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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2편. 사군자 고사(故事)와 고사화

[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2편. 사군자 고사(故事)와 고사화

2016/04/20

 

사군자, 다시피우다

사군자가 유명해진 것은 사군자에 얽힌 옛 문인들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죠.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화(故事畵)는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고사의 주인공인 문인들을 흠모했던 후대인들에게 사군자의 의미를 더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 연재하는 포스코미술관 사군자 특집 2편! 사군자에 얽힌 옛 문인들의 고사(故事)와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화, 함께 보시죠~!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아

심사정<파교심매도> 조선 1766년 비단에 담채, 115*50.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희룡,<매화서옥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담채, 130*3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매화에 군자의 상징성이 더해진 것은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탐매(探梅) 고사’ 때문인데요. 그는 한 겨울, 그 해 맨 처음 피는 매화를 찾기 위해 눈 내린 산속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탐매는 이후 많은 문인들에 의해 선비의 멋이자 풍류로 여겨졌죠.

‘탐매 고사’ 이후 매화는 북송대의 시인 임포(林逋, 967∼1028)의 이야기로 은일의 상징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임포는 오늘날 중국 항주 서호의 고산(孤山)에서 매화를 심어 감상하고 매화시를 읊으며 살았는데요.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를 아내 삼고[梅妻], 학을 아들 삼고[鶴子], 사슴을 심부름꾼[鹿家人] 삼아 20년 동안 성시에 내려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삶 때문에 임포의 이야기는 은거를 꿈꾸는 많은 선비들이 이상으로 여겼는데요. 맹호연의 탐매 고사는 <탐매도> 또는 <파교심매도>로, 임포의 고사는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나 <매감도(梅龕圖)> 라는 이름으로 즐겨 그려졌습니다.

굴원(屈原)의 충성심을 상진하는 난

정사초,<묵란도> 중국 남송, 종이에 수묵 25.7*42.4cm, 일본 오오사카 시립미술관 소장

난이 군자의 식물로 애호된 것은 이미 공자(기원전 551∼479)가 살던 시대부터입니다. 시경의 「유란조(幽蘭操)」라는 시에서 공자는 뜻을 펼칠 때를 만나지 못한 답답한 심정을 뛰어난 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잡초에 섞여 자라는 난에 비유하여 읊었다죠.

향기와 아름다운 자태로서 애호되던 난은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 기원전 343∼278)에 의해서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임금에게 한 충간(忠諫)이 용납되지 않자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은 충신 굴원이 장편서사시 「이소(離騷)」에서 넓은 땅에 난을 심었다고 한 것인데요. 그의 충성심이 난에 투영되면서 난은 곧 절개와 충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후 원나라 초기에 정사초(鄭思肖, 1239∼1316)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한 포기 외로운 난으로 표현하였는데요. 이로써 난은 더욱더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죠.

귀거래사를 읊은 도연명이 좋아한 꽃

장승업, <원랑애국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담채, 128.8*31.7cm, 개인소장

국화가 문인들의 애호를 받은 것은 육조시대 전원시인 도연명(365-427)과 관련이 깊습니다. 도연명은 자기의 뜻을 굽혀야 하는 관직 생활을 참지 못하여 80일 만에 사직하고 돌아오며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글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 글에서 그는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고 함으로써 국화에 대한 애틋함을 노래하였습니다.

「음주(飮酒)」라는 시에서도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 꺾어들고,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네.”라 읊었는데요. 자신을 저버리며 사는 것이 싫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관직을 버리고 떠났던 용기, 국화는 도연명의 그런 정신을 대변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문인들이 국화를 좋아한 것은 역경을 이겨내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인고의 정신과, 도연명에서 연상되는 은일 정신 때문이었는데요. 장승업의 <원량애국도>는 도연명과 국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원량은 도연명의 자(字)이죠.

고기없이는 살아도 대나무 없이는 살 수 없어

대나무는 일찍이 시경(詩經)에서 ‘군자’로 칭송되었습니다. 주나라 무공(武公, B.C.811∼757)

필자미상,<왕휘지애죽도> 비단에 채색, 105.5*60.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의 높은 덕과 인품을 대나무의 수려한 모습에 비유했죠. 이후 3세기 중엽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을 은거처로 삼아 청담(淸談)을 주고받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는 군자로서의 대나무에 더욱 강직한 이미지를 더해주었습니다.

진(晉)나라 때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아들 왕휘지(王徽之, 344∼388)는 “이 사람[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겠는가?”라며 대나무를 실제 혼이 통하는 것 같은 인격체로 부르기도 하였는데요. 그는 대나무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며 머무는 곳에 대나무가 없으면 반드시 옮겨 심은 다음에야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 천 년 동안 대나무를 고상하게 부르는 이름 ‘차군’은 이에서 비롯되었는데요. 현세의 욕심에서 벗어나 대나무를 통해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한 왕휘지의 경지는 오랫동안 파장을 불러오며 선망되었죠.

대나무를 통해 정신적 안존을 추구한 인물로 송나라 때 시인 소식(蘇軾, 1036∼1101)을 빼놓을 수 없다는데요. 그는 시에서 “고기 없이 밥은 먹을 수 있으나, 대나무 없이 살 수는 없다네.”라 하여, 고기반찬으로 상징되는 부귀와 대나무로 상징되는 맑은 덕을 다 가질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맑고 깨끗한 덕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소동파를 비롯한 북송대 문인들의 대나무 예찬은 시각적 형상화로 이어져 송대 이후 묵죽화의 대대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60여 수의 매화시로 『매화시첩』을 엮은 이황(李滉, 1501∼1570)을 비롯하여, 사군자를 좋아한 많은 문인들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매화를 무척이나 좋아한 매화 화가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수십 종의 국화를 길렀다는 18세기 김노인(金老人)의 이야기 등은 그 이야기 자체로서도 흥미롭지만 사군자화의 발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포스코미술관 전시 안내

  • <기획전 – 四君子, 다시 피우다>
  • · 전시 장소 :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440 포스코센터 지하 1층 포스코미술관
  • · 전시 기간 : 2016.3.30(수) ~ 2016.5.25(수)
  • · 관람 시간 : 월-금 10:00~19:00, 토 12:00~17:00
  • · 전시 해설 : 12:30, 15:30(일 2회)

글 이선옥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 소개해 드린
사군자의 고사와 고사와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포스코미술관에서 옛 문인의 정신을 음미하는 시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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