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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70] 서정복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 광양 토박이로 주민·제철소 가교 역할··· 포스코 성장지원 ‘큰 보람’

[남기고싶은이야기 70] 서정복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 광양 토박이로 주민·제철소 가교 역할··· 포스코 성장지원 ‘큰 보람’

2016/07/27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채 준공되기도 전인 1973년 3월부터 실수요자와 입지 선정을 두고 무려 8년 8개월의 우여곡절을 겪어온 제2제철 건설 입지가 1981년 11월 4일 국무회의에서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달 12일에는 광양읍 광양농고 교정에서 많은 전남도민과 기관장이 참가한 가운데 제철소 건설 환영행사 및 경축잔치가 벌어졌다. 그 행사의 사회를 맡은 이가 서정복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이었다(現 전남축구협회장). 그날 이후 그는 남해안의 한적한 시골 갯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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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광양제철소 건설 초 반발심 드셌던 지역주민 수없이 설득하고 갈등 조율

– 전남드래곤즈 창단 건의··· 10년 가까이 구단 이끌며 지역 발전에 기여

– 노사분쟁 심했던 외주파트너사 대표 맡아 원만한 노사관계 정립하기도

서정복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 주요경력  1948 전남 광양 출생  1993 전남대 행정대학원 졸업  1981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1989 광양시 새마을지회장  1990 금풍공업 대표이사  1991 광양시의회의장(3회 역임)  1994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 4대 단장, 부사장  1995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  2001 전남축구협회 회장(現)  2005 전남체육회 부회장, 사무처장  2008 대한체육회 이사  2009 대한축구협회 감사, 이사(現)  2012 전라남도 체육특별보좌관  2012 포스코 외주파트너사 성광기업 대표 (~2015)  상훈  1990 내무부장관상  1991 대통령상  1992 체육청소년부장관상, 국민훈장 석류장  1993 법무부장관상(2회)  1996 광양시민의 상(제1호)  2007 전남도지사상(5회)  2008 국무총리상  2012 자랑스런 전남도민의 상  2013 대한민국체육상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채 준공되기도 전인 1973년 3월부터 실수요자와 입지 선정을 두고 무려 8년 8개월의 우여곡절을 겪어온 제2제철 건설 입지가 1981년 11월 4일 국무회의에서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달 12일에는 광양농고 교정에서 많은 전남도민과 기관장이 참가한 가운데 제철소 건설 환영행사 및 경축잔치가 벌어졌다. 그 행사의 사회를 맡은 이가 서정복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이었다(現 전남축구협회장). 그날 이후 그는 남해안의 한적한 시골 갯마을이 거대한 산업단지로 바뀌어가는 격동의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산업화 과정의 산 증인으로 살아왔다.

제철소 입지 광양선정 환영대회에 골약면민으로 참석해 사회를 보다

“당시 광양군 골약면 금호리, 태인리, 소당리, 금당리 일부가 제철소 부지가 되었는데, 나도 골약면 성황리 사람이었습니다. 제2제철 건설 입지가 광양만으로 확정되자 광주의 전남도청 앞에는 대형 경축 아치가 세워졌고, 광양농고에서 대대적인 주민 환영행사가 열렸지만, 정작 골약면 사람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잃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어장을 잃는다는 불만과 불안이 그들의 발길을 막았던 겁니다. 나는 그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사로서 행사 사회를 맡았습니다만, 그 전에도 지역의 대소 행사 사회를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골약면 출신으로 그 행사에 갔고, 그것도 사회를 봤으니 면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당시 금호도와 태인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해태(김) 주산지였다.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기 직전인 1980년 금호도에는 272가구에 1567명이 살고 있었고, 호당 평균 소득은 330만 원으로 전남 평균 308만 원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태인도도 별 차이가 없었다. 530가구에 2966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평균 소득은 350만 원으로 금호도보다 높았다. 두 섬마을 주민들은 소득의 90%를 김 양식으로 얻고 있었다.

1981년 12월 1일 제철소 건설 준비를 위해 48명으로 구성된 포스코 선발대가 당시의 광양군 진월면 면사무소에서 건설사무소 개소식을 가지고 28일부터 부지 조성을 위한 사전조사 작업으로서 본격적인 시추작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역주민의 이주와 어업권 보상 문제가 대두되면서 많은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금호도와 태인도는 전형적인 연안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어촌이었다.

포스코는 1981년 10월 어업권 보상 업무를 전담할 용지과(用地課)를 신설하는 한편 11월에는 산업기지개발공사와 부산수산대학에 용역을 줘 사례조사를 한 후 보상계획을 수립했다. 포스코가 건설사무소를 망덕에서 금호도의 삼애중학교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보상 업무가 시작되었다. 보상 업무는 용지 수매, 분묘 이장, 어업권, 주민 이주 등이었다. 이들 업무는 주로 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 되어온 고향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는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별 진전이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포스코는 제철소의 조속한 건설을 위해서 1982년 1월 전라남도, 경상남도와 보상업무 위탁협약을 체결하고 행정기관이 보상업무를 대행토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라남도와 광양군에는 도 단위, 군 단위의 협의회를 발족시켰고, 광양군은 별도로 보상업무지원상황실을 설치해 보상 업무의 창구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금호도 각 마을 이장들과 주민 150명이 참석해 ‘광양군 골약면 금호리 보상대책위원회’와 ‘이주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보상대책위원회는 김영희 씨를, 이주대책위원회는 강종훈 씨를 각각 위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 1월 7일 열린 2차 회의에서는 11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의하고 각계에 보낼 건의서를 작성했습니다.”

이주민대책위원회 위원들은 1월 9일 11개 항의 결의안을 가지고 군수와 지역 출신 국회의원을 만났으며, 11일에는 주민들 개개인이 날인한 건의서와 결의사항을 도지사, 지역 국회의원, 군수, 시장, 제철소장, 민정당 사무총장 등 7개 부처에 발송했다. 제철소 측과의 첫 대면은 13일 금호초등학교 강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자리에서 주민들은 제철소 측의 사업계획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4일에는 임직원이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일체의 개인적인 보상은 거부하고 모두가 단합하여 집단적으로 행동할 것임’을 천명했다. 20일 옥곡에서 이루어진 건설부 장관과의 면담에서는 추후 건설될 제철소 배후도시 상가에 주민들이 집단 이주해 정착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건의했다.

주민들 ‘先보상 後착공 및 失漁費 지급과 생계대책 수립’ 요구

“행정기관이 보상업무를 대행하고 있었지만, 포스코는 포스코대로 다각적인 주민 설득 활동을 벌였습니다. 포스코와의 접촉에서 주민들은 ‘선 보상, 후 착공’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포스코는 2월 1일부터 시작되는 선공사를 허용해 주면 단시일 내에 보상을 완료하고 11개 결의사항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1월 29일 주민 전체회의에서 ‘2월 1일부터 시작되는 선공사는 허용하되 4월에 실시되는 수용지역 전역에 대한 공사는 선 보상, 후 착공을 관철한다’고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생업 기반을 잃은 주민들의 반발은 매우 강했습니다. 토지의 조기 사용에 대한 우선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물론이고, 무면허 어업권에 대해서도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실어비(失漁費) 지급, 생계대책 수립 등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관계 요로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강경한 집단 항의와 농성을 계속했어요. 포스코는 토지의 선 사용, 후 보상이 합의된 것으로 보고 공사를 진행했으나 주민들의 단체 행동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금호도와 태인도의 주민들이 보상 문제에 강경성을 띠면서 2월 9일부터 본격적인 보상 협상이 시작되었다. 도로 개설을 위한 선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공사 편입지역의 지상물인 보리와 마늘에 대한 보상액 문제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4월 1일부터 시작될 공사에 대한 주민들의 선 보상 요구는 매우 강경했다. 이에 따라 일단 논은 평당 6000원, 밭은 4000원, 임야는 1500원씩의 보상이 이루어졌다. 6월 21일에는 광양군에서 ‘토지보상심의위원회’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광양군수는 보상금액 결정 경위를 설명하고 지목별(地目別) 최고 토지가 및 개인별 보상 수령액을 발표했다. 주민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다음날인 22일부터 7월 2일까지 매일 집단 항의와 농성이 이어졌고, 각종 공사가 중단되었다.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짐에 따라 6월 26일 전남도지사실에서 주민 대표들과 포스코 측의 합동대책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영세민 주택 건립 자금 무이자 지원, 이농비 지급액 조성, 1가구 1인 취업 알선, 현지 피해 주민 장학금 지급 등 4개 항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9월 10일 보상금 지급이 완료됨에 따라 포스코는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어업권 등 법적 보상 외에 우리나라 최초로

제철소 건립지 주민에게 법외(法外)보상까지 완료

다음은 어업권 보상이었다. 부산수산대학이 조사기관으로 선정되어 1982년 4월부터 7월까지 어업권 및 어선, 어구 등의 물건 조사를 거쳐 7월 20일부터 감정평가를 실시했다. 평가는 어업량, 생산액, 어업경비를 조사해서 연간 수익액을 계산한 다음 보상액을 결정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9월 19일 수산조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상액이 발표되자 태인도 주민들이 건설기지를 점거하고 무면허 어업권이라 할지라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관습 상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보상과 생계대책 마련을 강력히 요구했다. 주민 500여 명은 제철소 부지조성을 위한 공유수면 매립 공사로 인해 자연산 패류를 채취할 수 없게 되자 1984년 3월 10일 무면허 관행 어업에 대한 29억 58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5년 넘게 이어져 1989년 9월 11일 대법원이 포스코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2심 판결대로 확정되었다. 포스코는 태인도 주민들에게 손해배상 15억 5000만 원에, 그간의 이자 6억 1000만 원을 더해 총 21억 6000만 원을 지불했다.

골약면 주민 140명도 1986년 7월 31일 같은 취지로 16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포스코는 1990년 4월 27일 2심에서 6억 9000만 원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포스코는 6월 21일 이자를 포함해 9억 4000만 원의 손해배상금 전액을 지불함으로써 자연산 패류 소멸 보상을 완료했다.

“사실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습니다. 포스코도 이를 회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나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막상 받아보니 얼마 되지 않는 거예요. 지주들은 보상액이 꽤 되었지만, 바다에 의지해 노동력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형편 없었어요. 그들은 자기 소유로 된 땅이나 바다 한 평 없이도 일정한 소득을 올리며 살아왔고, 그러한 삶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김을 생산해서 판매했다는 자료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게 보상의 근거가 될 수 있었겠지만, 당시 그런 걸 챙겨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협을 통해 계통 출하를 했다면 그것도 자료가 될 것이었지만,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멀리 진주나 순천 시장으로 나가 팔거나 어촌을 찾아 다니는 봇짐장수에게 판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슨 자료가 있었겠어요. 그러다 보니 갈등이 고조되었고, 주민들이 과격성을 띠면서 제철소 사무실에다 인분을 퍼붓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모색하게 된 것이 법외(法外) 보상이었습니다. 인우보상이라고 해서 아기들까지 모두 계산해 인당 보상액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옥곡면 광영리 일대 주민 이주단지 조성 ···

저수지 뒤편에 배후도시 및 직원주택단지 조성 못 한 것 아쉬워

다음은 주민 이주단지 조성이었다. 주민들은 집단이주를 희망했고, 제철소의 배후도시가 조성되면 그 도시의 상가지역에 정착지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배후도시의 위치는 현재의 금호교 주위, 마동리 저수지 주위, 와우 저수지 근처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광양군은 광양읍 주위, 마동리 주위, 옥곡리 주위 등으로 분산, 이주시킬 것을 검토했다. 1982년 5월 7일 전남도와 광양군, 포스코가 협의하여 옥곡면 광영리 일대를 이주지로 확정했고 7월 16일 광영리 일대 129만m²의 부지는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추가 지정됐다. 지역이 너무 협소하고 제철소와의 거리도 4km나 떨어져 있다며 금호도 주민들 사이에서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당초 계획대로 집단 이주지 조성 계획이 진행되어 12월 7일 광영이주단지 공사가 착공되었다.

“이주단지 선정 작업은 포스코가 광양군에 위임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광양군에서 추진했습니다. 당시 광양군은 인구 5만 6000명으로 전라남도 25개 시군 중 끝에서 세 번째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군청 공무원들도 도시란 걸 몰랐어요. 시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주민들과 어울려 막걸리나 마시는 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종호 전남지사가 건설부 장관이 되어 군 단위에서는 처음으로 광양군청에 도시과를 만들었는데, 직원들은 일반 행정과 농사 행정을 하던 분들이었어요. 도시 전문가가 와서 일을 추진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포스코는 제철공단의 특성 상 제철소로부터 8km 이내에 배후 지원도시가 들어서기를 바랐고, 광양군에도 그런 뜻을 전했다. 하지만 광양군에서는 12km나 떨어진 용광리, 덕례리 등의 주변에다 만들려고 했다. 그 지역의 땅값이 엄청나게 뛰어 사업이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라남도는 골약면 태인, 금호 지구와 옥곡면 일부 지역을 떼어서 광양지구출장소를 만들고 산하에 골약지소, 태금지소를 두었다. 이현호 초대 소장과 김상철 도시건설국장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도시 만들기 작업이 추진되었다.

박태준 회장은 출장소에 광양 이주단지 조성 시, 포항제철소 건설과 같은 과정을 밟아 달라고 요구했다. 공장과 주거, 교육, 복지, 문화시설 등을 함께 건설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행정관청과 포스코의 호흡이 맞지 않았고 사업 추진도 지지부진했다. 포스코는 제철소 준공 시점에 맞추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직원주택단지를 제철소 단지 내에 건설하게 되었다. 밖에다 하려면 출장소, 도, 중앙부처를 거치는 제반 심의절차와 영향평가, 공고기간 등이 요구되는 도시개발촉진법의 적용을 받아야 했지만, 제철소 단지 내에 건설하면 중앙정부에서 직접 추진하는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의 적용을 받게 되므로 훨씬 빨리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 회장의 구상대로 일이 추진되었다면 지금 제철소 단지 내에 들어서 있는 포스코 직원주택단지와 각종 교육·문화 시설이 배후도시에 갖추어져 시민과 포스코 직원들이 하나로 잘 어우러졌을 겁니다. 제철소 직원들도 지원시설이 제철소와 너무 인접하게 위치해 있는 것을 그렇게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와우 저수지 뒤편 일대에 배후도시와 직원주택단지가 함께 들어섰다면 매우 이상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포스코가 제철소 단지 내에 직원주택단지를 건설하자 주민들 사이에는 ‘자기들끼리만 잘 살려고 제철소 안에 주택단지 만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추진과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광양 지역 청년들과 다툼 잦았던 제철소 직원들 

화해시키기 위해 파출소를 내 집같이 드나들어

초창기에는 지역 주민과 제철소 직원 사이의 정서적 이질감이 상당했다고 서정복 회장은 털어놓았다. 지역에 세계적인 제철소가 들어서지만 정작 돈이 될 만한 사업은 이재에 밝은 외지인들이 다 차지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역민 취업 우선’이라는 협상 조항이 있었지만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어민들은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그 혜택을 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는 지역 토박이로서 그리고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간사로서 시위나 농성 현장을 찾아다니며 내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하나의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어요. ‘비약적인 지역 발전을 가져올 제철소 건설사업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 또한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지역 청년들은 노란 옷만 보면 울화가 치밀어 시비를 걸었고 결국 싸움으로 비화되어 함께 파출소로 연행되는 일이 거의 매일 밤 이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제철소 측에서는 물론이고 파출소에서도 협조를 요청해왔는데, 그때마다 밤 1시, 2시에 달려가서 그들을 화해시켰던 일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보상을 두고 포스코와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정병섭 군수와 후임 안홍식 군수, 문재진 경찰서장과 관계 공무원 등이 무척 고생이 많았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뿐만 아니라, 그 무렵의 모든 행정관청 종사자들을 비롯한 지역인사들은 제철소 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여기고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제철소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잘 모릅니다. 5월 7일이 1기 용광로에 불을 지핀 제철소의 생일인데, 그런 날을 기념해서 당시의 인사들을 초대하면 큰 보람을 느낄 겁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기에 지금의 포스코 직원들은 고유의 애사심, 사명감 등이 초창기에 비해 많이 퇴색된 느낌입니다. 1981년 제철소 입지가 확정되고 35년이 지났는데, 초창기에 가정도 돌보지 않고 건설에 매진한 건설요원들의 불타는 사명감을 현장 가까이서 봐온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광양커뮤니티센터 건립과 전남지역 연고 프로축구단 창단을 건의하다

1991년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자치가 시행될 때 그는 골약면 대표로 기초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의회의장 2번을 거쳐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광양시로 통합된 후 또 한 번 의장을 맡았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의회의장 세 번의 재임기간 중, 포스코에는 김만제 회장이 취임했다. 김만제 회장은 광양제철소 순시를 마치고 광양시를 찾았는데 시의회에 들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의회의장으로서 김만제 회장에게 두 가지를 건의했다. 컨벤션센터의 건립과 전남지역을 연고로 한 프로축구단 창단이었다.

“김만제 회장의 대답은 한마디로 ‘검토합시다’였습니다. 일주일 후에는 실무자를 통해 바로 시작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건립한 것이 지금의 광양커뮤니티센터입니다. 당초에는 센터 건립에 290억 원, 그 위 도로가 있고 도로 위 반반한 데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케이블카를 놓는데 200억 원, 도합 490억 원의 예산 규모로 설계되었습니다. 설계는 포스코A&C 김문순 본부장이 주관하였습니다. 구단 창단은 전남 27개 시군에서 2억 원씩 출자하고 모자라는 것은 포스코가 부담해 300억 원의 자본금을 조성하기로 했어요. 당시 구단 운영은 1년에 30억 원이면 되니까 300억 원만 적립하면 돌아간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계획안을 들고 전남도지사를 찾아갔을 때 생각지 않은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실무자의 검토 결과 법적으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풀렸지만 당시만 해도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구단에 지자체가 투자할 수 없도록 법으로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27개 시군의 출자가 불가한 것이었다.

“다른 투자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내화, 대신증권, 광양기업을 비롯해 주변의 연관 협력사를 끌어모으고 개인 투자자까지 동원해서 적게는 몇 백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까지 출자를 받아 자금을 조성했습니다. 한경식 포스코 건설본부장을 초대 사장으로 해 창단작업에 들어갔는데, 단장은 지역민이 맡아야 한다며 나에게 맡아줄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볼 문제가 있었어요. 구단 단장은 상무급인데, 시의회의장이 회사의 사장 밑에서 단장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였어요. 시민과 동료들도 된다, 안 된다 말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는 지역 스포츠 발전과 축구단을 통한 지역과 포스코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시의회 의장으로서의 권위와 격식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단장을 맡아 1994년 12월 15일 백운아트홀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정병탁 감독, 박경훈 수석코치, 여범규 차석코치. 김봉길 주장, 김상호, 노상래, 김태영, 김인환 등이 창단 멤버였다. 포스코와 관련된 업무는 한경식 사장이 맡았고, 그는 관중 동원과 대언론 활동에 전념했다. 한마디로 전남드래곤즈를 언론을 통해 띄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제철소 단지 내의 전용구장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날에는 처녀, 총각 사원들이 모두 경기장으로 나왔고 배후의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룰 정도였습니다.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던지라 시민들은 환호했고, 시민과 포스코 직원이 하나 되는 축구 경기장은 그야말로 지역 페스티벌의 장이 되었지요. 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직위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지 내가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구단에서 부사장은 큰 역할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 다시 부사장급 단장을 맡아 실무에 복귀했습니다.”

그 후 그는 전남체육회 부회장(사무처장)을 맡아 전남이 31년만에 처음으로 전국체전을 치뤄내기 위한 실무 역할을 수행했다. 2008년에는 극심한 노사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광양제철소의 외주파트너사 삼화산업을 성광기업으로 바꾸고 사장으로 취임해 3년 6개월간 원만한 노사관계를 정립한 뒤, 지금은 전남축구협회의 회장으로서 또 다른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방관자의 자세로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어요. 3년 6개월간 성광기업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월급의 대부분을 노사 안정, 직원과의 대화를 위해 썼어요. 15년간 포스코의 예비군, 민방위 교육, 주부대학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손익계산서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생각을 묵묵히 실천할 뿐입니다.”

우재욱<시인·작가>

전라남도 광양군 주민들이 1981년 11월 12일 광양농고 교정에서 개최한 제2제철 입지 광양만 선정 전남도민 경축잔치.

▶ 전라남도 광양군 주민들이 1981년 11월 12일 광양농고 교정에서 개최한 제2제철 입지 광양만 선정 전남도민 경축잔치. 서정복 전남드래곤즈 초대 단장은 이날 제철소가 들어설 골약면민의 한사람으로 경축행사에 참여해 사회를 보며, 철강도시 광양만의 첫 출발을 군민들에게 알렸다.

 

서정복 광양시의회 의장이 김만제 회장에게 설립을 건의하여 2001년 완공된 광양커뮤니티센터의 전경.

▶ 서정복 광양시의회 의장이 김만제 회장에게 설립을 건의하여 2001년 완공된 광양커뮤니티센터의 전경.

 

1994년 제26회 광양 시민의날 행사에 참석한 서정복 광양시의회 의장, 김종진 포스코 사장, 김재호 국회의원, 박복만 전 면장, 김찬기 부의장, 서찬규 의원, 강한채 의원(왼쪽부터).

▶ 1994년 제26회 광양 시민의날 행사에 참석한 서정복 광양시의회 의장, 김종진 포스코 사장, 김재호 국회의원, 박복만 전 면장, 김찬기 부의장, 서찬규 의원, 강한채 의원(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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