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김공영은 어린 시절 재주가 많은 소년이었다. 88올림픽 꿈나무 수영 선수로 뽑혀 지역대표로 대회에 나가기도 했고, 그림도 곧잘 그려서 미술부 선생님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예체능에만 뛰어난 게 아니라 공부도 잘해서 교과성적도 1등을 도맡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에 학비 걱정을 덜고자 포철공고로 진학했다. 제강과에서 공부했는데 곧 학과에서 자격증이 제일 많은 학생이 되었고, 졸업할 때는 과 수석을 했다.
그는 운명에 끌려다니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인생을 개척했다. 이제는 최고의 기능인이 된 다재다능한 소년,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김공영 명장의 본래 꿈은 기능인이 아니었다. 행정고시를 보고 공무원이 돼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의 인생을 공무원의 궤도가 아닌 기능인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 계기는 바로 포스코 1호 기성(技聖), 연봉학 기성과의 만남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롤 모델이 돼줄 수 있는 기능인으로 연봉학 기성을 초청해 강연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의 강연을 들은 김공영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본 것 같았다.
“당시 연봉학 기성에게선 말로는 다 표현해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눈부신 오라(aura)를 봤다고 해야 할까요? 두보(杜甫)와 같은 시성(詩聖)이나 베토벤과 같은 악성(樂聖)은 들어봤지만 기성(技聖)은 처음 들어봤죠. 그런데 그 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온갖 역경을 딛고 100톤 전로를 국산화해낸 기성의 선명한 발자국을 좇아서 ‘나도 철강 장인(匠人)이 돼보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된 겁니다.”
그렇게 포스코에 입사해 처음 근무를 하게 된 곳이 포항제철소 2제강공장 전로계였다. 모든 게 신기했다. 알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빨리 배워서 선배들처럼 능숙한 기능인이 되고 싶었다. 금방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솟아올랐다. 운동이든 미술이든 공부든, 뭐든지 잘했던 그였기에 기술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마스터할 것 같았다. 의욕은 좋았지만, 너무 마음이 앞서간 걸까?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사고를 한 건 제대로 저질렀다.
“당시 제강공장에서는 전로의 용강을 래들에 붓고 나면 탈산제로 탄소가루인 ‘가탄제’를 용강에 투여해 용강 속의 산소를 제거했어요. 그런데 그 양이 꽤 많아서 선배직원이 지게차로 래들 근처까지 자루에 든 가탄제를 옮겨 놓으면, 저 같은 미숙련 작업자가 가탄제를 던져 넣기 좋게 정해진 장소에 세팅해서 쌓아놓아야 했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지게차로 옮겨오는 것도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지게차를 모는 선배를 보니까 사실 좀 부럽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었지요. 허락도 받지 않고 제가 지게차를 운전해서 가탄제를 옮겨놓는데, 막상 운전해 보니까 앞이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운전해서 가려는데 차가 잘 안 움직이는 거예요. 지게차 포크가 앞에 있는 출강구 슬래그 컷팅 머신(TCM)의 케이블에 걸렸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기동을 하니, 결국 케이블이 끊어졌지요. 그때가 한참 더울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고복구를 해야 했습니다. 4시간가량 설비 가동을 멈추고 비상조업을 했죠. 혼도 많이 났지만, 제 스스로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배운 것도 많았죠. 나 한 사람의 실수로 중요한 설비가 멈추고, 주변 동료들이 피해를 봤으니까요.”
사건 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도전을 거듭해 나갔다.
“제가 도전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상황이 도전을 하게끔 부추기는 것도 있었지요.”
실제로 그랬다. 제강부에서 근무하던 겨우 입사 2년 차에 불과했던 그가 불려간 곳이 바로 STS제강부였으니 말이다. 막 공장을 지으면서 조업대비 요원으로 사람들을 뽑아갔는데, 당시 스테인리스는 포스코로서도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었던 분야다. 김공영은 스테인리스 분야에서는 창립요원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가야 하는 곳에 갔으니 손에 닿는 일 모든 것이 다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힘들어도 그런 도전적인 환경이 내심 좋았다.
“제가 기능인다운 기능인이 된 것은 5년 차쯤 되어 취련 직무를 맡으면서부터입니다. 스테인리스 취련은 관련 지식이나 노하우도 풍부해야 하고, 여러 가지 요소를 모두 고려해서 순간적으로 최적의 판단을 하는 능력도 필요한 분야입니다. 요즘 말로 멀티태스킹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할까요? 그런 면에서 제 적성에 딱 맞는 분야였고, 제게 많은 기회를 줬습니다.”
그렇다면 김공영 명장은 어떻게 취련 분야에서 남과 비교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기능인이 됐을까? 그가 늘 ‘최고의 품질’에 더해 ‘최저원가’를 고려한다는 점 때문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연간 25만 톤에 달하는 스테인리스 핫 코일을 수입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포스코는 1990년 스테인리스 일관생산체제를 구축, 스테인리스 국산화에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스테인리스는 녹이 슬지 않고, 외관이 미려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철강재로 각광을 받고 있었기에 장차 포스코의 미래를 짊어질 기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문제는 기술이었다. 스테인리스강은 생산과정에서 니켈, 크롬 등 고가의 소재가 많이 소요된다. 녹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워낙 비싼 소재들이다 보니 제조원가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그런데 1990년대 초는 니켈 가격이 폭등하면서 제조원가에 대한 부담이 한층 높아진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김공영 명장은 원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허용범위 내에서 값비싼 소재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품질을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력은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하는 게 더 급선무인 상황이었다. 니켈 등 비싼 소재를 허용범위 내에서 최대한 적게 사용하는 조업방식은 기술과 노하우가 완벽하게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위험한 방식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품질문제가 없도록 보수적으로 비싼 소재를 활용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김공영 명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보수적이고 관성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발전이 없지요. 늘 해오던 방식, 매뉴얼에 있는 방식만 고집하면 어제의 방식이 오늘의 방식이 되고, 오늘의 방식이 내일의 방식이 되겠죠. 세월이 흘러도 똑같은 방식만 되풀이할 뿐, 변화도 발전도 없을 겁니다. 만일 그 방식에 허점이 있다면 허점까지도 계속 대물림되겠지요.”
보수적인 작업 방식을 외면하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과가 잘못되면 책임은 오롯이 도전한 자의 몫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부했고 그래서 자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김공영 명장의 능력과 자신감은 ‘탈산적중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테인리스 취련을 할 때 쇳물 속의 탄소를 제거하려면 산소를 불어넣어 탄소를 태우면 된다. 탄소가 산소와 잘 결합해서 일산화탄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산소는 크롬(Cr)과도 잘 결합한다는 것이다. 크롬은 비싼 소재고 또 태워 없애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크롬과 결합한 산소는 슬래그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데, 그러면 다시 실리콘(Si) 같은 탈산제를 활용해 산소를 크롬 등으로부터 떼어내야 한다. 그렇다고 실리콘 같은 탈산제를 여유 있게 투입할 수도 없다. 실리콘 등은 최종 제품에 허용 값 이상으로 있으면 안 되는 성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롬 등과 결합해 있는 산소량을 정확히 알고, 탈산제를 적정량으로 알맞게 사용해야 한다. 이 양을 추정해 내는 것이 바로 ‘탈산적중률’이다. 그가 나서기 전까지는 작업자가 경험을 바탕으로 그때그때 계산해야 했다. 계산이 어려워 틀리는 경우도 많아서 탈산적중률은 65%에 불과했다. 김공영 명장은 계산 과정의 자동화 모델을 개발했고, 그렇게 끌어올린 적중률은 무려 90%까지 올라갔다. 우수제안 2등급을 받은 데 이어 특허출원에도 성공했다. 입사 16년 차에 이룬 성과였다.
“저는 자신이 있었지만 취련 업무를 담당했던 직원들은 이 모델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몇 직원들이 먼저 이 모델을 적용해 보도록 설득하고, 그 결과치를 가지고 나머지 직원들도 설득했죠. 이젠 모두가 이 모델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운명은 도전을 원하는 자를 그냥 두지 않는 걸까? 김공영 명장이 STS 4제강공장 파트장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또다시 거대한 도전의 물결이 밀려왔다. 포항제철소의 STS 4제강공장은 가장 최근의 STS 제강공장인 동시에 가장 낡은 제강공장이기도 하다. 탄소강 신제강공장(현 3제강공장)이 준공되면서, 1제강공장을 리뉴얼해 STS 4제강공장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STS 4제강공장은 STS 2, 3제강공장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2, 3제강공장은 스크랩을 사용하는 전기로인 반면에 4제강공장은 고로 용선을 사용하는 전로, ‘전기로’가 아닌 전로지요.”
여기서 생기는 문제가 바로 ‘온도’다. 일반적으로 스테인리스제강에 크롬이 많이 쓰이는데, 크롬도 별도로 생산한 용선의 형태로 투입한다. 그래야 온도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STS 4제강공장은 기존의 탄소강 1제강공장을 활용하다 보니 크롬 용선을 만들어낼 공간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롬 자체를 투입하는데, 뜨거운 용선으로 투입하는 게 아니다 보니 고질적인 열원 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도한 방식이 ‘유도용해로’ 방식이었다. ‘유도용해로’는 중국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인데, 유도전류를 이용해 크롬을 녹여서 용선으로 만드는 설비다. 작게 만들 수 있어서 공간이 절약된다는 장점이 있는데, STS 4제강공장은 그나마의 공간도 확보할 수 없었다. STS 4제강공장에 필요한 크롬 용선을 생산하려면 유도용해로를 6기는 설치해야 했지만 허락된 공간은 2기를 설치할 정도의 공간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2기의 유도용해로를 설치하고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설비를 운영해야 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유도용해로를 무리하게 가동하면서 내부 내화벽돌이 상하고, 결국 내화벽돌 바로 뒤편의 코일도 손상됐다. 게다가 코일을 냉각하던 물이 유도용해로 내부로 흘러 들어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작은 사고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유도용해로 방식은 STS 4제강공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 반증됐다.
“유도용해로란 설비 자체가 우리에게는 낯선 설비였고, 중국의 슈퍼바이저도 적절한 가이드를 못해준 상태라 사고는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긴 했지만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STS 4제강공장 설비들은 이 사고로 다섯 달 동안이나 가동이 여의치 않았으니 피해도 컸고요. 유도용해로가 아닌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결국 김공영은 유도용해로 없이 전로 단독으로 스테인리스강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저가 탄재류와 전로 배가스를 이차 연소한 열을 이용해서 열원을 보충하는 방식이었다. STS 4제강공장은 이 기술을 통해 80만 톤 이상의 스테인리스강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한다. STS 4제강공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크롬용선을 사용하지 않는 STS 제강공장이면서, 세계 어느 제철소에도 없는 기술력을 갖춘 공장이란 타이틀도 갖게 되었다.
쇳물은 그에게 또 한 가지 문제를 던져줬다.
“전로 노 입구 부분에 자꾸 슬래그가 끼어 입구가 좁아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슬래그를 ‘지금(地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노 입구가 좁아지면 원료를 투입할 때 원료가 튕겨서 튀어나오기도 하고, 노구가 무거워져 전로를 회전하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당시 이 문제는 노구에 뚜껑을 덮고 열을 가해 지금을 용해해서 제거하는 식으로 해결했는데, 이 작업을 해내려면 생산을 멈추고 전로를 세워야 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해도 용해가 잘 되질 않았지요. 더구나 이때 사용하는 뚜껑은 소모품이라 원가부담도 컸습니다.”
노구의 지금은 작업이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돼야 했다. 그래서 김공영은 지금 처리를 전로의 가동을 멈춘 상태에서 따로 하지 말고 조업의 일환으로 해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어차피 전로 내에는 탄소를 제거하는 과정인 ‘탈탄’을 할 때 가스가 나온다. 그 가스는 일부는 부생가스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일산화탄소(CO) 농도가 낮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굴뚝에서 태워서 없애버린다. 그 작업을 전로 내에서 하되, 노구 부분에서 태워 없애면 그때 발생된 열로 지금도 녹여 없앨 수 있다. 그것이 노구 지금 문제 해결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김공영 명장은 또 하나의 고질적인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낸다.
이 ‘전로 노구 지금 용해 기술’은 2018년 김공영 명장에게 우수제안 1등급의 영예를 안겨준다. 이 우수제안은 스테인리스 분야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1등급 제안으로서 2년에 걸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그의 자랑이자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심지가 굳은 김공영 명장도 흔들릴 때가 있었다. 공무원의 길을 걷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했을 때 마음이 흔들렸었다. 그때 그를 잡아준 것이 연봉학 기성이 보여준 ‘기능인의 길’이었다. 또 한 번의 흔들림이 더 있었다. 입사 초기 마냥 앞서나가는 그의 의욕과 넘치는 에너지가 견고한 조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고민했었다. 그때 김공영 명장을 잡아 세워주었던 것은 단 네 개의 글자였다.
‘우수천석(雨垂穿石).’ 빗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다. 단기적인 성과를 원하는 조급한 기대로 삶을 긴 호흡으로 보기 어려울 때, 옆에 두고 마음을 다잡기 좋은 글이다. 한학자인 아버지의 친구분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액자에 쓰여있는 글귀였다. 어느 날 불쑥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나에게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집으로 그 액자를 가져왔다. 지금도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 글귀를 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김공영 명장은 포스코의 기능인으로서, 또 일반적인 기능인으로서, 통상 이루고자 하는 것, 이루어야 할 것을 모두 이룬 듯 보인다. 공부도, 상도, 자격도, 무엇 하나 빠지거나 뒤쳐지는 것이 없다. 이룬 것만으로도 넘치는 삶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다. 자꾸만 도전해야 할 것이 그의 눈에 밟히고, 운명도 도전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후배들과 현장을 누비며 ‘바위를 뚫는 한 방울의 빗물’처럼 살아가고자 한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4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신승철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
7편 : 포항제철소 후판부 이영춘 명장
8편 : 광양제철소 화성부 김제성 명장
9편 :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 명장
10편 : 포항제철소 제강설비부 남태규 명장
11편 : 광양제철소 제선부 배동석 명장
12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명장
13편 : 저탄소공정연구소 한병하 명장
14편 : 광양제철소 압연설비부 김종익 명장
15편 : 광양제철소 도금부 손병근 명장
16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손광호 명장
17편 : 광양제철소 열연부 김용훈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