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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②] 조길동 명장, 나는 기록한다 고로 성장한다

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 ②

[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②] 조길동 명장, 나는 기록한다 고로 성장한다

2022/06/23

이미지 왼쪽상단에 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 2 라는 제목과 함께 그 아래에 '길' 이라는 큰 글씨 우측에 '포스코의' 와 '명장의'가 각각 써있다. 그리고 좌측엔 한자 길도가 써있다. 그 아래에 나는 기록한다 고로 성장한다 조길동 명장 광양 제강부라고 이어서 써있으며 이미지 오른쪽에는 안전모와 보호안경을 쓴 남성이 한쪽 손을 든 모습이 담겨 있다.

포스코 현장 기술인 최고의 영예이자 롤모델인 포스코명장(名匠).
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정말 일까? 당연히 미신일 뿐이다. 물론 별똥별이 우리 소원을 들어준다는 허무맹랑한 뜻은 아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것은 바로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사람이 가진 ‘간절함’이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소원을 빌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순간이 말 그대로 너무 ‘순간’이어서, ‘찰나’여서 소원을 빌 틈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원을 비는 데 성공했다면, 그 소원은 평소 너무나도 간절해서 늘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열망하는 그런 소원이었을 게다. 그렇게나 간절했다면 떨어지는 별똥별에 대고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들인 노력이 소원이 이뤄지게 도운 것이리라. 이쯤 되면 소원을 비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 일종의 ‘과학’이 된다.

간절함은 욕심에서 나온다. 뭔가를 하고 말겠다는 욕심. 조길동 명장, 그는 입사 초기부터 욕심이 많았다. 배우겠다는 욕심이었다.

철강의 연금술사...'제강인생'에 첫 발 내딛다 라고 쓰인 글꼴박스

조길동 명장은 1982년 포스코에 입사한 후 전로가 시뻘건 쇳물을 토해내는 포항 제강부에 배치되자마자 거대한 설비에 압도됐다. 그리고 그 거대한 설비로 해내야 하는 정교한 품질관리에도 완전히 매료되었다. 알고 싶어졌다. 설비 구석구석, 돌아가는 원리, 그런 것들을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제강부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이미 설비가 다 제자리를 잡고 돌아가고 있었다. 변변한 매뉴얼도 구하기 어렵고, 이미 돌아가고 있는 설비의 원리를 따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선배들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기초가 없어,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게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사고 없이, 문제 없이 설비를 운용하는 게 당면과제인 현실에서 그의 질문은 좀 엉뚱한 짓으로 비치기 쉬웠다. 답답함만 쌓여갔다.

그렇게 그는 포항제철소 2제강공장에서 4년 8개월 동안 크레인으로 쇳물을 전로에 부어 넣을 때 신호를 하는 신호수 업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이 일이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강공장의 핵심작업이라 할 수 있는 용강 취련 작업을 원리부터 배워보고 싶었다. 취련 작업이란 고로에서 넘어온 쇳물, 즉 용선에 산소 등을 불어넣으면서 불순물을 없앰으로써 용선을 용강, 즉 쇳물을 강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제철소에서 제강공정은 제철공정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던 중 광양제철소 건설로 조업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저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조업요원으로 직원들이 포항에서 광양으로 대거 이동하던 때였죠. 저도 1986년 11월, 취련을 기초부터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기회다 싶어 광양제철소 1제강공장으로 전입을 선택했습니다.”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든, 모두가 힘써서 극복한 일이든, 이걸 상세하게 적어두면 반드시 쓸모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쓰인 글꼴박스

광양에 와보니 모든 것이 새로웠고, 배울 것 투성이었으며, 배울 기회도 무궁무진했다. 설비·설치부터 운용까지 처음부터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일복이 터졌다’며 힘들어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익숙한 곳에서 바닥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곳으로 온 것에 대해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신바람이 났다.

1987년 4월 그는 오매불망 기대하던 첫 취련 작업에 참여했다. 어려움이라면 포항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설비가 달랐다는 점 정도였다. 포항의 설비는 일본 설비였고, 광양에서 만난 설비는 오스트리아 설비였다. 그러다 보니 설비구조, 조업 프로세스, 제어방법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새로 배워야 했다. 신나는 것은 신나는 것이고,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첫 조업 시작부터 설비 트러블이 생겼어요. 계속 트러블이 생기니까 몸도 마음도 피로도가 엄청나게 쌓였죠. 그런데 저는 트러블을 그냥 트러블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든, 모두가 힘써서 극복한 일이든, 이걸 상세하게 적어두면 반드시 쓸모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라...'제강실록' 탄생 이라고 쓰인 글꼴박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나면 사고 내용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사고 날짜, 시간, 일어난 이유까지. 또 어떤 부분이 문제였고, 어떻게 고쳤는지 등도 상세히 적었다. 사고 내용과 복구한 내용을 적으면서 설비설명서를 찾아 설비구조에 대해서도 번역해서 기록했다. 사소하다고 생각되건 중요하다고 생각되건, 무조건 기록했다. 자나 깨나 기록에 빠져있던 그를 동료들은 ‘사마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기록인생은 명장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기록은 설비 트러블이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기록한 데서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강조업 전반에 걸친 내용을 망라하게 되었다. 설비구조, 조업 프로세스, 제어방법 등 본 것, 들은 것, 배운 것, 연구한 것, 모든 것을 기록했다. 분량으로 따지면 권 당 1000쪽 이상이 되는 책으로 쳐서 100여 권 분량을 훌쩍 넘는다. 이 기록은 이른바 ‘제강실록’이라 불리는데 크게 과장된 표현 같지 않다.
기록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열마디 말보다, 스스로 기록의 힘을 체감하는 게 최고입니다. 라고 쓰인 글꼴박스
기록은 그 자체로 힘이다. 지식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지혜의 축적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일찍이 기록의 힘을 깨우쳤던 조상들은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등을 통해 기록의 힘을 입증했다. 그러나 기록의 힘은 공유를 포함한 활용의 힘에 크게 의존한다. 국가나 사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개인도 기록을 통해 지식을 쌓고, 지혜를 연마할 수 있다. 조길동 명장은 그 점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후배들에게도 기록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요. 그렇지만 자꾸 기록해라, 기록해라 말하면 이른바 ‘꼰대’의 ‘지적질’이 되고 말지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모여서 회의하고 토의하고 한 것들을 반드시 정리해서 기록하고, 후배들과 공유합니다. 그렇게 해서 후배들이 조업이나 기타 다른 일로 그 기록을 활용함으로써 일을 더욱 쉽게 하거나, 해결법을 찾아내거나, 뭔가 개선을 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 기록의 힘을 체감하게 되지요. 열마디 말보다, 그렇게 체감하는 게 최고입니다.”

그렇다. 조직문화의 힘 역시 포스코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 문화 중 조길동 명장의 기록문화도 반드시 이어져야 할 소중한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기록과 함께 고난을 이겨내며, 새로움을 배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일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주임도 빨리 되었고요. 그런데 주임이 되고 높은 지위는 아니지만 관리자의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후배 직원들과 선배 관리자들을 연결하는 중간관리라는 업무가 힘겹기만 했습니다. 즐겁던 일조차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정말 그에게 큰 위기였다. 그런데 그때, 마법처럼 HMI(Human Machine Interface)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가 그를 찾아왔다. 당시 조업은 기계적, 아날로그적 작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뭔가 작동시키려면 작동시키는 버튼을 사람이 누르는 식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시스템이 실수를 걸러준다면 실수 때문에 생기는 설비 오작동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설비는 개별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운용을 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할 수 있다면 생산성은 높아질 것이다. 시스템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바로 HMI(Human Machine Interface) 시스템이었다.

HMI 시스템은 단순히 공학적 시스템만은 아니다. 경험치를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다. 이세돌을 이긴 바둑 AI ‘알파고’도 과거의 무수한 대국 실적을 공부함으로써, 즉 스스로 입력함으로써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큰 힘이 된 것이 바로 조길동의 ‘제강실록’이었다. 그는 제강실록의 내용과 함께 조업에 참여한 이들의 의견도 총망라했다. 사람에 의한 실수 사례를 집어넣은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시스템을 완성했다. 포스코에 처음 도입한 시스템이었고, 이 시스템은 생산성을 높이고, 조업사고를 예방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당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당시 HMI 시스템과 함께 PLC(Program Logic Controller)라는 시스템도 함께 구축했습니다. HMI 시스템이 사람과의 인터페이스를 맡은 시스템이라면, PLC 시스템은 설비를 컨트롤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MI 시스템과 PLC 시스템은 상호 연동이 되어야 하는데요. 이 PLC 시스템이 용량문제 때문에 새롭게 구축된 HMI 시스템과 완벽한 짝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용량문제는 몇 년 뒤로 예정된 PLC시스템 업그레이드 때에나 해결될 텐데 그때 PLC 시스템 쪽에 HMI 시스템과 호환될 기술 적용을 설비공급사가 해줄 것인지가 문제였죠. 설비공급사 담당 임원은 추후 기술 적용을 해주겠다고는 했지만, 구두약속이 지켜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몇 년 뒤 PLC 시스템 업그레이드 때가 되자 설비공급사 임원이 그 일을 기억하고는 추가 개발비용 없이 HMI 시스템과의 연동이 가능한 기술 개발 및 적용을 해주었습니다. 하나하나 비용을 따지는 냉정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기술 자체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내보여준 그 임원이 참 고마웠습니다.”

공사현장에서 안전모를 쓴 남자 세분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세계 최초로 더블 취련 도입...골칫거리 '인(P)'을 제어하다 라고 쓰인 글꼴박스
제강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조길동 명장에게 제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제강은 어쩌면 인(P)과의 싸움이 아닐까 싶어요.”

제강에서는 탄소(C)·망간(Mn)·실리콘(Si)·인(P)·황(S), 이렇게 다섯 가지를 5대 불순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제강공정에서는 이러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가장 골치 아픈 게 ‘인’이라고 한다.

“인은 무조건 낮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 제강공정의 숙적인 인과의 싸움을 위해 조길동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전로 더블 슬래그(Double Slag) 조업 기술’이다.

남자 한분이 안전모와 보호안경을 착용한 채 구멍을 뚫린 원통기둥 아래에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때까지는 한번 취련으로 ‘인’을 포함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관리했었지요. 그런데 ‘인’이 계속 문제가 되니 ‘인’을 없애는 취련을 따로 한번 더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늘 해오던 일반 취련 전에 미리 ‘인’을 없애는 취련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방법은 5분간 소프트 블로잉(Soft Blowing)이라고 하는 취련을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전로에 담긴 쇳물인 용강 위로 찌꺼기인 슬래그가 떠오릅니다. 이 슬래그는 용강에서 뽑혀 나온 ‘인’이 포함된 찌꺼기로, 일단 이것을 제거합니다. 그 다음 주로 탄소를 제거하는 본격적인 취련을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니 골머리를 썩던 ‘인’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되었습니다. 용강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어찌 소문이 난 건지, 조금 지나니까 경쟁사들도 이런 방식을 쓰더라고요.”

제강공정은 전로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연주까지 공정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강에서 ‘엄지척’할 정도 기능인이라면 연주 쪽으로 이어지는 문제까지 해결해주어야 한다. 조길동 명장은 이 분야에서도 남다른 성과를 냈다.

그가 해낸 자랑스러운 개선작업은 바로 ‘제강 리드타임(Lead Time) 관리기술’이다. 제강에서 생산한 용강이 굳기 전에 바로 몰드를 통해 한 호흡으로 슬라브를 생산해내는 기술을 연주공정이라고 하는데, 이게 또 쉽지 않은 과정이다. 용강을 연주까지 연결하는 과정도 바로 되는 게 아니라 몇 가지 공정을 거치는데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용강이 너무 식어버리면 안 된다.

해결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 방법은 용강을 일반적인 온도보다 더 뜨겁게 내놓는 것. 압연에 들어갈 때까지 용강이 어느 정도 식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인’이 말썽이다. 용강 온도를 높일수록 ‘인’을 제거하는 게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럼 품질이 문제가 된다.

또 한 가지 해결방법은 용강에서 연주까지의 공정을 거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러려면 공정별로 걸리는 최소시간을 정확하게 산출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즉 공정별 노하우를 결집해야 가능하다. 조길동 명장은 많은 이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낸다. 리드타임이란 전로에서 용강을 내놓은 순간부터 연속주조 압연을 시작하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말하는데, 그는 이러한 공정별 최적타임 기준을 설정하고, 운영함으로써 연주공정의 최적화를 이루어냈다.

전로가스 회수로 쾌적한 환경 만든 것 또한 보람 이라고 쓰인 글꼴박스
“다른 공정에 비해 제강공정이 의외로 환경적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전로가스를 100% 잡아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작업장 환경이 열악해지는 문제가 있지요. 그래서 회사에서 많은 돈을 투자해 전로가스를 회수하는 설비에 투자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투자하기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곰곰이 따져 보니까, 하드웨어적인 설비는 훌륭한데 조업 쪽에서 그걸 운영하는 데 문제가 있더라고요. 결국 PLC 시스템과 HMI 시스템, 이 양자를 최적화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걸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하니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더군요.”

제강공정에서의 환경개선 문제에 대해서 조길동 명장은 나름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다른 공장에서도 이 환경개선 문제에 대해 벤치마킹을 많이 왔다 갔다. 그리고 제강공정으로서는 처음으로 QSS대상도 받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장 조업에서의 높은 효율, 생산성만큼이나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업무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그의 내심이 읽히는 대목이었다.

“명장이 되고 나서는 사실 좀 불편해졌어요. 업무적으로 늘 숙제가 주어지는 느낌이랄까, 부담감이랄까 이런 게 없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설비개선이든 새로운 프로젝트든 저 혼자 하는 것은 하나도 없지요. 기술연구소든, 조업현장이든, 또 설비공급사든 함께 해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조율하고, 리드해야 하는 건 역시 책임감을 많이 느끼게 되는 일이지요.”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꿈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쓰인 글꼴박스
명장이 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 것은 없다 한다. 젊은 시절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해온 시기에 명장이란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한다. 그저 눈에 보이고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져서, 개선하고 개발한 것뿐이라고. 이제 명장이란 제도가 정착된 상황이니 예전과 달리 명장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스펙이란 게 분명 존재하겠지만, 후배들이 이런 스펙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조심스럽게 꺼낸다.
다방면으로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달려드는 게 중요합니다. 할 수 있는 건 정말 부지런히 해보세요. 즐기면서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겁니다.라고 쓰인 글꼴박스
“일단 다방면으로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달려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할 수 있는 건 정말 부지런히 해봐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업무든 업무 외적인 것이든 말입니다. 그렇게 즐기면서 하다 보면 길이 보이고, 그 길 위에서 비로소 필요한 자격 등이 있으면 하나하나 갖추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명의 사람들이 여러개의 화면을 보면서 모니터링하고 있는 상황실 안에서 조길동 명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기록을 낳고, 기록이 데이터가 되어 새로운 시스템 개발의 토대가 된다. 보람이 의욕을 낳고, 의욕은 다시 호기심이 된다.. 그렇게 젊음을 불태운 기능인 조길동은 그 선순환의 고리 속에서 명장이라는 자랑스러운 감투를 썼다. 감투를 쓰기 위해 노력한 게 아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감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을 뿐.

최근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송강호는 이렇게 말했다. “상을 받기 위해 연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배우도 없습니다.” 조길동 명장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명장이 되기 위해 기술개발에 진력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직원도 없을 것”이라고. 다만 최선을 다하는 과정의 끝에 주어지는 하나의 이름표일 뿐이라고.

조길동 명장은 이라고 쓰인 글꼴박스 아래 미소짓고 있는 남자 한분의 사진과 함께 미니 인터뷰가 실려있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2년 전남 순천시 주암면에서 3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정형편상 고교진학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당시 중3 담임선생님의 강력한 추천 덕분에 포철공고 제강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포철공고 졸업 후 1982년 4월, 포스코에 입사하여 포항제철소 2제강공장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1986년 광양제철소 제강공장에 전입했고, 혁신지원그룹, 후판부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2011년 6월부터는 원소속이라 할 수 있는 광양 1제강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제강조업을 통해 경험하고 깨달은 모든 것을 기록한 ‘제강실록’을 남기는 등 제강조업기술 혁신에 매진해온 그는 철강기능상(2006년)을 거쳐 2015년 포스코명장의 영예를 얻었고, 이후에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2020년)을 받았다. 이밖에도 포스코 회장표창, 사장표창, 제철소장 표창(9회), 제철소 부소장 표창(11회) 등 수많은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포스코 고유의 제강기술 창조를 위해 노력해왔고, 또 노력하고 있는 그는 제강기능사(1981년), 주물조형기능사(1981년), 국소배기장치자체검사원(2003년), 제강기능장(2004년), 사용시설안전관리자(2005년), 기계정비산업기사(2008년) 등 다양한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이 콘텐츠는 포스코그룹 통합 소통채널 ‘포스코투데이’를 토대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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