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일본 연수생들이 만든 기술표준서로 1고로 화입·첫출선 성공 수행
– 조업 초기 ‘노황부조 해결하라’··· 4개월간 매일 대책회의로 대안 마련
– 포항 건설경험·자신감, 세계 최고 설비의 광양제철소 건설 뒷받침
박명하 전 이사는 1971년 10월 20일 연수원 도입교육이 끝나고 제선설비부 고로건설반으로 발령났을 때, 연수원까지 직접 와서 신입사원들을 현장으로 데리고 간 조용선 당시 고로건설반장을 떠올렸다.
"첫 말씀이 ‘오늘부터 나와 같이 근무한다. 이제부터 고생이다.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는 거였어요. 현장에 도착하니 ‘고로건설추진반’이란 간판이 걸린 퀀셋(quonset·비닐하우스 모양의 반원형 간이 건물) 막사가 있었고, 그 주변에 식당과 가설건물 몇 동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는 고로본체 콘크리트 타설 공사가 한창이었고 소결공장, 코크스공장도 기초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주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파일 항타 소리가 귀청을 때리더군요. 지금도 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박 전 이사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부산의 극동철강에서 일하던 중 1971년 지인의 권유로 포항제철에 합류했다.
"서울에서 입사시험을 치르고 4급사원으로 입사했지요. 포항 연수원에서 약 20일간 교육을 받고 현장에 배치됐는데, 제철설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어요. 대학에서 배운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극동철강에서의 조업 경험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입사 다음해 6개월간 일본 연수를 떠났는데, 거기서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1972년 8월 중순이었다. 도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열차 편으로 센다이를 거쳐 일본 동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가마이시(釜石)제철소 숙소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다음날부터 연수가 시작됐는데, 내용적 3600m³, 1700m³의 고로 2기를 갖춘 현대식 제철소의 위용은 그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제선 쪽 연수생은 12명이었는데, 4명씩 3교대에 맞춰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현장 정리정돈 작업부터 시키더군요. 개공기(開孔機)를 비롯한 모든 장치와 기기들이 처음 보는 것이었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었어요. 퇴근 후에는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 교육자료를 서로 교환하는 일을 매일 반복했습니다. 연수가 끝나고 귀국 후 연수생들이 배우고 익힌 자료를 모아서 우리 나름의 기술표준서, 작업표준서를 만들었어요. 이것이 이후 신입사원 교육에 유용한 교재가 됐고, 이러한 노력이 쌓여서 1973년 6월 8일 1고로 화입과 다음날 아침 첫 출선(出銑)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어요."
1기 설비가 준공되고 1고로가 가동에 들어간 뒤로부터는 노심초사의 연속이었다. 1고로는 포항제철소라는 강의 발원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후공정에 쇳물을 공급하는 유일한 고로가 문제를 일으켜서 쇳물 생산이 중단되면 제철소 전체를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2고로 준공까지는 2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당시 제선부장이 최환용, 차장이 조용선, 공장장이 김달현 씨였습니다. 세 분 다 돌아가셨는데, 2고로 준공 때까지 1고로가 고장 나면 절대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제철소는 최소한 2기의 고로를 갖추어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양폐체제(兩肺體制)라고 하는데,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다른 하나로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거지요."
그런데 1기 설비 준공으로부터 1년이 막 지난 1974년 7월 4일, 아침 7시경 현장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출선구(出銑口)에서 물이 줄줄 새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야간이나 주말에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사람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어요. 대부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고로계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별 생각이 다 들더군. 혹시 냉입사고(冷入事故)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과연 출선구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퇴근할 야간 근무조와 교대한 주간 근무조 설비점검반을 함께 대기시켜 놓고 물이 새는 곳을 찾기 시작했어요."
고로에서 물이 샐 만한 곳은 노정(爐頂)의 살수장치, 고로에 붙어있는 1200여 개의 노체냉각반, 급수 파이프와 배수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는 24개의 풍구 등이다. 우선 배수 파이프에서 나오는 물의 온도와 급수 압력을 체크하면서 찾아보았으나 알아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정기수리를 앞당겨 하기로 하고 감풍(減風)하여 풍구를 조사해 보니 11번 풍구가 파손되어 물이 새고 있었다.
"인체의 질병도 진단만 정확하게 하면 치료는 오히려 쉬울 수 있듯이 물 새는 곳을 정확히 찾아냈으니 다음 조치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일시 휴풍(休風)하고 교체작업에 들어가 정상으로 복구시켰습니다. 조업·정비 모두 1년밖에 안 되는 경험으로 해낸 일이었어요."
▶ 1974년 7월 포항제철소 1고로 앞에서 최환용 제선부장, 박태준 사장, 김달현 고로공장장, 박명하 고로계장(왼쪽부터). 1기 준공 만 1년이 갓 지난 그해 7월 4일, 풍구 파손으로 인해 1고로 출선구에서 물이 새는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조업·정비 모두 1년밖에 경험이 없었지만, 일시 휴풍하고 완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
1975년 들어서는 1월부터 5월까지 노황부조(爐況不調)로 애를 태워야만 했다. 무려 4개월에 걸쳐 조업이 순조롭지 못하고 쇳물 생산에 차질을 일으킨 것이었다. 한마디로 고로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치면 소화불량에 걸린 것이었다. 고로 조업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소결광이나 코크스 등 장입물의 성상과 고로 조업기술 등이다. 고로 내에서 쇳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고로 상부에서 광석이 코크스와 함께 아래로 내려오면서 풍구에서 올라오는 열풍에 먼저 코크스가 타고, 다음 광석이 환원되어 쇳물이 고로 바닥에 모이게 된다. 이 과정이 사람의 소화기 계통과 비슷해서 장입물이 노체 상부에 얹히기도 하고 갑자기 설사하듯이 노체 하부로 낙하하기도 한다. 노황부조가 지속 반복되면 내용물의 슬립(slip)으로 인해 주변 설비 고장이 잇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노황부조가 일어나면 장입물이 낙하하면서 풍구나 내부노벽에 반복적으로 부딪혀 풍구가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로 인해 고로가 침수되면 휴풍을 해서 파손된 풍구나 냉각반을 교체해야 해요. 장입물 낙하 때문에 저온 출선이 일어날 경우에는 쇳물이나 슬래그가 흘러가는 길에 눌어붙어 인력으로 떼어내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 내에 치우지 않으면 다음 출선에 영향을 주고 출선이 늦어지면 다시 노황에 악영향을 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출선구가 저절로 터지는 바람에 쇳물이 흘러나와 혼선로(混銑爐·고로에서 나온 쇳물을 제강공장으로 보내기 전에 저장하는 노) 철로(鐵路)에 쇳물이 떨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굳어진 쇳물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사람과 장비가 동원되기도 했다. 또 노황이 빨리 복구되지 않으니까 조로(操爐·노체 운전) 작업에 대해 나름대로 좀 안다는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조로공들이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이었다.
이런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전되다 보니 조용선 차장은 근무위치를 아예 서브센터에서 고로운전실로 옮기고 진두지휘에 나섰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관련 부서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련 인력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냉입사고와 같은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고 6월부터 고로가 정상을 되찾았다.
"노황부조란 고로에 일어나는 만성 증후군 같은 겁니다. 몇 가지 증후가 한꺼번에 나타나지만,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단일하지 않은 병적인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그 설명 그대로입니다.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도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안정되는 거죠. 고로에 장입되는 소결광과 코크스의 입도를 균일화하는 등의 온갖 조치를 취하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대책회의를 열고 상황을 보고하는 작업이 4개월간 이어졌어요. 당시 거기서 고생했던 인물들이 이후 2·3·4고로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좋은 경험이 된 거지. 저로서는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매일 저녁 7시 노황 복구대책 회의를 하다 보면 9시 이후에나 퇴근할 수 있었다. 퇴근 이후에도 문제가 악화되면 새벽 2~3시에 공장으로 나와야 했다. 그 시간에는 통근열차와 버스가 끊어졌기 때문에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포항은 비교적 따뜻한 지방이지만 야간에는 2~3월에도 추운 날이 많았다.
"차가운 맞바람이 부는 한밤중에 형산강 다리를 건널 때면 자전거는 나가지 않고 손은 얼어터질 것같이 시렸어요. 하는 수 없이 자전거에서 내려서 입으로 호호 불어 손을 녹인 후 다리를 건너야 했고, 어떤 때는 자전거를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해야 효자주택단지까지 갈 수 있었어요. 너도나도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요즘의 세태에서 보면 그때 그 시절을 스케치한 한 장의 삽화일 따름이죠."
▶ 1983년 10월 독일 티센(Thyssen)을 방문한 박명하 제선설비그룹장(오른쪽 두 번째). 티센은 1982년 그해 1월부터 6월까지 광양 1기 전체 설비의 기본기술계획(MEP)을 검토했다. 광양 1기 MEP는 △제조비용 절감 △고생산성 및 고품질 추구 △자원 절약 △인력 절감 △공정관리의 효율화 등을 통한 최신예 제철소 건설을 목표로 했다. |
1979년 4월, 설비계획1부 제선설비그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대 초에는 광양제철소 건설 입지와 설비공급 컨소시엄이 확정되었다. 당시 일본이나 유럽의 제철소들은 1973년 1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에너지·인력 절감을 위한 자동화 설비, 품질향상을 위한 각종 장치, 공해방지 설비, 조업전산화 기술 및 설비를 제철소에 적용하고 있었다. 또한 제철설비 메이커들은 신기술을 적용한 제철설비를 팔기 위해 제철소 건설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코는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하여 국제경쟁을 통해 설비공급사를 선정하기로 하고 설비 별로 몇 개의 공급사를 선정해서 견적을 요청했다. 고로설비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내용적 3800m³의 광양 1고로 설비공급 경쟁에 뛰어든 제작사는 일본의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IHI), 영국의 데이비매키(Davy Mckee), 독일의 만게하하(MAN GHH)와 만네스만데마그(Mannesmann Demag) 4개사였다.
"각 메이커에서 제출한 견적서 내용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배기량은 동일하지만, 회사별로 차체·엔진·변속기·동력전달장치·전조등·계기판 등이 달랐습니다. 약간 다른 것도 있었고 전혀 다른 것도 있었어요. 메이커별로 설명을 들은 후 비교표를 만들어서 4개사 중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기술 및 설비 리스트를 만든 뒤 모든 메이커들이 그 기술을 적용하도록 했어요. 엔진은 모두 A사, 변속기는 모두 B사, 동력전달장치는 C사, 이런 식이었지. 그렇게 해서 다시 견적을 제출하도록 한 뒤 경쟁입찰에 부쳤어요. 단순히 고로 설비가 아니라 고로에 적용된 부속설비까지 분야별 최고를 적용한 거예요. 그래서 광양제철소가 20세기 말에 건설된 세계 최고의 제철소가 된 겁니다."
▶ 1983년 11월 박명하 제선설비그룹장이 광양 1고로 설비공급 입찰에 참여한 영국 데이비매키(Davy Mckee)와 견적을 살펴보고 있다. 포스코는 국내외 제작사 간 컨소시엄 형태로 설비를 발주했는데, 유력한 후보이던 일본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IHI)을 제치고 데이비매키-한국중공업 컨소시엄이 수주에 성공했다. |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에는 축적된 기술과 경험이 전무했기에 재팬그룹(JG)이라는 단일 창구를 통해 사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지만, 광양제철소를 건설할 때는 이미 제철소 건설 및 조업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설비별로 최고의 설비를 골라 적용할 수 있었다.
1988년 6월 설비계획1부장으로 있을 때 고로개수추진반 담당 이사 보좌역 겸무 발령이 났다. 포항 1고로가 2대기 조업을 끝내고 2차 개수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포항제철소에서는 주물선고로를 포함해 5기의 고로를 가동하고 있었고, 광양제철소 4고로 건설이 완료되면 포스코는 모두 9기의 고로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고로의 수명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1~2년 주기로 고로 개수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용선 당시 제철소장은 앞으로 고로 개수는 자력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력 개수 업무를 설비기술본부에서 추진해주기를 바랐다.
"그때 광양 1고로 메이커로 선정되었던 영국의 데이비매키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데이비매키는 포항제철소 고로 메이커인 일본의 IHI와 같은 중공업 회사가 아닌 종합 엔지니어링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광양 1고로 설비는 200여 개에 달하는 하청업체에 발주해서 건설공정에 맞춰 광양 현장에 납품했습니다. 데이비매키가 이렇게 분할 발주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 엔지니어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이미 광양 2기 설비부터 기본기술계획을 자력으로 수행해왔고, 포항 1고로 개수 경험도 있으므로 고로 개수 공사는 자력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1988년 7월 30일이었다. 고로 개수를 자력으로 수행하겠다는 품의서와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정명식 사장에게 보고했다. 정명식 사장의 질문은 간단했다.
"할 수 있겠어?"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했다간 ‘다시 검토해’라는 지시가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에 큰 소리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자신 있습니다."
박 전 이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씀 안 하시고 결재를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9월초 고로개수실이 발족됐고 지금까지 자력 고로 개수의 전통을 이어온 겁니다. 이후 고로 개수는 물론 포항·광양제철소에서 축적해 온 조업 및 설비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에 제철기술과 플랜트를 팔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엔지니어링 능력은 지금까지 전수되어 현재 포스코건설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포스코건설은 타 건설회사와 차별화됩니다."
철강 자급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국가에서 중공업을 크게 일으킨 예가 없다는 것은 그의 생각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1973년 포항 1기 준공 후 포스코가 ‘산업의 쌀’인 철강재를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수요산업에 공급해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건설·조선·기계·자동차·가전 등 중공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자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나는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포스코에서 일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치와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리더십도, 일하는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목표의식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면 회사는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재욱 <시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