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오일쇼크로 전 세계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1973년 말, 한국에 나와 있던 모모세 타다시(百瀨 格) 전 일본 도요멘카(東洋棉花, 이하 도멘) 포항소장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일본으로 가는 길에 인사차 박태준 사장을 찾았다. 그런데 박태준 사장은 부탁이 있다면서 핫코일(hot coil) 2만 톤을 일본이든 어디든 팔 수 있도록 계약을 성사시켜 주면 ‘좋은 신년 선물’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당시 철강시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핫코일이 얼마나 안 팔리고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철강딜러 ‘미스터 제임스’ 설득··· 세계적 불황에도 2만톤 거래 성사
– 대한중석에서 이어진 ‘포항제철 프로젝트’ 도멘 기계부 성장 발판으로
– 포항·광양제철소 설비공급 참여··· 포스코와의 아름다운 동행 12년
제1차 오일쇼크로 전 세계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1973년 말, 한국에 나와 있던 모모세 타다시(百瀨 格) 전 일본 도요멘카(東洋棉花, 이하 도멘) 포항소장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일본으로 가는 길에 인사차 박태준 사장을 찾았다. 그런데 박태준 사장은 부탁이 있다면서 핫코일(hot coil) 2만 톤을 일본이든 어디든 팔 수 있도록 계약을 성사시켜 주면 ‘좋은 신년 선물’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당시 철강시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핫코일이 얼마나 안 팔리고 있는지도 당연히 몰랐죠. 새해 들어 도멘 본사 철강부에 가서 상의를 했더니 펄쩍 뛰는 겁니다. 나는 박 사장의 부탁을 들어주면 포항제철소 3기 설비 공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철강부에서는 핫코일 2만 톤이 얼마나 많은지 본 적이나 있느냐면서 지금 일본도 핫코일 2만 톤은 커녕 2톤도 못 팔고 있는 형편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이미 약속을 했으므로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철강부를 찾아가 매달렸다. 며칠을 그렇게 찾아가 읍소작전을 펼치자 과장 한 사람이 “지금 그 정도의 물량을 팔 수 있는 사람은 독일에 있는 ‘미스터 제임스’밖에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제임스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이라는 것이 그 과장이 전해준 정보의 전부였다.
“밤 9시쯤에 무턱대고 독일에 나가있는 기계부 선배에게 전화를 했지요. 그런데 그 선배도 똑같은 반응이었어요. ‘당신 바보냐, 어떻게 하려고 그런 약속을 했느냐’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임스는 일본과 1년에 3000톤 정도의 철강을 거래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에는 1000톤 정도밖에 거래를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나로서는 달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 선배에게 제임스를 한국으로 불러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교통비와 체재비 전액을 지원하는 조건이었어요.”
제임스가 한국에 와서 만난 사람은 안병화 판매 담당 상무였다. 안 상무는 평소 포항 현장에서 혼자 지내는 모모세 전 소장에게 매우 살갑게 대해 주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회의실 앞에서 두 시간쯤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안 상무와 제임스가 밖으로 나왔다. 표정을 살펴보니 안 상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얘기가 잘 안 됐음을 직감했다. 안 상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모세 씨, 당신은 기계담당이 아닙니까. 이러면 우리도 부담이 됩니다.”
순간 ‘아, 3기 설비 계약은 물 건너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모모세 전 소장은 회고했다. 그런데 제임스는 공장이 어디인지 가보자고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는데, 압연공장만 둘러보고는 서울로 향했다.
“이틀 후 제임스는 다시 안병화 상무를 만났고, 이번에는 30분도 안 돼 두 사람 모두 활짝 웃으면서 나오는 겁니다. 2만 톤 계약이 성사된 것이었어요. 그는 포항제철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장을 직접 둘러보고 최신 기계설비를 확인한 후에야 납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다음날 아침 조선호텔을 찾은 모모세 전 소장은 깜짝 놀랐다. 체재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50만 원이면 넉넉할 것으로 판단하고 준비해 갔는데, 85만 원이 나와 있었다.
“내역을 보니 모두 국제전화료였어요. 그 양반이 밤새 세계 곳곳에 전화를 걸었던 겁니다. 당시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핫코일 2만 톤을 팔기 위해 수십, 수백 건의 몇 백 톤짜리 작은 거래를 모으느라 그랬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 제임스와 포항제철은 몇 년 동안 좋은 거래를 계속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모세 전 소장이 포항 현장에 처음 도착해 부임인사차 박태준 사장을 찾은 것은 1971년 12월 초였다. 사장실은 롬멜하우스 2층에 있었다. 모모세 전 소장은 박태준 사장을 만나 인사를 드릴 때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박 사장께서는 무척 바빠 보였고 뭔가 심기가 편치 않은 표정이었어요. 어느 현장에서 골치 아픈 일이 터진 듯한 느낌이었어요. 앞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인사차 찾아간 내게 앉으라는 말도 없었어요. 그러니 그냥 서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일단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도멘의 모모세입니다. OO 씨와 교대했습니다.”
“응? 으응···.”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박태준 사장과 모모세 전 소장의 첫 대면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설익은 만남이 있은 뒤 2주일쯤 지난 12월 16일 롬멜하우스 옆에 위치한 대강당에서 건설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각 건설현장의 건설사 현장책임자들이 현황을 보고하고, 포항제철의 담당 부장이 브리핑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외국 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은 영어나 일어로 보고했다.
“도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발전소와 변전소에서 각 공장으로 연결되는 배전설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현장 일은 이상이 없는 것으로 간단히 보고하고 애로사항을 말씀드렸어요. 당시 도멘에서는 현장 일이 어려워서 일본으로부터 업무용으로 자동차 두 대를 선적해 왔는데, 통관이 안 되어 창고에 그냥 썩혀 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속히 통관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보고가 아닌 부탁을 드렸지요.”
모모세 전 소장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박태준 사장이 물었다.
“통관과장, 모모세 씨 말이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왜 통관이 안 돼? 회의 끝나면 당장 통관시켜. 일본에서 자동차까지 가져와서 도와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후 통관절차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는 포항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파티가 열렸다. 파티에는 인기가수, 코미디언 등 연예인 4명까지 초청되었다.
“나는 현장에서 그런 파티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초대장이 왔는데 정장이 한 벌도 없으니 낭패였어요. 가진 옷이래야 콤비로 입을 수 있는 재킷과 바지, 그리고 작업복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와이셔츠도 넥타이도 없고, 티셔츠 두어 장이 전부였어요.”
파티 장소는 영일대였다. 그는 도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파티장 현관에서 남들의 차림을 슬쩍 훔쳐보았다. 모두가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선뜻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입구로 들어오던 박태준 사장과 마주쳤다.
“들어와요.”
“현장일 하느라고 세비로(정장)도 없고 넥타이도 없는데···.”
“완전히 각오하고 왔구먼. 괜찮아요.”
그런 일이 있은 후 박 사장은 그를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박태준 사장이 그를 각별하게 대해준 데는 과거 도멘과의 범상치 않은 인연이 작용했을 것으로 그는 짐작했다.
그러니까, 박태준 사장이 대한중석 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박 사장은 취임 1년 만에 만성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한중석을 흑자로 돌려놓은 후 ‘소다회(soda ash)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도멘과 설비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마침 인천의 동양화학이 똑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일본의 다른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영 대한중석은 민간기업 우선정책에 따라 계약을 파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박 사장은 일본 오사카의 도멘 본사로 가가와(香川英史)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사정을 들은 가가와 사장이 ‘해약은 일본 설비회사 사이의 문제이므로 어떻게든 우리가 해결할 테니, 그런 일로 고민하지 마시고 조국을 위해 더 힘을 내 열심히 일하십시오’ 하면서 오히려 박 사장을 격려한 일이 있었습니다. 500만 달러가 넘는 계약이었느니 10%의 해약금이면 대한중석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겠지요.”
박 사장은 이 일로 가가와 사장을 매우 고맙게 여겼고, 모모세 전 소장에게도 몇 번이나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박 사장은 그때 다시 계약할 사업이 있으면 꼭 도멘과 하겠다고 답례 인사를 했고, 이후 포항제철 사장이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답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도멘이 포항제철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도멘의 참여는 조강연산 103만 톤 체제의 1기 설비에서부터 910만 톤 체제의 4기 2차 준공까지 이어졌습니다. 박태준 사장은 일본을 방문할 때면 으레 가가와 사장을 찾았고, 가가와 사장도 제가 일본에 들어가면 꼭 박 사장의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이 정도면 ‘아름다운 인연’ 아니겠습니까.”
▶ 1981년 2월 18일 열린 포항 종합준공식에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4기 건설 유공으로 산업포장을 받고 있는 모모세 타다시 前 도멘 포항소장. 그는 “포항에서 십여 년의 젊음을 불태우고 대한민국에서 받은 훈장이 감사하고 기뻤다”고 말했다. |
1984년 초, 모모세 전 소장은 도멘 본사로 복귀했다. 1971년 겨울, 포항 땅을 밟은 지 꼭 12년 만이었다. 그 사이 포항제철은 조강연산 910만 톤 체제를 최종 4기 2차 사업을 완료하고 1기 착공 13년 만에 세계 12위의 제철소가 되어 있었다. 광양제철소 부지조성공사도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그 전에도 현장에서 교대해 일본 본사로 돌아오라는 얘기가 두 번쯤 있었습니다. 1977년으로 기억합니다. 본사의 과장 자리로 오라는 소식이 있어서, 집에도 곧 돌아갈 거라고 연락을 해두고 본사에서 온 간부 두 사람과 함께 박 사장께 이임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10시간 만에 승진 인사가 취소되었습니다. 박 사장께서 도멘 본사 간부를 다시 호출해 ‘모모세 씨를 본사 과장으로 데려가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되면 앞으로 도멘이 포항제철과 장사를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었어요. 본사에서는 과장 자리는 비워둘 테니 한 2년쯤 더 고생하라고 하더군요. 이후 박 회장께서는 ‘모모세 씨 출세 못한 건 다 내 책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는 1984년 초부터 2년 반 정도 일본에 머물렀다. 동료들은 왜 회사에서 그를 부장으로 승진시키지 않는지 궁금하다고 한마디씩 했다. 오랜 기간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 큰일을 해냈는데, 그 정도로 열심히 일했으면 회사 쪽에서도 뭔가 배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또한 만약 포항제철 프로젝트가 없었으면 도멘의 기계부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진단했다.
“포항제철 프로젝트는 도멘의 기계부를 세운 기초 가운데 하나로, 기계부 성장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대한중석 사장 시절의 박태준 회장과의 인연으로 도멘에 포항 1기 설비 공사에서부터 계속 발전소 배전설비라는 좋은 사업을 준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거래 금액으로는 당시까지 총 6000억 엔쯤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거래였어요. 1984년 무렵 기계부의 1년 매출이 약 500억 엔 정도였으니 10년 이상의 매출액이 되는 대단한 프로젝트였어요.”
1986년 9월 24일, 그는 다시 서울지점장 발령을 받았다. 2년 반 정도의 본사 근무 기간은 서울지점장으로 나가기 위한 대기 시간이었던 셈이다. 1985년 말에 도멘은 포스코와 광양 5고로 설비 중 부대설비 공급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포부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이야기는 5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1981년 9월 어느 날 박태준 회장이 그를 불렀다. 광양만이 제철소 입지로 적합한지 지질조사를 할 수 있는 전문가를 일본에서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때까지 광양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일본에는 해양토목 분야의 전문가인 가와모토 이사무(河本勇) 일본해양컨설턴트 사장이 있었습니다. 가와모토 사장은 니혼강관(NKK), 후쿠야마(福山) 제철소와 오기시마(扇島) 해상제철소 건설공사 등 많은 해상부지 조성공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특히 연약지반 개량공법에 대해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전문가였습니다.”
광양으로 떠난 지질조사단은 일본에서 온 가와모토 사장과 유상부 전 회장, 그리고 모모세 전 소장 이렇게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지금 제철소가 들어서 있는 광양 앞바다에는 김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작은 섬들이 솟아있고 그 사이로 작은 어선들이 떠다니고 있는데, 경치가 매우 좋았습니다. 과연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다도해다웠어요. 나는 이런 경치 좋은 곳에 제철소를 세우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날 배는 광양만 이곳저곳을 여섯 시간 동안이나 휘젓고 다녔지요.”
광양이 제철소 입지로 결정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섬진강이었다고 모모세 전 소장은 회고했다. 제철소는 공업용수를 많이 쓰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은 섬진강은 광양을 최상의 제철소 입지로 돋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광양제철소가 자리 잡은 곳은 육지가 바다 쪽으로 조금 돌출되어 있는 부분인데, 광양만 바로 맞은편에 여수 석유화학단지가 있어서 거기까지는 이미 수로가 뚫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해서는 거기서부터 섬진강 하구까지만 수로를 열면 되는 유리한 조건이었어요.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였죠. 마지막 남은 문제는 섬진강 어느 쪽에 제철소를 짓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상도 쪽으로 짓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박태준 회장께서 지역간 균형발전을 고려해 전라도 쪽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양만의 아름다운 풍경, 바다에 떠 있는 많은 섬들, 김 양식장과 어선들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정경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가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 여기에는 이러이러한 것이 있었다’는 팻말 하나라도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유상부 전 회장이 ‘정말 그렇네’ 하고 맞장구를 쳤던 일을 떠올렸다.
“제철소가 들어선 뒤 유 전 회장과 제철소를 둘러본 일이 있습니다. 부지를 둘러보던 때가 생각나서 함께 그 위치에 가보았더니 여러 섬 가운데 하나의 윗머리만 남아 있었어요. 그걸 보고 유 전 회장께 ‘여기에 기념패를 세워서 우리 이름을 새기면 어떨까요’ 했더니 ‘그건 저와 모모세 씨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면 충분한 역사가 될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어요. 멋진 이야기라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 곳에 섬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니, 직접 보진 못했지만 굉장히 뿌듯하군요.”
▶ 광양제철소 제선부 3고로 앞에는 ‘서취도(西吹島)’라고 쓰인 돌비석이 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섬 중 하나인 서취도가 있던 자리다. 매립 지면보다 높은 섬 윗머리 부분을 보존해 섬 모양을 닮은 돌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광양제철소 건설 부지인 광양군 태금면은 태인도와 금호도 등 7개 유인도(有人島)와 9개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2년 9월부터 시작된 부지 조성공사로 인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현재 공장 부지에는 본섬인 서취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취도는 그 형상이 나발 모양이어서 ‘나발섬’이라고도 불렸으며 김과 어패류 양식업이 활발했다. 썰물 때 하나였다가 밀물 때는 둘로 나뉘어져 그 작은 섬 하나가 ‘소서취도’로 불렸다.” |
서울의 일본인 모임 ‘재팬클럽’의 최고참 멤버인 그는 스스로를 서울 남산의 개나리를 좋아하고 포항·광양 양대 제철소에 대한 아련한 회억(回憶)을 간직한 ‘한국 사람이 되고 싶은 일본인’이라고 했다.
우재욱 <시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