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초창기 제철소 부지의 40%에 상당하는 100만 평 녹지화 계획 추진
– 허허벌판에 잔디심고 국내 최초로 대경목(大莖木) 소나무 이식 성공
– 포스코 녹화·조경기술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일본에 수출
고려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조합중앙회를 거쳐 유엔개발기구(UNDP;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동진강사업소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원운재 전 환경안전실장은 1969년 ‘포항제철로 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확실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포항제철로부터 연락도 없었기 때문에 여느 때와 같이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던 당시 상사로 있었던 박충진 소장이 협박조로 포항행을 채근했다. 이미 명령이 났는데 왜 안 가고 버티고 있느냐며 어디 불려가서 혼쭐이 날 수도 있으니, 갔다만 오라는 것이었다.
"유엔개발기구는 유엔 산하 기구로서 개발도상국의 소득향상을 위해 산림 및 농지 개발, 환경문제, 에너지 등 경제와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주업무였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온 산천이 벌거숭이여서 비가 오면 1ha(10,000m2)의 산지에서 1~1.5톤의 토사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에 산림복구를 위해 3대강(안성천, 동진강, 낙동강) 유역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유엔 산하기구였기에 월급이 꽤 많았습니다. 사무관 월급이 1만 7000원일 때 우리는 4만 5000원의 월급을 받고 관사, 차량, 운전기사 등의 지원도 받았으니까. 다른 여러 가지 조건도 좋았기에 나로서는 옮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포스코는 촉탁으로 가면 월 10만 원을 줄 수 있다며 재차 그를 채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에게 포항행을 재촉했던 박충진 소장은 박태준 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고, 포스코 설립 당시 박 사장은 ‘공원 속의 제철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조경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그렇게 진척되었다기에 예의상 한번 가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포항을 찾았다.
"해질 무렵이었어요. 포항건설사무소에 도착해서 신상은 총무계장을 만났더니 서류를 찾아 소장실로 들어가더군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 이홍종 소장께서 검토하던 서류를 신상은 계장에게 던져버리는 거야. 발령 날짜가 언제인데, 이제야 왔느냐는 거였지. 유엔기구에서 사표도 내지 않고 일해 온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되돌아갈 요량으로 포항시내터미널로 나왔는데, 실무자들이 거기까지 따라 나와 제철소 녹화 마스터플랜만이라도 짜주고 가라면서 붙잡는 겁니다. 뭔가 사정이 딱한 것 같았어요."
그때 그들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간 것이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다며 원 전 실장은 미소를 띠었다. 명령은 2월 10일인데 부임일자는 19일이었다. 2층 목조 건물로 지어진 롬멜하우스에서 바라본 공장 부지는 온통 모래 먼지로 뒤덮여 앞을 가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미국 측 측량 기술자들이 작성한 초기 레이아웃에는 제철소 부지면적이 260만 평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해안 사구지역(砂丘地域) 모래 알갱이 입도는 0.08mm로서 극세사(極細砂)가 약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포항지역의 바람이 얼마나 세요? 마을이 들어서 있고, 논밭에 표토가 덮여 있을 때는 좀 나았겠지만 그걸 파헤쳐 놓고 준설한 모래밭이기 때문에 이건 완전히 강풍에 휩싸인 사막인 겁니다. 그 속을 뚫고 다니다 보면 입 속에 모래가 씹히고 코를 풀면 모래 덩어리가 딸려 나왔어요."
부임과 동시에 떨어진 일이 제철소 녹화계획서 작성 및 보고였다. 해외 출장 중인 박태준 사장이 3월 1일 귀국하는데, 그때까지 작성해서 3월 3일 서울 YWCA의 본사 사무실에서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월이 28일까지 있다 보니 남은 시간은 열흘 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해 3월 3일이 월요일이었어요. 빠듯한 일정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공장부지 레이아웃이었습니다. 공장 위치가 정확하게 나와 있어야만 조경계획이든 녹화계획이든 세울 수가 있는데, 그때까지 나와있는 레이아웃이래야 아이들이 도화지에 그림 그리듯 대충 그어 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제철소 건설 국제 컨소시엄이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에서 재팬그룹(JG)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는데, 일본인 기술자들이 막연히 그려 놓은 수준이었죠."
일단은 대충대충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제철소 부지가 860만m2(약 260만 평)이니 부지의 30~40%인 80만 평 내지 100만 평을 녹지 면적으로 잡고, 나무를 심을 데와 잔디를 깔 데를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서 계획서를 만들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계획서가 나올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받은 직급이 4급 2호봉이었습니다. 급여로 따지면 부이사관급 공무원이 4급 2호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어요. 공무원 경력만도 10년 가까이 되는데다 유엔 산하기구 소장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당시 인사가 엉망이었던 거지.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3월 3일 보고만 마치고 유엔개발기구로 되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계획서 작성과 보고는 적잖이 심적 부담을 안겨줬습니다. 알찬 내용을 담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브리핑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어요."
흩날리는 먼지와 모래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우선 잔디부터 깔아야 했는데 그 면적을 20~25만 평으로 잡았다. 나머지 땅에는 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수종(樹種)으로 할 것인가. 수종을 정하고 나면 그 나무를 공급해줄 만한 시장은 있는가. 그걸 척박한 모래땅에 심어서 살려낼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조림(造林)이나 조경기술 수준은 묘목을 옮겨 심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어요. 소나무 성목(成木)을 이식(移植)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어요. 묘목에서 조금 더 자란 나무를 옮겨 심어도 절반이 고사(枯死)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계획 보고를 하고 떠나버리면 다음 사람이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냉천 하구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는 약 5만 주의 해송(海松)이었다. 직경 5~7cm, 높이 5~7m로서 영일군에서 조성한 해안사방림(海岸砂防林)이었다. 제철소가 건설되면 어차피 없어져야 할 숲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식할 수만 있다면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매우 좋은 녹지화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걸 옮겨 심어서 살려낼 수 있느냐였다.
"흔히 소나무라고 하면 강인한 생명력이 연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식에 매우 약한 수종이에요. 공장에서 나오는 가스나 분진에 가장 약한 수종이 바로 소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까지 그만큼 크게 자란 소나무를 대량으로 옮겨 심은 적이 없었어요. 일본인들도 소나무를 매우 좋아하면서도 공장에는 소나무를 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나무들이 나를 강력하게 유혹하는 거야. 어떻게든 해보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 좋은 조경 소재를 그대로 잘라버리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단 소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수종도 일정 크기 이상의 것을 옮겨 심을 때는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먼저 나무 밑동의 땅을 반원으로 파서 일정 기간 잔뿌리가 새로 나오게 하고 뿌리를 자른 뒤 덮어뒀다가 다음해 다시 반대편에 같은 작업을 하고 다시 한 해를 기다려 옮겨 심는 것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이식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3년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단번에 파 옮기는 방법으로 500주를 시험적으로 이식해보고, 이에 성공하면 이식이 가능한 3만 주를 추가로 옮겨 심기로 했습니다. 해송이 육송에 비해 생명력이 강하다는 생각도 했죠. 옮겨 심을 장소는 지금의 홍보센터 아래, 그러니까 당시 포항사무소 진입로 양쪽 산으로 계획했어요. 이식 후 한 시즌만 지나면 성공 여부를 거의 알 수 있습니다. 박태준 사장께 이런 내용의 보고를 드리면서 보고서 하단에 조건을 달았어요. 단번에 옮겨 심어서 성공할 가능성에 의문이 들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일단 시행한다. 만약 실패할 경우 내부 또는 감사원에서 담당자에게 변제가 떨어질 텐데, 이를 사장께서 막아주셔야겠다. 이런 조건이었어요."
박태준 사장은 껄껄 웃으면서 실패할 경우 변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우선 500주 시험 이식을 시행하라고 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사무소 옆의 산에 구덩이를 파놓고 해안의 소나무를 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무를 파보니 당초 생각과는 달랐다. 모래땅에 구덩이를 파고 흙을 채운 뒤 소나무 묘목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했지만, 땅 속에 흙은 전혀 없었다. 그냥 모래에다 심은 것이었다. 뿌리에 달린 모래를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게 하기 위해 저녁에 소방차로 물을 뿌렸다. 물기가 없으면 모래가 다 떨어져 버리고, 물기가 너무 많으면 씻겨 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촉촉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TR률(Trunk-Root Ratio)을 적용해야 합니다. 지하부 생장 뿌리와 지상부 생장 가지의 비율, 즉 뿌리와 잎의 양에 대한 비율을 맞추어야 해요. 뿌리를 많이 잘라버렸기 때문에 남은 뿌리로는 그 많은 잎의 수분 증발량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잎이 달린 가지도 비율에 맞게 잘라주어야 합니다. 터가 바뀐 나무는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잎을 노랗게 변색시키면서 낙엽이 지게 만듭니다. 황화현상(黃化現象)이라고 해서 스스로 구조조정을 하는 거지. 나뭇잎에 황화현상이 일어나면 살아나지만, 잎이 검은색으로 변하면 고사하고 말아요. 그렇게 500주를 산에다 옮겨 심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500주 중 4주를 뺀 496주가 낙엽 부위에 새잎을 피우면서 활착(活着)하기 시작했다. 산림 규정에는 30% 이상 죽으면 재식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70~80%만 살아도 일단 성공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려 99%의 활착률을 보였으니 기대치를 훨씬 넘어서는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확신이 생겼어요. 이후 1970년부터 1971년에 걸쳐 형산강과 냉천 사이 2.7km, 폭 50m 구간에 2~3m 간격으로 2만 7000주를 옮겨 심었습니다. 조금 지나니 잎이 노랗게 변하며 황화현상이 나타났어요. 나는 쾌재를 불렀지만, 국도를 달리는 버스 승객들이 노랗게 변한 솔잎을 보고 저거 다 죽는다며 어느 미친놈이 저런 짓을 했느냐고 혀를 끌끌 찼다는 거야. 고준식 부사장께서도 ‘엄청난 작업을 해놨는데 저거 살기는 사는 거야’하시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때부터 유엔개발기구로 돌아갈 계획을 접어야 했습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일이 겹치는 바람에 몸을 뺄 겨를이 없었어요. 잇달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급여와 직급에 관계없이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고···."
다음은 제철소 전 부지의 초지화(草地化)였다. 공장이 들어설 자리, 도로, 콘크리트 피복 지역을 제외한 전 제철소 부지를 푸른 풀밭으로 만들어야 했다. 잔디밭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었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따져서 150억 원 가량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보고를 받은 박태준 사장은 ‘야, 그런 돈 어딨어. 돈 들여서 하면 무슨 기술자야. 돈 없이 해야 기술자지’하면서 막무가내였다. ‘돈은 없다. 그러나 모래바람이 날리지 않도록 녹화는 하라’는 것이니 이런 낭패가 없었다.
"박태준 사장께서는 내가 눈에 띌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야, 이 먼지 좀 안 나게 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어요. ‘예’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차라리 제 이름을 먼지라고 하세요’하는 말을 마음 속으로 되뇌곤 했지. 그런데 대송면 지역 허허벌판의 표토를 긁어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중기부에 이야기해서 긁어낸 표토를 조금도 버리지 말고 다 모아달라 부탁해놓고 이걸 5~7cm 두께로 깔 계획을 세웠어요. 우선 제강지역, 후판지역 등 4개 지역에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그 안에 표토를 깔아 자연 초지 유도 시험을 해봤습니다. 연탄불을 피워 실내 온도를 유지하면서 풀이 돋아나기를 기다렸어요."
잡초의 생명력은 역시 대단했다. 온 비닐하우스 안이 푸른 조원으로 변했다. 1970년 후반 들어 전 제철소 공터를 표토로 뒤덮었다. 표토가 모자라 인근 야산의 흙까지 긁어모아 온 제철소를 풀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경리부에서 녹화 파트와 중기부를 상대로 일주일간의 특별 경리감사를 벌인 것이었다. 제철소 복토작업은 일용직 근로자를 동원해 일을 시키고 전도자금으로 현장에서 임금을 지급했고, 중기부 또한 장비 임차료 등이 있었기에 혹시 작업 과정에서 비리가 있지는 않았나 해서 나온 감사였다.
"그때 나는 나 혼자 그 일을 했고 나중에야 한 사람을 받았는데, 혼자 한 일에 6명의 감사요원이 나와서 이것저것 뒤지는 중에 이상한 것이 발견된 것이습니다. 일용직 인부 중에 주민등록등본 상 82세로 기록된 노인네가 포함돼 있었어요. 내가 시킨 일꾼 중에 그런 노인네는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어요. 사실 확인을 위해 감사요원과 함께 주소지인 오천리로 찾아갔는데, 그분은 거동도 못하는 노인네였어요. 가짜 인부를 넣어놓고 임금 빼돌린 것 아니냐, 그런 일 없다,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들어오더군요. 보니까 내가 일을 시킨 아이였어요. 군 입대를 준비하던 도중, 집에 떼어 놓은 할아버지 주민등록초본을 들고 와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간 웃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그는 제철소 녹화작업에 소요되는 조경소재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오천과 영일대에 묘포장을 조성하고, 주택단지 내에 온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1973년 포항 1기 설비 준공에 맞춰 대잠과 지곡 주택단지 내의 조경공사도 완료하였다.
제철소의 기초적인 조경과 녹화사업이 성공을 거둔 후에는 관상수 등을 요소에 배치하는 계획 조경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제철소 곳곳에 들어선 나무들에 링거 병이 치렁치렁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병원을 뒤져서 쓰고 버린 링거세트를 모아 수목 영양제를 채운 뒤 나무에 주사한 것이었다.
"박태준 사장께서 ‘저거 뭐하는 거냐?’고 물으셨어요. 옮겨 심은 나무에 영양제를 공급하고 있다고 답변 드렸지. 1973년 준공 때까지 그게 달려 있었는데, 그걸 본 박정희 대통령께서 박태준 사장에게 또 물으신 거야. 나한테서 들은 대로 답변을 드렸더니 박 대통령께서 ‘허허, 그 나무들 호강하는군’ 하면서 껄껄 웃으셨다고 들었어요.
1974년에는 사화(社花)와 사목(社木) 제정이 있었다. 사화로 홍장미, 사목으로 히말라야시다를 정한 뒤 임원회의를 거쳐 박태준 사장의 재가를 받았다.
"홍장미는 제철소의 열정적 이미지를, 히말라야시다는 피라미드 형상으로 뻗어나가는 활기찬 기상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조(社鳥)는 쉽지 않았어요. 처음 까치를 생각했는데, 까치는 비둘기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상징의 오류에 빠져있는 대상이지요. ‘좋은 소식’, ‘평화’로 상징되고 있지만 실은 둘 다 익조(益鳥)가 아니라 해조(害鳥)입니다. 사화, 사목, 사조 등은 본질보다는 상징을 취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 상징이 본질로부터 너무 떨어진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조는 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976년 6월에는 권력기관의 호출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납품업자가 가져온 나무가 너무 형편없어 반품을 시켰더니 석 달 뒤에 "나 대구분실 전 소장이오. 12시에 육거리 횟집에서 좀 봅시다." 하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반품 문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지만 뭔가 찜찜한 게 있었다. 유엔개발기구에 있을 때 직원을 채용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신원조회가 무려 석 달이나 이어진 적이 있었다. 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 가서야 그게 아니고 나무 납품업자가 엉뚱한 민원을 제기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조사는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투서가 들어왔기에 당신을 3개월 동안 조사해 봤더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이 일을 박태준 사장께도 말했다고 하면서 허위 투고를 한 친구를 ‘나쁜 놈’이라고 했어요. 나는 그날 공짜 점심을 얻어 먹었습니다."
1976년 환경관리과장을 거쳐 1977년 환경안전실 차장이 되면서 그에게는 ‘환경’ 외에 ‘안전, 소방, 공해’라는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었다. 업무 분장이 그렇게 되어있었지만, 사실 이는 그의 주전공인 ‘환경’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안전에서 계속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냉연공장 정기수리 중에 일산화탄소가 유출되어 작업원 40명 전원이 질식하는 사고부터, 후판공장 지붕 끄트머리에서 도시락을 먹던 일용직 아주머니들의 추락사고, 제선부 슬래그 사고, 제강공장 안전라인 사고 등이 이어졌다. 임원회의에서의 안전 브리핑은 그의 머리를 지끈지끈 아프게 했다.
"그때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어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박태준 사장님의 메모 한 장을 들고 명동성모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았더니 심장내과 전문의가 직장을 옮기라고 했어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거야. 사실 나도 그런 것 같았어요. 사표를 냈더니 일본 출장을 다녀오라는 겁니다. 고준식 사장께서는 일본에 가서 아무 생각 말고 푹 쉬고 오라고 했어요."
일본 출장을 다녀오고 1978년 들어서는 좀 좋아지는가 싶더니 또 그 증세가 나타났다. 공황장애라는 것이었다. 1979년 들어 회사의 배려로 다시 호주 출장을 떠났다. 그러나 1981년 들어 또 재발했다.
"할 수 없이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박태준 회장께서는 인사도 받지 않았어요. 그때 환경안전실장 직무대행 발령이 난 상태였지만 이후 명령이 취소되었겠지요. 이후 한국종합조경 상임고문을 거쳐 지금의 경원엔지니어링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오직 조경 외길을 걸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공원 속의 제철소’를 표방한 박태준 회장님의 혜안이 감탄스럽습니다. 나로서도 그때까지 시도해보지 못했던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큰 경험을 했지요. 포스코의 녹화, 조경이 세계적 모델이 되어 이후 일본에서도 제철소에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때부터 가로수로 소나무를 심곤 했지요. 결국 ‘공원 속의 제철소’는 포스코에서 태동한 산업계의 신개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원운재 전 실장은 1969년 포스코 입사 후 초창기 제철소 부지 100만평의 녹화 및 조경 작업을 이끌었다. 박태준 사장이 표방했던 ‘공원 속의 제철소’는 포스코에서 태동한 산업계의 신개념으로, 훗날 일본 철강사도 이를 벤치마킹했다. |
▶ 1969년 여름 포항제철소 초기 부지의 모습. 사진 뒷편에 보이는 롬멜하우스 인근의 소나무들은 포항사무소 진입로(現 홍보센터) 양쪽 산자락에 옮겨 심어졌다. 포스코가 당시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소나무 성목 이식을 성공시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가로수로 소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했다. |
▶ 포항제철소 중앙도로에 이식된 소나무의 모습. |
▶ 원 전 실장은 1974년 포항제철의 사목과 사화 제정에 참여했다. 사목은 히말라야시다, 사화는 홍장미로 정해졌다. 1974년 6월호 쇳물지에 소개된 사목과 사화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