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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63] 황원철 前 정비본부장, 정비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설비는 진화한다

[남기고싶은이야기 63] 황원철 前 정비본부장, 정비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설비는 진화한다

2016/03/24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1971년 포스코에 입사한 뒤 줄곧 석회소성공장 조업에만 매달려 있던 황원철 전 본부장이 전공 분야인 기계 쪽으로 옮겨간 것은 4기 설비 건설이 끝난 1982년 2월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세훈 당시 포항제철소장이 그를 불러 이제 기계 쪽으로 가라며 선강정비부 제강정비과장을 맡긴 것이었다. "포스코 입사일이 1971년 3월 1일이지만 실제로는 사전근무라고 해서 전년 12월부터 명동에 있던 서울사무소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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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밤낮없이 현장 지켜··· 2년마다 증설된 고로에 맞춰 정비체제 구축

– 정비인들은 ‘설비의 일생’ 관리하는 전문 기술집단이자 최일선 파수꾼

– 고도화된 설비가 품질을 제어하는 시대··· 정비인의 역할·정비의 전문화 중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1971년 포스코에 입사한 뒤 줄곧 석회소성공장 조업에만 매달려 있던 황원철 전 본부장이 전공 분야인 기계 쪽으로 옮겨간 것은 4기 설비 건설이 끝난 1982년 2월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세훈 당시 포항제철소장이 그를 불러 이제 기계 쪽으로 가라며 선강정비부 제강정비과장을 맡긴 것이었다.

 

"포스코 입사일이 1971년 3월 1일이지만 실제로는 사전근무라고 해서 전년 12월부터 명동에 있던 서울사무소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정식 입사와 함께 포항 독신료에 입소한 후 다시 신입사원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첫 발령을 받은 부서가 제강부 석회소성공장이었다. 이때부터 2003년 포스렉(현 포스코켐텍) 대표이사 사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32년 동안 그는 제철소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희망한 부서는 정비와 열연이었어요. 그런데 이름도 생소한 석회소성공장으로 첫 발령이 난 겁니다. 석회소성공장은 잘 알다시피 석회석을 파쇄, 선별, 소성(燒成), 가공해 제강 부원료인 생석회를 만드는 공장이지요. 1기 공장 건설과 조업을 마치면 다른 부서로 갈 수 있으려니 했는데, 곧장 2, 3기를 거쳐 1981년 4기 준공까지 계속 한 곳에서 건설과 조업 두 분야를 함께 수행하면서 11년을 근무했습니다. 제강부에서는 석회소성공장은 당신이 책임지고 하라는 식이었어요."

 

제철 공정에서도 주 공정과는 동떨어진 부대설비이고, 대학 전공과도 거리가 먼 분야였기 때문에 아예 기초부터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책을 구해 이론적 무장을 하는 한편, 어차피 주어진 일인데 피하지 말고 열심히 해서 석회 분야에서 사내 1인자가 되자는 마음가짐으로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석회소성 분야에서 10여 년 간 몸담는 동안 ‘황석회’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982년, 입사 11년이 되어서야 전공 분야인 기계 쪽으로 갈 수 있었다. 선강정비부 제강정비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뒤늦게 전공분야로 갔기에 적어도 5년은 늦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새 보직에 적응하기 위해 신입사원처럼 어리둥절해하면서 제강정비과장 2년을 겨우 보냈는데, 다시 1984년 6월 막 부지조성을 하고 있는 광양제철소 정비부문 조업준비요원으로 발령이 났다.

 

"토요일 반직근무 중이었어요. 광양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었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발령이었어요.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고 업무 인수인계도 있고 하니 며칠 여유를 주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광양에서 연락이 와서는 정명식 부사장님께서 월요일 아침에 전입신고를 하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당장 광양으로 가야 했다. 다음날 일요일 오후, 회사에서 내어준 버스에 오른 광양 발령자들은 20여 명이었다. 버스 출발지에는 가족들이 애들의 손을 잡고 나와 울먹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6시간을 달려 금호도라는 섬에 도착하니 독신료와 몇 동의 건물만 덩그러니 서있었고, 준설선이 광양만 해저의 토사를 퍼올려 부지를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광양제철소는 조업 대비 체제로 생산기술부에 생산그룹, 전산그룹, 설비그룹이 있었는데 그는 설비그룹장을 맡게 되었다. 이 그룹이 바로 12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광양제철소 최초의 정비 조직이다.

 

"1971년 입사 당시의 포항 현장과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남해안의 한적한 갯가 인근에는 다른 마을도 없었고 상업 시설도 전혀 없어 흡사 귀양을 온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독신료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전화라고는 공용으로 사용 가능한 한 대가 전부였어요. 포항 집에 연락이라도 하려면 여럿이 교환에 신청해 놓고 몇 시간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인근에 민간 상업시설이 없어 외식이라도 하려면 광양읍이나 순천으로 나가야 했는데, 자가용이 없는 시절이었고 노선버스도 하루 1, 2회 다녔기 때문에 외출하더라도 돌아오기가 무척 불편해 그냥 독신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주말에는 회사에서 귀향버스라고 해서 1인 월 2회로 한정해서 이용할 수 있도록 운행했어요. 개인적 사정으로 포항으로 가려면 순천으로 나가 부산을 거쳐 포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10시간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포항까지 가는 데 10시간, 집에서 10시간, 다시 광양으로 돌아오는 데 10시간, 이렇게 주말을 보내곤 했습니다."

 

직원 주택과 학교를 급히 건설하고는 있었지만, 그나마도 재학생이 있는 직원에게 우선적으로 배정했으므로 순서가 올 때까지 3년 정도 단신부임으로 독신료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부족한 설비관리 업무 지식을 보강하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발간되던 설비보전관리 분야의 전문지 과월호 5년 분을 일괄 구입해 집중 학습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공장 건설은 빠른 진척을 보여 1987년 5월 1기 설비 준공 이후, 1992년 10월 4기 설비 준공까지 5년 간에 걸쳐 거의 연년생으로 고로가 하나씩 들어섰다.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면서 그 방대한 신생 설비들을 유지, 관리, 안정시키는 일은 그야말로 설비와의 육박전이었다.

 

"설비와 기술 도입선이 포항은 일본이 많고 광양은 유럽이 많았습니다. 일본과 유럽은 설비뿐만 아니라 함께 온 기술자들의 사고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어요. 현장에 파견되어 온 슈퍼바이저들을 보면, 일본인들은 친절하기도 했지만 현장 설비들을 자기 설비같이 취급했습니다. 꼼꼼히 메모를 하면서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했어요. 설비 트러블이 발생해 일본으로 팩스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면 즉시 달려와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는 모든 데이터를 챙겨서 귀국한 뒤 다음 설계에 반영하는 하는 겁니다. A/S 또한 완벽에 가까웠죠. 반면에 유럽 기술자들은 계약서부터 먼저 살펴보고 행동합니다. 자기 설비가 아니라 계약서 설비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 현장 실무자로서는 일본 설비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어요. 광양은 유럽 설비가 많아 언어 소통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대신 일본 설비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일본 기술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기술 습득 속도가 느리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잘 배양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손쉽게 일본 기술자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기에 기술적으로 일본에 종속될 우려마저 없지 않았다. 유럽 설비를 담당하는 직원은 역설적으로 기술 향상 속도가 빨랐다. 유럽 기술자들은 계약 운운하면서 잘 응대도 해주지 않았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현장에 도착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공장을 돌리기 위해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찾다 보니, 설비를 우리 식으로 바꿔 버리거나 아예 개조를 해서 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직원들로 하여금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책임감도 키워주었기 때문에 기술 수준이 부쩍 향상되었다. 조업 개시 후 몇 년이 지나자 유럽 설비는 우리 기술진에 의해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량된 것이 많았다.

 

"광양제철소가 조업을 시작하면서 포항의 경험 인력을 참여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제반 여건 상 광양 근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포항 또한 안정적 조업을 유지해야 하니 소위 키잡(Key Job) 요원들은 광양으로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차선 요원을 선발, 배치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들은 광양의 유럽 설비를 담당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단련에 단련이 거듭된 결과 기술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되었어요. 3기를 거쳐 4기에 이르러서는 포항 못지 않은 정예요원으로 성장했습니다. 급속한 설비 확장으로 조직이 커지면서 진급 기회도 많아지고 실력도 향상되니, 직원들의 사기도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요인은 급여 인상보다는 설비 확장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당시 포스코에 근무한 직원이라면 대체로 기억이 떠오를 만한 이른바 ‘골프 5인방 사건’이 있었다. 당시 광양에는 백운대 뒤에 6홀짜리 체력단련용 간이 골프장이 있었다. 회사는 간부들에게 주말에 멀리 가지 말고 제철소 현장에 비상 출동할 수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은근히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간이 골프장 군데군데에는 비상 전화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988년 갓 조업을 시작한 CGL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의 품질이었다. 급기야는 일본으로 수출한 제품에 클레임이 제기되었다.

 

이를 보고받은 박태준 회장은 크게 화를 냈는데, 그 문제가 그만 기강해이로 비화되었고, 끝내는 골프로까지 불길이 번지고 말았다. 특히 6홀 골프장으로 불똥이 튀어 감사부에서 이 골프장을 이용하는 간부들의 핸디를 조사했는데, 결국 로핸디캐퍼(Low Handicapper)라고 하면서 5명에게 징계가 떨어졌다. 생산관리부장 이승관, 품질관리부장 박계생, 행정관리부장 이두형, 설비관리부장 황원철, 건설관리부장 김문순, 이렇게 5명의 부장들이었다. 이들 5명에게는 직위해임 및 본사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공통점이 있다면 직함에 모두 ‘관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후 이들은 두 달 남짓 소본부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함께 지내야 했다. 회사 분위기 일신책으로 내려진 징계로 짐작되었지만, 막상 그런 조치가 내려지고 나니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근신해야 할 사람들이 출근이 늦다, 점심시간에 일찍 나간다, 오후 6시만 되면 칼퇴근한다, 늦게 퇴근하면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이 퇴근시간이 되어도 안 나가고 있다는 등의 소리가 들려왔어요. 처신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박태준 회장께서는 어떤 일로 문책할 때 라인 조직보다는 주로 스태프 조직을 나무랐습니다. 그때도 그런 철학이 작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훗날 골프 5인방 중 3명이 임원이 되었습니다."

 

1990년 10월, 징계가 풀리면서 받은 보직이 정비본부 선강정비부장이었다. 흔히 조업 중에 문제를 일으킨 기계 설비만이 정비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건설 중에도 정비 요원들의 현장 출동은 빈번하다. 특히 공장 건설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정비팀이 공장 관리의 주체가 된다.

 

공장 건설이 끝나면 생산조업팀으로 인계하기 전에 성능과 기능을 확인하는 시운전 기간을 거친다. 죽어있는 설비에 처음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모의운전을 하는 기간으로, 길게는 6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이 시기를 커미셔닝(Commissioning) 기간이라 하는데, 설비의 기능과 성능을 총 점검하고 향후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주로 정비기술자가 주도하게 된다. 광양은 고로 4기가 거의 연년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신생 설비가 있었다. 그래서 10년 동안 광양 주요 설비의 커미셔닝팀장을 수도 없이 맡아야 했다.

 

"광양제철소가 4기에 이어 조강증산사업 추진과 함께 5고로 건설로까지 이어져 세계 제일의 제철소가 되었습니다. 철강 시황도 좋은 시기여서 회사는 100% 가동, 대량생산 및 판매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공장 준공 스위치를 누름과 동시에 상업생산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방대한 신생 설비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야말로 최일선에서 1분 1초를 아끼는 돌관 정비체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모든 설비가 가동 초기였기 때문에 크고 작은 트러블이 정비 인력을 잠시도 가만 두지 않았다. 정비 인력은 상시 비상체제에서 삐삐를 옆구리에 차고 언제 어디서든 출동이 가능한 상태로 대기해야 했다. 대부분의 직원이 금호동 주택단지에 거주했기에 10분이면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지만, 그렇다 보니 공장인지 집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만큼 현장 밀착형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어린 애들에게 잔병치레가 많듯이 시도 때도 없이 공장으로 달려가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전 제철소를 관장하는 입장에서 바람 잘 날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정비과장은 72시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버틸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어요. 매일 아침 6시에 집으로 걸려오던 설비관리센터의 전화 벨소리는 퇴직 후에도 환청이 되어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매월 전사 운영회의 심사분석 보고서 첫 장에 등장하는 설비 고장률은 전 정비인을 긴장케 했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돌발수리?정기수리?중수리?대수리는 늘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정비부서와 운전부서가 1분이라도 생산시간을 늘리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수리 공정을 짜는 일은 전시의 전략회의 같았지요."

 

당시에는 설비정비관리가 회사 경영관리의 주요 항목 중 하나로 대두되고있었다. 그러던 중 광양에 방문한 조말수 전 사장은 전사의 유관 부서가 합동으로 팀을 꾸려 해외 제철소를 벤치하킹할 것을 특별 지시했다. 당시 정비부본부장으로 있었던 그와 최종태 인력관리부장, 업무부, 양소 정비본부 직원 등 6명으로 구성된 팀이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제철소를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이때 수집한 자료는 훗날 정비 부문의 글로벌화를 위한 PI시 많은 참고가 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정비 물량과 트러블을 감소시키기 위해 설비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하는 CMS(Condition Monitoring System)를 확대 개발하고, 설비 진단기술을 연구하는 등 과학적 예방정비에도 전력 집중한 결과, 광양제철소는 매번 생산량 신기록을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제일의 단위 제철소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정비인들의 역할과 기여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10년 정도 지나니 설비도 우리 몸에 맞게 개량, 개선되고 운전 숙련도와 설비 관리기술 또한 향상되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점진적인 진화를 거쳐 지금의 건강하고 효율적인 설비가 되었다고 황원철 전 본부장은 술회했다.

 

광양제철소의 설비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 그는 또 다시 1998년 12월 31일부로 포항제철소 정비본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까지 광양제철소 초기 15년을 함께한 셈이었다. 그해의 마지막 날짜로 발령이 났으니 그날 자정에 열리는 신년 안전기원제에 참석하기 위해 곧바로 포항으로 떠나야 했다. 황 전 본부장은 1971년 입사 후 퇴직시까지 32년 동안 새해 벽두 제철소에서 열리는 안전기원제에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었다고 한다.

 

"포항제철소 정비본부장으로 부임 후 2000년 들어 유상부 회장께서 PI 및 ERP 도입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정비 부문에서도 기존에 운영해왔던 포스코 전용 시스템인 포항 ATOMS와 광양 TIMMS를 폐기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업무 시스템 구축에 들어갔어요. 70여 회에 걸친 포항-광양 간 영상회의를 통해 변화될 업무 시스템의 연착륙(Soft Landing)을 위해 공부하면서 일에 전념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기본 사고가 기존의 포스코 시스템과 너무 달랐으므로 직원들의 인식 변화관리가 성공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죠. 이때 전사 물품 체계도 획기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인도에서 파견 온 10여 명의 IT 전문가와 함께 50만의 물품 분류를 25만 정도로 감소시키는 글로벌화된 물품 관리체계를 새롭게 확립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포항제철소는 그때 이미 설비가 안정되어 있었고, 어느 정도는 노후화되어 강창오 제철소장은 제철소 환경쇄신 리모델링 작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정비부문에서도 연주공장 전용 수리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포스코 정비의 30여 년 본산인 공무부 서브센터를 철거하고 새로 정비센터를 신축했다.

 

"그 서브센터는 제철소 내 최초의 정식 사무실이었고 정비인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초창기 정비 주역 OB들을 초청해 보고를 드리고 철거한 뒤 신축에 들어갔습니다."

 

현재 제철소의 설비 하나하나가 최적으로 안정적 조업에 이른 것은 ‘고장과 복구’가 수없이 반복된 결과이며, 정비인의 손길이 미칠 때마다 설비는 진화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설비 개발의 최초 정보와 아이디어는 정비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설계-제작-건설-운전-폐각으로 이어지는 설비의 라이프사이클을 관리하는 것이 설비정비관리이고, 설비도 인간과 같이 유년기, 중장년기, 노년기가 있으므로 연식(年式)과 노후도에 따라 거기에 합당한 맞춤관리를 해야 합니다. 설비가 점점 고도화되어 제품의 품질을 설비가 직접 제어하는 시대이므로, 정비 전문화와 정비인의 역할이 커질 필요가 있겠지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황원철 전 본부장은 정비인들의 사기는 곧 제철소의 사기이고, 생산활동성의 바로미터이며, 제철소 안전조업 미래의 척도라고 했다. 정비인은 근거 없이 자기가 제일이라는 자만심을 가지는 순간 위험이 닥칠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훌륭한 선배, 상사나 부하, 후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자기계발에 앞장 서 훌륭한 직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재욱 <시인·작가>

 

▶ 1981년 4기 포항 석회소성공장 준공 후 전기실 앞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한 황원철 석회소성공장장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 1994년 11월 4일, 광양 4기 완공 후 열린 ‘정비인의 날’ 행사에서 황원철 설비관리부장(둘째 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이 정비 OB인 장세훈 초대 광양제철소장 등 선후배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정비본부 직원을 대상으로 개최한 ‘정비인의 날’ 행사에서 직원들은 정비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업무에 임할 것을 다짐했다.

  

▶ 2000년 1월 15일 포항 제철소 공무부 건물(서브센터) 철거 및 정비센터 신축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규화 전 포항 공작정비본부장(앞줄 왼쪽 네 번째), 황원철 정비본부장, 강창오 포항제철소장 (앞줄 왼쪽 여섯 번째부터) 외 정비 OB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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