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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센터 개관 20주년 특집 1] 포스코센터, 건축·문화·사무공간에 초일류정신 심다 ①

[포스코센터 개관 20주년 특집 1] 포스코센터, 건축·문화·사무공간에 초일류정신 심다 ①

2015/09/03

포스코센터, 건축·문화·사무공간에 초일류정신 심다

① 사옥건립 추진, 부지선정, 매입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4km 길이의 왕복 10차선 도로 양쪽에 20~30층 빌딩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금융·무역·IT 관련기업들이 밀집한 이곳에 수많은 비즈니스맨이 근무하고 있다.

 

대치동과 삼성동을 가르는 언덕 아래 우직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포스코센터’다.

 

포스코센터가 어느새 탄생 20주년을 맞았다. 1995년 9월 1일 개관 당시 포스코센터는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 ‘친환경 빌딩’ 등의 별칭과 함께 테헤란로의 랜드마크로 단숨에 등극했다. 지금도 스무 살 나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다.

 

서울 사옥 건립 안건이 처음 등장한 1988년부터 부지 선정, 매입, 기획·설계, 공사를 거쳐 테헤란로의 마스코트로 스무 살을 맞이한 2015년까지 포스코센터가 겪어온 이야기와 만난 사람들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 포스코센터는 ‘본사’다? ‘서울사무소’다!

 

포스코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모두의 걱정을 보란 듯이 엎고 포스코는 1973년 7월 3일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 1기를 종합 준공하며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로 탄생했다. 저렴하고 품질 좋은 철강재를 생산, 공급함으로써 자동차·조선·건설·가전 등 국가 경제의 중심이 되는 철강 수요산업 발전에 톡톡히 기여해오고 있다.

 

포스코를 이끄는 힘은 ‘제철소’이며, 제철소가 있는 포항에 본사가 있다. 따라서 포스코센터는 ‘서울사무소’다.

 

 

 

하지만 포스코센터는 포항 본사 못지 않게 포스코를 상징하는 건물로 인식되고 있다. 비즈니스의 중심지 테헤란로를 20년간 지켜온 역사가 있어서일 것이다.

 

 

■ “서울 본사를 가정한 최신의 대형건물 건립 추진을 검토하라”

 

포스코 창립 20주년인 1988년 8월 22일 열린 임원회의에서 서울 신사옥 건립이 처음 논의됐다. 세계화·정보화 시대의 전진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포스코의 본사 기능도 지금처럼 포항에 있었다. 하지만 연산 2100만 톤 체제에 맞는 판매·관리 업무 수행이 서울에서 대부분 이뤄지고 있었고, 철강센터와 정보통신기지 기능도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위치해있던 데다가 다가올 글로벌 시대에도 대비해야 했다.

 

이윽고 1989년 1월 12일 구성된 ‘서울 사옥 건립추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1989년 8월 21일 가칭 ‘POSCO-21’ 건립추진반이 발족됐다. 추진반 초기 멤버 27명은 사업계획서 작성부터 관계회사들과의 유기적인 협조, 참여업체 공사 감독, 설비공급 확인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면에서 포스코센터 건립에 힘썼다.

 

▶ 1989년 8월 결성된 가칭 ‘POSCO-21’ 건립추진반은 매월 열리는 건설회의에서 용역사·시공사·건축설계사·설비공급사 등과 함께 주요 공사계획을 공유하고 추진실적을 분석하는 등 건설품질 확보에 힘썼다.

 

 

■ 부지 선정 – 정보통신의 거리 ‘테헤란로’에 입성하다

 

조직 편성 후 급선무는 사옥 입지 후보지 선정과 부지 매입 추진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서울 사옥도 포항 본사와 마찬가지로 ‘경영정보센터’의 개념으로 추진하라”고 당부하고 사옥 입지에 대해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4대문 안에 있어야 한다. 둘째, 청계천과 같이 가스가 나오는 곳은 안 된다. 셋째, 지하철 역사와 연결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진반은 서울 전역을 샅샅이 찾아 다녔지만 4대문 안은커녕 사옥이 들어설 만한 크기의 부지 확보가 쉽지 않았다. 후보지로 물망에 오른 지역도 각기 특성이 뚜렷해서 선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포스코는 여의도에 나대지(裸垈地·지상에 건축물이나 구축물이 없는 대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옥을 지으려면 그 두 배는 있어야 해서 인접한 제일생명 소유 부지를 합쳐 같이 건물을 짓고 나눠 쓰자고 제의했지만 제일생명이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다시 물색한 곳이 경기고등학교 맞은편 모 회사 부지로,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 부지를 매입해서 45층짜리 인텔리전트 빌딩을 건설하려 했지만, 정부에서 추진하는 수도권 정비계획과 꼭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금의 도곡동 타워팰리스 자리에 서울시 소유의 땅이 있었는데, 그 땅도 팔 듯하더니 나중에는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후보지 중에 대치동 부지, 제2롯데월드 지역, 역삼역 주변 공지(空地) 등 세 군데로 좁혀졌고, 최종 적지로 현 위치가 결정됐다.

 

수도권 정비 기본계획상 정보통신 기능으로 특화된 지역인 테헤란로가 수도권 인구 및 교통 문제를 고려했을 때 서울시 도시 기본계획의 도심 분산 취지에 부합하면서 영동부핵권의 중심부였기 때문이다.

 

▶ 1991년 7월 테헤란로 전경. ‘빌딩숲’으로 표현되는 현재 테헤란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당시 테헤란로변에는 10층 이상 건물 개발이 활발히 진행 중이었고, 이면도로에는 3~4층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 특히 삼성역사거리 부근의 무역센터(54층)와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34층)이 초고층 건물로서 테헤란로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 삼성로 가로경관(위)과 테헤란로 가로경관.

 

 

■ 사옥 부지를 확보하라… 경영층부터 실무자까지 ‘근성’으로 승부하다

 

▶ 부지 선정 당시 주변지역 토지이용 현황 및 대형건물.

 

 

부지 매입은 초기 추진위가 결성된 1989년 1월 12일부터 12월 29일까지 장장 일 년간 진행됐다.

 

사옥 부지로 결정된 대치4동 892번지1만7453㎡(5280평)는 6개 필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82% 상당인 1만4342㎡(4339평)이 동아건설 소유였다. 동아건설은 포항제철소 건설 초기단계부터 공사에 참여해 온 회사로 포스코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지 매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 추진반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부지가 동아건설 산하의 별도 법인인 사단법인 공산학원 소유였던 것이다. 당시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동아건설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동아건설도 본사를 같은 대치동 부지로 옮기려고 오래 전부터 30층 규모의 사옥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동아건설이 당시 일본 설계회사 니켄 세케이(Nikken Sekei)에 이미 용역을 주어 조감도까지 나와 있는 상태였는데, 포스코도 부지 매입과 병행해서 니켄 세케이와 사옥 설계 협의를 벌이는 중이었다는 점이다. 두 회사가 같은 부지에 사옥을 설립하기 위해 한 설계회사에 용역을 주어 검토하고 있었으니 우연을 넘어 ‘동상이몽’과 같은 현실이었다.

 

동아건설에게 사옥 설립을 포기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 하지만 포스코는 한번 결정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근성’을 발휘했다. 최고경영자부터 실무자까지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동아건설 측과 수십 차례에 걸쳐 협상을 진행, 이견을 조율했다.

 

결국 동아건설 측에서 제의해 온 공동 개발사업 추진과 포스코의 여의도 지역 부지에 대한 매각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협상의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후 동아건설 측 전 임원이 그룹 대표에게 ‘해당 부지가 가져다 줄 경제적 가치’ ‘건립 계획을 백지화할 때 회사가 받는 이미지 타격’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부지 매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하기도 했다. 동아건설은 당초 약속사항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정중하게 사과를 표시했지만, 포스코는 다시 동아건설의 마음을 돌려 부지 매각과 매입을 원안대로 추진키로 합의했다.

 

 

■ “이 땅에 한국 제일의 첨단빌딩을 지어주십시오”… 이주일 씨의 바람

 

초기 추진위원회서부터 사옥 건립에 몸담은 김영수 前 건설기획부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건설 부지 매입으로 한 고비를 넘기는 듯 했지만, 오히려 소규모 5개 필지 소유주를 상대로 하는 매입 업무가 훨씬 더 힘겨운 작업이었습니다. 더욱이 5개 필지 중 일부는 이중삼중으로 압류돼있거나 저당권이 설정돼있어서 법적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부지였어요. 그나마 법적 하자가 있는 부지는 손쉬운 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일부 필지는 재력가나 사회 유명인사가 소유하고 있어 매입 조건을 절충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매도 의사가 전혀 없고, 오히려 포스코가 매입한 사옥 부지를 자신에게 매각해달라는 등 역공을 펴면서 만나기를 기피했습니다. 수 차례 협의를 거쳐 어렵사리 성사시키고, 막상 계약하려고 약속장소에 나가보면 아예 나타나지 않았어요. 나타나도 변심해서 딴소리를 하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소규모 지주 5명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서 들려주었다. 한동안 정계에서도 활동했던 코미디언 故 이주일 씨 부부와의 이야기인데, 포스코센터 건설 과정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씨가 소유하고 있던 부지 750㎡(228평)는 이 씨가 연예계 초년생 시절부터 무대 뒤편에서 어렵게 한푼 두푼 모은 돈과 아내가 어린 시절부터 억척스럽게 일해 저축한 돈으로 마련한 재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땅에 대한 부부의 애착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부인이 더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 씨도 부지를 매각해달라는 포스코의 요구에 오히려 압력단체를 동원해 위협을 가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실무자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에는 흔쾌히 응했다. 추진반은 여기에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매일 이주일 씨 자택을 찾아가 집요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결국 이 씨 부부도 우리의 끈질긴 노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허락했다.

 

김영수 前 부장은 계약 체결 당일 이주일 씨가 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저는 오늘 포스코에 백기를 들겠습니다. 원래 저도 포스코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포스코맨들로부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 아무리 힘겨운 대상일지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제가 이번에 배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 동료 연예인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했습니다. 포스코맨들의 프로정신을 배우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연예인들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요. 진심으로 그 땅에 한국 제일의 첨단 빌딩이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그의 진솔한 이야기에 김영수 前 부장은 “반드시 그곳에 우리나라 최고의 건물을 세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1월 7일, 포스코는 이주일 씨의 바람에 걸맞은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 건설을 향한 첫 삽을 떴다.

 

 

※ 포스코센터 개관 20주년 특집 2화는 9월 7일(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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