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장인(85, 경기도 무형문화재 45호 주물장)은 안성주물 사무실 의자에 앉아 필자를 맞았다.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정정한 그는 조부, 선친에 이어 가업인 안성주물을 이어받아 60여 년째 일하고 있다. 1988년 군에서 제대하면서부터 회사 일에 뛰어든 그의 둘째 아들 김성태 대표가 장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고 2001년부터 회사 경영을 맡고 있다. 말하자면 증조부에서 손자까지 4대째 ‘주물’이라는 가업을 잇고 있는 셈.
팔팔 끓는 쇳물을 내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짓는 가마솥을 만든다
이 유례를 찾기 힘든 가업은 창업자인 1대 김대선 대표가 1910년경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서 유기로 유명한 안성으로 옮겨 온 뒤 유기공장에서 놋쇠 다루는 일을 하다가 독립해 가마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의 아들(고 김성순 대표)이 그 뒤를 잇고 또 그의 아들인 김종훈 대표가 이어받았다가 김성태 대표(전수자)에게 이어진 것. 현재 안성주물에는 김 대표와 함께 열 명 정도의 숙련공들이 일하고 있다. 마침 인터뷰를 위해 공장을 찾은 날은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 있는 쇳물을 내리는 날이었다.
안성주물에서 가마솥 등을 제작하는 방법은 전통적인 ‘큐플라 방식’. 다른 주물공장에선 일반적으로 전기를 이용해 쇠를 녹이는데, 그럴 경우엔 고철이나 잡철도 농도를 맞출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해 성분이 섞일 수 있다고. 안성주물이 채택하고 있는 전통 방식은 쇠에 뜨거운 바람을 넣는 과정에서 납이나 카드뮴 같은 중금속이 사라져서 인체에 무해한 주물이 탄생된다. 김종훈 주물장은 이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국품질시험원에서 유해물질 및 성분 검사를 했는데, 우리 가마솥에서는 일절 유해 성분이 나오지 않았어요. 오히려 인체에 유익한 철분 성분, 헤모글로빈이 배출되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지. 가마솥으로 밥을 짓는 건 전기솥으로 해 먹는 것과는 맛과 영양 면에서 비교할 수가 없지요.”
안성주물은 용광로에서 섭씨 1,850도로 펄펄 끓는 쇳물을 받아 가마솥 모양의 거푸집(틀)에 붓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체에 무해한 솥을 만들고 있다.
고객과의 신뢰를 위해 명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포스코 철만 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이, 안성주물의 가마솥은 단골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구입하면 2~30년을 너끈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1995년경부터는 중국산 가마솥이 무분별하게 수입돼 유통되었는데, 중국산 가마솥은 값싼 잡철을 쓰고 놋쇠 두께가 얇아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가격이 저렴해 수요자들이 중국산 가마솥을 많이 찾는다고.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악조건에서 과연 회사와 공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새로운 수요를 찾는 것은 안성주물 4대 가업이 유지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인 듯 보였다. 김종훈 주물장과 김성태 대표는 무리한 유통보다는 가마솥의 ‘명품화’를 통해 고객이 찾아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거나 유통망을 넓히지 않고 수요에 정확히 맞추고 고객과 직접 거래하기 위해 노력해요. 신뢰가 구축된 고객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제품을 권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죠. 그리고 요즘엔 식당에서도 많이 찾는데, 생활형편들이 나아지면서 사람들이 외식을 많이 하고 몸에 좋은 것들도 많이 찾으니까 식당에서 가마솥에 밥을 많이 하거든요. 얼마 전부터는 미국에도 수출을 하는데, 재미교포들을 상대로 하는 한식당에서 우리 가마솥을 쓴다고 해요.”
안성주물의 자부심은 포스코에서 제작한 선철을 쓰는 데서도 나타난다. 김성태 대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적인 기술력으로 선철을 생산하는 포스코 제품으로 가마솥을 만드는 이유는, 우리 제품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예요. 단가가 싼 잡철을 쓸 경우, 명품 가마솥이 요구하는 최고의 품질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죠. 명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최고의 원자재를 써야죠.”
가마솥은 따로 용량이 없다. 안성주물은 현재 밥 한 공기 용량의 미니 가마솥에서 20공기 용량의 대형 가마솥까지 십여 종의 가마솥을 생산하는데, 안성주물의 가마솥 크기가 바로 우리나라 가마솥 용량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했다는 김성태 대표는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한순간도 몸을 쉬지 않았다. 용광로에서 1,850도로 녹인 쇳물을 받아서 거푸집에 붓는 그의 반복적인 동작에서 헌신과 열정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겨우 붙잡고 가업을 잇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증조부에서 아버지까지 이렇게 힘든 일을 이어오셨고, 그리고 그걸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보아왔는데, 이것이 끊기게 할 순 없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고객과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는 우리 제품에 대한 고객의 신뢰를 지키고 기대에 계속 부응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업을 잇기로 한 겁니다.”
달두고 녹이면 더욱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가마솥의 가르침을 전통으로 잇다
4대째 가업을 잇는 전수자의 소신 있는 이야길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김종훈 주물장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무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딱딱하고 거칠어 보여도 열을 가하고 다양한 주물에 넣으면 기대한 형태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딱딱해도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마솥은 무쇠를 달구고 녹여서 더욱 단단해진 솥이다. 이 솥에 무엇을 지어먹을지는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이 결정할 일이다. 누군가는 밥을 지어먹고 누군가는 곰국을 끓일 것이고 누군가는 누룽지를 끓일 것이다. 그 의도에 거짓됨 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무쇠와 가마솥의 가르침이야말로, 4대째 이어지는 안성주물이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안성주물 연혁
1910년대 증조부(김대선) 가내수공업
1930년대 조부(김순성) 주물공장 설립
1953년 부친(김종훈) 운영
1980년 계동마을로 공장 이전
2002년 8월 차남 성태씨 운영
2003년 9월 실용신안등록 ‘개량형 무쇠솥 뚜껑구조’
2003년 12월 경기도 ‘으뜸이’ 지정
2003년 12월 제28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입선(가마솥)
2006년 3월 김종훈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5호(주물장) 인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