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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82] 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회장, 포스코와 함께 한 50년··· 풍구(風口) 시장점유율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

[남기고싶은이야기 82] 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회장, 포스코와 함께 한 50년··· 풍구(風口) 시장점유율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

2017/01/05

포항제철소 제선부에서 서울엔지니어링에 고로에 사용되는 풍구(風口)라는 동주물(銅鑄物)을 만들어 보겠느냐고 제안해 온 것은 1973년이었다. 이는 포항제철이 아직 고로 조업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막상 개발에 착수하려고 하니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포항제철에서는 우선 세계적으로 가장 지명도가 높은 3~4개 사 중 1개 사와 기술제휴를 하고 그 회사가 서울엔지니어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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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포스코의 철저한 품질 검증 덕분에 세계 80여 제철소에 풍구 수출
– 세계 최초로 ‘다중 스파이럴 풍구’ 개발··· ‘돌발휴풍’ 현격히 줄어
– 가족경영 지양하고 연고주의 타파해 ‘글로벌 히든챔피언’ 일궈

 

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회장 주요 경력 1933 서울 출생 1960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1968 서울엔지니어링 창업, 회장(現) 상훈 1987 대한금속학회 기술상 1991 한국주조공학회 기술상 1992 증소기업기술혁신상 금상 1998 산업자원부장관 표창(우수자본재 유공) 2001 대통령 표창(해외무역 증진 유공) 2013 금탑산업훈장(생산성 향상 유공)

포항제철소 제선부에서 서울엔지니어링에 고로에 사용되는 풍구(風口)라는 동주물(銅鑄物)을 만들어 보겠느냐고 제안해 온 것은 1973년이었다. 이는 포항제철이 아직 고로 조업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막상 개발에 착수하려고 하니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포항제철에서는 우선 세계적으로 가장 지명도가 높은 3~4개 사 중 1개 사와 기술제휴를 하고 그 회사가 서울엔지니어링이 생산하는 초기 제품의 품질 보증까지 해야 한다면서 일본, 영국, 독일 등에 소재한 4개 사의 풍구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국제 정보도 어두웠고, 팩스도 없던 시절이어서 무작정 4개 사에 서신을 계속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1년이 다 되어서야 일본의 한 메이커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회사 전무가 한국에 오는 길에 우리 회사를 둘러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회사와 기술제휴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풍구는 고로 조업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고로 내부에 철광석을 가공한 소결광과 유연탄을 가공한 코크스를 층층이 장입한 뒤 이를 녹일 1200~1250℃의 열풍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열풍은 고로를 빙 둘러 설치된 풍구를 통해 취입된다. 이때 풍구는 초고온의 노내(爐內) 용융물과 직접 접촉하게 되는데 용융점이 1083℃에 불과한 구리로 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기술적 바탕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어렵게 기술도입 계약이 체결되었으므로 풍구 제조에 필요한 설비를 도입하고 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각종 기계와 검사설비도 갖추었습니다. 마침 그때 정부로부터 유망 중소기업에 배정하는 연리 9%의 기계공업 육성자금 9억 원을 받은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포스코와의 풍구, 랜스노즐 등 동주물 제품 공급 기본계약 체결은 자꾸 늦어져 1975년에야 이루어졌어요. 여러 차례의 일본 현지 기술연수를 통해 실력을 쌓은 우리 기술진이 일본 기술자의 현장 지도 아래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3개의 풍구를 포스코에 납품한 것이 1977년 11월이었으니, 포스코의 제의가 온 지 5년 가까이 된 거지요. 웬만한 각오와 인내심이었으면 중간에 손을 들고 말았을 겁니다.”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부도났을 때도 꾸준히 거래해준 포스코에 감사

화목한 노사관계 자랑하는 서울엔지니어링··· 비결은 가족경영 않는 것

포스코의 제품 검사는 여간 철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1년간은 장착도 못 해본 채 입고검사에서 번번이 불합격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1980년까지 납품에 성공한 풍구는 50개에도 미치지 못했다. 서울엔지니어링은 그동안 본래 생산해온 자동차용 각종 비철금속 주조제품으로 힘겹게 버텨오고 있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은행 대출금리가 연리 20%, 연체금리는 30%로 치솟는 바람에 순식간에 차입금이 불어나 1984년 4월에는 채무를 감당하지 못 하고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부도수표 중에는 당좌수표도 있었으나 피하지 않고 회사에 눌러 앉아 150여 명의 직원들과 힘겹게 조업을 이어나갔습니다. 회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채권자들과 대화를 이어간 결과 2년 후 법정관리 인가를 받았는데, 이때 가장 큰 힘이 된 것이 포스코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포스코와 같은 막강한 고객사에 계속 납품하고 있다는 사실이 채권자들에게 믿음을 주었던 거지요.”

포스코는 일단 품질을 인정한 후에는 꾸준히 서울엔지니어링의 풍구나 랜스노즐의 사용 비중을 늘려주었고, 이는 부도가 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법정관리는 10년 후에나 종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다른 사업은 모두 유보하고 제철소용 순동 주조품 생산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부도 발생 후 약 10년간은 급여가 두 달이나 밀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노사가 하나가 되어 잘 견뎌 주었고, 1996년에는 노동부로부터 산업평화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서울엔지니어링이 특별히 좋은 노사관계를 유지해온 이유 중의 하나로 처음부터 가족경영을 하지 않았던 점을 꼽았다. 가족경영에 대해서는 그는 확고한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196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으나 취직할 데가 없었어요. 당시 국내 유일의 제철소인 대한중공업공사가 있었으나 금속공학과 선배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 내가 끼일 데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천의 한 회사에 기술과장으로 입사를 하고 보니, 과장급 이상의 자리는 거의 오너의 가족들이 포진하고 있었어요. 1963년 들어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안정과 경제개발, 산업시설의 현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정부기관인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에 들어가 미국 연수를 다녀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8개월간 미국에 머물면서 비철금속 기업 몇 군데를 가보았는데, 규모는 작지만 가족경영을 하는 데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1966년에는 회사의 전무와 함께 일본 니케이알루미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녁식사 자리에서 구로사와(くろさわ) 라는 안내계장이 한국 기업의 가족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는 오너의 아들, 사위, 처남 등이 회사의 중요 직책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고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까지 했어요. 만약 니케이알루미늄이 그런 체제였다면 자기는 결코 입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다가 못할지라도 ‘나는 이 회사의 넘버원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비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68년에 사람 셋 데리고 내 사업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가족이나 인척이 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회사에 나를 빼고 5명의 임원이 주식 40%를 보유하고 있는데, 나하고는 어떤 혈연관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더해 지연, 학연을 배제하고 능력 위주의 인사를 중시하는 경영방침에 따라 회사를 운영한 것이 오늘날의 성공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풍구 기술개발 및 제품 수출에 역량 집중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특허 취득하기도

포스코의 모든 고로에서 사용하는 풍구를 독점한 1996년부터 서울엔지니어링은 수출에 전력을 다했다. 제일 먼저 개척한 시장은 미국이었다. 그때 이미 미국의 대형 제철소에서는 재래식 2체임버(Two Chamber)가 아니라 포스코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스파이럴 풍구를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일본의 제철회사가 미국에 진출해 스파이럴 풍구의 장점을 십분 과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제철소는 오쿠라상사가 일본에서 수입해온 스파이럴 풍구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상사가 우리가 미국에 진출하기 몇 년 전에 파산하면서 그 일을 담당하고 있던 베테랑 세일즈맨이 오쿠라를 인수한 종합상사와의 관계를 끊고 우리 제품의 미국 수출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제품의 미국 시장 진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품질 면에서도 이미 포스코의 철저한 검증을 받았었기 때문에 진출 초기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4~5년 내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우리 제품이 미국 스파이럴 풍구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시장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유럽에서는 1체임버 구실밖에 못하는 스파이럴 풍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스파이럴 풍구는 냉각 능력이 뛰어나 수명이 긴 것은 사실이지만, 풍구는 어차피 용손이 있기 마련이므로 2체임버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로 일본 업체들의 권유로 1970년부터 스파이럴 계통을 써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사용하는 도면대로 2체임버 풍구를 제작해 공급해 봤지만, 2체임버는 특성상 어디서 만들든 결정적인 품질 차이가 날 수 없었다. 그래서는 기존 공급사의 선점효과를 무력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 몇 년간은 입찰에 참여해 가격경쟁에서 이기는 길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우리 기술진들의 유럽 출장을 늘려 유럽 유수의 제철소 고로 조업 기술자들과의 접촉을 부쩍 강화하면서 그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했습니다. 거의 모든 고로에서의 공통된 요구는 가격이 다소 높아지더라도 돌발 휴풍(休風)을 최소화할 수 있는 풍구를 개발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독일의 티센(Thyssen) 제철소는 우리가 제안한 개발 단계의 2체임버 스파이럴 풍구를 진지하게 검토해 주었고, 매번 장착 시험까지 해주었습니다. 3중 스파이럴 풍구 개발 시에는 가압을 위한 부스터 펌프도 몇 대씩 설치해서 다중 풍구 개발에 적극 협조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2중으로 된 스파이럴 회로를 가진 풍구를 설계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냉각효과가 탁월한 2개의 독립된 스파이럴 수로를 풍구 안팎에 설치할 수만 있으면 해결되는 것인데, 문제는 두 스파이럴 회로 모두 각각의 급수회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겹으로 된 스파이럴 수로를 한 풍구 속에 설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0년 들어 서울엔지니어링의 기술진은 기발한 착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 냈다. 직선수로 입구 대신 스파이럴 수로로 들어가 선단부에서 180도로 반전해 들어갈 때의 스파이럴 통로 사이사이로 배출 스파이럴 통로를 만든 것이었다.

“착상이 어렵지 원리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2중 스파이럴 풍구는 2011년 국내 특허를 취득한 데 이어 지금까지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네시아에서 특허를 취득했고 유럽, 베트남, 인도, 브라질에서는 현재 특허 심의에 들어가 있습니다. 포스코에서는 포항 2고로, 3고로, 4고로, 광양 1고로, 5고로에서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고로에는 개수(改修) 시 펌프와 냉각수로를 추가로 설치해서 2중 스파이럴 풍구를 사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 티센 사는 2014년 2고로 개수 시 42개의 전 풍구를 3중 스파이럴로 교체하고 포스코와 같은 성과공유 계약도 체결해 주어 우리는 2015년 말 푸짐한 1차년도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서울엔지니어링이 개발한 다중 스파이럴 풍구는 가히 혁신적이었다. 이 풍구의 출현으로 고로 조업에서의 고민거리였던 돌발 휴풍은 현격하게 줄었다. 이미 세계 20개 이상의 고로에서 이 풍구를 사용하고 있고, 앞으로 신설되는 고로나 개수에 들어간 고로에서도 이 풍구를 사용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므로 오세철 회장은 전 세계 절대다수의 고로에서 이 제품을 쓰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확신했다.

작업자 실명제 등 새로운 제도 도입해 제품 품질관리에 주력

불량 제품 생산기록 추적하고 시험주조 반복해 불량률 현격히 낮춰

서울엔지니어링은 2013년 제강용 랜스노즐에서도 획기적인 제품을 개발했다. 랜스노즐은 전 세계 사용량의 90% 이상이 주조제품이고 나머지 10% 미만이 단조제품이다. 단조품은 주조품보다 수명이 훨씬 길지만, 랜스노즐의 내부 냉각수로가 복잡해서 전체를 단조로 제작할 수 없기 때문에 선단부만 따로 단조해서 본체와 저온 접합을 할 수밖에 없다. 단조 랜스는 제조 원가도 높고, 전로 조업 중 용강(熔鋼)이 튀어 노즐에 맞을 경우 노즐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저온 용접부가 파괴되어 누수(漏水)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단점 때문에 단조 랜스노즐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서울엔지니어링은 주조 랜스노즐의 분출 홀만을 단조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선단부 단조 랜스노즐’이라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국내 특허를 취득했고 현재 세계 각국에 특허를 출원 중에 있다.

“동합금(銅合金) 주물의 일종인 청동주물의 역사는 4000년이 넘지만, 순동주물은 고로나 전로의 출현 후에 실용화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10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요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순동주물업체는 10개도 되지 않고, 그것도 종업원 100~150명 규모의 중소기업들입니다. 순동주물은 동의 순도가 99.5% 이상이기 때문에 응고 시 수축이 심해 수축결함이 생기기 쉽고, 용해 작업 시 수소, 산소 등의 흡수가 용이해 기포불량(氣泡不良)도 흔히 일어납니다. 역사가 짧고 사용 분야가 한정되어 있으니 순동 용해나 주조에 관한 연구논문 등이 별로 없어 순동주물 메이커는 주로 경험에만 의존해 제품을 생산해 왔습니다. 주물사(鑄物砂)의 종류, 모래의 입도, 점결재의 유형, 용해 출탕 온도, 용탕의 탈가스·탈산 방법, 갖가지 형태의 주조 방안 등 주조품의 품질을 좌우하는 변수가 20가지가 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작업표준을 만들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제품이 불량으로 판정이 나는 것은 대개 최종 공정에서 인데, 이때는 주조한 지 이미 2~3주가 지나 언제, 어느 용탕에서 주조한 것인지도 추적하기 어렵습니다.”

서울엔지니어링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93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나름의 순동 주조 이론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수많은 시험주조를 통해 불량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 나갔다. 스펙트로미터 등 성분분석기는 물론 용탕 내 산소·수소 분석기, 금속 현미경, 3차원 측정기 등을 두루 갖춘 실험설비 외에도 사내에서 모든 주조제품에 대한 비파괴검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엑스레이, 감마레이 설비까지 갖추어 주조제품을 100% 촬영했다.

“주조기술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는데도 고로 대형화에 따라 냉각반의 검사기준이 해마다 엄격해지다 보니, 불량률이 엄청 높아져 회사 경영 전반을 위협하는 일까지 몇 번 경험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176회에 걸쳐 6만 1556개의 냉각반을 전 세계 고로에 납품했는데, 실제로 주조한 냉각반의 수는 8만 1250개나 됩니다. 불량률이 무려 32%나 되는 거지요. 이렇게 악전고투를 이어온 결과, 2014년을 기점으로 냉각반의 불량률이 크게 줄어들어 현재 8% 미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울엔지니어링이 좀 더 체계적으로 품질관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1996년 미국의 벨 헬리콥터 사에서 3년간의 훈련을 거쳐 도입한 공정이동전표 제도의 성공적 시행이 계기가 되었다. 작업자 실명제이기도 한 이 제도를 통해 불량품을 초기 공정에서 걸러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불량이 난 제품의 용해 및 주조 기록을 바로 추적할 수 있었으므로 의심되는 주조 조건을 개선하고 불량을 줄여 나가면서 현실에 적합한 작업표준을 차례로 완성할 수 있었다.

 

우리 회사 동제품 품질 보증해준 포스코 덕분에 수출 길 열려

반세기 역사 함께 해온 양사, 앞으로도 파트너십 유지하길 기대

“2000년 독일의 HKM제철소로부터 718개의 미니 주조 스테이브와 1050개의 냉각반을 수주한 것을 계기로, 우리 회사는 냉각반을 유럽으로도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스테이브와 냉각반 둘 다 고로 수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품이다보니, 당시 HKM 사의 간부가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이를 본 HKM 소장이 ‘일전에 포스코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포스코가 100% 서울엔지니어링의 동제품만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 그러니 안심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더군요. 이 이야기를 한참 후에 전해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세계 철강업계의 선두주자였던 포스코가 전 세계 고로업체에 우리 동제품만을 사용한다고 알려준 것은 우리 제품의 수출 길을 터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서울엔지니어링은 현재 전 세계 제철소에 연간 3500개의 풍구를 수출하여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풍구는 정부가 지정한 세계 일류상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냉각반은 2016년까지 전 세계 177개 제철소에 6만 1556개를 공급해 단연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랜스노즐은 2016년 2200개를 공급해 이 또한 세계 정상급이다.

“우리 서울엔지니어링도 2018년이면 창립 50주년이 됩니다. 그동안 우리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주조불량도 획기적으로 줄었고, 생산 설비도 거의 완벽해졌습니다. 풍구, 냉각반, 랜스노즐 등 주요 제품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모두 1위 또는 최정상급입니다. 이러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기까지 포스코가 보내준 성원과 지원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세계 시장으로 나아갈 때 품질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세계 유수의 제철소들도 포스코가 이 회사의 제품을 전량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심하는 거였어요. 포스코가 품질 보증 업체가 되어준 셈이지요.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양사의 파트너십이 지속하기를 기원합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포스코와의 제품 공급계약 체결 후 그 해 양사가 작성했던 기본 공급계약서(사진).

▶ 서울엔지니어링은 1973년 포스코로부터 고로에 사용되는 풍구를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일본의 메이커와 기술제휴를 맺는 등 3-4년간 개발에 몰두했다. 그러나 품질기준이 매우 까다로웠던 포스코와의 제품 공급계약 체결은 자꾸만 늦어져 1975년에나 이루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해 양사가 작성했던 기본 공급계약서(사진).

 

사진은 선진기술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1996년 2월 동주물 관련 일본 업체를 방문한 오세철 회장(왼쪽 두 번째)의 모습.

▶ 서울엔지니어링은 포스코로부터 동주물 제품 개발을 제안받은 후 기술개발에 매진해, 1996년 포항·광양제철소 전 고로에 풍구를 공급하는 등의 성과를 거둬 지난 10년간 포스코 PHP(POSCO Honored Partner) 공급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진은 선진기술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1996년 2월 동주물 관련 일본 업체를 방문한 오세철 회장(왼쪽 두 번째)의 모습.

 

서울엔지니어링 오세철 회장이 1968년 창업 후 포스코와 상생하며 개발한 고로 핵심부품인 풍구를 전 세계 80여 개 제철소에 수출한 공로 등으로 2013년 금탑산업훈장을 받고있는 모습

▶ 서울엔지니어링 오세철 회장은 1968년 창업 후 포스코와 상생하며 개발한 고로 핵심부품인 풍구를 전 세계 80여 개 제철소에 수출한 공로 등으로 2013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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