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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7편. 생활 속의 사군자화

[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7편. 생활 속의 사군자화

2016/05/20

<사군자, 다시피우다>전 포스터

각 식물마다 타고난 특성이 군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사군자. 군자가 사랑한 네 가지 식물을 오는 5월 25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사군자, 다시피우다>전에서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데요.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는 사군자와 사군자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생활 속의 사군자화’라는 주제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사랑을 받았던 사군자는 문학이나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민화, 공예품 등 일반인들의 생활공간 깊숙이 파고들어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다채로운 형태로 활용되었습니다. 공예품이나 민화에서는 오랜 사군자화의 전통을 따른 것도 있지만, 문인들이 지향하는 바와 다른 대중들의 정서가 반영되어 재미있게 변형되거나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답니다.

공예품의 사군자 문양

<나전칠기매란무늬함> 19세기, 65*38*19cm, 개인 소장

사군자는 그 이미지가 갖는 품격과 도안화하기에 적합한 간결한 형태로 인해 각종 도자기나 생활용품에 즐겨 애용되었습니다. 나전칠기나 철제 그릇의 문양, 시전지판, 필통 등 목공예의 문양, 벼루나 화로 등 석공예에도 사군자는 애용되는 문양이었는데요. 네 가지 식물로 이루어진 사군자는 사각형의 네 면을 장식하기에 적합해 사각형의 필통이나 장식장의 각 면 등에 두루 사용되곤 했죠.

도자기에 사용된 사군자화는 무명 도공들이 그렸을 단순한 그림도 있지만, 전문 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수준급 작품도 있어 그 표현 양식도 다양합니다.

<백자철화매죽문시명호> 17세기, 높이 35.3cm, 지름 30.5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사군자무늬각병> 18세기, 높이 16.5cm, 개인 소장

17세기 작품으로 전해오는 <백자철화매죽문시명호>에 있는 매화는 산화철 안료로 매화 한 그루를 그린 것입니다. 이 도자기에 그려진 끝이 부러진 줄기에 새 가지가 곧게 난 매화도는 조선 중기에 유행한 매화도가 단순화된 모습입니다. 이 철화백자의 매화도는 반대편에 쓰인 시와 어울려 화폭을 보는 듯 단순화된 멋을 풍기죠.

<청화백자난초문필통> 19세기, 높이 16.0cm, 구경13.1cm, 저경 12.0cm, 리움박물관 소장 <청자상감국화문탁잔> 12세기 후반, 총 높이 12.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난 그림이 조선 후기부터 많아지는 것처럼, 도자기에 활용된 난 또한 18세기에 들어 많아졌습니다. 대부분 사군자의 하나로 그려지지만 단독으로 시문된 경우도 있습니다. 선비들이 즐겨 쓰는 필통, 연적 등 문방구에도 난 문양은 좋은 소재였습니다. 리움박물관 소장 <청화백자난초문필통>의 난은 하단에 지면을 상징하는 선 위에 굵고 가는 필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꽃 또한 농담을 살려 경쾌하게 그려 더욱 회화적인 느낌이 듭니다.

국화가 도자기 문양으로 그려진 예는 고려 시대부터 볼 수 있습니다. 상감청자에 시문 된 국화문은 청초한 들국화 모양입니다. 가는 선으로 파내 흑토와 자토를 메워 넣는 상감청자의 기법 상, 가는 선으로 표현이 가능한 들국화 문양은 매우 선호되는 문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자철화국화문호>17세기, 높이 13.8cm 호림박물관 소장 <백자진사죽문호> 18~19세기, 높이 20.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화꽃을 자세히 그려 넣는 경우도 있는데, 철화로 추상화된 국화를 그린 항아리는 투박한 선 맛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답니다. <백자철화국화문호>는 철화 안료로 간략하게 국화 네 송이를 그린 것인데요. 밑 부분이 좁아든 투박한 기형에 군데군데 태토가 드러난 소박한 형태의 항아리에 그려진 국화는 시대를 뛰어넘는 독특한 미감을 보여줍니다.

진사 안료로 그린 <백자진사죽문호>의 대는 청화 안료로 그린 대나무의 섬세함과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몰골법의 한 붓으로 줄기와 잎을 연이어 그린 듯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진하고 연한 농담의 차이가 자연스럽습니다. 붉은색을 띤 진사로 그려져 있어 송나라 때 소동파가 붉은 먹으로 자죽(紫竹)을 그렸다고 한 고사를 연상케 합니다. 소동파가 붉은 먹으로 대나무를 그리자 이를 본 지인이 “이 세상에 붉은 대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소동파가 “그럼 검은 대는 또 어디에 있느냐”라며 태연해했다는 것이죠. 그 후로 붉은 안료로 그린 자죽이 유행처럼 그려졌다고 합니다.

<은제비녀>19세기말~20세기초 , 길이 13.7cm/25.5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사군자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정절의 상징인 대나무나 매화는 규방 여인들의 자수 문양이나, 머리장식의 문양으로도 즐겨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축수(祝壽)나 벽사(僻邪)의 의미를 더하여 생활 곳곳에서 문양으로 쓰였습니다.

민화로 다시 태어난 사군자

사군자화는 특히 구도나 문양을 단순화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각종 민화의 장식에도 활용되었습니다. 민화의 사군자는 장식적 효과나 의미 변형이 주는 즐거움이 적지 않습니다.

<문자도 치> 팔폭병풍 중 종이에 채색, 50.8*29.2cm, 미국LA카운티미술관 소장

민화의 매화는 일반 묵매화 전통을 따르면서도 길상의 의미를 더하여 형태가 과장되거나 특이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라는 유교의 핵심 덕목을 강조한 <문자도(文字圖)>에서 매화는 장식적인 기능과 상징성을 나타내는 두 가지 기능을 다 갖추고 그려져 있습니다. ‘치(恥)’자의 검은색 글씨에 핀 연분홍의 꽃은 간결하면서도 장식적인 효과가 뛰어난데요. 또 ‘의롭고 염치를 아는 사람,즉 유교에서 말하는 완성된 인격자로서의 군자’라는 상징에 매화의 곧은 이미지는 그 의미를 더해줍니다.

필자미상, <장생도>19세기 가회박물관 소장

그런가 하면, 민화 <백동자도(百童子圖)>에서 매화는 다산(多産)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매화나무에 다래다래 열리는 매실은 그 수가 많은 것으로서 다산을 상징합니다. 일찍이 중국에서 매실을 던져 사랑을 구하던 습속에서도 사랑의 매개체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난은 독립된 소재로서 보다는 책가도나 장생도 중 자연의 일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거리(冊─)>에 그려진 난은 관상 가치가있는 여러 물건들을 배치해 사랑방의 품격을 높이는 그림의 한 켠에서 그 방주인의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담당하고 있는 듯합니다. 드물게 난이나 사슴, 바위, 불로초, 물과 같은 십장생류와 함께 장생 사상을 담아 그려지기도 합니다.

필자미상<화조도10곡병> 중 <국화>,종이에 채색 55*37cm, 리움박물관 소장

그에 반해 국화는 군자의 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책가도(冊架圖), 초충도(草蟲圖), 소과도(蔬果圖) 등 문인 취향의 민화에서도 빠지지 않는 소재였습니다. 《화조도10곡병풍》 중의 <국화(菊花)>는 괴석, 나비, 화려한 깃털의 꿩 등과 함께 그려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죠.

국화꽃도 여러 색이 어울려 있고, 형태는 크고 활짝 피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국화는 늦가을에 핀 고고한 상징보다는 아름다운 색의 꽃으로 부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함께 그려진 나비도 화려한 제비나비 한 쌍이며, 꿩도 암수 모두 화려한 색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꽃처럼 장식을 한 이끼 낀 바위도 넣음으로써 부부화합의 의미를 더하였습니다.

민화에 그려진 대나무는 일반적인 군자 이미지보다는 부귀 장수와 같은 길상적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전설에 따라 대나무와 봉황이 함께 그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봉황이 깃드는 곳이 오동나무이다 보니 오동나무와 봉황, 대나무와 봉황 혹은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함께 등장하기도 합니다.

필자미상(해산) <봉황도> 종이에 채색 102*37cm, 개인소장

민화 <봉황도(鳳凰圖)>는 그러한 내용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매우 평면적이면서도 봉황 깃이나 대나무의 죽간, 솔방울 등은 마치 공예품처럼 도안화되었는데요. 이 그림에는 ‘해산(海山)’이라는 민화에는 흔치 않은 그린 사람의 호와 싯구가 함께 적혀 있어 흥미롭죠. 더구나 대나무 한 줄기는 위가 잘려져 있어서 절의를 상징하는 부러진 대나무의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이처럼 민화 속에 사군자가 스며든 것은 한편으로는 사군자 문화가 그만큼 대중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그 의미 변용이 있기는 하였으나 민중들도 사군자의 정신적 가치를 공유할 만큼 민중의식이 상승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글 이선옥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Hello, 포스코 블로그가 전해드리는 사군자 이야기,
다음 시간에 전해드릴 마지막 편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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