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창립 3차년도인 1970년 3월 입사한 공채 2기생들은 전년 11월부터 포스코 본사가 입주해 있던 YWCA 회관(서울 중구 명동) 강의실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1969년 9월 입사시험을 치른 뒤 10월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11월 1일부터 소집되어 매일 1시간씩의 일본어 교육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봉관 합격자(現 서희그룹 회장)도 동기생들과 함께 일본어를 배웠다. 그런데 포항제철에서는 수강생들에게 매월 1만 2000원의 현찰을 손에 쥐어주었다. 입사도 하기 전에 합격자 신분으로 교육을 받았는데, 1만 2000원은 당시로서는 제법 큰돈이었습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문서규정에 맞느냐?’로 첫 회사생활··· 유성티엔에스 창업
– 어느 자리에서든 최선 다하고 충실하면 기회는 올것
포항제철 창립 3차년도인 1970년 3월 입사한 공채 2기생들은 1969년 11월부터 포스코 본사가 입주해 있던 YWCA 회관(서울 중구 명동) 강의실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1969년 9월 입사시험을 치른 뒤 10월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11월 1일부터 소집되어 매일 1시간씩의 일본어 교육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봉관 합격자(現 서희그룹 회장)도 동기생들과 함께 일본어를 배웠다. 그런데 포항제철에서는 수강생들에게 매월 1만 2000원의 현찰을 손에 쥐어주었다.
“입사도 하기 전에 합격자 신분으로 교육을 받았는데, 1만 2000원은 당시로서는 제법 큰돈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술자리 몇 번 할 수 있는 액수였어요. 그 돈의 성격은 교육지원금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갓 대학을 졸업하고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입사 대기자들에게 입사 전까지 쓰라고 쥐어준 용돈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공짜 교육에 용돈까지 받았으니 횡재한 기분이었어요.”
당시 포항제철 신입사원 봉급이 3만 1000원 수준이었는데, 입사 전 예비교육을 받고 있는 합격자들에게 1만 2000원의 돈을 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1만 2000원을 받아들고 매우 흐뭇했는데, 다음 달에는 2000원을 떼고 1만원만 주는 거예요. 교육에 4~5일 빠졌으므로 결강 페널티가 2000원이라는 거야. 그게 얼마나 아까웠는지 다음 달부터는 절대 교육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주 주말에는 시험이 있었어요. 나는 흔히들 말하는 일류대 출신이 아니므로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시험을 치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서울대 출신들이 시험 절대반대를 외치고 나섰어요. 거의 데모 수준이었지.”
나이 지긋한 일본어 강사는 하는 수 없이 교과서를 펼쳐 놓고 답을 써도 좋다고 했다. 결과는 당연히 전원 만점 수준, 전원 성적 평준화였다. 만약 그때 일본어 강사가 엄격하게 가르치고 시험 관리를 했다면 수강생들의 일본어 실력이 더 많이 향상되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때 4개월 동안 배운 일본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운송부로 갔을 때 일본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이 나뿐이었어요. 나는 언어 습득에 소질이 있는 편이어서 일본어를 꽤 잘했습니다. 언어는 기초를 배우고 나서 실무에서 제대로 익히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좀 서투르더라도 움츠러들지 말고 적당히 빠른 속도로 하면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차차 익숙해집니다. 그때 나보고 일본에서 몇 년 동안 있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1970년 처음으로 발령받은 부서는 포항 총무부 총무과였다. 당시 총무부에는 인사과와 총무과가 있었는데, 총무과에는 이름 그대로 ‘타부타과(他部他課)’에 속하지 않는 온갖 잡동사니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포스코에 입사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간에 쫓겨나지 않고 정년까지 잘 붙어 있을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성격이 진취적인 편이 아니어서 직장을 그만두면 가정을 제대로 꾸리고 아이들을 양육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요즘 젊은이들 말로 소위 ‘범생이’ 기질이 강했어요.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였고 나쁘게 말하면 꽁생원이었지.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안 했고, 교회에 다녔는데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도 일절 하지 않았어요.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나면 온종일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어린시절,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올 때 친구들은 더러 남의 수박밭이나 참외밭에 들어가 서리를 하곤 했다. 그는 늘 하지 말라고 말렸고, 서리를 해온 것들을 같이 먹지도 않았다. 스스로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대신 남이 그러는 것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연히 주위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총무과에서 맨날 하던 일은 현장부서에서 가지고 온 공문이 문서규정에 맞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되어 있으면 직인을 찍어주고, 아니면 퇴짜를 놓는 거였지. 문서규정이라는 게 세세히 살펴보면 아주 복잡해요. 문서는 조직의 혈관입니다. 당시 포스코의 문화는 군사문화의 복사판이었는데, 5·16 이후 관공서, 기업체 등으로 유입된 군사문화는 애초에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선진화되어 있었어요. 흔히 군사문화라고 하면 구타, 상명하복 등의 부정적인 느낌을 떠올리는데, 그건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왜곡된 부분일 뿐입니다.”
서식(書式)은 문서규정의 핵심으로서 계조식(階調式)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문서 항목의 번호 매김은 ‘1, 2, 3’에서 ‘가, 나, 다’로 그 다음은 ‘1), 2), 3)’에서 다시 ‘가), 나), 다)’의 체계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온 공문의 서식은 제멋대로였다. 특히 초창기 포항제철에는 전국 각지의 여러 기업체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전 직장의 관행을 고집하고 있었다. 부서 내부 문건이야 어쩔 수 없지만, 외부 발송 공문은 회사의 서식에 맞게 작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현장 과장이 박태준 사장의 결재까지 받은 공문을 들고 왔는데, 규정에 전혀 맞지 않았어요. 다시 해오라고 했더니 그 문서규정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면서 쏘아보는 거야.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직위 차이도 있고 해서 그냥 통과시켰는데, 당시 신상은 총무과장께서 왜 안 고쳐줬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냥 넘어가 주면 계속 못 고친다는 거였어요. 신 과장은 직접 나서지 않고 담당자인 저만 닦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 과장이 또 틀리게 해온 겁니다. 내용이 중요하지, 뭐 그런 자잘한 것을 가지고 귀찮게 구느냐며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사장 결재까지 난 기안지를 볼펜으로 좍 그어 버렸어요.”
때려죽인다고 난리가 났다. 신입사원 꼬리도 채 못 뗀 녀석이 과장이 가져온 공문을 그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것도 사장 결재까지 난 공문을···간신히 진정을 시킨 신상은 총무과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제하지 않으면 안 한다고 나무라고, 빡빡하게 굴면 그런다고 나무라니.
“나는 규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게 남이 보기에는 융통성이 없었던 거지. 수박 서리에 나서는 친구들을 말리는 성격 그대로였습니다. 규정대로 하면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시비꾼이 되어가고 있었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관리자의 처지도 나중에 내가 관리자가 되고 보니 이해하게 됐습니다.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 참 맞는 말입니다.”
어느 날은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반말이었다.
-과장 계시나?
-누구신데요?
-여기 3600번이야.
-3600번이 어딘데요?
-바꿔.
-글쎄, 어디시냐구요?
전화는 바로 끊겼고 이어서 과장 책상의 전화가 울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전화 받은 놈이 누구냐? 뭐 그런 놈이 있느냐?’ 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3600번이란 중앙정보부 분실을 이르는 것이었다.
“전화를 그렇게 받으면 어떡하느냐고 나무라는 과장에게 대놓고 중앙정보부면 정보부지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반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덤볐으니, 신 과장께서는 아마 숨이 막힐 지경이었을 겁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면서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대기업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시중은행도 싫었고, 특수은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구름에 비 들어 있을지 모를 일이므로 우선 붙어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시험을 치렀다. 포스코 채용 시험 1차에 붙은 후, 면접자가 몇 사람 되지 않았으므로 박태준 사장이 직접 면접을 보았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더니 ‘경희대 나왔어? 공부 잘했네. 포철에 와서 열심히 할 거야?’ 하시는데, 일류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교를 인정해주신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어요. 그때 박태준 사장이 40대 초반이었는데, 눈이 반짝반짝하고 외모가 무척 잘생겨 보였어요. 그때부터 나는 포철에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후 포스코는 출신학교, 출신지역 등에 따른 차별을 배격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오늘날의 포스코로 성장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사 2년차에 서울에서 근무하던 동기가 계약 관련 조사차 포항에 내려왔다. 후에 전무이사에까지 오른 신충식이었다. 처음부터 서울로 발령을 받아 계약 업무를 맡고 있는 친구였다. 문서규정이나 따지고 있던 그로서는 국내 굴지의 회사들과 계약 관계로 교류를 트고 있는 그 친구가 하늘 같이 대단해 보였다. 자신은 어떻게든 포스코에 오래 붙어 있기를 소망하고 있는데, 좋은 부서,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내가 회사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내 사업해야지···’ 하며 여유를 보이는 그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건가 봅니다. 그러던 그는 회사에 정년까지 남아서 전무이사에 올랐고, 직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나는 일찍 나와 사업에 투신했으니···”
총무부 총무과 직원으로서 원리원칙을 앞세우는 그의 일처리 방식은 여러 사람들과 다투는 것으로 비화되었고, 상사와 동료들도 그를 차츰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미운털이 박히면서 현장의 토건부로 발령이 났다.
“당시 현장에서는 서무 직원들이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종태 소장께서 현장의 행정 능력이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본부의 행정요원들이 현장으로 보직을 이동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가장 일이 많았던 토건부로 발령이 난 것이었습니다. 나는 서울로 가고 싶었는데, 서울은 고사하고 본부에라도 복귀해야겠다는 생각에 최의주 당시 인사과장을 찾아갔습니다. 훗날 인력관리부장을 거쳐 총무이사에 오른 분이지요.”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그는 혼자 앉아서 1시간 동안 인사과장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과연 인사과장답게 그의 개인 정보를 훤히 꿰고 있었다. 총무과 근무 중에 이런저런 시비가 많았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강의는 한 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요지는 ‘너는 농땡이 피우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회사 내 어느 부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있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인사과장이 굉장히 똑똑하고 훌륭해 보였던 반면, 자신은 너무 바보 같고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이 힘든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좌절감에 그는 ‘하나님, 제게도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2년 들어 운송부 해운과에 자리가 났다.
“당시 운송부의 물동량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기계설비에서부터 건설 기자재에 이르기까지 엄청났습니다. 사무실에 관련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모두들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빠져 있었고, 나 역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비로소 내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주말에도 쉰 적이 없었어요. 여기서 쫓겨나면 이제 갈 데도 없다는 위기의식도 한몫했을 겁니다. 그래서 휴일에도 교회 예배를 마치고 회사에 나갔어요.”
그해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그의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12월 26일이었다. 그날로 날을 잡은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결혼식 전날인 크리스마스부터 신년 연휴 3일까지 합쳐 10일간의 휴가 스케줄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케줄에 맞춰 제주도 관광호텔도 예약을 해두었다.
“그런데 과장님이 결혼식 당일 하루만 쉬고 27일에는 출근을 하라는 겁니다. 그게 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했더니 크게 인심이나 쓰듯이 ‘그럼 28일에 나와’ 이러는 거야. 결국 제주도 예약을 다 취소하고는 부산에서 하룻밤 보내고 그날로 올라왔어요. 최영두 과장이었는데, 결재 서류를 올리면 단번에 결재를 해주는 일이 없었어요. 보통 두어 번은 퇴짜를 놓았지. 그런데 재미있는 게, 면전에서는 사정없이 혼을 내면서도 다른 데서는 ‘그 친구 잘 키우면 괜찮은 물건이 되겠다’고 칭찬을 하는 거였어요.”
그가 담당했던 국제 해운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업무수행을 요구했다. 바닷길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운송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변수를 다 따져서 해상보험료를 적용해야 했다. 따라서 계약 하나 잘못하면 몇 천만원, 몇 억원의 손실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관련 용어만 해도 엄청나서 다 외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역 거래조건으로 FOB(Free On Board)와 CIF(Cost, Insuarance and Freight)가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FOB BERTH TERM, FOB ST, FOB FAS 등 변형이 많습니다. CIF도 환리스크를 매도자 부담으로 하는 CIF&E, 특수한 수수료를 포함하는 CIF&C, 환어음에 대한 이자를 포함하는 CIF&I, 수수료와 이자를 포함하는 CIF&CI, 보험조건을 제외한 C&F 등 다양한 변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도조건, 운임, 보험료, 환율, 수수료, 관세, 이자 등 온갖 변수를 다 따져서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야 해요.”
3기 설비 공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78년 7월, 그가 해운과장으로 일하던 때였다. 프랑스 세심(SECIM) 사에서 제작한 300톤 제강 전로가 운송 도중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부두에서 하역한 후 현장으로 이송하다가 발생한 대형사고였다. 다시 제작해 포항에 도착시키려면 최소 5개월이 소요된다는 것이 세심 측의 주장이었다. 그는 해운과장 자격으로 박태준 사장 보고 자리에 참석했다. 이 사고는 3기 설비 공기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건설본부에서 보고를 맡았는데, 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것저것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3~4개월로 맞춰 보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감독이 제대로 안 붙고 어떻고 하면서 사고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그 사고로 인해 3기 설비 공기가 1년 늦어지는 걸로 보고를 마쳤습니다. 사실 프랑스 측과 잘 조정하면 약 3개월 안에 전로를 도착시킬 수 있는 일이었어요. 미리 모든 준비작업을 완료해 놓고, 전로 도착과 함께 작업에 집중하면 공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그는 곧 박태준 사장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고, 사고 책임자인 그도 파면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은 “지극히 원시적인 사고구먼. 제철소장이 잘 수습해봐!”라고 말하며 문책하지 않고 자리를 나섰다. 현장에서는 작은 사고만 나도 벌을 받고 하는데, 왜 봐주느냐며 모두들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박태준 사장께서 왜 큰 벌을 내리지 않으셨는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박태준 사장 부친의 성함이 ‘박봉관’으로 나와 동명(同名)이었는데 혹시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오한구 부장이 당신이 아끼던 육사 후배였기 때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포스코에 근무하는 동안 박태준 사장을 비롯하여, 직접 모셨던 오한구 부장, 안병화 부사장 등 선배들로부터 예쁨을 많이 받았던 것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특히 오한구 부장 내외는 마치 친형님, 친형수처럼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당시 ‘안심통’이라 불릴만큼 부하 직원들을 자주 혼내곤 했던 안병화 부사장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고 회상했다. 판매부서 임원들이 결재를 받으러 들어가면 줄줄이 혼나기 일쑤였는데, 그가 보고를 들어가면 농담을 건네기도 하면서 쉽게 결재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황경노 전 회장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며 선배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현장 상황을 수습하고 서둘러 프랑스로 가야 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아침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일주일 동안 밤잠을 못 자고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급기야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오후 4시에야 깨어나 그 다음날 바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프랑스에서 세심과 성공적으로 협의를 마친 뒤 설비 메이커가 있는 독일, 영국을 거쳐 돌아오면서 인도에도 잠깐 들렀다가 15일 만에 귀국했습니다. 출장 중에는 멀쩡했는데, 포항에서 용광로가 눈에 들어오니 또 소화불량이 일어나는 거야. 스트레스가 그만큼 심했던 거지.”
1983년 들어 유성화물(現 유성티엔에스)를 설립하면서 회사를 떠난 그는 이후 파이프공장을 세워 철강산업에 진출했고, 서희건설을 설립해 건설사업에도 뛰어들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사업을 영위해 오면서 포스코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며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포스코에서는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옳은 것도 틀린 것일 수 있고, 내가 아무리 옳아도 상대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상대방이 있고, 상대방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원칙주의자입니다. 원칙에 충실할 때 융통성도 나오는 법이에요. 이도저도 아닌 어름어름한 것을 융통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에요. 원칙이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융통성이 원심력으로 작용해 조화를 이룬다면 이상적입니다. 요약하면 융통성이란 기본적으로 원칙의 확장 영역 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이봉관 서희그룹 회장은 대학 졸업 후 공채 2기로 입사해 13년간 포스코에 몸담았다. 그는 포스코에서 쌓았던 경험과 지식이 훗날 사업을 영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
▶ 이봉관 회장(왼쪽에서 첫 번째)은 1983년 포스코를 나와 유성화물(現 유성티엔에스)을 설립했다. 화물차 20대로 운수업을 시작한 그는 1994년 건설사업에도 진출하며 매출 1조원 대의 서희건설을 일구었다. |
▶ 1987년 광양제철소에서 생산된 핫코일이 유성화물(現 유성티엔에스)의 25톤 트레일러로 첫 출하되던 날, 현장에서 만난 박태준 회장과 이봉관 유성티엔에스 사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