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흔히들 제철소를 산업의 심장이라고 한다. 철강이 현대문명을 지탱하는 소재이고, 이 소재를 제철소가 생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잘 때조차도. 제철소도 마찬가지다.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고로 특성상 제철소를 심장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또 하나가 있다. 단 한순간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그것. 바로 제철소의 전기다. 고로를 포함한 제철소의 모든 설비는 전기를 먹고산다. 즉, 전기는 심장을 뛰게 만드는 혈액이다. 혈액이 흐름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동작을 멈춘다.
그 전기공급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이가 바로 정규점 명장이다. 식사도 제때 챙기지 못하는 일이 빈번한 만큼 제철소 구석구석을 누비며 전력 업무에 매진하는 그에게서 분주함이 묻어난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제철소 곳곳에서 그의 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벨이 연달아 울렸다. 그러나 인터뷰에 응하는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기술지원을 위한 터키 출장을 마치고 입국한 게 9월 3일이었습니다. 그즈음 태풍 힌남노가 국내에 상륙했습니다. 9월 5일 출근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철야근무를 하는데 동이 틀 때까지만 해도 무사히 넘어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설비기술부 지하 전기실에 물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직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물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더군요. 이번에는 2열연공장 변압기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에너지부 ECC에 상황을 알아보니 수전변전소가 침수돼 제철소 전체가 정전됐다는 겁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제철소 전체 정전이란 건 포항제철소 역사상 들어본 적이 없는 사태니까요.
현장으로 가려고 차를 몰고 도로로 나섰지만,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사무실로 들어와서 수전변전소 복구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그때부터 며칠간 철야작업을 해 일단 수전변전소부터 안정시켰고, 고로와 선강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압연 변전소 복구까지 약 8~9일 정도 숨 가쁘게 복구에 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큰불은 어느 정도 끌 수 있었지요.”
그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은 과로에 따른 피곤함 때문이었을까? 왠지 그의 말에서 보다 근본적인 ‘마음의 짐’이 느껴졌다.
“입사 이후 전기 하나만 붙들고 어떤 트러블 슈팅도 문제없다고 생각해왔고 자신도 있었는데, 이런 사태를 겪으니 무력감이 들더군요. 제가 뭔가 더 잘 준비하고, 대비했어야 했나, 하는 그런 질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전기공급이 안돼 멈춘 공장도 문제였지만, 피해복구를 하려면 물을 퍼내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이 역시 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 모든 사태를 겪고 전기가 제철소 전체를 움직이는 처음이자 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중요한 건데….”
우리는 알고 있다. 포스코는 정말이지 최대한의 대비를 했다. 만일 미리 전기설비를 멈추어 두지 않았다면 침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재가 닥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규점 명장의 마음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잠시였지만 제철소의 혈액이 그 흐름을 멈추었고, 심장조차 고동을 멈추었다. 그 한가운데서 사투를 벌였던 그. 피해는 어느 정도 회복됐으나 명장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은 것이다.
정규점 명장이 맡고 있는 업무는 수변전(受變電) 관련 업무이다. 수변전이란 한국전력이나 자체 발전소가 생산해서 보내준 전기를 받아 각 공장에서 사용할 수 있게끔 변전해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제철소 모든 곳, 생산시설은 물론이고 생활지원시설에서 사용하는 모든 전력은 이곳을 통해 공급된다. 그러니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제철소 모든 곳이 영향을 받는다.
그가 이러한 전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마산공고 전기과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정규점 명장도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는 빨리 기술을 배워 취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고진학을 결심했다. 그 와중에도 소년 정규점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중화학공업의 요람인 창원공단과 인접한 마산공고에 입학했다.
꿈은 분명했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포스코에 입사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가 좀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등록금. 그래서 직장생활을 해가며 돈을 모아 늦게나마 공업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전기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한 뒤에야 그는 동경했던 포스코에 입사를 지원했고, 합격했다.
배움에 대한 남다른 갈망은 그를 현장의 해결사로 만들었고, 또 명장으로 이끌었다. 정규점 명장은 늘 현장의 문제와 맞닥뜨릴 때마다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근원을 파고들려면 생각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다.
“1992년에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더라고요. 창원기능대학에서 공부할 기회요. 제안을 받자마자 수락했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물론 배우는 것은 좋지만 현장에서 일하다가 공부를 하려니까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시작한 거니까 끝을 보자는 생각에 수업 시간에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녹음하고, 저녁에는 노트에 적은 강의내용을 정리해서 외웠습니다.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렇게 하니 결과가 좋더군요.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습니다.”
기능대학에서 돌아온 그의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문제들이 밀려든 것이다. 단, 조그만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다. 만약 실수를 할 경우 부분적 설비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블랙아웃(Blackout, 정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실수의 결과는 이처럼 치명적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론적인 배움을 현장에서 적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정규점은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갔다.
트러블 슈팅, 말 그대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일상이다. 이번 힌남노 사태처럼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럼 그가 기억하는 문제해결 상황은 또 어떤 게 있을까?
“2016년으로 기억합니다. 아시다시피 경주에 큰 지진이 났었지요. 규모 5.8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뉴스에 경주 시내 상가의 유리가 깨지는 장면이 많이 보도됐어요. 그런데 지진 규모가 꽤 크다 보니 포항에도 그 여파가 미쳤습니다. 포항제철소 3제강공장에 피해가 생긴 건데요. 전력공급용 메인 변압기 2대가 타서 손상됐고, 정전이 뒤따랐습니다. 조업도 스톱됐지요. 복구는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해야 했습니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피해가 커지고 그 여파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에 일단 직원들을 모아서 비상대책회의를 열었지요.”
이때 정규점 명장은 3제강공장에 비상변압기를 설치하고 운용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를 포함해 많은 직원들이 저녁 8시부터 복구작업에 들어갔다. 복구를 마치고 보니 아침 6시가 돼 있었다. 사고가 터지고 11시간 만에 비상조업을 할 수 있게끔 전력설비를 복구해낸 것이었다.
“사고가 나면 안 되지만 사고가 터지고 이렇게 고생해서 복구해 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습니다.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포스코인의 저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런 뿌듯함을 실제로 느끼는 거죠.”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응급복구를 한 뒤 3개월은 비상조업 형태로 조업이 이루어졌고, 신품 변압기가 2대 들어옴에 따라 변압기를 신품으로 교체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상’이라는 딱지를 떼고 ‘정상’적인 조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규점 명장의 진가는 이럴 때 발휘됐다. 신품이 들어왔다고 또 조업을 멈추고 변압기를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 이에 정규점 명장은 신품 변압기와 기존 변압기 3대를 병렬로 운용하면서 정전 없이, 조업을 이어나가며 변압기를 교체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해냈다. 놀라운 아이디어였다. 이론적 뒷받침과 경험 등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정규점 명장의 트러블 슈팅 목록에는 이런 일이 허다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했거나,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좀 마땅치 않게 보기도 한다. 자신만큼 노력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정규점 명장은 요즘 후배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후배들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정말 똑똑하죠. 우리 때와는 다릅니다. 다만 시대가 변한 까닭에 세대 간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문제는 우리 같은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우리처럼 해라, 라고 강요하는 것은 실효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는 가정보다 회사를 우선시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회사를 앞세웠잖아요. 그런데 지금 젊은 세대에게 그때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너희들도 그래야 한다’고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젊은 세대는 스마트해졌으니 이제 선배들도 그러한 점을 최대한 살려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죠. 그게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성장과 발전이 개인의 성장, 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고 정규점 명장은 말한다. 개성도 좋고, 워라밸도 좋지만 회사가 없다면 다 소용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유롭게 나는 새들도 하늘이라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도 맑은 물이 존재해야 하는 법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회사라는 일터는 개인의 성장, 개인의 행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본 토대, ‘하늘’과 ‘물’이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인재창조원에서 한 해에 200시간 정도 후배들에게 기술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하면서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후배들과는 또 다른 후배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들에게는 되도록 꿈과 비전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도전하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면서요. 그리고 그 도전의 근간은 공부라는 말도 빼놓지 않습니다.”
정규점 명장이 공부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관계다. 그래서인지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칭찬하기 바쁘다. 보통 인터뷰를 할 때 자신이 명장이 될 수 있었던 업적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대부분은 공적을 한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규점 명장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저런 도움들 받았다며 이야기들을 많이 해줘서 소문이 나면서 명장이 된 케이스입니다.”
정말이지 그에 대한 칭송은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최근 출장을 다녀온 터키에서도 그의 미담은 끊이질 않는다.
“POSCO ASSAN TST입니다. 저희는 공장 메인 전원을 공급하는 장치에 이상이 있어 자체적으로도 점검을 하고 터키 내 전력계통 관련 업체 진단도 받았습니다만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터키 내 외부 전문가 섭외에도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규점 명장님이 5일간 현장에서 현지 직원들과 함께 설비점검 및 진단을 하며 문제점을 확인하고, 조치 및 마무리까지 완료해 주셨습니다. 저희가 겪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주셔서 저희로선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장을 돌아다녀도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정규점 명장이 문제를 해결해 준 데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기술적 문제 해결만으로 이런 관계가 형성됐다는 것은 명장의 겸손일 뿐, 그게 다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반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현장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필수다. 문제해결에 능하다는 것은 현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고, 그것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스스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규점 명장은 현장과의 소통, 현장에 대한 이해를 위해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무수한 노력 끝에 말이다. 인터뷰 말미 정규점 명장은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정규점 명장의 도전은 이렇게 다시 한번 큰 고개를 넘고 있었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4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신승철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
7편 : 포항제철소 후판부 이영춘 명장
8편 : 광양제철소 화성부 김제성 명장
9편 :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 명장
10편 : 포항제철소 제강설비부 남태규 명장
11편 : 광양제철소 제선부 배동석 명장
12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명장
13편 : 저탄소공정연구소 한병하 명장
14편 : 광양제철소 압연설비부 김종익 명장
15편 : 광양제철소 도금부 손병근 명장
16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손광호 명장
17편 : 광양제철소 열연부 김용훈 명장
18편 : 포항제철소 STS제강부 김공영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