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포스코투데이]
ㅣ박태준 명예회장은 나에게는 인생의 멘토이자 스승, 은인
ㅣ가족을 제외하고 임종 전 마지막으로 명예회장 뵈어
ㅣ선수 은퇴 후에도 포항프로축구단장,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해
2011년 12월 13일 오후 5시 20분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포스코를 창업한 박태준 명예회장이 생의 마지막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병실 앞에는 황경노 전 회장, 박득표 전 사장을 비롯하여 전현직 포스코 임직원과 가족이 병실 상황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고, 아래층 대기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주치의 장준 박사가 병실 문을 열고 나와 황종현 전 포항프로축구단장에게 말을 건넸다.
– 잠시 후에 운명하실 것 같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황 전 단장은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박태준 회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승의 끝자락 그림자가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가 병실을 나온 뒤 3분 후에 장준 박사가 다시 나왔다.
-운명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입원하신 후로 내가 오랫동안 곁을 지켰으므로 주치의가 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 내게 임종 직전을 지켜보도록 한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가족 외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이승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운명하셨다는 주치의의 말에 머릿속이 온통 하얘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는 뵐 수가 없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나에게는 인생의 멘토이면서 스승이요 은인이셨습니다.”
장옥자 여사는 그를 따로 불러 짤막하게 일렀다. 묏자리를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보통이라면 밑도 끝도 없는 말일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는 이미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생전에 고인과도 이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일이었다.
“꽤 이름이 알려진 지관(地官) 한 분과 함께 제일 먼저 찾아본 곳이 회장님의 고향 선산(경남 동래군 장안읍 임랑리)이었습니다. 회장님의 선친 내외분이 나란히 잠들어 계신 묘소 아래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가본 데가 포항공대였는데, 홍대원 동원개발 사장과 함께 포항제철소 1고로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서 한동안 말을 잊고 있었어요. 사실 거기도 갑자기 가본 것이 아니고 평소에 그런 생각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데가 포항 주택단지 내의 영일대 뒤쪽, 그러니까 부덕사 입구 앞이었어요.”
황 전 단장은 영일대 뒤쪽 그 자리가 박태준 회장의 유택으로 가장 좋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양지바른 곳인데다 시야가 탁 트여 전망이 좋고, 평소에 사람 좋아하신 분인데, 접근성도 매우 양호한 곳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생전에 회장님과 그쪽을 지나가면서 농 반, 진 반으로 그 자리를 말씀드린 적이 있었어요. 정정하게 활동하시는 분께 묏자리 말씀을 드린다는 게 좀 그래서 농을 섞었지만, 내 생각에는 참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회장님께서는 묏자리 말씀은 안 하시고 ‘내가 죽거든 미국식으로 하라’는 말씀만 하셨어요. 봉분(封墳)을 만들지 말라는….”
묏자리를 둘러보고 서울 빈소에 올라와 보니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모셔야 한다는 얘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장옥자 여사가 마지막으로 고향 선산과 포항의 두어 곳을 살펴보라고 한 것은 꼭 그 자리로 모시겠다는 뜻보다는 유족으로서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현충원 상황을 알아본 이대공 전 부사장은 서울현충원에는 자리가 없으니 대전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문상을 온 각계각층 인사들의 도움으로 서울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 EG 회장도 요로(要路)에 전화를 하고 협조를 구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장례식 전날 몇몇 사람들이 서울현충원을 찾아가 여러 곳을 물색해 보았지만, 모두들 현장 사정에 어두웠으므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현충원 측에서 권하는 자리가 있었다. 역시 그런 일은 아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리가 무척 좋아 보였던 것이다. 결국 현충원 측에서 잘 협조해 주어서 나중에 부부가 함께 누울 자리까지 마련해 장례를 치렀다.
축구선수 시절 점프력 상당해… ‘맘보’라는 애칭 붙어
한홍기 감독… 선수 처우 개선, 조언 아끼지 않는 선생님 같은 존재
맘보, 이는 축구선수 황종현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별명은 다소 악의적이거나 골려주는 식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에게 붙여진 ‘맘보’라는 별명은 차라리 애칭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맘보란 서양 음악의 한 갈래로서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두발, 복장 등에서 가장 앞서가는 패션 또는 그런 어떤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축구 올드팬들의 기억에는 생생할 겁니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KBS 축구 해설위원 선영제 씨라고. 그분이 내게 붙여준 닉네임이에요. 나는 운동선수로서 키가 큰 편이 아니지만 점프력은 상당히 좋았어요. 서전트 점프가 1m였으니까. 축구 경기 중에는 서로 공중 볼을 따내기 위해 헤딩 경쟁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공중에서 공의 위치로 이동하는 이중 점프를 하면 선영제 위원이 ‘저게 바로 맘보 점프입니다’ 하고 해설을 한 것이 나에게 ‘맘보’라는 애칭이 붙게 된 연유입니다.”
그는 대전상고, 건국대학교 축구부를 거쳐 1967년부터 대한중석 축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는 모든 분야가 그랬지만 특히 운동선수들에 대한 대우는 물론 사회적 인식이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프로구단은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 실업팀이래야 대한중석, 한국전력, 석탄공사 3개 팀이 전부였고, 군에서 운영하는 몇 개 팀이 더 있을 뿐이었다. 선수 숙소는 물론 훈련할 운동장도 없었고, 신분은 정식 사원이 아닌 임시직이었다.
“내가 중석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로 얘기만 들었습니다. 1964년 박태준 사장이 취임해서 상동광업소를 시찰하는데, 축구선수들이 거기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으니 ‘축구 선수들이 여기서 뭐 하느냐’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다음 해인 1965년에 대한중석이 우승하고 나서 한홍기 감독이 박태준 사장에게 세 가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동장 확보, 숙소 마련, 신분 전환 이렇게 세 가지…. 그런데 1972년 주주총회에서 대한중석 주주들이 예산 절감 방편으로 축구단 해체를 결정해버렸어요. 특별히 예산을 줄일 데가 없으니 축구단 해체가 가장 손쉬웠던 거지. 근무할 사람은 남으라고 해서 선수 다섯 명이 영등포 제련소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운동선수들이 그런 일을 하기가 어디 쉬웠겠어요.”
1967년 9월 11일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의 실수요자로 지명되어 중석 내에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후 이 멤버들이 유네스코회관으로 옮겨 종합제철 창설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홍기 감독도 거기서 창설 멤버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황종현 전 단장은 제련소 근무도 할 수 없는, 오갈 데 없는 선수들을 챙겨 농협팀 창단을 추진했다. 농협에서는 그에게 대리급에 트레이너 자리를 줄 테니 선수 스카우트 작업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홍기 감독과는 의논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유네스코회관을 찾았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당시 유네스코회관 멤버들 중에 대한중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분은 여상환, 박준민 두 분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선생님을 만나 농협으로 가도 되겠느냐고 여쭸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위층으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곤 다시 내려오시더니 거두절미하고 ‘가지 마’ 이러시는 거야. 박태준 사장님과 의논을 하셨겠지. 그때 박태준 사장께서 앞으로 제철설비를 구매할 때 유럽 메이커들과 많은 접촉이 있을 텐데, 그 과정에서 그들과 축구 교류를 할 생각이니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해요. 사실 나는 원래 군 병참팀의 멤버였는데, 한홍기 선생님의 배려로 중석팀에서 훈련을 하는 특전을 누리다가 합류했어요. 그렇게 박태준이라는 거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겁니다.”
황 전 단장은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한홍기’라는 고유명사 뒤에 ‘감독님’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감독님과 선생님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굳이 따질 필요 없이 그는 ‘선생님’이라는 말로 자신의 한홍기 감독에 대한 존경의 깊이를 드러내 보였다.
대한중석 축구단 해체로 갈 곳이 없이 떠돌던 선수들이 포항제철 촉탁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은 1972년 3월 1일이었다. 이후 7·3종합준공 때 포항제철 축구단이 창단되어 정식 직원으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그런데 이 신생 팀이 제22회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거머쥔 것은 창단 바로 다음 해인 1974년이었다.
“이 대회를 통해 포철 축구단은 일약 명문구단으로 떠올랐고 이회택 선수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어요. 당시 이회택 선수는 축구계 선후배 간의 처신 문제 등으로 축구계에서 밀려나 운동선수로서는 낭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한홍기 선생님께서 포철로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로서는 개인적인 한풀이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측면 공격수가 올려준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 해 그대로 때려 넣는 멋진 기술을 선보이며 축구 팬들로부터 ‘역시 이회택’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대회가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기 때문에 그는 국가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했지요.”
이듬해 1975년에도 실업연맹전에서 우승하고 일본 원정을 나섰다. 도쿄 올림픽경기장에서 일본 우승 팀인 얀마디젤과 맞붙은 한일전은 자못 뜨거웠다. 얀마디젤은 가마모토, 모리 등 일본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포진한 일본 최강 팀이었다.
“비가 쏟아져 수중전으로 치러졌는데, 우리가 전반에만 3골을 먹었어요. 잔디가 구불구불해 스파이크가 박히지 않는 어려운 그라운드 컨디션에 비까지 쏟아지는 가운데 3골을 만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어요. 그런데 후반 들어 이회택 선수가 날고뛰면서 혼자 4골을 터뜨려 결국 우리가 4 대 3으로 이겼습니다. 김영선 주일대사가 불러서 홍건유 동경사무소장, 한홍기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갔더니 대사께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더군요. 당시 권투선수 허버트 강 등이 연거푸 일본 선수에게 패해 교민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는데, 이번 포철의 승리로 그런 분위기가 말끔히 씻겨나갈 거라면서 크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포철 축구단… 대학 선수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
좋은 선수 육성해 선수 확보에 어려움 겪는 다른 팀에 보내주기도
이후 포철 축구단은 대학 선수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포스코는 몇 개 대학 축구선수들에게 3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지원한 뒤 졸업 후 선수로 확보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수 선수들이 대거 합류하자 그는 현역 은퇴를 결심했다. 그의 나이 34살 때였다.
“당시만 해도 후배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 준다는 뜻에서 선배가 은퇴하는 것은 스포츠계의 미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포스코는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키워서 선수 확보에 목마른 다른 팀에 흔쾌히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1980년 함흥철 감독이 할렐루야 팀을 창단할 때도 포스코에서 꽤 많은 선수를 보내 창단을 지원하기도 했어요. 박태준 회장님은 스포츠계에서도 그렇게 큰 분이셨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박태준 회장님이 안 계셨으면 오늘의 포스코가 있을 수 없고, 한홍기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포스코가 오늘과 같은 명문 축구단을 보유할 수 없었을 겁니다. 포스코가 회사 창립과 함께 축구단을 창단한 것도 사실 박태준 회장님과 한홍기 선생님 사이의 교감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또 박태준 회장님께서는 한홍기 선생님을 체육계 인사로만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느꼈습니다.”
1976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총무부 근무지원과 근무에 이어 비상계획부 경비계장과 독신료운영계장을 거쳐 1979년 비상계획부 경비과장에 보임되었다. 그는 경비계장으로 근무할 때 그 말썽 많은 직책에서 모함을 받아 고발을 당하면서까지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원칙에 따라 철저히 근무해온 것이 과장에 발탁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독신료운영계장을 두 달쯤 했을 때였습니다. 홍건유 총무이사께서 넥타이 매고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실이었어요. 박태준 사장께서 하신 말씀은 ‘잠 좀 자자’, ‘물자 관리 잘해’ 이 두 마디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비로소 경비과장 명령이 난 것을 알아챘습니다. 당시 제철소는 건설과 조업이 병행되면서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건설, 조업 자재를 비롯한 온갖 물자들이 드나드는데, 이를 관리하는 데가 경비과였으므로 ‘물자 관리 잘해’라는 말씀은 이해하겠는데, ‘잠 좀 자자’는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어, 포항시내에 건설업체 임원들이 자주 가는 술집들을 찾아가 안주인으로부터 정보를 얻기도 했습니다. 부정을 저지르다 경비실에서 문제가 되면 한밤중에도 사장께 전화를 해대는 일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도 그 두 마디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1984년에는 서울사무소 행정과장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서울사무소 행정과장은 비서실 소속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때는 자의건 타의건 박태준 회장의 정계 진출 논의가 무성했으므로 그는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포스코에서도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급기야 노조 추진 세력들이 포항 평민당사에 난입해 이를 저지하는 측과 마찰을 빚는 와중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사진이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박태준 회장은 더 이상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노동조합 설립을 승인했다.
“그렇게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때였어요. 하루는 김덕윤 비서가 ‘포항에 좀 가세요’ 하는 거야. 나는 직감적으로 포항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세한 것은 가보면 알겠지 하는 마음으로 더 묻지도 않고 야간열차를 탔는데, 포항에 도착해 보니 그게 아니라 주거시설부장으로 명령이 나 있었어요. 나는 명령이 날 때마다 명령지에 내 이름 하나만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기인사 때 많은 사람과 함께 난 것이 아니라, 꼭 무슨 일이 있어서 혼자 명령이 나는 거예요. 그것도 팔자라면 팔자겠죠.”
주거시설부에는 인덕 주택단지 단독주택을 아파트로 개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지 보상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라 있었다. 평당(坪當)으로 계산해서 보상했는데, 입주 이후 이 문제가 시끄러워졌다. 원래 소방도로는 개인 소유가 아니므로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데, 담당 간부가 잘 모르고 보상에 포함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문제의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설계부 직원의 부인이었다.
“연봉학 기성에게 부탁해서 그 사람을 만나보니 문제가 엉뚱한 곳으로 비화되어 있었어요. 당초 부지 보상 범위를 두고 시작된 문제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감정이 악화되어 입주 아파트의 벽지, 장판, 타일, 싱크대, 창틀 등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란 조기에 수습하지 못하면 이런 식으로 커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입주민들을 만나 내가 최대한으로 조치할 테니 도와달라고 재삼 당부를 하고 주거시설부에 편성되어 있는 공사 예산으로 이미 입주가 완료된 아파트의 수리 작업에 들어가 10개월 만에 끝냈습니다.”
성실함으로 시설 관리에 완벽 기해…직원 가족에게도 인정받아
1992년, 서울사무소장 겸 포항프로축구단장으로 보임
그는 주거시설부장 재임 중에 YS와 주택단지에서 조깅을 함께 한 일을 떠올렸다. 1990년 2월 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이 합친 이른바 3당합당으로 박태준 회장은 민주자유당의 민정계 수장이 되었지만, 당시 가장 유력한 여당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YS와의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90년 무렵 박태준 회장이 김영삼, 김종필, 박준규 등 민자당 최고위 지도부 인사들의 부부동반 포항제철소 초청 행사를 마련했다.
“오신 분들이 청송대에서 주무셨는데, 다음날 아침 내가 YS의 조깅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YS는 해외 순방 중에도 조깅을 거르지 않으므로 코스 안내도 할 겸, 정보도 얻을 겸 내가 파트너를 자청한 것이었습니다. 시속 10㎞ 미만을 유지하면서 정확히 20분을 뛰더군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잘 뛰십니까. 젊은 놈이 못 따라가겠습니다. 내일부터 저도 운동 좀 해야겠습니다’ 하고 아부성 발언을 했더니 ‘허허, 통영중학교에서 축구선수를 했어’ 하면서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런데 나는 ‘그래서 잘 뛰시는군요’ 하는 말만 했지 내가 축구선수였다는 말은 안 했어요.”
샤워를 마치고 조찬장으로 들어설 때였다. 박태준 회장을 마주한 YS가 흡족한 듯 말했다.
-박 회장, 이 사람 덕분에 아침에 잘 뛰었소.
-아, 그 친구 축구선수 출신 황종현입니다.
“회장님의 그 말씀에 나는 도망을 치고 말았어요. 내가 축구선수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이런저런 말을 했으니 결국 쫑코가 된 셈이었지. 비서 김기수 씨로부터 YS는 한번 꽁하면 안 펴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난감해지더군.”
당시 그는 가족과 떨어져 포항에 혼자 있었으므로 새벽에 일어나 혼자서 보일러실이며, 테니스장, 목욕탕 등 주택단지 공용 시설을 꼼꼼히 점검하고 다니면서 담배꽁초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런 일은 직원들보다는 직원 부인들에게 더 잘 알려질 수밖에 없었고 부인회에서는 그를 매우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거시설부장 재임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2년 들어 서울사무소장 겸 포항프로축구단장으로 보임된 것이었다.
“그때 포스코는 서울사옥 건설 부지를 두루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회장님께서 지시한 곳은 4대문 안이어서 남대문 경찰서 앞에 위치한 국제그룹 소유의 건물을 건의했지만 ‘부도난 것 왜 사’ 하시면서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포스코는 여의도에 1000평의 나대지(裸垈地)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옥을 지으려면 2000평은 있어야 했기에 인접한 제일생명 소유 부지 1000평을 합쳐 같이 건물을 짓고 나눠 쓰자고 제의했으나 제일생명에서 거부했다. 강남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역삼역의 현대 모델하우스, 지금 삼성 사옥이 들어서 있는 강남역의 모델하우스, 지금 아산병원이 들어서 있는 송파지역의 현대그룹 소유 부지 등을 두루 알아보았으나 모두 자체 계획이 서 있어 매입이 불가능했다.
되돌아오는 길에 떠오른 것이 한국중공업이 소유한 경기고등학교 앞의 부지였다. 마침 당시 한국중공업은 안병화 전 사장이 위탁경영을 맡고 있었고 김진주 전 부사장이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맞지 않았다. 골프 연습장이 들어서 있던 그 땅은 이미 팔린 후였다.
“최종적으로 잡은 것이 지금 포스코센터가 들어서 있는 대치동 부지였어요. 그 부지는 동아건설그룹에서 운영하는 공산학원이 4500평, 소지주들이 500평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 씨가 200여 평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이 200여 평 때문에 한동안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는데 결국 50억 원에 매입했고 나머지도 비슷한 가격으로 사들였습니다. 당시 사옥추진위원장이 조말수 전 사장이었는데, 결국 사옥 지어놓고 박태준 회장, 정명식 회장, 조말수 사장 모두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1992년 대선 때 YS-명예회장 간 담판 결렬 후 포스코 살생부 설 돌아
명예회장의 정계 행보 … 여한 없이 싸워봤다면 하는 아쉬움 남아
구단장을 맡아 1992년 실업연맹전에서 우승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해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가 문제였다. YS는 박득표 사장을 통해 박태준 회장에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박태준 회장은 거절했다. YS가 그해 10월 광양까지 찾아갔지만 결국 회담이 결렬되었고, 이후 박 회장은 남방정책을 핑계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선거에 관여하지 않았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YS가 당선된 뒤 개최된 1993년 포항제철 주주총회에서 결국 박태준 회장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당시 권력 핵심부에서 포스코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살생부에는 36명이 올랐는데 나도 거기 포함되었어요. YS가 당선된 뒤 서울사무소장을 그만두고 포항으로 내려가 축구단장만 맡고 있었는데, 조말수 사장 체제가 들어선 후 장중웅 상무가 서울로 좀 오라고 하더군요. 피차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 상무의 이야기나 나의 대답이나 매우 간단명료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 압니다.
“사장실로 찾아가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으나 조말수 사장은 아무 말이 없었어요. 다시 회장실에 들러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정명식 회장님께서는 문 앞까지 나와서 손을 잡아 주시더군요. 이후 1998년 유상부 회장 체제가 들어선 뒤 1년 남짓 포항프로축구 부사장 겸 단장을 맡기까지 5년 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대일기업을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포항프로축구를 맡았지만, 대일기업 사장으로 있었으므로 구단 급여는 받지 않는 걸로 했습니다.”
박태준 회장이 정계에 발을 디딘 것에 대해 ‘신군부 차출설’, ‘포스코 외풍 차단설’ 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황종현 전 단장은 경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 나갔으면 좌고우면하지 말고 여한 없이 싸워보기라도 했다면 아쉬움이 덜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포스코센터 2층 커뮤니티홀 옆 층계를 내려와 1층 로비에서 대각선으로 바라다 보이는 박태준 회장의 사진 입상(立像)을 향해 공손한 자세로 절을 하고는 테헤란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재욱 <시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