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지나도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은 여전하지만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풍경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제 필름 카메라는 찾아보기 어렵고 필요할 때 바로바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간단한 편집까지 가능한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또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사진 공유가 가능해 굳이 사진을 인화하는 수고로움도 줄었다. 확실히 편리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사진이 주는 특유의 감성이 빠르게 소비되는 사진 경험과 함께 많이 퇴색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 이런 속도의 시대를 역행하는 한 사진관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본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철판 한 장 한 장에 정성껏 사진을 인화하는 등대사진관은 19세기에 사용됐던 그 옛날의 ‘습판사진’으로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는 곳이다.
┃“습판사진, 베테랑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죠”
50대 남성이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80대 어머니와 함께 특별한 사진을 찍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50대 아들은 거동이 불편했고, 80대 노모는 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와 함께 오래 간직할 추억을 만들고 싶어 사진관을 찾은 것.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멋을 낸 모자의 사진이 철판에 인화되어 나온 순간, 등대사진관 이창주 실장은 “가슴 한 켠이 찡했다”고 한다.
습판사진은 아직 낯설다. 심지어 사진을 전공한 사람들도 사진 역사를 배울 때 어렴풋이 들어봤을 정도다. 최근 TV 예능프로그램 ‘빅피처 패밀리’에서 배우 류수영 씨가 습판사진 인화 과정을 배우는 장면이 전파를 타며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앞에서 얘기한 50대 남성도 방송을 보고 찾아왔다고 한다.
등대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창주 실장과 이규열 실장은 사진 경력 30년 차의 베테랑들이다. 그런 그들이 디지털 사진 작업을 하다 갑자기 시대를 거스르기로 결정한 것은 습판사진 특유의 매력이 컸기 때문. 이창주 실장은 “습판사진만의 빈티지하고 특별한 느낌이 좋았죠. 철판에 인화를 하기 때문에 10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수많은 난관을 헤쳐가야만 했다. 이규열 실장은 “2015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습판사진을 시작했어요. 시행착오도 물론 많았죠. 철판 위에 바르는 감광액의 적정 비율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테스트를 해야 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 결과 찾은 적정 비율은 이제 등대사진관만의 ‘영업 비밀’이 됐다.
습판사진에서 인화지 역할을 하는 철판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수입해 온 철판을 썼는데, 무게가 꽤 나가는 데다 개인이 소량 주문해 수입절차를 진행해야 했기에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국내 구석구석을 뒤져 맞춤 맞은 철판을 겨우 찾아냈다고. 검은색이 칠해진 얇은 철판을 청계천에서 발견했을 때 이창주 실장은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습판사진 촬영은 일종의 문화 체험이에요”
1851년에 발명된 습판사진은 철판 위에 감광액을 적신 상태에서 촬영과 현상을 하기 때문에 ‘습판(濕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초기 습판사진은 철 또는 유리에 인화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유리는 파손의 위험이 커서 철판을 주로 썼다고 한다. 현재도 외국 중고거래 사이트 등에서 100년 이상 된 습판사진들을 구할 수 있는데, 이창주 실장과 이규열 실장이 보여준 습판사진들도 그 오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철판에 새겨진 추억들이 어쩌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고거래 사이트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 땅에 살았을 그들의 표정이 신비롭게 보였다.
“저희는 습판사진을 단순히 한 장의 결과물이 아니라 문화 체험이라고 생각해요.” 이규열 실장의 말은 무슨 뜻일까? 보통 등대사진관을 방문하면 두 실장이 사진의 역사와 습판사진의 유래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다짜고짜 포즈부터 잡는 일반 스튜디오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간단한 강의가 끝나면 방문객들은 습판사진을 찍는 경험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그렇게 1시간 남짓 시간이 지나면 함께 온 일행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실제로 그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의 특별한 추억도 철판에 함께 새겨지는 것이다.
┃철판 위에 떠오르는 특별한 추억 한 장
습판사진에 대해 이해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포즈를 취할 차례. 방문객들 앞에 놓인 카메라는 100년도 더 된 골동품이다. 19세기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부품 하나, 렌즈 하나 힘들게 구해 최적화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단순한 카메라를 뛰어 넘는 하나의 ‘작품’으로 보였다.
습판사진은 일종의 즉석사진이다. 그 자리에서 찍고 바로 현상과 인화를 하기 때문에 다시 찍을 수 없고, 당연히 후보정 개념도 없다. 이창주 실장은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습판사진은 작업의 긴장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죠. 단 한 장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많은 것들을 세심히 준비할 수밖에 없거든요. 다시 찍을 수 없으니까요. 디지털 작업과는 많이 다르고, 힘들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등대사진관을 방문한 김에 직접 습판사진을 찍어 봤다. 포즈를 잡는 동안 암실에서는 철판 위에 감광액을 발라 즉석에서 필름을 만들었다. 준비된 필름을 카메라에 끼우고 ‘찰칵!’ 셔터가 눌렸다. 잠시 후 이규열 실장은 철판 위에 사진이 인화되는 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또렷이 상이 맺히는 과정이 신기했다. 이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마를 때까지 기다린 후 코팅 처리를 해서 방문객의 손에 전해진다. 스캐닝을 통해 디지털 파일로도 결과물을 받을 수 있다.
┃그날의 분위기까지 찍어드립니다
그리 크지 않은 등대사진관 한 쪽 벽면은 습판사진들로 빼곡했다. 주로 가족사진들이 많았고, 친구들끼리 찍은 사진도 종종 보였다. 이창주 실장은 제주도에서 올라온 2명의 청년들 일화를 들려줬다. “인화를 했는데 약간 얼룩이 보였어요. 제주도에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더 좋은 결과물을 주고 싶어서 연락을 했죠. 다시 찍자고요. 하지만 그 청년들은 ‘그게 습판사진의 매력 아니냐’며 그 얼룩까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사진을 찍는 순간의 분위기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어서 습판사진이 더 특별한 것이 아닐까? 그날 그 순간의 표정과 사진관의 분위기가 한 세기를 넘어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진 한 장 찍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래 사진들은 등대사진관에서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 언뜻 평범한 가족사진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철판 위에 새겨진 그날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뭐든지 빠르고 편리해진 요즘이지만 가끔은 천천히 그리고 오롯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보는 것은 어떨까? 100년 이상 변하지 않는 철판에 기록을 남기는 습판사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