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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57] 홍상복 前 부사장, 제철기술 개발 30년 외길··· 포스코 고유기술 완성 토대놓다

[남기고싶은이야기 57] 홍상복 前 부사장, 제철기술 개발 30년 외길··· 포스코 고유기술 완성 토대놓다

2015/09/24

포스코가 창립된 지 정확히 11개월 된 1969년 3월 1일 공채 1기로 입사한 홍상복 전 부사장은 당시 서울대 금속공학과 교수였던 윤동석 박사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윤동석 박사는 철 야금(冶金) 분야의 권위자로서 1967년 11월 8일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 발족 당시부터 위원으로 참여했고, 포스코 창립 후에는 전무이사·부사장을 역임했다. “1969년 2월, 그러니까 졸업 직전이었어요. 윤 박사께서 새로 설립된 포스코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우리 졸업생들에게 거기 가서 일하는 것이 매우 보람 있는 일이고 비전도 있다고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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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철강기술에 무지하던 시기··· 일본 기술계획서 바이블 삼아 공부

– ‘냉연품질향상 비상팀’ 5개분야 머리 맞대고 70일간 매일 밤 결산

– 기술 모방부터 자체개발까지··· 창의·노력 ‘퍼스트무버’로 나아가야

포스코가 창립된 지 정확히 11개월 된 1969년 3월 1일 공채 1기로 입사한 홍상복 전 부사장은 당시 서울대 금속공학과 교수였던 윤동석 박사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윤동석 박사는 철 야금(冶金) 분야의 권위자로서 1967년 11월 8일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 발족 당시부터 위원으로 참여했고, 포스코 창립 후에는 전무이사·부사장을 역임했다.

 

“1969년 2월, 그러니까 졸업 직전이었어요. 윤 박사께서 새로 설립된 포스코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우리 졸업생들에게 거기 가서 일하는 것이 매우 보람 있는 일이고 비전도 있다고 적극적으로 권유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인연으로 포스코에 입사했어요. 공채 1기는 모두 13명이었고 입사 후 바로 포항 현장으로 내려갔어요.”

 

당시는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추진 주체였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이 사업에서 서서히 발을 빼는 시기였다.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KISA 회원사들은 한국의 차관 상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가 경제적 타당성을 부인함에 따라 1969년 9월 KISA 프로젝트는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바로 그 해 입사한 우리로서는 앞날이 암담했지만 일본으로 방향을 선회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박태준 사장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대학에서 금속을 전공했지만, 사실 철강공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KISA가 제출한 일반기술계획서(GEP : General Engineering Plan)를 교재 삼아 철강생산 공정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을 거쳐 재팬그룹(JG : Japan Group)을 파트너로 한 제철소 건설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이번에는 다시 JG가 제출한 예비기술용역(PE : Preliminary Engineering) 보고서를 교재로 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곧바로 기술계 직원들은 유석기 생산부장 산하로 발령이 났다. 처음엔 주어진 업무가 없었는데, 조금 지나자 각자 희망하는 분야를 써내라고 했다. 제강 분야를 지원한 홍 전 부사장은 1970년 2월 제강설비부 신광식 과장 밑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장기간에 걸친 JG와의 기술협상에 참여했습니다. 제강공정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설비구성과 기술내용에 대한 협의를 이어나갔어요. 그래서 제강부가 나의 홈타운이 된 겁니다. 13년 동안 제강부에서 일했고 품질관리부장 3년을 거쳐 1988년 2월 임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생산기술본부장을 거쳐 포항제철소장으로서 회사의 최고기술경영자(CTO) 역할을 하기까지 오로지 기술 외길을 걸었습니다. 1994년 부사장이 된 뒤 1998년 포스코휼스 사장으로 나갈 때까지 제 관장 분야에서 기술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어요. 포스코의 기술사(技術史)는 기술관리, 기술개발, 품질개발의 역사였고 그것이 저의 주 업무였습니다.”

 

포항 1기 설비 엔지니어링 당시에는 저급 일반강 생산을 위한 낮은 수준의 설비였다고 회고했다. 그보다 높은 수준의 고급강을 생산하려면 별도의 계약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JG는 당초 후지제철·야와타제철·일본강관(NKK) 3사로 구성되었지만 이후 후지와 야와타가 합병해 신일본제철(NSC)이 되는 바람에 2사 체제가 되었는데, 제강 분야만 NKK가 담당하고 제선·압연과 기타 유틸리티 등 나머지 모든 분야를 신일철이 담당해서 기술용역을 제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JG는 우리에게 정말 고마운 존재였습니다당시 우리는 철강생산 공정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어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의존했던 거지. 그들이 주는 자료는 우리에게는 곧 바이블이었고, 이를 철저히 흡수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신일철과 NKK는 은근히 서로 잘 가르쳐주기 경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제한 강종 범위 안에서는 최대한 가르쳐 주려 했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우리의 눈망울에 그들이 감동한 점도 있었을 겁니다.”

 

1972년에는 NKK 게이힌제철소 미즈에 제강공장으로 연수를 갔다. 야마가(山鹿) 공장장은 일본 현지 조업요원들을 모두 빼고 공장 전체를 연수생에게 맡길 정도로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공장을 제 손으로 돌려봐야만 전체적인 것을 터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단이었겠지만 그것은 상당한 위험 감수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45년 전 당시 기술계장이었던 나와 이재운 조괴계장, 권억근 전로계장, 이승관 작업장, 정용희 작업장 등이 함께 갔습니다. 올 들어 그 다섯 사람이 뜻을 모아 지난 5월 일본에 가서 야마가 공장장과 우리의 카운터파트 분들을 뵙고 사은회를 열었습니다. 여든이 훌쩍 넘은 노구(老軀)에 백발이 성성한 야마가 선생은 모임 내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 홍상복 전 부사장은 1972년 일본강관(NKK) 게이힌제철소 연수를 다녀온 동료들과 함께 야마가 전 공장장을 뵙고 45년 만의 사은회를 가졌다. 당시 직함으로 야마가 공장장(앞줄 왼쪽 세 번째), 권억근 계장(앞줄 왼쪽 두 번째), 홍상복 계장(뒷줄 오른쪽 세 번째), 이재운 계장(뒷줄 왼쪽 세 번째), 이승관 작업장(뒷줄 오른쪽 첫 번째), 정용희 작업장(앞줄 왼쪽 첫 번째).

 

홍상복 전 부사장은 지금의 시점에서 지난 포스코 시절을 회고해 보면 세 가지로 압축된다고 했다. 첫째, 인생의 황금기는 물론 인생 전체를 포스코에 바쳤다. 둘째, 엄청나게 일했다. 셋째, 크리스천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월화수목금금금···.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지. 그때도 3박4일의 하계휴가가 있었는데, 그걸 찾아먹은 건 두 번뿐이었어요. 1기 설비 건설 때 앞으로 300만 톤 내지 500만 톤까지 확장한다는 막연한 계획만 있었습니다. 1기 준공 후부터는 2년 간격으로 2~4기로 이어지는 확장사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기술을 축적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거야. 그런 상황에서 휴가를 떠날 마음의 여유가 있었겠나.”

 

당시의 최우선 목표는 일본으로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스스로 무르익어가면 우리 사람, 우리 환경에 맞도록 최적화시켜 나가는 기술진화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방법은 오로지 ‘열심히 하는 것’ 하나였다.

 

“포스코의 종합기술개발 발전계획을 만들면서 목표를 일본을 따라잡는 데 두었습니다. 그때 일본의 조업.품질 지표와 우리 것과는 3~4년의 격차가 있다고 느꼈어요. 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1.5배 내지 2배의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휴가도 반납하고 일에 매달린 나머지 ‘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게 나중에는 ‘독사’로 바뀌더군. 퇴근 후에 밥 먹고 다시 회사로 발길을 옮기는 일상을 이어가다 보니 그런 별명이 붙었겠지. 정말 열심히 하는데도 3~4년의 격차는 상당 기간 좁혀지지 않았는데, 나로서는 안달이 났어요. 지금은 일본과 대등한 수준이 되었고 일본을 앞서는 부분도 있으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느껴짐과 동시에 후배들의 노력과 성과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포항 3. 4기가 끝나고 1980년대 들어 광양제철소 건설에 착수할 당시에는 일본의 우호적 태도가 일변했다. 무섭게 따라오는 포스코의 기술력을 감지하고는 부메랑 효과를 우려한 것이었다. 일본 제철소를 견학할 때에는 정보 유출을 철저히 차단했고 기술교류에서도 계약 범위를 엄격히 지켰다. 포스코로서는 자체 기술개발 체제를 확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방 단계, 추격 단계를 거쳐서 1980년대 이후에는 자력개발 단계로 들어간 겁니다. 그 기반이 된 것이 1987년 포스텍 설립과 부설연구소 RIST의 독립 법인화입니다. 그래서 제철소 현장과 함께 산학연 협동 연구체제를 구축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박태준 회장의 혜안, 그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부설연구소 체제에서는 급여.노무관리 등에서 회사의 체제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데, 그래서는 우수한 두뇌를 유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별도 법인화해서 급여를 포스텍 교수 수준으로 맞추고 자율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면서 RIST가 우수 두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포스텍 교수와 RIST 연구원의 겸직 제도를 도입하면서 선의의 경쟁이 이루어져 우리 나름의 기술개발 체제를 확립한 겁니다.”

 

당시 홍 전 부사장은 생산기술본부장으로서 포스코의 연구과제가 RIST를 통해서 포스텍으로 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한편, RIST에서 기술연구소를 분리해 포스코 직속으로 했다. 포스코가 RIST로부터 연구계획서를 받아서 투자가치가 있는지를 심사하는 체제는 비능률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존 체제는 의사결정 절차의 경직성으로 인하여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연구원의 자율권도 제한된다는 생각에서 취한 조치였습니다. 현장에서 즉시 적용할 수 있는 철강 관련과제는 포스코 직속 기술연구소에서 수행하고, RIST에서는 철강 외 부문, 그러니까 신소재·자동화·환경·에너지·경영과학 등 장기전략 과제를 맡도록 한 것입니다.”

 

포스코의 철강 기술발전은 크게 공정기술과 제품 개발기술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공정기술을 살펴보면 이 또한 세 가지로 나뉜다는 것이 홍 전 부사장의 견해였다. 제선·제강·압연 등 각 공정에서 효율을 극대화하는 단위공정 기술, 기존의 공정을 생략·단축·연속화하는 기술, 반대로 기존의 공정을 세분화·전문화하는 기술이 그것이다.

 

“단위공정 기술은 공장별로 이루어지는 고전전인 기술발전 영역으로서 고로의 미분탄 취입, 전로의 복합취련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뒤의 두 가지는 제철공정 전반에 대해 거시적 또는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기술입니다. 제선 부문에서 소결 및 코크스 공정을 생략한 코렉스(COREX)나 파이넥스(FINEX) 기술, 제강에서 분괴 공정을 생략한 연속주조기술, 압연에서 배치 시스템을 대체한 HCR(Hot Charged Rolling), HDR(Hot Direct Rolling), CAL(Continuous Annealing Line) 등이 대표적인 생략·단축·연속화에 해당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기존의 공정을 더 나누고 전문화하기도 합니다. 전로에서 취련을 하면서 산소와 탄소의 레벨을 맞추지만 강의 성질에 편차가 심해요. 정련 과정을 분산시켜 전로에서는 탈탄, 온도 제어만 하고 탈황·탈린은 용선 단계에서 수행하는 겁니다. 최근에는 극저린강(極低燐鋼)을 만들기 위해 탈린로(脫燐爐)를 별도로 갖추기도 하지요. 양 제철소에 이미 적용한 걸로 압니다.”

 

포스코에서 이런 첨단기술들의 하부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 1980년대였다. 이를 기초로 당시만 해도 과연 가능할까 했던 극한 레벨까지 현재 컨트롤 되고 있음을 볼 때 인간의 한계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실험실 파일럿 설비에서 성공한 기술을 현장설비에 적용하여 상업화하려면 엔지니어링 기술이 받쳐줘야 하는데, 국내에 이를 담당할 만한 엔지니어링 업체가 없는 상황에서 포스코가 자체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로 후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며 홍 전 부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기나긴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의 위치에서 이제 퍼스트무버(first mover)로 바뀐 거지. 철강산업도 어쩔 수 없이 원가경쟁을 치러야 하는데, 고로에 저급 원료를 쓰면 노황(爐況) 악화를 불러오고 출선비가 떨어져요. 그런데 포스코는 저급 원료로 고출선비를 내고 있고 이를 일본에서 배우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이야기는 공정 개발기술에서 제품 개발기술로 이어졌다. 공정기술이 엔지니어링 관련 분야라면 제품기술은 야금 관련 분야이다. 강(鋼)은 강도가 높으면 연신율(延伸率)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건 상식에 해당했다. 그런데 강도가 높으면서도 연신율이 뛰어나 가공성이 좋은 강을 포스코는 이미 상용화했다는 것이다. 트립(TRIP)강, 그리고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트윕(TWIP)강이 그것이다.

 

“고망간강, 고알루미늄강 등이지요. 상업생산은 세계에서 포스코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식성(耐蝕性) 면에서 아연도금보다도 몇 배 뛰어난 고내식 합금도금강판 포스맥(PosMAC)도 포스코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입니다. 포스코는 공정과 제품 양면에서 선두주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속속 개발하는 월드프리미엄 제품들은 경쟁력·차별성에서 포스코의 상징적 요소가 될 것입니다. 철강의 품질을 100으로 볼 때 제강에서 60을 담당하게 됩니다. 제가 포스코에 있을 때 그런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의 의미가 느껴집니다.”

 

1990년대 들어 광양3기 설비 건설이 끝나가면서 냉연설비가 속속 들어섰다. 냉연 제품은 역사가 짧고 최신 기술이 집약된 고가품으로 선진 기술은 베일에 가려 있었고, 기술 유출 또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장을 가동해 제품을 공급하다 보니 수요가로부터 품질에 대한 클레임이 잇달았다. 보고를 받은 박태준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빠른 시일 내에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품질을 끌어올리라는 것이었다.

 

“품질기술에 관한 사항이었으니 내가 뒷짐을 지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1990년 1월 17일부터 3월 31일까지 두 달 반 동안 ‘냉연품질 향상을 위한 비상팀’을 꾸려 품질향상에 매달렸습니다. 팀에는 제강·열연·냉연·품질관리·공정관리 이렇게 5개 분야를 참여시켰어요. 매일 밤 10시에 품질결산을 실시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목표 달성 여부를 확인하고, 안 됐으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현장에 피드백 하기를 계속한 결과 목표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일일 품질결산은 늘 자정이 되어서야 끝났어요. 그걸 통해 품질은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해서 이룩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냉연부에만 맡겨놓았으면 그런 성과를 도출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포스코는 광양 냉연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을 일본 자동차회사에 납품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 자동차 메이커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겨우 자동차 내판재로만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세계 최고의 품질의 외장재로 납품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지만 앞서간 발자국이 보였기에, 그리고 상업적으로 선진 철강사에서 이미 검증된 길이었기에 힘들어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없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후배들은 우리보다 한참 더 힘들 겁니다. 우리는 ‘열심히’라는 모토 아래서 몸이 힘들었지만, 후배들은 ‘창의’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대상과 싸워야 하므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겁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홍 전 부사장은 앞으로 후배들은 국제감각을 갖추고 타 산업과의 유기적인 관계도 생각하면서 한층 스마트한 퍼스트무버로서의 자세를 갖춰야 하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끈질긴 노력’의 가치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흔히 ‘요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력’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령의 큰 부분을 노력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력을 배제한 요령은 요령이 아니라 ‘잔꾀’에 불과합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1980년 3월 홍상복 제강공장장(앞줄 오른쪽)이 포항제철소를 방문한 김종필 전 민주공화당 총재(前 국무총리)에게 제강공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한국-베트남 협력관계를 구축하던 1995년 2월, 홍상복 부사장이 베트남 최고지도자이던 도 무오이(Do Muoi) 당 서기장을 예방하고 베트남 철강산업 발전에 대해 환담하고 있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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