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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98] 정길수 前 부사장, 해외 첫 STS일관밀 완성 “실패하면 양자강에 빠져 죽겠다”

2018/08/17

해외 첫 STS일관밀 완성 "실패하면 양자강에 빠져 죽겠다" 정길수 전부사장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ㅣ급작스럽게 중국에 부임한 후 12년간 장가항에 몸담아
ㅣIMF 여파로 취소 위기 맞은 장가항 프로젝트 뚝심 있게 밀어붙여 착공
ㅣ꽁꽁 얼어붙은 자금 조달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성사
ㅣ1999년 1기 준공 후 설비 확장 지속해 100만 톤 체제 완성

1996년 4월 싱가포르에서 국제철강협회(IISI, 지금의 worldsteel) 임시이사회가 열렸다. 1994년 10월부터 동남아철강협회(SEAISI) 사무총장을 맡아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주재하고 있던 정길수 전 부사장은 싱가포르로 가서 김만제 회장 등 IISI 임시이사회 참석 차 현지에 온 포스코 요원들과 저녁 자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김만제 회장은 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넸다.

-정 사무총장 당신, 다시 상하이로 가야겠네.

가볍게 던지는 말투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난달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포스코가 추진할 만한 프로젝트를 찾아보라고 미션을 내리곤 했던 김만제 회장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건 뭔가 간단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스치는 것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격동의 시기, 급작스럽게 중국 부임 결정돼

“1980~90년대는 포스코나 대한민국, 그리고 전 세계가 심지어 나 개인적으로도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거대 제국 소련의 정권을 장악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른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끌었고, 우리나라도 오랜 진통 끝에 5년 단임 정권이 이어지는 체제가 고착되었지요. 그때 나는 1989년 4월 소련, 동유럽, 중국을 담당하는 대외협력부 대외협력2과장을 맡았다가 곧 차장이 되었고, 또 7개월도 채 안 돼 비서실 차장 명령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2년 남짓 있다가 간 곳이 상하이사무소였어요. 그런데 거길 떠난 지 2년도 안 됐는데 또 상하이로 가라니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 혼자 말레이시아에서 외떨어져 있던 삶은 매우 외로웠다고 그는 기억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포스코와의 연락도 뜸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해외 사무소와의 유기적인 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포스코의 조직이었으면 이런저런 일로 서로 연락이 취해졌겠지만, 동남아철강협회 소속으로 되어있다 보니 별다른 정보 교환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본사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나자빠졌던 장가항 프로젝트 맡아 12년간 매진

“저녁식사를 마치고 혼자 빠져나와 상하이에 전화를 해봤더니, 거기서는 다들 짐작하고 있더군요. 장가항에 중국과의 합작회사가 설립됐는데, 아마도 그리로 가서 일하라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자세히 알아보니 GI(아연도금강판)공장과 스테인리스 냉연공장이었는데, 1995년 12월 22일 당시 김종진 사장께서 현지에 들러 합작회사 설립 서명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상하이사무소장으로 있을 때 우선 코일센터부터 운영하다가 차츰 냉연공장 건설로 가자고 본사에 건의한 바 있었는데, 바로 냉연공장부터 시작하고서는 나더러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에게 그런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장가항 일을 맡아 할 만한 사람들 4~5명과 접촉했으나 모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식으로 나자빠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김종진 사장께서 이미 상하이사무소장으로 일한 바 있고, 지금 동남아철강협회에 나가 있는 정길수가 있지 않으냐, 그 친구를 보내라,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당장 들어오라는 본사 해외사업본부의 성화가 빗발쳤다. 말레이시아의 관계 회사나 기관에 이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6월 초에 귀국해 포스코센터 25층에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계획서를 만들고 찢고 하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우선 현장이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6월 10일 장가항으로 들어갔다. 이후 2008년 2월까지 중국 장가항 프로젝트를 끼고 살았으니 그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장가항에 몸을 묻어야 했다.

당시 중국은 등소평이 개혁ㆍ개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정책은 처음에는 중국 사회에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추진동력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후 가속이 붙으면서 상하이는 시가지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해 있었다.

“상하이에서 서북쪽 147km 지점에 장가항이 위치해 있는데, 논두렁길, 밭두렁길이나 다름없는 울퉁불퉁한 도로를 4시간 이상 달려야 했습니다. 타이어 펑크가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할 만큼 오지 중의 오지였어요. 인구 50만 정도의 내륙 도시로, 호텔도 없었습니다. 거기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연산 150만 톤 규모의 조그만 선재공장이 있었는데, 이 회사가 바로 우리의 합작 파트너사인 사강집단(沙鋼集團)이었습니다.”

합작사인 사강집단 심문영 총경리와의 첫 만남 잊을 수 없어
중국 관례 따라 그 자리서 독주 12잔 연거푸 들이켜고 신뢰 얻어

장가항은 양자강 남안(南岸)에 접한 내륙 항구 도시였다. 주변의 산업 발전 정도나 도시 형성 속도에 비해 스테인리스 수요산업이 꽤 발달돼 있었다. 포스코는 그 시장을 장악한다는 생각으로 장가항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사강집단의 심문영(沈文榮) 총경리는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 정길수 전 부사장을 포함해 모두 12명을 대형 테이블에 둘러 앉혔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는 맥주 잔보다 조금 큰 잔이 놓였고, 중국의 유명 고급술 ‘우량예’가 등장했다. 알코올 52도의 독주 우량예가 잔에 찰랑찰랑할 만큼 따라졌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려면 최소 석 잔을 마시는 것이 중국의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낮 12시부터 1시까지 그 자리에서 12잔을 마셨어요. 중국의 그런 관행, 그런 문화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사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조바심이 그날 나를 주당으로 만들었던가 봐요. 그 자리에서는 술만 마시고 특별한 얘기는 없었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심문영 총경리가 내가 연거푸 12잔을 마시는 걸 보고 ‘저 친구와는 같이 일해도 되겠구나’ 하고 판단했다는 거였어요. 이런 음주 관행을 통해 사업을 추진시키는 중국의 문화가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합리성을 그 속에서 찾아내는 눈을 가졌다고 봐야겠지요.”

포스코 80%, 사강집단 20%의 합작 비율로 이미 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사업 추진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선의의 기싸움을 벌인 것으로 그는 이해했다. 당시 포스코 본사에서는 ‘정길수는 이제 죽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법인도 만들어지기 전에 사업을 추진시켰는데, 그 오지에다 무슨 공장을 짓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은 손을 털고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1997년 법인 설립 후 찾아온 IMF의 파고
간신히 프로젝트 취소 위기 넘겼으나 자금 조달 막혀 난항

“1997년 2월 15일에야 법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전 1년 3개월 동안은 소속도 없는 유령 인물로서 작업을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해 하반기 들어 이상한 조짐이 감지되는 겁니다. 상반기만 하더라도 외국계 은행 상하이 지점장들이 서로 ‘우리 돈 갖다 써라’며 장가항까지 접근해 오곤 했었습니다. 그땐 돈은 필요할 때 빌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각종 인허가, 공장 건설, 설비 도입, 인프라 구축, 공기 단축 등에만 매달려 있었어요. 금융 업무는 뒤로 밀쳐두고 있었던 거지요.”

1997년 2월 당시의 장가항포항불수강 부지.공장이 들어설 부지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1997년 2월 당시의 장가항포항불수강 부지. 1996년 7월 포스코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후 중국 사강집단과의 합작회사 소재지로 장가항이 결정됐다. 당시 장가항은 인구 50만 명 정도의 소도시였으며, 공장이 들어설 부지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런데 8월부터 은행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당시 국내는 물론 해외의 주요 금융시장에서는 한국에 곧 외환위기 사태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는 긴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그러한 국내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때 베네수엘라 포스벤(POSVEN)이 8월 중으로 홍콩에서 기채(起債)를 하고 그다음으로 장가항이 해야 하는데, 점점 밀리기 시작하더니 12월에야 포스벤이 겨우 홍콩에서 돈을 빌린 후 장가항에는 소식이 뚝 끊겼어요. 본사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혼자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싶어 1997년 12월 23일 아침 푸동의 HSBC은행을 찾아갔는데, 가는 중에 라디오에서 ‘한국의 국가 신인도가 2단계 강등된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했어요. 기업이나 국가의 신인도야 떨어지기도 하고 오르기도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죠.”

푸동 HSBC에 가서야 희미하게나마 사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내 여직원은 그를 허름한 사무실로 안내한 뒤 말이 없었다. 1980년대에 근무했던 멕시코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에서도 은행을 찾아가 ‘포스코’에서 왔다고 하면 은행 지점장실에 접한 VIP실로 안내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게 5분여를 더 기다려도 말이 없더니, 한 직원이 노란 텔렉스 용지를 들고 와 보여주며 장가항에는 대출하지 말라는 본사의 지시가 있었다고 간단히 설명한 후 인사도 없이 휙 가버렸다. 그가 겪은 IMF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은행 문을 나섰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그렇게 처량하게 들릴 수 없었습니다.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다음 해 1월 본사에서 전문이 왔는데, 내용이 이랬어요. ‘장가항 프로젝트를 캔슬 또는 지연시키는 것을 검토하라’. 문장에 ‘지연’ 또는 ‘검토’라는 말이 들어있기는 했지만, 구색을 맞추는 말에 불과했고 사실은 ‘캔슬’ 즉, 사업을 접으라는 지시였습니다.”

당시 장가항 프로젝트에는 포스코건설이 턴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포스코건설은 제철소 건설 경험이 많은 데다 엔지니어링 전반을 맡고 있었으므로 설비 사양이야 어차피 뻔하다고 보고 여러 설비 메이커에 자기네 생각대로 설비 제작을 의뢰해 놓은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1997년 말까지 들여오는 외자 설비에 대해 면세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포스코건설로서는 이 큰 혜택을 포기할 수 없어 더더욱 서둘러 제작을 맡긴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설비의 60% 이상이 이미 임시 야적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업을 캔슬 또는 지연시켰을 경우의 페널티를 계산해 보니 1억 2000만 달러에 달했다.

장가항 프로젝트가 취소 위기에 놓인 가운데 포스코건설이 발주한 설비들이 장가항의 임시 야적장을 가득 메운 모습

▲1997년 말까지 도착하는 설비는 중국 정부로부터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포스코건설은 설비 발주를 서둘렀고, 때마침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장가항 프로젝트가 취소 위기에 놓인 가운데 포스코건설이 발주한 설비들이 장가항의 임시 야적장을 가득 메웠다. 프로젝트가 취소될 경우 지불해야 하는 페널티만 1억 2000만 달러에 달했다.

“포스코가 어떻고 포스코건설이 어떻고 하는 것은 포스코 내부에서나 있을 수 있는 말이지, 중국의 사강집단이나 설비 메이커가 보기에는 어차피 하나의 묶음이에요. 1996년 7월 15일 열린 이사회 결의사항에 의하면 장가항 프로젝트의 총 투자액은 2억 1600만 달러였는데, 이후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본 실질적 투자액은 1억 6000만 달러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캔슬하거나 지연시키면 가만히 앉아서 1억 2000만 달러를 물어야 하는 거였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서 본사에 보고하고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든 추진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더니, 본부장을 맡고 계시던 이춘호 부사장께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무슨 이런 협박장을 보냈냐?

사업을 접을 경우 물어야 할 엄청난 금액의 페널티를 계산해 보이며 계속적인 추진을 건의했으니 협박장이라고 해서 틀릴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돈 꾸는 것은 오롯이 그의 일이 되고 말았다. 냉정하게 등을 돌린 HSBC 지점장을 만나 최종 담판을 하듯 들이밀었다.

-명색이 포스코에서 돈을 좀 빌려달라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포스코가 어느 나라 회사입니까? 한국 회사 아닙니까? 한국이 파산했는데, 무슨 포스코 이야기를 합니까?

나라가 잘되고 봐야 한다는 생각 지금껏 가슴에 사무쳐
양자강에 빠져 죽겠다는 절실함으로 차입계약 성사시켜

“그날 이후 이날까지 나는 ‘나라가 잘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어요. 이후 중국에 있는 한국계 은행은 모두 무너졌고, 외국계 은행은 모두 꽁무니를 빼는 상황에서 본사에서는 돈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매일 성화였습니다. 그때 나는 돈에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고, 돈을 꾸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1998년 5월부터는 비밀리에 중국계 은행과 접촉했더니 그들 또한 비밀리에 포스코의 모든 사항을 조사,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걸 감지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1998년 8월 28일 BOA(Bank of America)와 2000만 달러의 차입계약을 체결했다. 연리 13.5%였다. 당시의 시중 금리로서는 2% 정도면 될 일이었지만, 한국이 처한 상황을 볼 때 13.5%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꼬가 트이면서 그해 12월 2일 중국은행으로부터의 차입 2500만 달러를 비롯해 모두 8000만 달러를 확보, 공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현지 사정은 무시하고 다그치기만 하는 본사가 야속하기 그지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회사에 와서 배운 것이 있지 않으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바로 ‘우향우 정신’이었지요. 실패하면 영일만이 아닌 양자강에 빠져 죽자는 그 정신은 선배들이 물려준 것이었지요. 나는 천성이 모질거나 독하지 못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말은 내 성격에 맞지도 않고 경영학의 그 어디에도 없는 말이지요. 그러나 다른 모든 방법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그런 정신이 힘을 발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1999년 1월 22일, 연산 12만 5000톤 규모의 1기 공장 준공 후 그의 관심사는 온통 조업도 달성이었다. 그런데 1998년까지만 해도 톤당 4000달러였던 니켈 가격이 슬금슬금 뛰기 시작하더니 5000달러를 넘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스테인리스 강재는 니켈 가격과 연동되는데, 니켈 가격이 오르면서 스테인리스 수요 또한 계속 늘었다. 생산부장과 공장장들을 불러 확인했더니 앞으로 5년간 스테인리스 생산량을 월 2000톤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왜 그런 계획을 세웠느냐고 물었더니 중국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능력을 고려했다는 겁니다.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지 생산량을 줄이면 되겠느냐면서 준공 후 무려 5년 동안이나 손익분기점에서 간신히 턱걸이하는 회사에 어느 은행이 돈을 꾸어주겠느냐며 호통을 쳤더니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는 누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앞으로 이 숫자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 양자강에 빠질 순서를 정하겠다면서 분위기를 다잡았다. 2월 생산량을 2000톤으로 하고 이후 매월 1000톤씩 늘려 7월에는 7000톤을 달성하고, 8월에는 무조건 1만 톤을 생산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결국 장가항포항불수강은 1999년 조업 첫해에 53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의 이붕(李鵬) 전 총리(가운데) 일행이 장가항포항불수강을 방문해 제품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품질 수준 및 시장 판매 현황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02년 2월 4일 중국의 이붕(李鵬) 전 총리(가운데) 일행이 장가항포항불수강을 방문해 제품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품질 수준 및 시장 판매 현황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장가항 프로젝트는 이붕 전 총리가 재직 시 서명 비준한 중국 최대의 STS냉연 프로젝트다.

조업ㆍ설비 확장 병행하며 2기, 3기 공사 잇달아 준공
2011년 100만 톤 규모 STS 일관생산체제 확립

2002년 3월 확장공사에 돌입, 2003년 9월 19일 연산 40만 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냉연 2기 설비를 준공했다. 그러나 냉연 소재인 스테인리스 열연코일은 포스코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2004년 2월 그는 포스코센터 29층 회장 집무실에서 이구택 회장과 마주했다. 이구택 회장이 입을 뗐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계속 포스코에서 열연코일을 가져다가 조업을 한 건가?

-저도 상공정을 갖고 싶습니다. 제강공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를 만들자. 어떻게든 추진해야 한다.

이후 수없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중국 정부로부터 관련 면허를 획득해 2004년 12월 22일 3기 공사를 착공, 2년 가까운 공기를 거쳐 2006년 11월 22일 준공했다. 3기 공사를 통해 장가항포항불수강은 스테인리스 열연코일 6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제강과 열연공장을 완성, 해외 첫 스테인리스 일관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생산능력은 연간 110만 톤이었지만 중국 정부에는 60만 톤으로 낮추어 보고했습니다. 지금은 연 매출 29억 달러 정도에 전량 중국 내수로 쓰이기 때문에 마케팅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명예회장님께서도 장가항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5번이나 현장을 찾아오셔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5번이나 장가항포항불수강을 찾아 해외 첫 STS 일관밀 건설이라는 대역사의 현장에서 조업과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임직원을 격려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5번이나 장가항포항불수강을 찾아 해외 첫 STS 일관밀 건설이라는 대역사의 현장에서 조업과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임직원을 격려했다.

초창기 1기 설비 준공후 조업과 확장공사를 병행할 때에는 포스코에서 지원군이 300~400명 나와 있었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철저한 사명감을 강조하는 한편, 기술적인 문제는 기술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믿고 맡기는 식으로 회사를 꾸려나갔다. 이후 2008년 2월 스테인리스 담당 부사장으로 귀국했다. 그해 장가항은 16억 달러의 연매출을 올렸다.

일관생산 100만 톤 체제를 완성한 장가항포항불수강 전경

▲장가항포항불수강은 2011년 6월 연간 조강 100만 톤, 냉연 60만 톤 생산체제를 갖췄다. 100만 톤 생산체제 구축은 중국 내 외국기업 가운데 최초다. 사진은 일관생산 100만 톤 체제를 완성한 장가항포항불수강 전경.

“내가 떠난 뒤 2011년 장가항은 3기 증설사업을 통해 연산 100만 톤 체제를 갖추었어요. 중국에서 태원 다음가는 스테인리스 생산 회사로 성장했죠. 올해도 장가항에 갔다 왔는데, 공장뿐 아니라 주변 환경에 많은 변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비서실 차장으로 2년 남짓 근무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CEO가 외로운 결단을 내리는 것을 더러 보았기 때문이죠. 당시 비서실은 그야말로 격동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책으로 펴내면 논픽션 5권을 될 것입니다만, 그런 이야기는 묻어두는 것이 좋겠죠.”

정길수 전 부사장 주요 경력 1949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72년 한국외국여대 서반아어과 졸업 1975년 포스코 입사 멕시코사무소장, 정보기획과장, 대외협력부 과·차장, 비서실 차장, 상하이사무소장, SEAISI 사무총장, 장가항포항불수강 총경리 2008년 스테인리스부문장 2009년 한국철강협회 STS클럽회장 2010년 포스코차이나 회장보좌역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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