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글 보기
텅빈 로봇이지만 희망으로 채워주는 영웅
십오륙 년 전 태권브이 부활프로젝트가 진행된 적이 있었다.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좌절한 이들에게 영웅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김청기 감독의 만화영화 ‘로봇 태권브이’가 디지털로 복원되어 개봉되기도 했다. 김택기 작가도 다르지 않았다. 태권브이는 작가 스스로 위로받으려 시작한 작업이었다.
<철이철철> 기획전에 전시되었던 태권브이 휴먼 시리즈인 <색소폰 연주자>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등은 3D그래픽 기법의 디지털 드로잉 과정을 통해 디자인하고 스틸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면을 이용하는 여느 입체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선(線)을 이용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라인으로 작업하면 메탈 특유의 강력함이 줄어든다. 휘어지기 쉽다는 단점 또한 강점으로 작용한다. 안이 비어 있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데 ‘비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삶의 자세뿐 아니라 종교까지 엿보이는 부분이다.
우리의 영웅 태권브이는 늘 정의를 구현해왔다. 태권브이의 활약에 열광하면서 그 방법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지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김택기 작가는 로봇 태권브이를 천하무적의 이미지로 다루지 않는다. 선을 이용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선으로 작업한 결과 우리 기억 속 태권브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도 폭력적인 요소를 덜어낼 수가 있었다.
△ 강철로 만들어진 태권브이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만든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차가운 로봇과 따뜻한 음악이 만나다
“로봇의 형상을 빌려왔지만 결국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악기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음악은 천사의 말입니다. 인간의 범주가 아니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 음악 연주를 로봇이 하게 함으로써 이질적인 것이 충돌할 때 생기는 또다른 감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클래식 악기였을까.
“클래식 악기는 조형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워요. 악기를 연주하는 태권브이 앞에 서면 관람자들은 자신만의 선율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그 음악이 클래식 음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태권브이 시리즈를 정리하면서 교향악을 연주하는 태권브이 오케스트라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언어 이전에 음악이 있었다. 음악은 언어와 이념을 뛰어넘는다.. 뇌리 속에 흐르는 각자의 선율, 어떤 음악이든 그것은 천사의 말일 것이다. 비어 있는 몸통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꽉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영웅을 통해 지금의 현실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상반된 것들이 부딪히면서 제3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태권브이 뮤지션의 첫 작품을 만들었을 당시 그는 슬픔이라는 감정 때문에 한동안 다른 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 단단하지만 불을 만나면 부드러워지고 다시 강해지는,
어렵고 투박한 철 작업 과정을 좋아한다는 김택기 작가의 작업 모습.
강철의 선을 두드려 따뜻함을 불어넣다
그의 관심은 인간의 원형과 존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런 그에게 철은 그가 작품 구상 단계에서부터 빼놓지 않는, 작품의 과정 중 일부이다. 단단하지만 불을 만나 부드러워지고 다시 강해지는, 어렵고 투박한 그 과정이 늘 좋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 그는 알자스 지방에 흩어진 폭탄 파편을 모아 작업을 했다. 알퐁스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로 잘 알려진, 그곳이다.. 곳곳에 강력하게 저항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 파편들을 모아 그는 다마스쿠스 기법으로 작품들을 만들었다. 다마스쿠스 기법은 일명 검을 만드는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 베이고 잘 부러지지 않아야 하는 장점만을 취해야 하는 기법이다. 연성이 강하면 잘 구부러진다, 탄성이 강하면 잘 깨진다. 철의 성질을 이용해서 샌드위치처럼 접고 쌓아 누르고 다시 그러기를 여러 번, 어느새 재미있는 무늬가 나타난다. 과정이면서 동시에 형태도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에너지-생명>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을 무기의 파편으로 생명의 근원인 정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주제를 엿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그는 여전히 라인을 통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태권브이 시리즈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성의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선을 두드려 따뜻함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색소폰 연주하는 신사> 등의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들은 훨씬 더 드로잉에 가깝게 보인다.
그에게 라인이란 풀리지 않는 과제이고 풀고 싶은 과제이다. 문득 그 말이 선(禪)과 선(善)으로 들린다. 그에게 라인은 방법이고 곧 지향점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라인으로 풀어내야 할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그가 수천 개의 라인들 앞에서 고민하는 것은 어느 순간에 손을 떼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보태고 빼는 단 한 개와의 싸움이다. 그는 늘 그렇게 자신을 임계점까지 몰아붙인다.
다시 문 이야기이다. 전시실 붉은 문 양옆에 선 것은 태권브이이다. 오래전 그 자리에는 사천왕상들이 서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서 악귀를 물리쳤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수호하는 것은 음악이다. 천사의 말이다. 그 문을 통과하면, 저 멀리 불을 밝힌 홍등이 보일지도 모른다.
△ 다마스쿠스기법으로 작업한 <에너지-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