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철강 불모지에 제철소를 세우고, 산업의 쌀인 철강을 생산한다!”
모래바람만 가득하던 영일만에 제철소를 세웠던 창립 세대의 외침이다. 그 뒤로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었다. 철강이란 필수 소재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회사가 먹고살고, 나라가 먹고살 수 있던 고도성장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포스코는 창립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도전적인 환경과 마주해야 했다. 국내에 경쟁사가 등장했고, 중국이 어마어마한 물량을 생산해 저가 공세를 펼치면서 국내로도 밀려들어왔다. 국제시장의 경쟁 상황은 점점 첨예해졌고, 국내에서도 경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제 포스코도 포스코만의 독자적인 제품으로 국내외 시장에서 싸워야만 하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포스코는 이런 제품을 월드 톱 프리미엄(WTP : World Top Premium) 제품이라 이름 짓고 사활을 걸었다.
신승철 명장은 1982년 포스코에 입사한 후 포항제철소 냉연부에서 일하며 냉연인의 길에 들어섰다. 1988년 광양으로 근무처를 옮긴 뒤에도 그는 냉연인으로서 한길을 걸어왔다. 그런 그에게도 시대적 도전의 바람이 불어왔다. 당시 광양제철소는 ‘자동차강판 전문제철소’라는 비전을 선포하고 자동차강판 중에서 최고의 기술이 요구되는 자동차외판재 생산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국내 자동차용 외판만 생산하고 품질조건이 까다로운 수출용은 엄두도 못 냈다. 수출용 車강판 외판재 양산 기술이 시급했던 광양제철소는 ‘최고 품질이 필요한 일본향 자동차외판 제품을 개발, 양산하라’는 미션을 신승철 명장에게 부여했다. 일을 피해본 적이 없고, 오히려 즐겨왔던 그에게도 이 도전만큼은 부담스럽고, 또 두려웠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 시기를 직장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로 꼽는다.
“자동차 외판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상당히 고급 제품이었고, 수요자와 소비자들이 품질을 까다롭게 따지는 제품 중 하나입니다. 자동차 자체가 고가이다 보니 그 외부를 책임지는 강판은 두께, 강도, 표면, 색상 등 종합적인 품질에 까다롭지 않을 수가 없죠.”
그가 이 어려운 과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2009년 통합파트장으로 보임되면서부터였다. 압연부문에 주어진 목표는 ‘월드 프리미엄 제품의 생산기술 확보와 양산 체재 구축’이었다. 그 핵심은 일본향 자동차 외판 양산 기술이다. 그런데 그가 근무하는 광양제철소 냉간압연 부문 소둔설비는 제철소에서도 가장 오래된 설비였다. 가장 오래된 설비로,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었다. 자동차 외판재로 쓰는 강판은 여러 품질 요건들 중 특히 표면의 미려함이 중요했다. 즉, 고품질 연속 대량생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작업이었다. 100% 성능이 아닌 오래된 설비로 강판 품질을 확보하자니, 어려움이 많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제철소에 설비를 한번 설치하고 그저 매뉴얼대로 스위치만 조작하면 제품이 뚝딱 나오는 줄 압니다. 사실 그게 아니거든요. 설비를 가동하고 조업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개선사항이 생깁니다. 이 개선사항들에 잘 대응해서 이른바 ‘요소기술’들을 많이 확립해야 합니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설비에서 나온 제품이라도 그 품질은 천양지차입니다.”
하지만 신승철 명장은 이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이런 겁 없는 도전의 바탕에는 ‘긍정 마인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요소기술’ 확보에 필수적인 설비개선부터 꼼꼼히 따져봤다. 쉽지는 않았다. 설비 개선에는 기술적 난관뿐만 아니라 심리적, 조직문화적 난관도 존재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운전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설비에 대한 부담을 가지기 쉽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굴지의 설비공급사들이 가져다 놓은 설비를 보면 ‘내가 감히 이 거대한 설비를 고치고, 수정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그랬다가 문제가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필요하고, 문제가 된다 싶으면 과감하게 설비를 개선하고 조업 표준을 새롭게 정립해야만 합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돼요.”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세요” 후배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마디로 이렇게 답했다. 호기심을 가지면 배우게 되고, 배워서 알게 되면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긴다. 그리고 도전을 통해 ‘성공체험’이 쌓여가면 이러한 자신감은 커진다. 신승철 명장 역시 세계에서 인정하는 포스코 제품을 만드는 데 일조했던 ‘성공체험’이 쌓이며 자연스레 자신감을 얻었다. 바로, 일본향 자동차 외판이었다.
당시 포스코가 자동차 외판 생산에 있어서 가장 이루고 싶어했던 목표는 ‘일본향 자동차 외판 생산품질 확보’였다. 왜 하필 ‘일본향’이었을까?
“당시 일본향이라고 하면, 도요타, 혼다, 미쯔비시 등에 공급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본의 자동차 외판 고객사들은 품질에 엄청 까다로웠고, 그중에서도 혼다가 첫손가락에 꼽혔습니다. 우리가 제품을 생산해 이들 업체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면.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제품이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당시 우리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수율(收率)로 따지면 절반 정도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연속소둔라인(CAL: Continuous Annealing Line) 설비를 개조, 개선하고 작업 공정을 표준화해 일본향 자동차 외판을 양산하는 일을 맡았다. 사실 이 ‘연속’이라는 말은 조업하는 이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단어다. 절대 품질을 확보하면서 공정 중단 없이 고급 제품을 연속 생산해야만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빠르게 진행되는 공정이 ‘연속’이고, 연속은 대량생산의 필수조건이다. 그와 동료들도 설비 개선과 개조, 강판 표면 품질 테스트를 거의 쉴 틈 없이 무한 반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포기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포기할 수도 없었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쉽진 않았습니다. 고품질 자동차 외판을 생산하려면 연속소둔뿐만 아니라, 전공정인 냉간압연, 후공정인 정정 공정에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두 공정이 성공하면 한 공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실패했던 공정을 개선하면 또 다른 공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품질의 핵심 공정인 연속소둔은 해결할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특히 당시 설비가 구형이다 보니 소둔로의 설비들이 블랙박스화돼 있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신승철 명장은 설비의 구동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소둔로 최적화 시스템을 개발해 문제 해결의 첫 단추를 끼웠고, 개선 후 설비 모니터링 강화로 조업과정을 관리하는 게 훨씬 쉬워졌다. 그렇지만 실패와 좌절도 연달아 찾아왔다. 전후공정을 연계해 소재 품질에서부터 최종 공정인 제품 검사까지 프로세스를 최적화하고 설비의 관리 기준을 재정립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제품 검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제품 검사는 좀 형식적이었어요. 검사가 형식적이면 불량 제품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불량품을 놓치면 불량품의 발생 원인과 개선 방법 연구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정보도 얻지 못합니다. 품질을 개선할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죠.”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신승철 명장은 검사가 형식적이고 부실해진 근본 원인부터 찾았다. 문제는 검사용 시편의 길이가 너무 짧고, 시편 채취를 하려면 라인을 정지하고 가동 설비에 진입해 철판을 외부로 들어내는 등 안전에도, 생산에도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제대로 이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라인(Line) 정지 없이도 자동으로 5m까지 시편 채취가 가능한 제품검사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전에는 검사 시편을 사람이 직접 들어내서 검사를 했는데, 시스템 도입 이후에는 일정 주기로 자동으로 시편을 채취해 검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주기도 일정하고, 밝은 조도가 확보된 오프라인에서 정밀검사를 실시하면서 제품 검사의 수준이 올라갔다.
“조업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정보와 인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제품 검사 공정이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직원이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품질 자동차 외판 생산의 바탕을 만든 신승철 명장. 직원들이 작업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가 항상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에게도 아직 도전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을까? 망설임 없이 대답이 나왔다.
“이미 저는 ‘기가스틸’에 도전 중입니다. 과거 포스코의 새 먹거리가 자동차 외판이었다면 현재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죠. 물론 경쟁이 치열하니 기술 개발이나 설비 개선은 끊임없이 해나가야겠지만, 큰 고비는 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스틸은 아직 도전 자체가 진행형입니다.”
“기가스틸은 고강도여야 하기 때문에 망간, 실리콘 등이 많이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산화가 불가피해지고, 산세공정에서도 이들을 다 제거하는 게 어렵죠. 그러면 강판이 열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복사율이 달라집니다. 이때 달라진 부분을 조업에서 충분히 감안해줘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온도를 정확하게 계측하는 ‘계측기 신뢰성’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기술인 신승철 명장은 특히 ‘요소기술’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과거에는 우선 ‘자동차 강판이 우리 차세대 먹거리다’와 같이 큰 틀에서 방향성을 제시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그 방향성에 맞는 설비투자를 진행한 뒤, 설비가 한정해 주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문제없이 조업을 해내면 됐다. 그러나 이제 시대적 요구가 달라졌다. 큰 목표는 계속 추구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일한 설비로 다른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만드는 현장 설비 관리 기술 등 ‘요소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요소기술의 확립은 저와 같은 현장 기술인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이러한 점을 늘 강조합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기계발과 성장은 자전거 타기와도 비슷하다고 말한다. 앞으로 나가거나 넘어지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기술인도 마찬가지.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넘어지고 만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도 덧붙였다.
“최근 회사에서 기술과 로열티로 무장했던 베이비부머들이 매년 정년 등으로 대거 퇴직하는 상황입니다. 저도 베이비붐 세대이고요. 그런데 그 뒤를 빈틈없이 메워야 할 후배들은 정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모두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후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후배의 정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점을 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차피 바통을 넘겨야 하는데 지적만 한다면, 바통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겠죠.”
그는 명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자부심과 근로의식을 고취할 방법에도 고민이 많은 듯했다. 오래 생각해온 아이디어를 조심스레 꺼내는 그의 모습에서 후배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명장과 같은 제도도 물론 좋지만, 그 중간 과정 단계 단계마다에 현장 직원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면 더욱 좋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직원들이 명장과 같이 다소 먼 목표보다, 자신에게 가까운 목표를 단계별로 성취해나가면서 성장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나는 단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아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 ‘무지(無知)의 지(知)’에 근거해 끊임없이 철학적 성장을 하며 살았다. 신승철 명장은 이런 소크라테스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기술인이다. 스스로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자꾸 질문을 던진다. 그도 이러한 질문에 답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을 즐기지만, 결코 자신이 ‘완벽하게 다 아는 사람’이라고 자만하지는 않는다.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신승철 명장은 말했다. 냉연 열처리 분야 조업경험, 대형 프로젝트 엔지니어링 참여, 설비투자 및 기술개발 업무 등 다양한 경험과 기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현장 경험, 다양한 업무 참여, 이론적 지식이라는 기술인의 ‘삼위일체’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승철 명장은 아직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다. 그는 아직도 질문을 하고 답을 찾으며 성장한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