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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75] 신충식 前 전무, 18년간 구매업무 수행··· 컨소시엄 계약으로 설비 국산화 기여

[남기고싶은이야기 75] 신충식 前 전무, 18년간 구매업무 수행··· 컨소시엄 계약으로 설비 국산화 기여

2016/10/10

포스코는 포항, 광양 양대 제철소 외자 설비를 주로 공급자 차관 방식으로 도입했다. 외자부는 설비계획본부에서 작성한 사양서나 도면을 접수해 설비공급사에 파이낸싱(financing)을 제공하도록 했다. 여기서 파이낸싱이란 설비공급사가 자국 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설비를 후불 방식으로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화하면 설비를 외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해외 설비공급사는 자국 수출입은행 등에서 차관을 얻은 뒤 은행에서 제시받은 이자율, 거치기간, 상환기간 등 파이낸싱 조건을 포스코에 제시한다. 거치기간은 원리금 상환 유보 기간을 말한다. 외자부는 설비가액, 금융조건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파이낸싱 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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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업무부, 원료부, 구매부, 외자부 등 거치며 포스코 ‘계약전문가’로 성장해

-해외마케팅 경험 발판삼아 포스코형 종합상사 ‘포스트레이드’ 몸 담기도

-많이 혼낼수록 더 챙겨주는 박태준 회장 리더십, 포스코 성장요인 중 하나 

 

신충식 전 전무 주요 경력  1944 서울 출생  1970 고려대 상과대학 졸업  1970 포스코 입사(공채2기)  업무부, 원료부 원료계획과, 구매부 기재과 외자구매부 기재과장, 외자2과장 외자부 차장, 부장 싱가포르사무소장 오사카 주재 PIO(POSCO Industry Osaka) 사장  1994 포스트레이드 전무  1997 상무이사(포스코 수출 담당)  1999 전무  2001 UPI 수석부사장(POSCO 대표)  2004 포스코P&S 고문  상훈  1987 국무총리 표창(광양1기 준공 공로) 1999 철탑산업훈장(무역 진흥 유공)

포스코는 포항, 광양 양대 제철소 외자 설비를 주로 공급자 차관 방식으로 도입했다. 외자부는 설비계획본부에서 작성한 사양서나 도면을 접수해 설비공급사에 파이낸싱(financing)을 제공하도록 했다. 여기서 파이낸싱이란 설비공급사가 자국 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설비를 후불 방식으로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화하면 설비를 외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해외 설비공급사는 자국 수출입은행 등에서 차관을 얻은 뒤 은행에서 제시받은 이자율, 거치기간, 상환기간 등 파이낸싱 조건을 포스코에 제시한다. 거치기간은 원리금 상환 유보 기간을 말한다. 외자부는 설비가액, 금융조건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파이낸싱 조건은 입찰에 참가한 해외 설비공급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업무를 매우 까다롭게 진행해야 했다. 입찰서를 받으면 현가(現價)로 환산해서 모두 같은 조건으로 끌어올려야 업체별 비교 분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경쟁하는 4개의 해외 설비공급사가 제출한 4개의 해외 입찰서를 현가로 환산한 후 비교 가능한 환경으로 조건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충식 전 전무는 1979년 외자부에 합류한 이후 외자부 외자2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1988년 싱가포르사무소장으로 나갈 때까지 이 업무에 매달렸다.

 

“외자부는 해당 입찰서를 비교, 분석해서 일목요연한 비교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비교표 맨 하단에는 종합 평가사항을 기재했어요. 각 업체가 제시한 설비가액, 파이낸싱 조건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가장 낮은 평가 가격을 제시한 업체를 선별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입찰서의 기술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도면과 사양서는 설비계획본부에서 검토했습니다. 그러니까 외자부에서는 계약 금액과 파이낸싱 등 상업적인 조건에 해당하는 내용을 평가하고, 기술적인 측면은 설비계획본부에서 검토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외자부는 두 평가 내용을 종합해 보고하여 최종적으로 업체를 선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설비구매 업무는 외자부 단독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 작업은 설비계획본부에서 더 많이 한다고 봐야죠. 유상부 전 회장이 당시 설비계획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부서에서 전반적인 설비계획과 까다로운 기술 검토를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그가 외자부에서 입찰 업무를 수행할 때는 포항제철소의 설비구매 건수가 많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포항제철소 설비 구매 입찰이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에 보완 설비를 대상으로 하는 계약이 진행되는 정도에 그쳤다. 그가 맡았던 범위 내에서 규모가 큰 입찰은 주로 광양 3~4기 설비 구매 건이었다. 포항제철소 4기 2차 준공이 1981년 2월이었으므로 1979년 이전 설비구매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외자부에서도 부장을 맡은 시점이 1985년이므로 광양제철소 설비 구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고 그는 말을 이어 갔다.

 

“당시 박태준 회장께서는 주로 담당 임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장이나 차장 등 실무진도 자주 불렀습니다. 나도 차장 때부터 설비 구매 입찰과 관련해서 종종 보고를 드렸고, 꾸중도 많이 들었습니다.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저는 박태준 회장님으로부터 꾸중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외자부와 설비계획본부는 조직 체계는 그렇지 않았지만 조직 운영 면에서는 회장 직속 부서나 다름없었어요. 설비 구매 입찰에는 이런저런 잡음과 외압이 따를 수도 있고 빠른 업무 추진과 보안이 중요하므로, 복잡한 보고 체계를 뛰어넘어 직보하거나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박태준 회장이 보기에는 백면서생 같은 그가 한심하기도 하고 실제로도 철이 없었으니 알게 모르게 속을 많이 썩였을 것으로 그는 짐작했다. 수많은 설비 구매 과정에서 많은 외부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고, 국내외의 청탁도 많아서 CEO로서 많은 속앓이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태준 회장은 입찰서 비교분석표를 작성해 보고하면 최저가 응찰업체를 선정하면서도 그 금액에서 조금이라도 더 낮추어서 계약을 하라고 지시했다.

 

외풍과 잡음 많고 실세들 개입 심했을 포항제철 설비구매···

가슴에 사직서 품고 외압 견뎌낸 박태준 회장 뚝심에 존경 느껴

 

“입찰로 선정된 업체가 추가 가격인하 요구에 불응하면 당신의 지시라고 전하고, 그래도 거부할 경우에는 다음 업체로 계약 우선협의권이 이양된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이 방식은 일관되게 적용된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외압과 청탁의 풍파 속에서도 힘들어하거나 불편한 내색을 하신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언제 한번 업체 선정 보고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너희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사무원 몇 명만 두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외압과 청탁을 물리쳐야 하는 고단함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속마음을 그렇게 내비치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공장을 신설 또는 증설하기 위해서는 설비를 구매해야 했고, 설비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설비계획과 기술적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했다. 그건 살펴본 바와 같이 설비계획본부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 사업의 타당성 검토였다. 일관제철소에서 설비를 확장하는 경우에는 냉연류 제품 증산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냉연 100만 톤을 증설해 시장 공급 물량을 그만큼 늘리는 것은 타당성 검토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냉연제품의 파급력은 열연과는 달리 공급량의 증가에 따른 시장 쇼크가 크기 때문에 판매부문 뿐만 아니라 타당성 검토 부서도 해당 업무와 관련해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제품이 잘 팔렸기 때문에 설비를 계속 확장할 수 있었다는 관점은 사실 결과론일 뿐이다. 따라서 당시 설비 확장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해야 했던 경영정책실에서는 시장 상황이나 포스코에 미칠 파급효과 등을 쉽게 분석하고 예측하기 어려웠다. 쉽게 말하면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박태준 회장께서도 숙고 끝에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설비 확장은 경영정책실의 타당성 검토, 설비계획본부의 사양서 작성, 외자부의 구매 입찰 등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데, 기다려도 보고가 없으면 때로는 외자부장인 나를 불러서 해당 설비 확장 건의 진행사항에 대해 묻곤 하셨습니다. 경영정책실에서 타당성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하면 중간 절차를 건너뛰어 오늘 당장 후보 설비공급사들에게 입찰을 공지하고 입찰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어요.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결단을 내리신 거죠. 국영기업의 장으로서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인데, 박 회장님은 스스로의 확신으로 결단을 내리셨다는 점에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해당 프로젝트의 타당성 검토라는 고민에 빠져있던 부서도 부담감을 덜 수 있었겠죠.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설비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이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중요 사안 중 하나였다. 포스코도 국산화율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했기 때문에 ‘컨소시엄’ 형태를 수용하였다. 당시 국내 기계공업의 기술 수준이 설비 전체의 성능을 보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 설비공급사와 국내 중공업체가 각각 짝을 이루도록 해 해외 메이커의 기술 이전을 유도하는 한편, 성능보장 책임은 해외 공급사가 지도록 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결국 내자 부문과 외자 부문이 통합된 방식으로 입찰에 참여하게 했고 이를 ‘컨소시엄’이라고 이름 지었다. 광양 3, 4기 건설에 이러한 ‘컨소시엄’ 형태의 계약으로 진행된 사례가 많아 설비 국산화율을 크게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 결과 포항제철소의 설비 국산화율이 10~30% 정도였는데, 광양제철소는 50~60%로 높아졌다.

 

“컨소시엄 형태를 구성하기 위해 내외자 설비 범위, 제작사 선정 등은 설비계획본부 쪽에서 진행했고, 외자부는 구매 약관과 상업 조건 등을 만들었습니다. 국내 업체와 해외 업체는 포스코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고, 컨소시엄의 주계약자는 해외 설비공급사로 한다는 내용으로 구성했습니다. 결국 성능보장의 주 책임자는 해외 설비공급사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해외 설비공급사는 국내 중공업체에 기술적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밖에 없었어요. 포스코, 해외 제작사, 국내 제작사 3자가 서명을 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계약을 추진하는데 있어 상업적인 조건 등을 직접 만들어 업무에 참여한다는 보람이 있었죠.”

 

“선배들이 극복해 낸 한국중공업 등의 턴키베이스 시도는 포스코 역사 중에서도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시 권력을 등에 업은 국내 중공업체들로부터 여러 경로를 통한 외압이 있었을 텐데, 박태준 회장께서 배수진을 치고 사직서를 품고 다니면서 외풍을 막아내고 소신대로 밀어 부치셨습니다. 만약 그때 외압에 굴복해 턴키베이스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했다면 오늘날 포스코는 지금과 같은 기업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설비 품질과 건설 단가 측면에서 속된 말로 엉망진창이 됐을 거예요.”

 

공채 2기 출신··· 졸업 후 포항제철 전도유망하다는 생각으로 입사 결정

 

신충식 전 전무가 입사 후 처음부터 외자부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 3월 공채 2기로 입사해 업무부, 원료부, 구매부 등을 거친 뒤 1977년 외자구매부 기재과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이 업무에 합류하게 되었다.

 

“포스코 공채 2기 합격자 수는 30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신입사원 모집에서 학교 추천서를 요구했지만 포스코는 추천서 없이 시험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경쟁률이 13 대 1로 매우 높았는데, 합격이 되었어요.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동기생 12~13명 정도가 회사에 남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입사 당시에는 다른 회사에도 합격된 터라 두 회사를 두고 고민에 빠졌었지요. 형님의 지인 중 한 분이 포스코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회사라면서 입사를 권했고, 나는 상과대학 출신이기 때문인지 업무부에 배정되었어요.”

 

업무부 배치 당시 안병화 전 사장이 부장, 홍건유 전 부사장이 차장으로 있었고, 그 외 과장 한 사람과 3급 사원 몇 사람이 간부급으로 있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때는 KISA가 해체되고 JG와의 용역 체결이 진행되는 상황이었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백면서생으로서 회사의 현황과 전망 등을 파악하기에는 포스코의 사정에 너무 어두웠다.

 

“업무부는 서울 명동 YWCA 회관 4층 전층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막강한 실력자들이 포진하고 있었어요. 모두 경력사원으로서 전문성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안병화 부장은 굉장한 소신파에다 능력도 특출한 분이라고 어려워들 했어요. 일본이나 유럽 등지로 출장을 다녀오면 가족 선물보다는 책만 한 보따리씩 사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뚝뚝한 표정에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지요.”

 

1973년 7월 3일 포항 1기 설비가 준공되기 전, 사소통합에 따라 업무부는 3월 들어 포항으로 내려갔다. 1기 준공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본사 행정조직이 현장 관리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홍건유 차장이 원료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를 원료부로 데려갔습니다. 업무부에서 계약 관련 업무를 익혔기 때문에 데려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1기 조업이 시작되면서 형석, 페로알로이, 페로망간, 페로실리콘 등 부원료 파동이 났어요. 당시 포스코는 국내 원료 구매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홍건유 부장을 보좌하여 가격 인센티브를 주면서 원료 수급 안정화를 도모해야 했습니다. 업무부에서 계약 관련 업무를 수행한 경력으로 원료부에서도 계약 업무를 도맡았는데, 당시 국영기업의 계약은 감사원 감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원칙에 철저해야 했습니다. 계약 방법, 가격 등의 항목을 적절히 작성함으로써 감사원 감사에 대비하는 한편, 좋은 품질의 부원료를 조달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국영기업 직원은 준공무원에 해당하므로 예산회계법을 숙지하고 준수하는 업무수행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도 필수였다.

 

“업무부에 근무할 때 선배들로부터 ‘박태준 사장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잇피쓰’를 받으신 분이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잇피쓰’는 ‘일필(一筆)’의 일본어 발음으로서, 박태준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소위 ‘종이마패’를 이르는 말이었어요. 종이마패에는 몇 가지 내용이 있지만, 특히 ‘박태준 사장은 수의로 건설에 필요한 자재 및 건설에 대한 요소를 공여할 수 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협의로 해석하면 수의계약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죠. 예산회계법에 나오는 일반경쟁입찰, 제한경쟁입찰, 지명경쟁입찰 등을 뛰어 넘어 필요할 경우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소신껏 수의로 계약하고 공급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광의로 해석하면 많은 의미가 담기지만, 결국은 박태준 사장님에 대한 박 대통령의 무한한 신뢰의 표시로서 ‘백지 위임장’을 주신 것이겠죠.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박태준 사장은 계약 관계로 종이마패를 제시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대 제철소 건설 당시 턴키베이스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고, 광양에서는 CTS(Central Terminal System?대량화물유통기지)를 자기들이 건설하고 운영하려 했던 측도 있었지만, 박태준 사장은 담판으로 하나씩 해결하고 결국 극복해 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종이마패는 ‘박태준 사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 신망’의 상징이었고, 정작 박 사장님께서 가슴에 품고 다녔던 종이마패는 사직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박태준 사장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후의 국가통치권자에게 사표를 제출하려 했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말렸다고 들었습니다.”

 

해외시장 판매관련 계약 전권을 위임받은 최초의 해외사무소장

 

1988년 외자부장으로 근무하며 광양 4기 설비 계약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 그는 홀연 싱가포르사무소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자원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갑작스런 김철웅 외자담당 이사의 죽음으로 외자부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철웅 이사는 외자 업무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이나 경험 못지않게 매우 의욕적이었고, 인간성도 좋아서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는데,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보니 밀려오는 상실감이 컸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양 4기 설비 구매 업무가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대형 설비 구매 업무가 없어진 시점이기도 했으며, 이제는 어느 정도 소임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1970년 입사 이후 1988년까지 업무부, 원료부, 외자부를 거치면서 구매 관련 업무만 수행해 왔습니다. 18년간 구매 업무를 수행하면서, 비유하자면 같은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기분, 모래사장의 모래가 끊임없이 쓸려 나가는 기분이었고 구매 업무에 진력이 난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그때 뒤셀도르프 사무소장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처음에는 거기를 지망했습니다. 이 일로 화가 나신 박태준 회장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했는데, 결국 싱가포르로 발령을 내주시더군요.”

 

싱가포르 전출 한 달 만에 박태준 회장의 현지 방문이 있었다. 그는 박 회장이 체류하는 일주일 동안 수행하면서

‘박 회장은 꾸중도 하지만 인정도 많은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행 마지막 날 공항에서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는데, 귀국 후 관계부서에 ‘신충식이 싱가포르에서 고생하던데 BMW 730 한 대 사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1988년 당시 해외사무소 근무자 뿐만 아니라 전사적으로 BMW 730을 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형평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지시를 받은 동기생 부장이 전례가 없고 형평에도 어긋난다며 연락을 해왔다.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니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지시사항을 조정하라고 했어요. 결국 한 단계 낮춰 볼보로 구매해 주었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사례가 박 회장님의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꾸중을 많이 한 부하일수록 더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어요. 이러한 점은 결국 결정적인 시점에 포스코의 폭발적인 에너지로 발현되곤 했다고 생각합니다.”

 

2년 반 정도의 싱가포르 근무를 마치고 일본 오사카의 PIO(POSCO Industry Osaka)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당시 오사카 물류센터를 설립하고 후쿠오카 코일센터를 인수한 것이 큰 보람으로 남는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던 중 1994년 김만제 회장이 도쿄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현안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이후 김 회장은 포스트레이드 설립을 추진하면서 그를 판매 담당 전무로 가라고 했다. 김만제 회장이 당시 포스트레이드를 구상하면서 떠올린 아이디어는 포스코형 종합상사 설립과 상사 인력의 육성이었다.

 

“인사발령에 따라 나는 포스트레이드 판매 담당 전무로 자리를 옮겼는데, 문제는 포스트레이드가 포스코 관련 상사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동안 업무적으로 협조해왔던 종합상사들이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96년 김만제 회장이 그 계획을 철회하기 직전 나에게 다시 싱가포르 사무소장을 맡아서 동남아 전 지역의 판매 계약을 현지에서 실행하라고 지시하셨어요. 그 지시 때문에 마케팅 부서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판매 관련 계약은 본사 마케팅본부에서 전담하고 있는데, 이를 해외사무소가 추진한다는 것은 회사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싱가포르사무소장은 포스코 역사상 최초로 판매 계약권을 가진 해외사무소장이 되었지요.”

 

자동차강판 경쟁력으로 세계시장 선도하는 포스코 기술력 감탄···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하고 기술연구투자 늘려 회사 잘 이끌어주길

 

그는 싱가포르에서 마케팅 업무를 수행하면서 나름대로 성과를 냈다. 현지의 반응도 좋았다. 현지에서 고객사들과 직접 마케팅을 수행하면서 계약을 추진하다 보니 고객사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1998년 국민의정부가 출범하면서 박태준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복권되고 유상부 회장이 취임했다. 그는 다시 본사로 복귀해 해외 수출 부문을 맡았다.

 

“국내 경제는 외환위기를 타고 넘어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포스코는 잘 견뎌냈습니다. 전사적인 판매 노력도 있었지만 환율의 급격한 상승이 불러온 현상이기도 했어요. 당시 나는 마케팅 수출 담당 임원으로서 해외코일센터 확장에 관심이 있었고, 일본의 자동차강판 시장 공략은 지난한 과제였습니다. 일본 기업 특유의 ‘보이지 않는 카르텔’ 때문이었어요. 내가 퇴사한 지 15년이 흐른 지금은 그 카르텔의 결속력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일본 철강업계도 각자 도생(圖生)의 길로 들어선 결과입니다. 현재 포스코가 세계 시장에 연간 800만 톤 이상의 자동차강판을 팔고 있는데 이는 정말 대단한 발전이며 후배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는 2001년 미국 UPI로 자리를 옮겨 2년간 근무하다가 귀국해 포스코P&S에서 1년 정도 몸담은 뒤 포스코 그룹을 떠났다.

 

“대학 졸업 후 백면서생으로 포스코에 입사해 35년간 보람 있는 일을 했으니, 포스코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철강산업에서도 현재 중국이 맹렬하게 추격해 오고 있지만, 포스코는 아직도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강판을 비롯한 고급강 시장에는 아직 중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어요. 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에 사업 능력을 집중하고 기술연구 투자를 늘리면서 회사 전 부문이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춘다면 포스코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포스코에는 위기에 강한 포스코 특유의 ‘스피릿’이 있지 않습니까. 잘 헤쳐 나가리라 믿습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1988년 신충식 전 전무가 싱가포르사무소장으로 부임한 직후, 박태준 회장이 지시사항을 적어 그에게 전달한 친필 편지봉투(사진).

▶ 1988년 신충식 전 전무가 싱가포르사무소장으로 부임한 직후, 박태준 회장이 지시사항을 적어 그에게 전달한 친필 편지봉투(사진). 신 전 전무는 박태준 회장에게 수도 없이 많이 혼났지만, 많이 꾸중한 부하일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더 따뜻하게 챙겨주는 회장님의 독특한 리더십이 포스코의 폭발적인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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