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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뉴스룸 편집팀 2019/05/08

l 용광로보다 뜨겁게 혼(魂)을 불사른 김철우 前 부사장에 대한 헌사

올해 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고(故) 김철우 포스코 부사장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하고, 지난달 과학‧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에서 증서를 수여했다.

 고(故) 김철우 포스코 부사장 초상화

포항제철소 1고로를 설계, 건설하는 등 우리나라 최초 제철소 건설을 기술적으로 주도하고, 포항제철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한국 철강기술 개발의 토대를 구축하여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다. 또 그는 산학연 연구개발체제 구축과 우수한 철강인재 양성을 통해 최빈국이었던 한국을 최고의 철강국가 반열에 올려놓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번 과학기술유공자 명단에는 고 김호길 포스텍 초대 총장과 권경환 포스텍 수학과 명예교수를 포함한 16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2013년 타개한 김철우 부사장에 대하여는, 그의 헌신과 기여에 비해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태어나 공학을 배웠고, 이후 조국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으나 분단된 조국이 만들어낸 가족사에 연루돼 7년간 옥살이를 한 인물. 1979년 석방된 이후엔 다시 제철보국의 현장으로 돌아와 포스코 기술개발의 큰 틀을 닦아 오늘의 포스코를 있게 한 인물. 그의 생애를 되짚어 본다.

l 철 박사 김철우, 박태준을 만나다

김철우는 1926년 3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공학박사다. 그의 부모는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일찍이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으나 가난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놓지 않고 금속학도의 길을 걸었다. 도쿄공업대학, 도쿄대 대학원을 거쳐 1956년 도쿄대 연구교수(文部技官)가 되어 철강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어려운 일제 환경에서도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은 신분으로 도쿄대 연구교수가 된 첫 재일동포이기도 했다.

사실 포스코(당시 포항제철) 설립 이전에 그는 신격호 롯데 사장의 요청을 받고 종합제철공장 건설사업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와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의 첫 만남은 1965~1966년께 이뤄졌다.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그는 후식으로 못 보던 과일을 봤단다. “이게 뭡니까?” “이건 ‘망고’라는 과일입니다.” 이렇게 김철우와 포스코의 인연은 ‘망고’에서 시작됐다.

1985년 기술연구소 3연구동 착공식에 참석한 김철우 부사장

▲1985년 기술연구소 3연구동 착공식에 참석한 김철우 부사장

그리고 1967년 어느 날. 그는 박태준 사장, 박충훈 상공부장관, 윤동석 서울대 박사, 청와대 경제비서 등과 만나게 됐다. 기술 문제가 대두됐지만, 그는 교육만 뒷받침된다면 한국인이 훨씬 빨리 익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걸리는 게 있었다. 한국이 제철소 건설에 대일청구권 배상금을 쓰기로 한 점이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권력자 개인과 정당이 그 돈을 뜯어먹었던 선례가 있었다. 그때 박태준 사장의 말에 김 부사장은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기는 한데, 내가 맡은 이상 그렇게 못합니다. 김 박사는 나를 잘 모르실 겁니다. 한국에 오셔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나를 아시게 될 겁니다.”

제철소 건설 당시 포항제철은 정부의 정책적 선택에 의해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인 1억 1,948만 달러를 사업자금으로 지원받았다. 그 이후 정부가 출자금의 18배에 해당하는 3조 8,899억 원을 환수했으니 그 이야기를 지킨 셈이다.

l ‘경제국보 1호’ 포항 1고로를 설계하다

1968년부터 김철우는 포항제철 건설과정에서 모든 공정 구성과 기술 도입, 그리고 이에 따른 기구 설립 등 기술적인 분야에 참여했다. 그리고 1971년 도쿄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조국의 산업화에 몸담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철우는 한국과학기술원(KIST) 중공업연구실장을 맡아 포항제철소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포항제철 기술이사를 겸임하며 포항 1고로 설계를 주도하고 제철소 건설을 이끈 주인공이 바로 김철우다. 그는 인맥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포항제철에 기술지원을 함으로써 한국의 산업과 경제 발전을 견인하고 철강산업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의 주변에는 제철 전문가가 20명쯤 있었고, 특히 은사가 일본제철(당시 후지제철소) 기술본부장으로 있었다.

김철우가 주도하여 설계, 건설한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 1고로는 훗날 ‘경제국보 1호’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이후 ‘산업의 쌀’을 생산, 가난하던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된다.

1987년 3월 27일 RIST(포항산업과학연구원) 창립 행사

▲1987년 3월 27일 RIST(포항산업과학연구원) 창립 행사

l 냉전체제, 7년간의 옥살이를 겪다

그러나 포항제철 준공식을 한 달여 앞둔 1973년 3월, 김철우는 예기치 못하게 영어(囹圄, 감옥)의 몸이 됐다. 북송(北送)된 동생을 만나러 1970년 북한을 다녀온 일 때문에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수년의 시간을 쏟아 부은, 수고와 땀의 결실인 포항제철소 준공식에 그는 참석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6년 6개월 후 1979년 8월 광복절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북한에서 황해제철소를 구경하면서 공정 개량에 대한 조언을 해준 것이 이적행위가 되는 줄 몰랐다. 조국을 도와주려고 온 내가 왜 갇혀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모르고 살아온 내 실수가 그토록 가혹한 상황까지 이어진 것은 극단적인 냉전체제의 비극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l 평생을 기술개발과 국가발전에 헌신하다

옥살이를 하고 난 뒤에도 김철우는 고국과 포항제철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80년 완전히 귀국하고 포항제철로 복귀해 1987년까지 기술고문, 기술담당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한국 철강기술의 근간을 이루는 연구개발을 주도했다. 파이넥스 용융환원제철기술을 비롯해, 스트립캐스팅(Strip Casting)·400계 스테인리스강·초대형 고로 설계기술·자동차강판 소재기술 등 개발에 착수했다.

1989년부터는 탄소 소재기술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인조흑연 제조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개발을 추진했다. 또 코크스, 탄소섬유,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 복합재료 등을 포스코의 신성장 사업화 대상으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포항제철 기술연구소장으로 재임 중이던 1984년, 박태준 회장과 함께 ‘포스텍(당시 포항공과대학) 건립’과 ‘산학연 체제 구축’을 구상하고, RIST(포항산업과학연구원, 당시 산업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1987년 출범한 실용화 전문연구기관인 RIST의 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포항제철-포항공대-RIST로 이어진 산학연 연구개발체제 기반을 구축했고, 한국 고유의 철강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협력 연구와 우수인재 양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RIST 연구소 실험동을 찾은 고준식 사장과 최형섭 상임고문(전 과기부 초대 장관), 김철우 부사장(왼쪽부터 차례대로)

▲RIST 연구소 실험동을 찾은 고준식 사장과 최형섭 상임고문(전 과기부 초대 장관), 김철우 부사장(왼쪽부터 차례대로)

포스코가 우리나라 철강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 포항제철 건립을 정책적으로 이끈 사람은 박태준이지만, 포스코의 오늘을 과학기술적으로 이끈 인물은 김철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퇴임 이후에는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 고문과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을 맡아 한국과 일본의 중소기업 기술교류에 힘썼다. 특히 포스코를 퇴임하면서 받은 퇴직금 전액을 출연해 사단법인 한국테크노마트를 설립, 일본의 우수 중소기업 기술이전과 산업인재 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l ‘과학기술유공자’이자 ‘진정한 애국자’

“1964년,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공학도로 처음 조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부산의 제일제당, 대구의 제일모직, 영월의 화력발전소 등으로 안내를 받았다. 기껏 그게 자랑거리인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김철우가 살아생전에 남긴 이야기다. 그의 많은 지인들은 그가 공학자나 과학자이기 전에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입을 모은다.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으로 인해 고생한 고향 친척들을 위해, 그리고 조국의 산업화를 위해 국가의 요청에 부응하여 다시 한국 철강산업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포항 1고로 설계와 건설을 주도한 공학자, 산학연 협력체계 구축을 통해 한국 철강기술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연구자, 한중일 기술협력과 인적 교류를 통해 한국 소재산업의 기틀을 다진 김철우. 그는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가득찬 진정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였다.

 

오는 5월 9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2019 세종과학기술인대회’를 열고 故 김철우 부사장을 비롯해 올해 선정된 과학기술유공자의 업적을 재조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 현대사와 얽힌 아픔과 좌절에도 생애 전반에 흐르는 김철우 부사장의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에 삼가 경의를 표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찬란한 빛이 되어주길 손 모아 기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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