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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97] 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안 되는 것은 없다… 윗사람의 의중 헤아려 미션 완수”

[남기고싶은이야기97] 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안 되는 것은 없다… 윗사람의 의중 헤아려 미션 완수”

2018/06/21

"안 되는 것은 없다... 윗사람의 의중 헤아려 미션 완수" 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ㅣ제철소 표고계획 +3m로 관철시켜 건설비 대폭 절감
ㅣ내란 중인 이란에 출장… 4억 5000만 달러 계약 물꼬 터
ㅣ설비공급사 성능 보장 조항 아무도 생각 못 한 묘안 실행에 옮겨

포항제철소 3기 설비 확장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7년 여름, 김광일 건설본부 조사역은 중동 지역 순방에 나섰다. 중동 지역 후판 수요개발 조사와 포항제철의 현지 사무소 개설 임무를 띤 출장이었다.

“박태준 사장이 판매 쪽에 내린 지시였어요. 당시 중동 지역에 개발 붐이 일면서 이른바 중동 특수가 일고 있었고, 중동 특수의 가장 큰 부분이 토목사업이었기 때문에 토목기술자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판매부 박인수 과장과 함께 출장 갔어요. 약 한 달 동안 중동 지역을 광범위하게 조사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제다•리야드•주베일 산업항 등),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10여 개 국를 거쳐 마지막으로 이란 테헤란에 갔더니 현시학(玄時學) 이란 주재 한국대사가 아는 분이어서 도움을 받았어요. 현 대사는 내가 해군 장교로 근무할 때 해군 참모차장을 지낸 분이었습니다.”

해외 연락사무소 위치는 쿠웨이트와 이란을 비교, 검토한 후 이란의 테헤란으로 건의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는데, 뜻밖에도 당시 김광일 조사역이 초대 테헤란사무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테헤란사무소장 재임 기간은 1년 반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팔레비(Pahlevi) 왕조 붕괴로 정정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에 1979년 1월 11일 쫓기듯 이스탄불행 팬암 항공편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무소 정리도, 폐쇄 조치도 못하고 서둘러 몸만 빠져나왔어요. 1979년 2월 박태준 사장께 귀국 인사를 하면서 가정 형편상 건설회사로 이직해야겠다고 말씀드렸지요. 포항제철은 이미 550만 톤 체제의 3기 설비를 효율적으로 가동할 정도로 안정기에 접어들어 있었어요. 이후 4기 설비 건설도 계획되어 있고, 제2제철 건설 논의도 있었지만, 영일만 허허벌판에다 공장을 짓던 초창기에 비하면 토목 관련 업무 비중이 많이 줄어들어 있기도 해서 드린 말씀이었지요. 나는 그때 이미 현대건설과 이야기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박태준 사장의 반응은 한마디로 ‘안 돼’였다. 하필이면 그때 제2제철 실수요자 문제로 포철과 현대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박태준 사장은 당신이 추천하는 회사로 가라면서 그 자리에서 신화건설 이남주(李南柱)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곧 중역이 될 사람이니 전무 자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사장실에서 내려오니 정명식 본부장께서 신화건설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을 일러주더군. 얼마 전에 토목 담당 전무를 이미 채용했으니 포철 담당 상무로 채용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상무든 전무든 사장께서 그리로 가라니 갈 수밖에 없었지.”

軍, 호남정유에서 8년간 토목 프로젝트 경력 인정받아 과장으로 입사
日 가와사키제철 우에노(上野) 고문의 제안으로 ‘굴입항만’으로 최종 확정

그는 1968년 7월 1일 토목 담당(2급 1호봉) 과장으로 입사한 몇 안 되는 경력의 소유자였다. 당시 상당한 경력자라 하더라도 3급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저는 1960년 3월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4월 해군사관학교 간부후보생 훈련을 거쳐 해군 시설장교로 임관한 뒤 항만, 건선거(dry dockㆍ선박의 수리를 위해 만든 구조물) 설계ㆍ감독 등 토목 분야 경력을 모두 군에서 쌓았어요. 냉전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1962년 8월 짧은 동안이나마 캘리포니아 포트 와이니미(Port Hueneme)에 있는 미 해군시설 장교학교(Naval Civil Engineer Corps Officers School) OJT 과정에 선발되어 선진 기술을 익혔었죠.”

귀국 후 그는 해군 본부 시설감실 항만 담당으로 근무하면서 미 해군 시설 고문단장 상담역을 겸임했다. 포항 해병기지사령부에 파견 근무를 하면서 약 2년간 LST(전차상륙함) 접안 부두 설계를 위한 수중측량, 지반조사를 비롯해 설계도면 작성, 공사계약 후에는 공사감독관 업무를 수행하며 포항 지역의 해양, 항만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췄다.

1967년 1월 31일부로 대위 예편 후 건설부 한강유역개발조사단 항로과 계장으로 발령받아 1967년 2월 1일부터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건설부에 잘 아는 대학 선배가 (주)호남정유 여수정유공장프로젝트(Yeosu Honam Refinery Project)본부에서 영어가 능통하고 항만 분야 경험이 있는 토목기술자를 찾고 있는데 뜻이 있으면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월급은 현장 수당 포함 7만 원 정도가 된다고 하여 건설부에 사표를 내고 여수정유공장프로젝트에 참여해 미국 칼텍스(Caltex)사의 매니저들과 함께 공장 부지 조성부터 유조선 접안시설(imodoco buoy), 공장 설비 기초공사 등 1년 6개월간 공정별로 공사를 수행하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토목기사로서의 현장 업무를 끝내고 미국 내 칼텍스 정유공장에서 6개월간 공장장 훈련과정을 준비하던 중 포항제철에서 토목과장 요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가 눈에 띄는 거야. 모집요강에는 실무경력 7년 이상, 출신 대학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했고, 채용 절차는 서류심사와 구두시험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면접시험은 총 3개 분야로 나누어 치러졌는데, 첫 번째 파트는 당시 이종열 총무이사 주재로 배환식 총무부장, 안병화 SM부장, 황경노 관리실장이 영어 구사능력, 입사 동기 등 일반적인 사항을 물었어요. 두 번째 파트에서는 이홍종 건설이사와 김상억 실장이 부지조성, 원료ㆍ제품 부두의 적정 표고(標高) 등 당면 문제에 대해 질문했고, 세 번째 파트는 서울대 토목과 박상조 주임교수의 전문지식에 대한 질문이 진행됐어요. 박상조 교수는 입사 추천서를 자필로 써주신 분으로, 월급쟁이는 뭐니 뭐니 해도 월급이 많은 호남정유에서 근무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지만 유사 이래 가장 큰 일관제철소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토목기술자로서 보람이 있을 것 같아 포항제철 입사를 결심하게 됐죠.”

면접이 끝나고 당시 현영환 총무차장은 미안하지만 나이가 30세가 안되니 3급 최고 호봉인 14호봉을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월급이 반토막(3만 5000원)이 나고 포철 입사를 결심했던 취지에도 맞지 않으므로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2급 1호봉 토목 담당으로 7월 1일부로 발령을 내줬고, 근무는 6월 15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본사 건설본부장실 토목 담당의 업무 중 하나는 일본 가와사키(川崎)제철의 우에노 조사부로(上野長三郞) 고문의 카운터파트 역이었다. 우에노 고문은 1968년 4월 1일부로 박태준 사장의 기술고문으로 위촉되어 5년간 포항제철소의 항만계획과 공장배치안에 대한 기본 구상과 KISA의 컨설턴트인 미국 코퍼스(Koppers)사가 제시한 기본계획에 대한 검토 조언 등 제철소 전반에 걸친 자문을 했다.

우에노 고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만 가오슝(高雄) 항의 해군시설 부장(해군 대령)으로 군항 확장 계획을 수립했고, 귀국 후에는 가와사키제철에 부임해 제철소 계획 설계, 공사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각별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지바(千葉)ㆍ미즈시마(水島)제철소 건설에 기여했다. 해군 시설 장교로 근무한 공통점이 있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초기 단계에 포항 입지에 적합한 굴입항만 안(案)을 스케치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해주어 준설과 부지 성토의 병행 시공에 따른 공사비 절감과 제한된 공기 내에 항만을 건설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U자형 굴입식 안벽을 공장 중앙에 배치하여 최종 규모로의 확장이 쉽도록 했다.

“당시 항만 건설은 정부 지원 사업으로서 일본 퍼시픽 컨설턴트(PCKKㆍPacific Consultants K.K)의 용역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1968년 3월 건설부와 일본 PCKK, 우에노 고문이 참석한 가운데 굴입식 항만으로 할 것을 최종 확정하여 같은 해 4월 KISA가 작성한 직선 안벽식의 초기 용량 연산 60만 톤(최종 300만 톤)으로 계획된 안을 추후에도 확장이 가능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코퍼스사가 제시한 직선 안벽식 부지조성 표고계획 합의사항을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제철소의 후판ㆍ열연ㆍ냉연공장의 기초가 지하 20m 이하로 내려가기 때문에 공장 배수를 고려하여 형산강~구룡포 간 국토변의 지반 높이를 형산강 제방 높이 +7.5m에서 2.0m 낮춘 +5.5m로 하고, 직선 안벽의 표고는 +4.5m로 하여 1.0m의 완만한 기울기를 두도록 했다. 또 부지 성토를 할 때는 25cm마다 지반 다짐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김광일 토목과장은 이러한 사양으로 부지조성을 하게 되면 제철소를 언제 지을 것인가에 대해 코퍼스사 어시스턴트 프로젝트 매니저인 모어랜드(Moreland) 씨, 현지 주재 이사 홀스(Holes) 씨와 불합리한 항목을 조목조목 따져 합의를 이끌어 냈다.

KISA가 제시한 직선 안벽 표고 +4.5m에 대하여는 영일만 조수간만의 차가 18cm밖에 안되고 포항 시내 모든 안벽의 높이가 +2.0m이므로 1m 여유를 두어 +3.0m로 하고, 국토변의 성토고 역시 +5.5m에서 +4.5m로 낮출 수 있다고 설득했다. 뿐만 아니라 부지 성토를 할 때 25cm 간격으로 지반 다짐하는 조항도 삭제했다. 지반 다짐을 생략함에 따른 건설공기 단축 및 투자비 절감 효과는 막대했다.

그가 이 같은 핵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해군과 호남정유에서 다년간 축적한 항만, 해양 분야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포항 해병기지사령부 파견 당시 LST 접안 부두 설계 및 공사 감독을 하며 포항지역 항만과 해양에 대해 익혔고, 호남정유 공장 건설 당시에는 미국 칼텍스사 프로젝트 매니저들과 약 2년간 부지 조성부터 유조선 계류시설 및 제반 인프라 건설까지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KISA측의 보고서는 U자형 굴입항만 시설을 준설하고 그 준설토로 매립하는 내용을 모르고 작성된 것임으로 그는 그해 12월 초 KISA측 모얼랜드 씨와 홀스 씨를 포항 준설 현장으로 안내했다. 당시 펌프 준설선에서 쏟아내는 모래, 자갈 등의 토사는 양질의 성토재로 손색이 없었다. 25cm 간격으로 다짐작업을 할 수도 없거니와 준설선에서 퍼올린 모래를 부지에 쏟아놓으면 자연스럽게 물다짐이 이루어졌다. 이를 본 모얼랜드 씨와 홀스 씨는 ‘원더풀(wonderful)’을 연발했다.

모얼랜드 씨와 홀스 씨는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투숙 중이던 남산 근처 타워호텔에 김광일 과장 부부와 여상환 외국계약부 주무계장 부부를 초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후 코퍼스사와 포항제철 간 기술 협의는 원만히 진행될 수 있었다.

KISA가 해산되고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되자 포철은 일본의 야하다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 3개사로 구성된 JG(Japan Group)와 1968년 12월 예비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하여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의 기본이 되는 사항을 망라한 Preminary Engineering Report를 작성했다. 그중 공장 배치계획 작성에 있어 우에노 고문의 안을 기초로 한 기본구상안을 JG에 제출, 반영(1969년 12월 2일)함으로써 현재의 포항제철소 레이아웃이 탄생되었다. 포항제철소 최종 규모를 연산 500만 톤에서 현재 910만 톤으로 변경, 확정시킨 것은 우에노 고문의 원대한 통찰력과 국경을 초월한 진실된 조언, 세심한 배려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우에노 고문의 공적이 있다면 제철소 건설의 경험이 전무한 우리를 위해 건설요원의 OJT 교육이 반드시 필요함을 박태준 사장에게 강력히 역설한 것이다. 덕분에 1968년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차로 박종태 부장을 단장으로 하여 건축에 심인보 차장, 행정에 신현욱 차장, 토목에 김광일 과장, 기전에 이광일 계장 등 5명이 1조가 되어 지바제철소를 경유, 미즈시마제철소에서 3주간에 걸쳐 연수를 받았다. 숙소는 우에노 고문이 미즈시마제철소에 내려오면 투숙하는 구라시키(倉敷) 시내에 있는 후쿠지소(福地莊)라는 전통여관이었다.

우에노 고문은 몸소 미즈시마제철소에 내려와 옛 간부들을 전원 소집, 연수 계획을 작성토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우리 일행을 격려했다. 또 제철소 간부들에게는 앞으로 포항제철소의 건설을 담당할 연수생에게 무엇이든지 다 가르쳐주도록 지시했고, 필요한 자료와 참고 설계도면도 제공하도록 해줬다. 이때 수집한 자료와 참고 도면은 귀국 후 제철소 설계 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예로 포항제철소 정문은 미즈시마제철소 정문 설계도면을 참조하여 똑같이 설계한 것이다.

연수가 끝나갈 무렵 일요일에 근처 히메지성(姫路城)을 관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우에노 고문에게 부탁해서 관광을 포기하고 일요일 밤 기차로 도쿄로 갔다. 우에노 고문은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도쿄역에서 그의 직속 부하인 후루카와 신지(古川新次) 전 지바제철소 토목과장의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어 그날 하루 종일 일본 토목학회, 토질공학회(현재 지반공학회), 항만협회, 국제항만협회 회원 가입을 하고, 협회 전문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우에노 고문의 교토(京都)대학 후배 교수들을 비롯하여 가와사키제철 출신들과는 지금까지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우에노 고문의 남다른 업적의 한 예다. 1972년 4월까지 230만 평의 부지 조성을 완료하려면 굴입항만에서 준설선으로 퍼올린 토사로 성토, 매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준설선의 펌프 능력은 울산만호 5000마력(HP)이 최대이고, 준설토사의 파이프 이송거리는 최대 2km로 준설지점에서 공장부지 예정 거리 2.5~3.0km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우에노 고문의 조언으로 부족한 거리만큼 굴입항만에서 굴입하여 토사의 거리를 단축, 한국이 보유한 준설선으로 작업이 가능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준설토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굴입으로 조성된 해면은 파도와 관계없이 하역이 가능해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우에노 고문의 공적은 막대했다.

포항 2기 설비 건설 당시 중앙정보부와 맞먹는 초대 치안본부장에 박태준 사장의 육사 동기생이 임명되어 축하를 겸해서 한강변 조용한 곳에서 만났다. 이때 치안본부장이 고로 건설에 많이 쓰이는 계장 설비를 처남이 근무하고 있는 이성설비가 포항제철과 직접 계약해 납품할 수 있도록 부탁해 왔다.

“고로설비는 현대건설이 주계약자였고, 성능 보장이 안되는 하청업체인 이성설비와는 직접 계약이 불가능하다는 계약부서 및 건설책임부서의 의견이 나와 박태준 사장이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건설공정실은 산하에 공사 행정 관련 부서를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공장의 설비 공급과 외국 공급사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업무를 맡고 있어 당시 고로설비 공급사의 현장 책임자인 IHI사의 이시가와(石川) 소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요. 이성설비가 한국에서 최상의 계장설비 공급업체임을 설명했고, IHI사의 전문기술자를 한국에 파견, 이성설비를 조사하게 하고 성능 보장이 가능하다는 서류를 작성해 계약부서에 통보함으로써 계약이 성사되었어요. 내가 매월 주관하는 건설회의에도 이성설비 사장이 참석하게 되었죠. 최고 경영자는 기술자나 행정요원과 달리 경영의 여러 부분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이럴 때 아랫사람은 무조건 안된다고만 하지 말고 윗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야 해요.”

박태준 사장 지시로 1980년 말 이란에 급파되어 국제정세 파악 임무 수행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 ‘토목기술자’로서 가장 큰 보람 느껴

이야기는 다시 신화건설 상무이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포항제철에서 신화건설로 옮겨 포항제철로부터 수주한 현장을 독려하느라 바삐 지내고 있었는데, 박준민 경영정책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980년 12월경이었다.

“다시 포철로 들어와서 이란으로 출장을 가라는 거야.”

사건은 박태준 당시 국회 재정위원장에게 올라간 국제문제조사연구소의 특별연구보고 제4호라는 문건에서 발단이 되었다. ‘이란•이라크 간 휴전 성립 시 전후 복구에 우선 참여를 위한 시안(試案)’이라는 문건을 접한 박태준 사장이 그 문건에 메모를 해서 경영정책실로 내려보낸 것이었다. 박태준 사장 특유의 구불구불한 반초서체 글씨의 메모와 이른바 달팽이 사인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었다.

– 경영정책실장 면밀히 검토 후 대책 요. 우선 신화건설에 나가있는 김광일 군을 그 지역에 사전 파견하여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생각됨 –

“박준민 실장이 사장 지시사항이니 가능한 한 빨리 결정해 주어야 되겠다는 전화를 자꾸 걸어오는 거예요.”

신화건설에 상무로 근무하게 된 것도 박 사장의 배려 덕분임을 생각할 때 거절할 수가 없어 신화의 이남주 사장께 말씀드리고 12월 31일 포항으로 내려갔다. 정월 초하루 효자단지의 A동(사장 숙소)으로 찾아가 이란 출장 결심사항을 보고 차 찾아뵈려고 했으나 연말 과로와 몸살이 난 사장님을 못 뵙고 대신 사모님께 말씀드렸더니, 1월 5일 서울 본사에서 뵙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곧바로 귀경했다. 1월 5일 사장실에는 새해인사차 주요 내빈과 전직 간부가 많아 5인 1조가 되어 이상수, 장경환, 한명환 전직 임원과 같이 인사를 드렸다. 박 사장이 그에게 좀 기다리게 하고 조말수 비서실장을 불러 오늘 당장 김광일 여권을 신청해서 주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극이 풀리기 전에 테헤란에 도착시킬 것을 지시했다. 박 사장의 지시사항은 “전쟁으로 파괴된 복구 공사에 소요될 철강자재 수요조사와 테헤란사무소 재개 필요성을 약 3개월간 검토하고 돌아오게. 수고하게”가 전부였다.

인질극이란 이란의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1979년 추방된 팔레비 국왕은 미국으로 망명했고, 호메이니(Khomeini)는 미국에 그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격화된 나머지 호메이니 혁명정부는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을 점거했고, 대사관 직원들은 인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판매이사 보좌역에다 이란 강재 수요개발 조사단장이란 직함으로 3개월의 출장명령이 났는데, 출장비가 무려 3만 달러였어요. 지금 돈으로 치면 1억 원쯤 될 겁니다. 여비규정으로는 그런 출장비가 나올 수 없었으니 특별활동비나 다른 어떤 명목으로 그렇게 나왔을 것으로 생각했지. 당시 이란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은 이란항공으로 런던에서 한 편, 파리에서 한 편, 이렇게 일주일에 두 편밖에 없었어요. 런던을 통해 이란으로 들어가 먼저 한국대사관과 접촉했습니다. 안기부에서 나온 참사관도 만났는데 반갑게 대해주었어요. 다들 서둘러 이란을 빠져나가는 판인데, 거꾸로 들어왔으니 뭔가 임무를 띠고 있을 거라고 본 것 같았어요.”

한국대사관의 협조를 얻어 이란인 운전수와 지프 한대를 임대하여 ‘전쟁지역 통과 중’을 지프 전면에 붙이고 현장조사를 하는 가운데 본사에는 일주일, 늦어도 열흘 간격으로 상황보고를 해야 했다. 주로 코트라(KOTRA)의 텔렉스를 이용하여 본사의 장중웅 경영정책실 종합기획과장 앞으로 보냈다.

그런데 거의 끝나갈 무렵 안기부에서 나와 있던 이근호 참사관으로부터 그야말로 특급 정보를 건네받았어요. 4억 5000만 달러 상당의 비행기 및 군장비 부품 상담이었어요. 평상시 같으면 미국과 접촉할 일이었지만 당시 미국대사관은 기능이 중단된 상황이었고, 이 참사관은 정부 공식 라인을 건너뛰어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채널을 찾고 있었던 거야. 이근호 참사관에게 주요 인사를 포항 4기 종합준공식(1981.2.18)에 초청하여 입국시키고 준공식 참석 후 안기부 직원 입회하에 국제상사와 실무 접촉케 하는 비밀 서신을 한국으로 가는 인편을 수소문해서 박태준 사장에게 올렸다.

박태준 사장은 미8군사령관의 허가를 득해야 할 사항임을 감안, 전두환 대통령과 처음으로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전 대통령께서 박 사장의 제철보국 이외에 국가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후일 양가가 사돈의 인연을 맺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예정된 출장 기간을 마치고 5월 초 귀국한 뒤 그해 10월 박태준 사장께 ㈜한양 평택LNG기지 건설 담당 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보고드렸다. 박 사장은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따뜻하게 격려해주었다.

“일본 격언에 엔노시타노 치카라모치(緑の下の力持ち),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토목기술자의 숙명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프로젝트 초기에 이러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것입니다. 초대 토목과장으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 한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포스코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기업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1971년 5월 17일 김광일 당시 제선토건과장이 박종태 포항제철소장, 박태준 사장, 조용선 제선설비반장과 함께 포항 1기 제선설비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1971년 5월 17일 김광일 당시 제선토건과장이 박종태 포항제철소장, 박태준 사장, 조용선 제선설비반장(왼쪽부터)과 함께 포항 1기 제선설비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포항제철은 1973년 7월 연산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준공했으며, 그 해 12월 1일 조강 연산 157만 톤 규모의 2기 공사를 착공했다.

1976년 12월 송년모임에서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이 포항 3기 설비 공사의 성공적 완수를 기원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6년 12월 송년모임에서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 (사진 왼쪽)이 포항 3기 설비 공사의 성공적 완수를 기원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이영직 설계부 차장, 이성림 기전부장, 심인보 토건부장, 김두하 설계부장, 육완식 부본부장, 정명식 본부장.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이 1968년 7월 1일 토목과장으로 입사하면서 받은 사령장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이 1968년 7월 1일 토목과장으로 입사하면서 받은 사령장. 당시 상당한 경력자라 하더라도 3급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80년 11월 박태준 당시 국회 재무위원장에게 올라간 국제문제조사연구소 특별연구보고 제4호

▲1980년 11월 박태준 당시 국회 재무위원장에게 올라간 국제문제조사연구소 특별연구보고 제4호. 박태준 사장은 <이란•이라크간 간 휴전 성립 시 전후 복구에 우선 참여를 위한 시안>이라는 이 문건 표지에 ‘경영정책실장 면밀히 검토 후 대책 요. 우선 신화건설에 나가있는 김광일 군을 그 지역에 사전 파견하여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 생각됨’ 이라는 메모를 써 경영정책실에 내려보냈다. 김광일 전 건설공정실장은 이 문서가 발단이 돼 1981년 1월 내란 중의 이란으로 급히 출장을 떠났다.

1970년 6월 12일 당시 김상억 토건부장이 김광일 토목과장에게 보낸 업무지시서

▲1970년 6월 12일 당시 김상억 토건부장이 김광일 토목과장에게 보낸 업무지시서. ‘강관파일 및 준설파이프 인양 건’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에는 ‘1.강관파일 인양 및 준설파이프 인양 계획을 6월 14일까지 수립(樹立)하고 2.강관파일 인양내역을 6월 13일한으로 검토하고 3.준설파이프 인양 직영비(直營費)를 산출하고 4.강관파일 및 준설파이프 인양 스케줄을 6월 14일까지 검토하여 5.건설기획관리실과 협의 하에 6월 15일 오전 중에 소장님께 브리핑하고 6.6월 15일 오후에 포항건설공사(CIA) 사장님께 토목과장이 직접 설명 올리도록 할 것 7.이는 사장님의 엄격한 지시사항이니 명심하시오’라는 업무지시가 담겨져 있다.

김광일 前 건설공정실장 주요 경력 1938 황해도 봉산군 출생 1960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1967 해군 대위 예편 1967 호남정유 1968 포스코 입사 건설본부 과장, 토건부 과장, 공사부 차장, 이란 테헤란사무소장, 경영정책실 부장 1979 신화건설 상무이사 1981 포스코 부소장 1981 한양 이사 1993 강원산업 강건재기술연구소장 2000 대한토목학회 회장 2005 일본 토목학회 명예회원 상훈 2003 일본 토목학회 국제공헌상 수상 2010 ACECC(The Asian Civil Engineering Coordinating Council) 국제공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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