스 제강 외길을 묵묵히 걸으면서 마주한 모든 것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왔습니다.

임전무퇴의 우향우 정신, 명장의 꿈을 품다!

그가 겨눈 첫 번째 과녁은 ‘우향우 정신’이었습니다. 포철공고 재학 시절, 독후감 주제로 던져진 우향우 정신은 안 그래도 혈기왕성하던 고등학교 남학생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었다는데요. 국익을 위해 죽을 각오로 무장하고 나선 창립요원들에게서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화랑의 기상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불이 당겨진 열정의종착점은 아직 불분명했는데요. 그러다 연봉학 기성(技聖)의 초빙 강연에서 목표를 정했습니다.

“당시 연봉학 기성에게선 제 짧은 표현력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요샛말로는 아우라(aura)랄까요? 아무튼 형언하기 힘든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어요. 시성이나 악성은 들어봤지만 기성이라니 불현듯 가슴이 뛰더군요. 그때 이 길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온갖 역경을 딛고 100톤 전로 국산화를 달성한 기성의 선명한 발자국을 좇아서 저도 한번 철강 장인(匠人)이 돼보기로 맘을 먹었지요.”

그리고 1987년 4월, 포항제철소2제강전로에서 철강명인의 꿈이 막 피어올랐습니다.

“제강일이 호랑이 등일 거라는 건 미리 예상했었습니다. 근데 정작 문제는 사람이었어요. 활달한 성격과 학창시절부터 어느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교성으로 사람 사귀는 일은 자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급, 내규 등 여러 준거 기준 안에서 사람을 대하는 건 사뭇 다른 문제였어요. 입사하고 초반 몇 년 동안은 조직에 용해되지 못하고 제 자신에게로만 침잠됐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허송세월만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했고, IT자격증도 취득했지만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었어요. 사람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이 여럿 있겠지만 그 이면 가장 깊숙이 자리한 건 인정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그림이 어찌 됐건 그 기저에 밑바탕은 그대로였습니다. 내로라하는 쇠장이. 뚜렷한 목표를 두고도 우왕좌왕하던 저를 묵묵히 참아준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에요.”

흔들리던 김 명장을 잡아준 것은 본가에서 맞닥뜨린 사자성어였습니다. ‘우수천석(雨垂穿石)’. 한학자이던 아버지 친구분께서 아버지에게 선물한 글씨였는데요. 힘 있는 필치가 희미해진 지난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찮은 빗방울이라도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단단한 돌도 뚫을 수 있다는 건데, 결국 어떤 일이건 꾸준히 매진하면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불쑥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제게 훌륭한 나침반이 돼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집으로 가져와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습니다. 지금도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살피고는 방향을 체크해요. 거, 액셀 밟기 전에 앞 한번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웃음)”

90년대 초 전 세계 스테인리스시장 얼어붙어
합금철 실수율을 높여 위기 극복해

“90년대 초, 우리나라는 연간 25만 톤에 달하는 스테인리스 핫코일을 수입하고 있었어요. 회사는 1986년 스테인리스사업부를 발족하고 1990년 7월 제강서 냉연에 이르는 스테인리스 일관생산체제를 구축, 수급 불균형 타파에 나섰습니다. 물론 같은 해 12월 광양 3기 종합준공으로 조강연산 1,750만 톤을 달성한 것에 비하면 갓 걸음마를 뗀 단계였죠. 하지만 스테인리스는 뛰어난 내식성, 미려한 외관과 더불어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장차 회사의 미래를 짊어질 기린아(麒麟兒)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만큼 손도 많이 필요했고요.

스테인리스강 정련에는 니켈, 크롬 등 고가의 합금철이 다량 투입됩니다. 녹이 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녀석들 덕이에요. 근데 그 대가도 확실합니다. 제조원가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자그마치 80% 정도니까요. 갑자기 90년대 초 니켈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 스테인리스강 시장이 얼어붙었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 당시 제게 주어진 취련 작업은 용강의 특성을 감안해 이 값비싼 성분들을 조정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첨가된 합금철의 실수율을 높이는 게 저의 지상목표였죠. 제 손끝에서 당시 제 월급 정도가 왔다 갔다 했다니까요.

기필코 원가절감을 이뤄내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렸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던 명예회장님 말씀대로 한번 미쳐보니 슬슬 길이 보이더군요.”

스테인리스강 취련사 김공영은 쓰러진 과녁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오랜만에 손에 쥔 화살은 그 어느 때보다 촉이 바짝 서있었습니다. 팽팽한 활시위에서 당겨진 화살은 쏘는 족족 과녁을 꿰뚫었는데요. 김 명장의 이름이 매번 실수율 수위에 오르면서 ‘취련은 김공영’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목표에 도달한 건 아니었죠. 길을 냈으니 이젠 닦을 차례였습니다.

크롬산화물 효과적 환원기술 개발, 스테인리스 자동 취련 모델 BAM 제작
조업자 사이의 지식공유를 통한 역량 결집 꿈꿔

“제가 좀 개방적인 편입니다. 특히 회사일에 있어서는 더 그래요. 초일류 조직이 되려면 구성원들이 검증과 체계화 노력을 통해서 자신이 체득한 노하우를 자산화해야 합니다. 조금 세련되게 표현해보자면 ‘오픈 앤드 콜래보레이션(open and collaboration, 개방과 협력)’이랄까요. 특히 변수가 많은 정련 작업은 조업자 사이의 지식공유를 통한 역량 결집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저도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팀워크
앞으로 제2, 제3의 명장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


“지금 저희 파트가 서른 명 가량 됩니다. 근데 어느 분이 마치 한 명 같이 보인다고 그러더군요. 파트장을 맡으면서 공언한 게 하나 있습니다. 출근할 때 행복하고, 퇴근할 때 보람을 느끼는 파트를 만들겠노라고. 고맙게도 너 나 할 것 없이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더군요. 그 손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으니 하나로 보일 수밖에요.”

김 명장은 당면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안으로 팀워크를 강조했습니다. 핸드폰을 꺼낸 김 명장은 어제 회식 후에 촬영한 거라며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는데요. 여태껏 보아왔던 여느 단체 사진과는 달리 좀처럼 서열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친소관계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죠. 틀림없이 그들은 모두 파트너 관계였습니다.

“포스코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많은 덕을 봤습니다. 이젠 제가 입은 그 후광에 보답할 차례에요. 묵묵히 후배들이 가는 길을 비춰줄 요량입니다. 누가 묻더군요. 이젠 목표를 다 이룬 거 아니냐고… 맞습니다. 30여 년 전, 당돌하던 고등학생 시절에 수립했던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뤘어요. 하지만 대한민국 명장 김공영으로서의 목표는 최근에 막 세웠습니다. 저희 파트에서 제2, 제3의 명장을 배출하는 것. 이제 그걸 향해 뛰어볼 참입니다.”

마침표는 어느새 또 한 번 물음표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 선보이는 ‘대한민국 명장 인터뷰’ 시리즈! 명장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충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는데요. Hello, 포스코 블로그는 더 진하고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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