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뭐라고 설명하면 그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망설임이 없다. 저돌적이다. 지나치리만큼 긍정적이다. 일단 하고 본다…일단 그의 말을 먼저 들어보자. “저는 회사가 가라고 하면 갑니다. 인도네시아도 좋고, 남미도 좋고 어디든 갑니다. 또 무엇이든 합니다. 가리는 게 없다고 할까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제철소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이지만 해외근무에 대한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라운드를 치르고 온 선수처럼 차오르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하지 못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김용훈 명장, 그는 첫눈에 보기에도 도전을 즐기고, 도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포스코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과거에는 코일센터 등으로 해외진출을 도모했다면 이제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인도, 미주 등을 중심으로 일관제철소 형태로 해외에 진출하고 있죠. 후배들에게는 해외근무의 기회가 활짝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활짝 열린 해외 무대로 나아가려면 직무역량 향상도 물론 중요하고, 글로벌 인재로서의 역량도 갖춰야 합니다.”
명장답다. 자신의 이야기보다 포스코의 미래를 책임질 후배들에 대한 조언이 먼저 나온다.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는 시대에 그는 후배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제 분야인 열연 기술력은 세계에서 꿀릴 것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해외근무를 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겁니다. 후배들의 기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언어입니다. 물론 현장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몸으로 부딪히면 결국 의사소통은 됩니다. 그러나 해외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에는 원활한 의사소통의 툴을 배워두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후배들도 그런 시대를 대비해 외국어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는 회사에도 바라는 게 있다고 했다. 인력운영이 매우 타이트하다 보니 어려움이 있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후배들이 해외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는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건 회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외에 가보니까, 어떤 설비는 우리 것보다 더 최신 설비였습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고민하는 문제가 이미 개선된 설비 또는 프로그램으로 해결돼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랜 노력과 경험으로 극복해온 설비와 조업 문제를 그대로 겪으며 해결을 바라는 문제도 있었고요. 그래서 후배들이 이런 곳에서 짧게라도 일정 기간 근무하며 경험을 쌓으면 돌아와서 우리 현장을 개선하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기회로 새로운 혁신이 가능할 거란 거죠.”
남다른 후배 사랑 덕분에 이야기 순서가 좀 바뀌었다. 이제 시간을 거꾸로 돌려 김용훈 명장의 햇병아리 시절부터 명장으로의 행로를 더듬어 보자.
그는 스스로를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표현했다. 그런 그가 우물 밖을 마주하게 된 것은 바로 군 복무 시절이었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김용훈 명장도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보다는 취업을 마음에 두고 군 복무를 먼저 시작했다. 그가 근무한 곳은 영천에 자리한 3사관학교로, 이따금씩 사관생도를 인솔해 산업체 견학을 다니곤 했다. 그때 간 곳이 바로 ‘포항제철소’. 대충 철을 만드는 회사 정도로 생각했던 그가 눈으로 목도한 광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규모에 압도되고, 주택단지 등 복리후생에 감탄한 그는 자연스럽게 ‘나중에 여기서 근무하자’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운명적이게도 그때 본 현장이 열연공장이었다고 하니,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고 이어질 인연은 결국 이어지나 보다.
1990년 3월 포스코에 입사한 그는 광양 2열연공장에 배치됐다. 그가 입사한 당시 2열연공장은 막 준공을 마치고 조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곳에서 김용훈 명장은 열연코일 생산라인 운전을 담당했다. AI까지 도입된 지금도 제철소 조업은 작업자의 능력, 기술이 제품의 품질 수준을 좌우하는데 당시에는 작업자들이 설비 전반을 직접 운전해야 했다.
수학공식처럼 어떤 소재는 어느 정도로 조작해야 된다는 데이터가 확립돼 있지 않은 상황이니 믿을 건 경험뿐. 그러나 신입사원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선배에게 묻는 수밖에 없고, 만약 실수가 나오면 그 실수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노하우를 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운전기술은 늘어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걸까? 데이터를 축적하고 적용해 자동화할 수는 없는 걸까?’하는 의문이 쌓여만 갔다.
이른바 노터치(no touch) 운전기술의 시발점이 된 순간이었다. “한 번은 외빈이 공장견학을 왔는데 악수를 청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운전대에서 손을 놓으면 오작동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그냥 외면해버렸어요. 조업에 집중하는 건 좋은데 자동화 정도가 지나치게 떨어지는 문제는 개선해야 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쌓이자 그는 2003년 ‘2열연공장 FM(Finishing Mill ; 마무리압연) 노터치 오퍼레이션 TFT(no touch operation Task Force Team)’이 구성된다는 소식에 만사를 제치고 적극 참여했다. 목표는 마무리 압연공정에서 수작업을 최소화해 운전자에 따른 결과 편차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김용훈 명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설비적 한계도 존재했고, 다양한 시험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품질불량, 생산량 감소 등의 문제도 걸림돌이 됐다. ‘처음 설비를 놓을 때부터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반영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김용훈 명장은 주어진 한계 속에서 조업으로, 또 이러한 활동으로 문제점을 확인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2열연공장 근무 시절, 완전한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6시그마를 접하면서 기술의 깊이에 대한 진한 맛을 알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성과였다. 기술을 배우고, 연구하고, 적용하고, 개선하는 즐거움은 세상 어떤 것보다 달콤했다. 휴일이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던 취미인 낚시조차 잊을 정도로 말이다. 이 시기 그는 비록 높이 날아오를 수는 없었지만 차곡차곡 쌓은 내공으로 머지않아 화려한 비상의 날갯짓을 할 터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4열연공장 신설이 결정된 것이었다.
새롭게 지어진 광양제철소 4열연공장은 포스코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 4열연공장은 열연공장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기술자의 힘을 빌지 않고 온전히 포스코 자체 기술만으로 지었다. 게다가 통상 짓고 나서 반년, 길게는 일 년 걸리는 조업안정화를 석 달 만에 이루어냈다. 일본 엔지니어링 회사의 기술자들이 지원해 주던 이 작업을 우리 손으로, 그것도 통상적인 기간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해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설비능력 350만 톤을 훌쩍 웃도는 420만 톤의 생산 능력까지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자 최초 설비계획 단계부터 참여한 김용훈 명장에게는 ‘자력 엔지니어링에 성공한 파트장’이라는 자랑스러운 수식이 따라붙었다. 물론 본인은 이런 명칭을 더없이 쑥스러워하지만.
4열연공장 신설은 여러모로 김용훈이 꾸어왔던 꿈을 실현하는 장이 돼줬다. 열간압연 설비를 운전하면서부터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 그것은 ‘압하운전 조작과 스피드운전 조작을 통합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2열연공장에서 그가 펼치지 못했던 꿈이기도 했다. 그래서 4열연공장에서는 처음부터 이를 가능한 설비로 구상했다. 그러나 주변의 염려가 컸다. 평생 손으로 운전을 했던 이에게 완전자율주행자동차라면서 운전대를 떼어버린 자동차를 주면, 그 차로 바로 고속도로에 올라탈 용기가 나겠는가? 결국 4열연공장 압연설비의 패널은 압하운전과 스피드운전을 통합한 하나의 패널, 사실은 스피드운전을 없앤 패널로 가되,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백업패널’을 설치해 ‘만에 하나’라는 근심걱정을 달래는 방향으로 구상했다.
설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면 직원은 어떻게 되는 걸까? “통상적인 일에 매몰되면 발전이 없잖아요. 운전인력이 두 명이었다는 것은 두 명이 모두 운전만 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생산성을 높이고, 품질을 향상시키는 게 늘 하는 운전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그건 그냥 현상 유지지요. 운전인력에서 여유가 생긴 인력 한 명은 설비도 돌아보고, 운용방식도 고민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운전을 하던 인력이 검사하고 검토하는 인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한 단계 높은 발전단계로 올라설 수 있는 거죠.”
4열연공장을 가동하면서 김용훈 명장이 적용한 기술은 또 있다. 그건 바로 ‘FM 전장 유압연 적용기술’이다.
“용어가 좀 어렵죠. FM이란 건 피니싱 밀(Finishing Mill), 즉 마무리 압연이란 뜻입니다. 애당초 4열연공장을 신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고강도강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고강도강은 자동차강판은 물론이고 송유관 같은 걸 만드는 데에도 쓰이는데요. 열연공장에서 일반강이 아닌, 강도가 더 높은 소재를 압연할 일이 많아지니 롤의 피로도가 오르고, 압연할 때 진동도 심해졌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소재에 압연유를 뿌리면서 압연해야 했어요.”
압연유를 뿌려주면 압연소재와 롤 사이에 유막이 생긴다. 유막이 생기면 롤이 압연하는 힘을 소재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즉, 힘을 덜 들이고 압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유압연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는 세계적으로 흔한 기술이다. 다만 ‘전장 유압연’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일반 유압연을 할 때 소재 끝부분 7미터부터는 압연유를 뿌리지 않는다. 압연유를 뿌리지 않은 소재 끝 7미터 부분은 롤을 지나며 자체 열로 롤에 묻어있는 유막을 태워 없애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에 투입되는 소재가 미끌미끌한 롤에 제대로 물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슬립(slip) 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입한 새로운 방식은 나머지 7미터에도 압연유를 뿌리는 것이다. 그래서 명칭이 ‘전장 유압연’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 문제인 슬립 현상도 극복해냈다. ‘FM 전장 유압연 성공’은 그야말로 고강도강 생산과 품질을 극대화하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 성공은 김용훈 명장에게 ‘제안2등급’을 안겨주기에 이른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포스코 기능인의 최고 영예인 ‘명장’의 반열에 오른 김용훈 명장. 그러나 그가 지향하는 기술혁신의 길은 ‘명장’이 종착역이 아니다. 명장이 된 이후에도 그는 또 다른 포스코 기술표준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더스트 프리(dust free) 기술’이다.
그런데 4열연공장이 신설될 즈음 압연환경은 변하고 있었다. 비교적 분진이 적은 일반강이 아닌 특수강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 그래서 기존에는 FM에만 설치해도 됐던 집진기를 조압연기인 RM(Roughing Mill)에도 설치해야 했다. 문제는 집진기가 대당 40억 원에 이르는 고가의 장비인 데다가 운용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선 물을 뿌리다가 소재를 차갑게 식힐 염려가 있었다. 또 소재가 지나가는 바로 근처 설비에 미스트 노즐 구멍을 뚫다 보니 소재가 이 구멍에 긁혀 스크래치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아이디어를 1개 라인에만 적용해 시험 운용하며 문제점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또한 광양 4열연공장을 넘어 포스코 전체에 적용될 표준기술이 됐다. 광양 1, 2, 3열연은 물론이고 장가항포항불수강 등 해외에도 적용했으며 포항 열연공장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김용훈 명장의 활약은 이제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향과도 같은 광양 4열연공장에서 열연공장의 표준기술들을 잉태하고 확산한 그는 최근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포스코에서도 앞선 기술을 전수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톱 텔레스(top-teles) 개선’과 ‘테일 핀칭(tail-pinching) 개선’이다. 두 기술 모두 압연 마지막 과정에서 소재를 가운데 정렬하는 센터링이 잘되지 않아 롤이 두루마리처럼 말렸을 때 가운데 심 부분이 비뚤어지거나, 마지막 끝부분이 비뚤어져 말리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김용훈 명장의 기술전수 덕택에 가운데 심 부분에 문제가 생긴 톱 텔레스 발생률은 16%에서 3%로 획기적으로 개선됐으며, 테일 핀칭 발생률은 11.95%에서 0%로 내려앉았다. 이에 따른 증산효과도 무려 연간 3만 9000톤에 이른다.
김용훈 명장은 종착역이 없는 기관차와 같다. 성과를 내놓는 역에서 잠시 쉬어갈 뿐 이윽고 또 다른 출발의 기적을 울린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종착역, 그건 그 자신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그곳은 포스코의 지속가능한 성장이 확보되는 곳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4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신승철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
7편 : 포항제철소 후판부 이영춘 명장
8편 : 광양제철소 화성부 김제성 명장
9편 :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 명장
10편 : 포항제철소 제강설비부 남태규 명장
11편 : 광양제철소 제선부 배동석 명장
12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명장
13편 : 저탄소공정연구소 한병하 명장
14편 : 광양제철소 압연설비부 김종익 명장
15편 : 광양제철소 도금부 손병근 명장
16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손광호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