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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4편. 맑은 향기 머금은 난 그림

[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4편. 맑은 향기 머금은 난 그림

2016/05/04

<사군자, 다시 피우다>전

군자가 사랑한 네 가지 식물을 말하는 사군자! 오는 5월 25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사군자, 다시 피우다>전에서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데요.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는 사군자 그림과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네 번째 이야기! 난과 난 그림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함께 보시죠~!

절제된 엄숙미

난은 꽃 중의 군자로 일컬어져 고결함을 상징하는 오랜 세월 동안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죠. 오늘날에도 동양화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시작할 만큼 필획의 기본으로 삼는 문인화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난은 고결한 덕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옛 문인들은 난 그리는 자세와 기법에 삼엄한 수칙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법식에 따라 그리는 것을 꺼렸고, ‘난을 친다’고 하는 것처럼 머뭇거림 없는 운필로 내면의 의취(意趣)를 표출하였죠. 따라서 묵란의 성패는 형태의 재현이라기보다 형상의 바깥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정, <묵란> (17세기, 비단에 금니, 크기미상, 《화원별집》소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정, <묵란> (17세기, 비단에 금니, 크기미상, 《화원별집》소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난 그림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나 기록에 의할 뿐 조선 초기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습니다. 본격적인 묵란 작품은 조선 중기 묵죽의 대가로 알려진 탄은(灘隱) 이정(李霆, 1541∼1622), 화원 화가였던 이징(李澄, 1581∼?), 그리고 목판화로 남아있는 선조(宣祖)의 묵란 등입니다.

이정의 <묵란(墨蘭)>은 검은 비단에 금물로 바람에 날리는 난 한 포기를 묘사한 것인데요. 좌측 하단 지면에서부터 화면을 꽉 채운 대각선 구도를 보이며, 비스듬히 길고 매끄럽게 뻗은 난엽은 좌우대칭으로 균형을 이룹니다. 중간중간 붓을 돌리듯 떼었다 다시 이어가는 삼전법(三轉法)으로 끊어질 듯 이어져 보일 만큼 필선의 굵기에 변화를 주었죠. 방사 형태로 뻗은 잎은 시원스러운 리듬감이 있고, 잎 사이에 짧게 세 송이 꽃을 그려 넣었는데요. 난 꽃은 정세하고 강한 필선으로 꼼꼼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징, <묵란> (종이에 먹, 29.8×2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징, <묵란> (종이에 먹, 29.8×2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징의 작품으로 전하는 <묵란(墨蘭)> 역시 이정의 묵란과 비슷한 형태감을 보입니다. 이징의 묵란은 현전 작품이 많지 않은 조선시대 전반기 난 그림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후에 보게 될 다른 작품보다는 좀  둔한 느낌을 주지만 고졸한 기품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징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문인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시 <난>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난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습니다.

난이 속세의 티끌을 묻히는 것을 싫어해 산중 바위 골짜기 물가에 홀로 피어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자태는 청초하고 향은 그윽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고고한 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난에 대한 오랜 찬사입니다. 잡풀 속에서도 그윽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난의 품격은 덕을 갖춘 사람과 같은 것이죠.

  • 如傀人間被俗塵     인간이 속세에 물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 叢生岩谷澗之賓     바위 골짜기 물가에 손님으로 살고 있네.
  • 雖有令色如嬌女     비록 고운 색은 아름다운 여인과 같지만
  • 自有幽香似德人     절로 향기 그윽하여 덕인을 닮았구나.

다채로운 변화 속의 격조

강세황, <선면묵란> (조선 후기, 종이에 수묵, 각 21.6×56.1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강세황, <선면묵란> (조선 후기, 종이에 수묵, 각 21.6×56.1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난 그리는 법에 의하면 난 잎이 자연스럽게 휘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당두(蟷頭), 잎의 끝을 뾰족하게 빼는 서미(鼠尾), 두 잎이 교차할 때 이루는 모양이 봉황의 눈과 같다 하는 봉안(鳳眼) 등 여러 법식이 있는데요. 이러한 기본 법칙에 따라 운필을 하되 화가들은 이를 나름대로 운용하여 각자 개성 있는 난을 만들게 됩니다. 같은 모양의 글씨를 쓰면서도 각자의 필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죠.

18세기 문인 강세황의 <묵란(墨蘭)>은 잎을 지나치게 빠르게 하거나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대여섯 개의 잎과 몇 개의 꽃으로 담담하고 소박하게 그렸는데요. 한자락 미풍이 살며시 지나간 듯 부드러운 잎은 단아한 격조를 살린 문인화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임희지, <난죽석도> (조선 후기, 종이에 수묵, 87.1×42.4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임희지, <난죽석도> (조선 후기, 종이에 수묵, 87.1×42.4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난은 군자의 꽃으로 불리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사람이나 미인의 향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 임희지(林熙之, 1765~?)의 난 그림은 마치 미인을 염두에 두고 그린 듯 빼어난 모습이 요염하기까지 하죠. 임희지의 <난죽석도(蘭竹石圖)>는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나온 괴석과 괴석 뒤로 뻗어 나온 대나무, 그리고 괴석 아래 활달하고 힘찬 난이 자신 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편에는 이 세 가지를 한 폭에 그린 뜻을 적었습니다.

“원장(元章)의 돌, 자유(子猷)의 대나무, 좌사(左史)의 난초, 이를 몽땅 그대에게 주는데 그대는 무엇으로 보답하려는가?”

원장은 북송 대 문인 화가인 미불(米芾)을 가리킨 자인데요. 그는 돌을 좋아하여 괴석을 향해 절을 하며 경의를 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유는 동진의 서예가 왕휘지(王徽之)로서 하룻밤도 대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묵을 수 없다며 처소에 대를 옮겨 심게 했다는 인물이죠. 좌사는 초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을 일컫습니다. 이들을 모두 한 폭에 그려 석(石), 난(蘭), 죽(竹)을 한 번에 준다고 한 호기로운 화제들이죠.

18세기 들어 난은 이전 시기에 비해 작품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화풍도 다채로워졌는데요. 강세황, 이인상, 임희지의 난 모두가 다른 느낌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들의 묵란에서는 새로 발간되어 우리나라에서 유통되었던 여러 화보들의 영향도 감지되지만, 화가 각각은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독특한 묵란화를 선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묵란화의 전성기

김정희, <불이선란> (종이에 수묵, 55×31.1cm, 개인 소장)
김정희, <불이선란> (종이에 수묵, 55×31.1cm, 개인 소장)

이전 시기부터 난 그림이 있었지만, 묵란에 일가를 이룬 전문 화가들이 나타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난을 잘 그렸을 뿐 아니라, 난법을 논하였고, 《난맹첩》을 통해 다양한 난법을 후배들에게 전하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그의 난법을 배운 조희룡(趙熙龍, 1789~1866),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등에 의해 우리나라 묵란화는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은 난 잎은 거친 붓으로 담담하게 몇 줄을 그었으나 바람을 맞아 한쪽으로 치우친 난의 초탈한 경지를 드러내는 듯하죠.

김정희는 이 그림에 스스로 쓰기를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문득 그려낸 것”이라 하였습니다. 가슴 속에 20년간 응축된 난의 실체가 이러한 모습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죠.

또한 이는 유마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설법하였던 선(禪)의 경지를 난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요. 그래서 이 난을 선과 난이 서로 둘이 아니라는 뜻의 ‘불이선란’이라고 합니다.

김정희, <시우란> (종이에 수묵, 23×85cm, 개인 소장)
김정희, <시우란> (종이에 수묵, 23×85cm, 개인 소장)

김정희는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난은 그림 그리는 법으로 해서는 안되며, 서법으로 난법을 삼아야 하며, 삼전법(三轉法)을 적절히 써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아들 상우를 위해 그려 주었다고 전해지는 그림이 <시우란(示佑蘭)>이죠.

김정희가 19세기에 양반 문인의 대표적인 화가라면 조희룡은 중인 화가들의 대표적인 화가였는데요. 조희룡은 김정희의 글씨체를 모방하기도 하였고 난 그림도 김정희의 난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김정희와 비슷하지만 조희룡의 글씨는 김정희 추사체의 각진 예서보다는 더 둥글고 부드러운 맛이 있습니다. 난 그림은 마치 난 잎을 들에 난 풀처럼 흐드러지게 그려 현란함과 화려함을 보여줍니다.

이하응, <석란도> (종이에 수묵, 149×66cm, 인주문화재단 소장)
이하응, <석란도> (종이에 수묵, 149×66cm, 인주문화재단 소장)

조희룡과 마찬가지로 김정희의 난 그림을 배웠다고 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화(墨蘭畵)>는 여러 형식을 보이는데요. 한두 포기의 난을 독립적으로 그리거나 다른 기물과 함께 그리기도 하였는데, 위아래로 긴 화폭에 몇 무리의 난을 바위와 함께 그린 형식이 가장 많습니다. 난엽은 잎 끝이 가늘고 변화가 심한 특징을 보이죠.

김정희 묵란의 투박하고 필획의 변화가 적은 특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김정희는 예서를 바탕으로 사란(寫蘭)을 한 반면, 이하응은 초서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찾기도 합니다.

가는 난이 절벽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모습은 김정희와 이하응의 필의(筆意)를 철저하게 따라 그렸던 김응원의 <묵란(墨蘭)>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그는 당시 이하응에게 들어온 그림 청탁을 대신 그렸다고 할 정도로 이하응과 유사한 면을 보입니다. 그러나 김응원의 묵란은 이하응에 비해 힘 있는 필선과 활달함으로 그만의 독자적인 경지를 보이죠.

민영익, <석란도> (종이에 수묵, 129.5×59cm,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장)
민영익, <석란도> (종이에 수묵, 129.5×59cm,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장)

같은 시기 민영익의 <묵란(墨蘭)>은 위태로운 나라를 등지고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그의 고뇌와 우울한 심경을 드러내는데요. 마치 잘린 듯 끝이 뭉툭한 난 잎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 같죠. 더구나 그의 묵란 중 뿌리를 드러낸 <노근묵란(露根墨蘭)>은 뿌리내릴 땅이 없는 나라 잃은 설움을 그대로 드러낸 듯합니다.

김정희, 이하응 등 19세기 대가들의 활약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 묵란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근래에는 난 재배법이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난을 기르고 여러 의미로 선물하기도 합니다.

풀숲 속에 묻혀서도 향기를 발하던 옛적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난 잎의 빼어남과 꽃의 고결함으로 맑고 향기롭게 살려는 사람들의 이상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Hello, 포스코 블로그가 소개해 드리는 난과 난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다음 편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

글 이선옥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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