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고로는 무엇을 하는 설비인가. 철광석인 소결광과 석탄인 코크스를 집어넣고, 열풍을 불어넣어 액체 상태인 철인 쇳물, 즉 ‘용선’을 생산하는 설비를 고로라고 부른다. 뜨거운 쇳물을 1년 365일 24시간 만들어내는 거대한 설비이기 때문에 조업에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고로에 관해서라면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동석 명장이 말하는 어려움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고로 조업에서 어려운 일이라…. 저는 구멍을 뚫고, 또 그 구멍을 막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고 느낍니다.
무슨 소리일까? 명장의 말을 이해하려면 고로 조업 현장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핵심기술로 꼽히는 ‘출선구 일발개공 기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로 안에서 만들어진 쇳물은 고로 아래쪽에 고인다. 이 쇳물을 밖으로 뽑아내려면 고로 아래쪽에 ‘출선구’라는 구멍을 뚫어야 한다. 출선구는 평소에는 막혀있고 쇳물을 밖으로 뽑아내는 시점이 오면 뚫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다. 거대한 송곳 같은 장비인 ‘비트(bit)’를 활용하는데 고로 자체가 뜨거운 데다가 구멍을 뚫으면 뜨거운 쇳물과 맞닿기 때문에 비트를 식혀가며 작업해야 한다. 식힐 때는 물을 사용하지만, 고로 내부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러 명이 달라붙어 끙끙대며 작업해도 예측하기 어려운 사고가 빈번했던 위험한 작업을 이제 작업자 한 명이 안전하게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고, 문제가 많은 작업이었음에도 설비의 압도적 위용 앞에 감히 개선할 엄두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배동석 명장은 패러다임을 바꿨다. 게다가 새롭게 개발한 비트는 또 다른 개선, 또 다른 발전을 낳았다.
“출선구에 구멍을 뚫어 출선하고 나면 다시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막을 때는 ‘머드제’라는 것을 사용하는데 다소 물렁한 상태에서 막아놓으면 나중에 단단하게 굳습니다. 이 머드제는 굳었을 때 단단할수록 좋습니다. 머드제가 뜨거운 열이 나 높은 압력을 견디지 못해, 녹거나 부서지면 출선구로 쇳물이 새어 나오는 사고가 일어나니까요. 그런데 머드제가 너무 단단해져서 비트가 이를 뚫지 못하면 그것 또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머드제는 단단할수록 좋지만 비트 문제 때문에 더 좋은 머드제를 개발하거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비트를 개발하는 것과 머드제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은 이런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지요.”
새로운 비트가 개발되면서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고강도 머드제 사용이 자유로워지자 출선 시간은 평소보다 길어졌고 출선 횟수는 줄어들었다. 안전은 강화하고, 생산성은 올린 셈이다.
“고강도 머드제를 쓰면서 출선구를 좀 더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열과 압력을 견뎌야 하는 부위이니, 출선구에 지워지는 부담을 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고로에는 출선구가 4개 있는데 문득 ‘왜 하나만 뚫어서 출선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2개 출선구에서 동시에 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이를 ‘패럴렐(parallel) 개공 기술’이라고 하는데요. 가령 출선구 하나로 100만큼의 쇳물을 뽑아낼 것을 두 구멍에서 50씩, 총 100을 뽑아내면 출선구가 받는 부담이 반으로 줄어듭니다. 이렇게 하니 출선구에 가해지는 부담을 훨씬 줄일 수 있더군요.”
명장이 되는 데는 많은 요소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성실함’을, 또 어떤 이는 ‘학습’을 꼽을 것이다. 이론적 사안들을 끊임없이 충전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러나 배동석 명장이 첫 손가락에 꼽은 것은 좀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응용능력’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다른 공정이나 외부의 다른 기계, 설비들을 보고 ‘이걸 내 현장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내는 능력 말이죠. 예를 들어 농사지을 때 쓰는 콤바인 같은 장비를 보면서, ‘작업 현장에서 뭔가를 자동으로 착착 정리해 주는 그런 설비로 응용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그런데 명장 스스로가 모르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그런 외부적 자극을 접했을 때 바로 현장과 연결하는 게 가능하느냐?’ 하는 것이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 누워있다가 사과가 땅에 뚝 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 지구가 물체를 잡아당기는구나. 질량이 있는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마법처럼 해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뉴턴은 늘 ‘왜 높은 데 있는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늘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장의 응용능력은 호기심과 설비개선을 향한 열망이 바탕이 돼야 가능한 게 아니겠는가? 불현듯 그에게 물었다.
배동석 명장은 그렇게 매일매일 갈고닦은 열망 덕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출선구 문제를 기적처럼 해결해낼 수 있었다.
명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구멍을 뚫고,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야기했다.
“고로 하부에서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고로를 빙 돌아가며 거대한 파이프가 줄지어 있는 광경인데요. 이 파이프가 고로 내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풍구’입니다. 고로가 펄펄 끓는 게 밥솥에 밥을 짓듯 고로 외부에서 불을 때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쇳물을 녹이는 불은 고로 안에 있습니다. 밥솥 안에서 불을 때서 밥을 짓는다고 할까요. 고로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어 열을 가하면 안에 있는 석탄인 코크스가 타오르는데, 이 풍구가 또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노벽 보수 등 때문에 고로를 세운 뒤 다시 불을 붙일 때가 문제다. 멈췄던 고로 내부에 열풍을 불어넣을 때는 평소의 풍구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 내부 물질들이 식어 유동성이 줄어있으므로 평소보다 바람을 세게 불어넣어 그 물질들 안쪽까지 뜨거운 바람을 도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을 강하게 하려면 풍구 숫자를 줄여야 한다. 고무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세게 만들려면 호스 입구를 손가락으로 눌러야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렇게 하다가 서서히 막아둔 풍구를 하나 둘 뚫어준다. 정상적인 상태가 될 때까지 말이다.
“풍구를 뚫는 작업은 누가 합니까? 결국 사람이 수작업으로 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풍구를 쉽게 뚫을 수 있는 고압관통기를 개발했습니다. 고로에서 작업하다 보면 이렇게 구멍을 뚫고, 또 막는 작업 때문에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고로는 위험한 요소를 두루 갖춘 작업장이다. 높은 데다가 뜨겁기까지 하다. 단단한 곳을 뚫어 구멍을 내기도 하고, 뜨거운 쇳물이 나오는 구멍을 안전하게 막을 줄도 알아야 한다. 뜨겁고 강한 바람과 맞서야 하기에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크고, 열망도 크다. 안전에 대한 배동석 명장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이 문제’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도대체 무슨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걸까? 그는 최근 출선구 머드건 작업과 관련해 주변 정리를 자동화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이 일은 직장 생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궁극의 과제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래서 연구소 그리고 외부 협력사와 연계해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고 한다. 출선구 근처에 고정식 장치를 달거나 바퀴 등으로 자유로운 주행이 가능한 일종의 로봇을 설치해 사람이 하던 작업을 자동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이 문제를 해결하면 안전과 생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아직은 미완의 과제이고 실패도 여러 번 겪었지만 그래서 더욱 해내고 싶어요. 일종의 오기도 생겼고요.”
배동석 명장 역시 이제 후배들을 믿고, 그들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제철소’라는 명예와 가치를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고민도 많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조직에 대한 로열티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라고 믿는데, 이런 무형 가치를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아직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배동석 명장의 회사 사랑, 회사에 대한 자긍심은 신입사원일 때부터 남달랐다. 그는 남들이 민망하게 생각하며 꺼리던 회사 홍보모델로도 오랜 시간 활동했다. 회사 홍보영화에 출연한 그는 출선작업을 마치고 카메라에 다가서며 엄지를 척 내미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 건 회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이랬는데…. 이른바 ‘라떼’라고 하지요. 이건 정말 좋은 방법이 아니고요. 상황이 생기면 그때 솔선수범하면서 우리 세대가 지켜온 가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배동석 명장은 신입사원 때부터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본인이 몸담고 있는 제선공정 전반에 기계화를 도입하는 것. 사실 그는 포철공고에 다니던 시절, 늘 주위로부터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았다. “동석이가 만들다 버린 걸 주워서 제출해도 중간 이상은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손재주도 손재주지만 그는 기계를 만지는 것, 기계가 움직이는 원리를 좋아했다. 그런 그였으니 자신의 분야에 기계화, 자동화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게는 현장에 롤 모델도 있었습니다. 다행이고, 행운이지요.” 그의 롤 모델은 바로 김일학 기성. 김일학 기성이 주임으로 근무하던 시절, 배동석 명장은 70㎏이나 되는 무거운 출선구 개공기 장착법을 반자동화해 작업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김일학 기성을 보면서 받았던 충격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꿈과 버무려져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됐다. 그는 그 꿈을 작은 불씨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조금씩 키워갔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지자 어느 순간 그는 설비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로소 설비와 교감하게 된 것이다.
“설비와 소통하고 교감해야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나를 완전히 오픈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에게, 또 설비에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다가서면 어느 순간 이심전심의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꼭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그런 순간들처럼.”
배동석 명장은 현장을 돌 때마다 설비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한다. ‘여기가 가려우니 긁어주세요.’라고. 이렇게 그는 신입사원 때부터 꾸어온 꿈을 하나하나 실현해왔다. 그렇기에 지금 누구보다도 환히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4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신승철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
7편 : 포항제철소 후판부 이영춘 명장
8편 : 광양제철소 화성부 김제성 명장
9편 :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 명장
10편 : 포항제철소 제강설비부 남태규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