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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95] 양윤세 前 동력자원부 장관, KISA”한국의 종합제철 꿈, 더 멀어지게 했다”

[남기고싶은이야기 95] 양윤세 前 동력자원부 장관, KISA”한국의 종합제철 꿈, 더 멀어지게 했다”

2018/02/28

1969년 4월 17일부터이틀간 프랑스 파리에서 IECOK(對韓國際經濟協議體) 연차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IECOK 회원국들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 공여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KISA(韓國國際製鐵借款團)를 주체로 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 벽에 부딪혔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定說)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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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실>

 

– KISA와의 계약 불합리성과 미온적인 태도 알고 IECOK 총회서 계약 파기
–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 현실화위해 대일청구권자금 교섭 맡아
– 창업의 주춧돌 하나를 놓은 사람으로서 창립 50주년 감회 새로워

 

양윤세 전 장관 주요 경력 1931 황해 곡산 출생 1959 고낼대 경제학과 1960 뉴욕대학원 외교학 석사 1961 하버드대학원 수료 1962 내각수반 비서관, 경제기획원 외자 총괄과 과장 1966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 1971 농림부 농정담당 차관보 1972 청와대비서실 경제3비서관 1974 주미국대사관 경제공사 1979동력지원부 장관 1981 경제기획원 정책자문위원 1982 한양그룹 회장고문, 동력자원부 정책자문위원 1984 미국코넬대 자문위원 1987 럭키금성그룹 미주지역담당 사장 1990 한라그룹고문 1992 한양 고문 1995 에어링크 코리아 회장, 한라중공업 고문 저서(증언록) 2017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

1969년 4월 17일부터이틀간 프랑스 파리에서 IECOK(對韓國際經濟協議體) 연차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IECOK 회원국들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차관 공여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KISA(韓國國際製鐵借款團)를 주체로 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 벽에 부딪혔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定說)로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으로 일한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장관은 내막을 소상히 증언해줬다.

“보통은 IECOK가 제동을 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KISA 협약서에 미국, 독일, 영국, 이태리 등 네 나라의 정부 공공차관으로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요. 차관 교섭은 KISA가 담당하고, 교섭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우리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KISA 주도의 종합제철 사업이 지리멸렬하게 추진되고 있어서 우리는 그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우리나라와 KISA간 계약이 체결되어 있어서 직접 계약을 파기할 수 없어서하는 수없이 회원국 정부들이 KISA에 차관을 제공할 계획이 없다는 의사를 표명해 줘야 했어요. 그걸 우리가 IECOK를 통해서 회원국 정부가 발표하도록 물밑작업을 한 겁니다.”

우리가 제철소 건설의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던 KISA를 우리가 서둘러 깨버렸다는 사실이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에 그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미국과 사전에 따로 교섭을 해서 4월에 열리는 IECOK 총회에서 그런 자금을 공여할 계획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발표해 달라고 했고, 독일에 가서도 역시 자금 지원 계획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해 달라, 그러면 우리는 KISA를 깨겠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새로 연구를 해서 방법을 찾겠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나 그런 말로는 의문이 풀릴 수 없었다. 우리 정부에서 KISA를 깨겠다는 결정을 먼저 내렸다는 것인데, 19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미국, 서독, 영국, 이태리 등 4개국 7개사를 회원사로 하여 KISA를 구성하고, 이듬해 1967년 4월 가협정과 10월 기본협정을 맺고, 그리고 1968년 말에서 1969년 2월에 일반기술계획서, 최종가격서, 확정재무계획서를 합의하기까지 동서반구(東西半球)를 돌면서 동분서주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정부였기 때문이다.

“1967년 10월 부총리가 장기영 씨에서 박충훈 씨로 바뀌면서 사단이 나기 시작한 겁니다. 1968년 말이나 1969년 초쯤이었는데, 박 부총리가 나를 부르더니 KISA 협약서를 주면서 좀 파악해 보라고 했어요. 기획원 업무 중에 다른 건 다 파악이 되고 알겠는데, KISA 협약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어요.”

당시 그는 기획원 국장으로서 투자진흥관으로 있었는데, 박 부총리가 소관도 아닌 다른 국장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은 그냥 적당히 파악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문제가 있는지 파헤쳐 보라는 지시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KISA와의 협약을 담당해서 쭉 끌고 온 건 황병태 국장이었습니다. 부총리로서는 담당자에게 검토를 맡겨서는 제대로 문제점이 밝혀질 수 없다고 보고 나에게 지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디나 그러하겠지만 특히 기획원에서는 남이 하는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는 게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모함처럼 비치니까요. 그래도 그때 나는 종합제철소 건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끼고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나로서는 부총리가 검토해 보라고 하니까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협약서를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몇 장 넘기다 보니까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제철차관 교섭을 위한 모든 경비는 한국 측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협약을 깨려면 회원국 정부가 자금 제공을 거부한다는 확정이 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경비니 뭐니 하는 것은 무조건 한국이 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이 달라는 대로 다 줘야 하는데, 계산해 보니 그때 그만둔다고 해도 한국에서 70만 달러를 내놔야 했다. 앞으로 이게 얼마나 더 소요될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차관확정계획서까지 제출받은 후 200일간은 차관을 교섭토록 되어 있으니, KISA안을 갖고 시간이 마냥 흘러갈 수도 있었다.

1967년 4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KISA 대표단 접견 모습
1967년 4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KISA 대표단 접견 모습.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왼쪽 양윤세 투자진흥관(경제기획원 국장), 오른쪽 장기영 부총리.(국가기록원 CET0023648)

“미국 측에 알아봤더니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차관 교섭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미국 정부 자금이 들어간다고 되어있는데도 말입니다. AID개발차관 같은 공공차관이든 아니면 세계은행 자금이나 최소한 수출입은행 자금 정도는 들어가야 하는데, 알아보니 자금 교섭한 게 없었어요. 독일 쪽도 내가 한독 관계 담당하면서 살펴봤는데 마찬가지에요. 거기도 자금 제공할 계획이 없다는 거야. 나는 KISA가 좀 이상하다는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내용을 들어다보니까 미국이나 독일에서 진척된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KISA 사람들이 달라는 대로 계속 돈을 내야 하고요. 부총리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했더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되묻는 거야. 그래서 내가 깨버리자고 했지. KISA에 맡기고 경비 대주는 거 없애버리고, 직접 우리가 무슨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박 부총리도 좋다고 했습니다.”

 

제철소 건설 무산 리스크 무릅쓰고 KISA 협약 파기 추진

당시 KISA와의 협약서에는 KISA가 일반설계서, 최종가격서, 차관확정계획서를 작성해 우리 정부에 제출하고, 우리 정부의 차관 도입을 도와 제철소 건설에 착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제철소 건설의 ABC를 모두 KISA가 대신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KISA를 깨버리면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는 일이었다.

“맞아요. 무산되는 거죠. 그러니 예사 이야기가 아니었죠. 그래서 박 부총리에게 먼저 김학렬 경제수석과 의논을 하고 대통령께 보고하라고 말씀 드렸더니, 나더러 갔다 오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바로 청와대경제수석실로 찾아가 김 수석에게 KISA로는 일이 안되겠으니 깨야겠다고 했어요. 김 수석이 무릎을 탁 치면서 이제 제대로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시간을 잡아줄 테니 그때 대통령께 말씀 드리라고 하더군요.”

김학렬 수석에 대해 그는 ‘감정이 강한 분’으로 묘사했다. 김학렬 수석도 종합제철소 건은 KISA 같은 남의 손에 맡겨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 수석은 거의 감정적으로 KISA를 부정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기획원에 있을 때부터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대통령께 직접 보고를 드렸습니다. 김 수석, 박 부총리, 나 이렇게 셋이서 들어갔는데, 설명은 내가 했어요. ‘이러이러한 관계인데 이대로 둬선 도저히 안 될 테니까 다시 생각해야겠습니다. 이건 깨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까, 대통령께서 두 말 안 하시더구먼. ‘그렇게 해’ 그러고는 끝이었어요.”

KISA를 깨기로 했다면 제철소를 새로 추진한다는 계획이 있어야 했지만, 그때까지는 따로 내놓을 만한 대안이 없었다. 그는 아무튼 KISA안은 잘못됐으니 폐지하고 우리가 직접 추진하되, 세계은행과 IECOK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KISA와의 협약서에는 차관확정계획서를 제출한 후 200일 이내에 양측이 그 차관 조달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 양측 모두 추가적 책무 없이 계약이 해지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KISA를 깨려면 미국 AID나 수출입은행을 상대로 한 사전 정지작업 내지는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

“KISA를 깨기 위해서는 차관을 줄 수 없다는 회원국 정부의 의사를 미리 확인해야 했지요. 때마침 1969년 3월 27일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조문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갈 일이 생겼고, 그 참에 미 AID나 수출입은행에 가서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나서 친분이 두터웠던 데이비드 케네디 재무장관을 거쳐 AID의 존 블리트(John Bulitt) 차장보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다음 달에 열리는 파리 IECOK 총회에 참석하게 돼 있었거든. 그 사람에게 물었어요, KISA를 통해 한국의 종합제철소 차관 공여 요청을 받은 게 있느냐고. 그런데 자기네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과 관련해 KISA로부터 그 어떤 교섭도 받은 바가 없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건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KISA에서는 이 사람들과 교섭했다고 우리에게 활동비를 요구했는데···.”

그는 존 블리트 차장보에게 한국 측의 의중을 전달했다. 한국에서 KISA를 깨야겠으니 AID에서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해 달라고 요구했고, 존 블리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한국이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가겠다면 AID도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헨리 컨스(Henry Kearns) 미 수출입은행장도 만났는데, 그 사람도 자기네는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자금을 빌려줄 계획이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독일로 갔습니다. 그런데 독일도 역시 그런 계획이 없다는 거야. 독일에도 똑같이 요구했죠. 한국은 KISA를 깨고 세계은행과 상의해서 새 길을 찾겠으니 독일이 KISA에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 없음을 밝혀 달라고, 독일도 그러겠다고 합디다. 그때 내가 독일에 간 일차적인 목적은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일으킨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으로 단절된 한-독 경제협력을 부활시키기 위한 교섭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파리 IECOK 총회가 끝나면 우리 부총리를 독일로 모시고 올 테니 그때 한독각료회담을 열자. 그래서 경제협력을 다시 부활시킨다는 걸 합의문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고, 파리로 가서 박충훈 부총리와 합류했습니다.”

 

차관 공여 부결키로 각국 대표와 사전협의 후 IECOK 총회 참석
대통령, 부총리, 경제수석, 양윤세 4자간 추진해 비밀지켜져

1969년 4월에 열린 파리 IECOK 총회에는 박충훈 부총리, 김학렬 경제 제1수석비서관, 황병태 기획원 경제협력국장, 양윤세 투자진흥관, 오원철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등 당시 정부 경제부처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때 한국 대표단의 표면상의 공식적 입장은 종합제철소 건설과 관련해 미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것이었지만, 박충훈 부총리와 김학렬 경제수석 그리고 양윤세 투자진흥관 3인은 내막적으로 차관 공여를 부결시키기로 각국 대표와 사전 합의를 보고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이 양 전 장관의 설명이었다.

파리 IECOK 총회 회의장 모습(왼쪽)과 주요 참석자들
파리 IECOK 총회 회의장 모습(왼쪽)과 주요 참석자들. 왼쪽부터 양윤세 투자진흥관, 박충훈 부총리, 레이몬드 굿맨 의장, 김학렬 경제수석, 미상, 유솜(USOM)처장 코스탄조

“당시 이 내용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대통령, 부총리, 경제수석 그리고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새나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비밀이 지켜진 겁니다. 아무튼 파리 IECOK 총회는 우리의 각본대로 진행되었어요. 미국, 독일은 정부 자금을 줄 계획이 없다는 걸 정식으로 발표했고, 미국 AID는 ‘지금으로서는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을 지원할 아무런 계획이 없고, 앞으로 세계은행이 중심이 되어 검토한다면 그때 가서 충분히 살펴보겠다’고 했어요. 미국과 독일이 차관 공여 계획이 없다고 확정적으로 발표했으니, 그걸로 KISA는 더 이상 우리 종합제철소 사업을 맡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겁니다.”

당시 KISA에서는 어떻게든 수출입은행과 교섭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세계은행으로 하여금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사업은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내게 해 결국 부결시켰다고 전해져 오는 사실에 대해 그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KISA는 미국 정부의 돈으로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미국 정부는 찬성할지 반대할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수출입은행도 모르고 있었어요. 수출입은행장은 KISA에서 교섭해온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제대로 교섭을 안 한 겁니다. 세계은행이 IECOK 총회에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타당성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제대로 스터디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세계은행은 미국 정부 의견을 따라가는 입장이었으니까 한국에 종합제철소가 시급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서 KISA 안을 없애버린 겁니다. 자기네는 그때부터 스터디해서 방도를 찾겠다고 한 거예요.”

IECOK 총회가 끝난 후 양윤세 전 장관은 한독경제각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갔다. 그는 미국 수출입은행과의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제철 차관선을 모색하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쓴 책에 ‘양 전 장관이 제철 차관선을 구하려고 서독에 갔다’고 한 내용도 그는 부정했다.

“오 전 수석도 내막을 몰랐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때 IECOK 총회 참석 멤버들이 독일까지는 같이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독일에 간 것은 동베를린사건 때문이었어요. 그 일로 인해 한-독 관계가 경색되었는데, 정치적인 관계는 따로 논의하더라도 우선 경제 문제부터 매듭을 풀기 위해 간 것이지, 새로운 차관선을 찾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에요. 그건 박 부총리, 김 수석 그리고 나만 아는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때 박 부총리는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파리에서 KISA 문제 해결되었지, 독일에서는 한-독 간의 경제 문제가 해결되었지, 그랬으니 기분이 좋았던 거야. 이제 미국 닉슨 행정부의 새 관료들을 만나 협력 체제를 갖추는 일만 남았다며 무척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미국 방문 중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미 주요 인사를 초청해 열린 만찬회(black tie dinner)모습
1969년 4월 말, 미국 방문 중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미 주요 인사를 초청해 열린 만찬회(black tie dinner)모습. (왼쪽 사진)왼쪽부터 양윤세 투자진흥관, 데이비드 케네디 미 재무장관,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전 국방장관). (오른쪽 사진)왼쪽부터 조지 볼 전 국무차관 부부, 박충훈 부총리, 양윤세 투자진흥관.
박충훈 부총리 일행이 백악관에서 미국 닉슨 대통령과 면담하는 모습
▶ 1969년 5월 1일박충훈 부총리 일행이 백악관에서 미국 닉슨 대통령과 면담하는 모습. 1 닉슨 대통령, 2 박충훈 부총리, 3 김동조 주미대사, 4 양윤세 투자진흥관.

박충훈 부총리의 회고록 <이당 회고록>(박영사, 1988)에는 KISA 측이 1968년이 다 지나도록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서 종합제철 건설이 큰 차질을 빚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가 KISA 안을 무산시키기로 IECOK 총회 전에 결정한 사실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4월의 IECOK 총회에서 자신이 회원국 대표들에게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자본 협력을 요청했으나, 세계은행과 미 수출입은행이 타당성 재검토를 주장하고 서독 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최종 무산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양 전 장관은 다른 증언을 했다.

“그해 5월 말에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는데, 자신의 해임 사유를 감추고 싶어서 그랬을 것으로 봅니다.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귀국 비행기에 올랐는데, 기내에서 일본 신문을 보니 이 양반 조카가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그 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아니므로 줄이기로 하고, 아무튼 조카의 간첩단 연루 사실이 박충훈 부총리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떨어뜨린 한 요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밖에 대통령이 박 부총리에게 한계를 느낀 점도 좀 있었던 것 같고요. 세간에는 종합제철소 건설 프로젝트가 잘 추진되지 않아 박 대통령이 그를 해임하고 김학렬 수석을 해결사로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 부총리로서는 실제 해임 사유가 알려지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기 때문에 그렇게 유도한 것으로 보이고, 회고록도 그렇게 쓴 게 아닌가 싶어요.”

6월 2일 김학렬 부총리가 임명되었다. 취임 닷새 후인 7일에는 KISA와의 계약을 백지화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경제기획원은 정문도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고 노인환 경제협력국 공공차관 과장, 포항제철의 부장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태스크포스를 둔다고 발표했다.

 

청구권 자금 사용해 종합제철소 건설하자고日 외무성에 제안
상공부의 종합제철소 건설방안 보고서 기초로 일본과 교섭나서

“그 TF는 원칙적으로 기술자로 구성되었는데, 나는 거기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당시 한국의 기술자란 사람들은 주로 상공부에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망라해서 기술단을 만들고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단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기술단이 일본 야하타제철소 사람과 협조해서 작업을 했는데, 거기 부장 한 사람이 아주 열심히 이 문제에 달라붙어 협력해 주었고, 거기서 종합제철소 건설 방안을 작성했어요. 기술단이 작업한 후에 세계은행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때 내가 나섰습니다. 나중에 내가 청구권 자금 건으로 일본과 교섭할 때 이 기술단에서 나온 보고서를 기초로 활동했죠.”

경제기획원 출신 인사들의 회고 잡지 <경우(經友)>에 실린 김재관 박사의 기고에 따르면, 이 기술단에서는 약 두 달에 걸쳐 작업을 진행, 8월 초에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기술단은 건설계획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철강연맹, 철강회사 대표를 상대로 설명에 나선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8월 6일자 신문은 정문도 차관보, 박태준 사장 등이 그달 말 열릴 한일정기각료회의의 사전 정지 작업차 일본 출장을 떠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때 나도 한일정기각료회의에 앞서 일본 정부 관계자들에게 일본 자금에 의한 제철소 건설을 제의하러 도쿄에 갔습니다. 기술단 사람들은 기술 관계를 협의하러 갔고요. 그런데 비록 기술 관련 문제 때문이기는 하지만 내 상급자인 정문도 차관보가 와 있는데, 국장급인 내가 대표로서 일본 측에 요청하기가 조금 뭐한 거야. 그래서 정 차관보에게 같이 가자고 해서 외무성에 가서 공식적으로 ‘청구권 자금을 당겨 써서 종합제철소를 건설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 직속상관이니까 대외적으로는 정 차관보가 요청한 걸로 보였겠죠.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아요. 상관이 현지에 있으니까 내가 예의상 같이 가자고 한 것뿐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청구권 자금 교섭은 내가 맡았습니다.”

KISA 안이 무너진 후 대일청구권자금을 종합제철소 건설에 사용하고 차관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기로 한 것과 관련, 그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오원철 전 수석은 저서에 ‘IECOK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양윤세 투자진흥관이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기록했고,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양 투자진흥관의 아이디어라고 증언했다. 반면 박태준 사장의 전기에는 1969년 미국에서 귀국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을 때 대일청구권자금 사용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일청구권 자금전용 아이디어 누가 냈는지 답변할 수 없어
다만 김학렬 부총리가 청와대에서 결정했다고만 알려와

“종합제철소 건설에 청구권자금을 쓰자고 한 게 내 아이디어냐, 박태준 사장 아이디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답변할 수가 없어요. 다만 김학렬 부총리가 나에게 ‘청구권 자금을 당겨 쓰기로 청와대에서 결정했습니다. 양 국장이 교섭을 맡되 양 국장 뜻대로 해서 이걸 빠른 시일 내에 매듭지어 주세요’ 하고 지시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걸 결정하는 순간에 무슨 회의를 했는지, 아니면 김 부총리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는지, 또는 김 부총리가 건의한 것인지, 회의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박태준 사장을 불러서 물어보았는지는 내가 몰라요. 그러니까 박태준 사장이 말했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지 못합니다.”

박태준 사장의 전기에는 1969년 1월 하순 자신이 미국 피츠버그로 가서 KISA의 주도 회사인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을 만나 거듭 차관 제공을 요청했지만 포이가 사업의 경제성이 없다고 거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와이키키 해변의 모래사장에 누워 잠시 쉬는 중에 불현듯 청구권자금 사용 방안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바로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서 청구권자금 사용 방침을 허락받았고, 일본에 들러서 청구권자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 측에 협조 요청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중앙일보 2004년 8월 29~31일 연재분). 이에 대해 양윤세 전 장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썼다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KISA는 우리 정부와 마찬가지로 차관을 성사시켜야 할 입장이었는데 포이 회장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차관이 성사되면 자기네가 제철소 설비와 기자재를 공급하게 되고, 기술 제공 대가를 단단히 챙길 수 있는데, 차관을 얻자고 나서야지 왜 반대를 했겠어요. 또 그가 거절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어요. 차관은 미 수출입은행 등에서 제공하는 건데, KISA가 거절할 일이 아니었죠.”

 

양윤세 국장은 청구권자금 교섭담당, 기술단은제철소 건설계획 입안
日 정부에 한국 제철소 건설에 대한 타당성 알리고 절차 밟아

김학렬 부총리는 기술단을 만들어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제철소 건설계획 입안 작업을 맡기는 한편으로 양윤세 국장에게는 자금 측면에서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해 대일청구권자금 교섭을 맡겼다는 것이다. 양 전 장관은 당시 일본 측과 교섭하면서 우시바 외무성 차관에게 처음 이야기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에게 미리 귀띔을 해놓았더니 8월 초 일본에 도착한 날 저녁에 통산성, 대장성, 경제기획청 등의 웬만한 간부들을 모두 저녁식사 자리에 불렀어요. 그렇게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거였죠. 그 모임을 통해 일본 측 정식 대표 네 명이 결정됐습니다. 외무성의 참사관, 말하자면 연락관 비슷한 창구 역할 하는 이, 통산성의 하나무라 신페이라는 사람, 대장성 외환국의 국장, 이 사람이 나중에 후생성 장관이 됩니다. 그리고 단장 격으로 경제기획청의 아카자와 쇼이치(赤澤璋一), 이 사람이 통산성의 중공업국장을 오래 해서 이 계통에는 정통한 전문가였지요. 그래서 이 네 명이 나를 상대하게 된 겁니다. 이후로는 내가 일본에 가기만 하면 우시바 차관이 내 저녁을 예약해 두곤 했어요. 그리고는 그 네 명을 불러요. 일본에서는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매우 싫어하니까, 거기에 영향력 있는 누구 한 사람만 만나서는 일이 안 돼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가서 만나고, 필요할 때는 같이 만나고 해야지 그중에 누구 한 사람에게 치우치면 될 일도 안 됩니다.”

흔히 일본을 ‘안면 사회’라고 하듯이 개인적인 친분이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일청구권자금과 관련된 문제는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입장, 예를 들어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사업을 지원하는 것은 일본에 나쁘지 않거나 이익이 된다는 판단이 서야 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왔는데, 그는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처음에 우시바 차관에게 ‘비공식적으로 내가 이 일을 맡아서 왔으니 내 일을 도와주시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더니 동조해 주더군요. 그 사람은 당시 한국의 제철소 건설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에는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절차를 중요시하더군요. 기술부서의 대표 기술자들을 뽑아서 그 대표단으로 하여금 나와 회담을 하도록 하고, 그 결과를 한일각료회담에 올려서 승인을 받고, 자기네 기술단을 한국으로 보내서 기술 조사를 하도록 하고, 그 보고서에 의거해서 자기네가 나중에 최종 결정을 하는 그런 절차를 밟았어요.”

나중에 기술진이라고 해서 기술조사를 하러 왔을 때 대장성의 젊은 사무관이 던진 질문과 그 질문에 답한 내용을 양 전 장관은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원료도 없고, 기술도 없고, 결국은 다 수입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제철소를 하겠다고 그러십니까?

한국의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이었고, 비아냥거림이기도 했다. 그는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그런 이야기는 한국을 일본에 항상 예속시키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철강 생산이 부족하면 제일 가까운 데서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러면 우리는 일본이 결정하는 가격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죠. 그런데 우리가 100만 톤짜리라도 하나 갖고 있으면 국내 생산이 있으니 일본에서 마음대로 가격을 매길 수가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제철 시설이 없으면 일본에서 국제 가격의 2배를 매긴다고 해도 우리는 그 가격에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게 일본에 예속되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일본과의 청구권 자금 사용 교섭회의 모습
▶ 일본과의 청구권 자금 사용 교섭회의 모습. 왼쪽이 한국측, 1 양윤세 투자진흥관.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 각별히 아끼고 신임해
청구권 자금 아이디어의 출처, 중요한 문제 아니야

한일 협력이 열매를 맺어 103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 1기설비가 착공된 것이 1970년 4월 1일이었으니, 1966년 12월 6일 KISA가 정식으로 발족된 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포항제철 창립 주주총회가 열린 1968년 3월 20일을 기점으로 삼아도 2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기간 중 경제부총리가 3번이나 바뀌고 KISA가 와해되고 담당 공무원이 바뀌고 제철소 건설이 무산될 위기도 겪었다.

일본 민관합동조사단과 포항제철소 예정지에 방문했을 때 모습
▶ 1969년 9월 하순,일본 민관합동조사단과 포항제철소 예정지에 방문했을 때 모습. 1 박태준사장, 2 일본측 아카자와 조사단장, 3 양윤세 투자진흥관.

“그런 와중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을 아꼈습니다. 최고회의 비서실장, 대한중석 사장, 그리고 대한중석에서 출자한 포항제철 사장 등의 요직에 보임시킨 것도 그렇지만, 그 후에도 박태준 사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사실은 여러 각도에서 감지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이 박태준 사장의 작품처럼 세간에 알려진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고, 포항제철이 성사되기 전까지의 어려운 과정에서는 박태준 사장이 한 게 별로 없다는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생각에 대해서도 양 전 장관은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오 수석 말고도 그런 이야기를 한 분이 또 있었습니다. 정문도 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그 기술단에서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한 사람이 KIST의 김재관 박사였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그분이 내게 여러 번 전화를 했었어요. 박태준이 하와이 구상이니 뭐니 하면서 딴소리 하고 있는데, 그거 다 사기라는 거야. 그러면서 나더러 항의 반론을 제기해 달라고 했어요. 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준 사장의 자전 에세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초창기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 아니겠어요. 하지만 내가 굳이 나서서 박태준 사장을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포항제철을 크게 성공시킨 게 결국 박태준이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그에게 일임해서 그렇게 되었는데, 청구권자금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게 누구냐 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포스코의 행운 빌어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장관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듯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들춰 보이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포스코 초창기 역사를 기록한 사진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그 장면, 바로 1969년 12월 3일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 간 기본협약 체결’ 사진이었다. 김학렬 부총리와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 일본 대사가 한일기본협약서에 서명하고, 양 옆에서 박태준 사장과 이낙선 상공부 장관이 지켜보고 있는 낯익은 사진이었다.

경제기획원에서 종합제철 한일기본협약 체결 모습
▶ 1969년 12월 3일,경제기획원에서 종합제철 한일기본협약 체결 모습. 이 행사가 상당히 의미있는 역사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김학렬 부총리 취임 6개월을 맞아 기획한 행사였다. 1 김학렬 부총리, 2 가네야마일본 대사, 3 박태준 사장, 4. 이낙선 상공장관, 5 양윤세 투자진흥관.

“포항제철에서는 이 사진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 왔겠지요. 그런데 사실은 김학렬 부총리 취임 6개월을 기념해서 만든 행사였습니다. 부총리 비서실장이 ‘부총리 취임 6개월 축하 이벤트로 종합제철 건을 매듭짓는 행사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내게 상의해 온 거야. 그래서 내가 일본 측에 ‘의향서 비슷한 걸 하나 만들어서 우리 부총리와 일본 대사의 사인 행사를 열면 어떻겠느냐’고 타진을 했습니다. 그간 교섭 과정에서 주한 일본 대사가 소외되어서 좀 서운해 있었는데, 내가 그런 제의를 하니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행사를 만들어낸 겁니다. 한일 양국 간에 그런 사인이 꼭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는데, 특별한 일처럼 꾸며진 거죠. 역사란 그렇게도 만들어지나 봅니다.”

여기까지 반세기 전, 포항제철 맹아기(萌芽期)의 비사(秘史)를 풀어놓은 양윤세 전 동자부 장관은 마지막으로 포스코에 보내는 덕담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포항제철 창립 전후의 시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포스코가 초창기의 어려움을 딛고 우뚝 일어서서 세계 최강의 철강기업으로 성장해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는다니, 창업의 주춧돌 하나를 놓았던 나로서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죠. 행운을 빕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이 글은 2017년 5월 도서출판 해냄에서 펴낸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박정희 시대의 경제외교사 증언'에 나온 양윤세 전 장관과 주익종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대담중언록 중 <종합제철소를 최종 성사시키다> (339~391p)를 토대로 우재욱 작가가 재정리한 것입니다. kisa 계약파기, 대일청구권 자금전용 등 매우 값진 포스코 창립 당시의 자료를 흔쾌히 제공하여 주신 양윤세 전 장관과 주익종 박사계 감사드립니다 [포스코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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