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세상을 바꾼 진정한 거인, 영국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이 한 말이다.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세운 뉴턴조차 자신의 업적은 선대의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문어도 지능이 꽤 높다고 하는데, 자신이 평생 습득한 것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후대의 문어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다르다. 이렇게 인간은 선대의 업적을 기단(基壇)으로 삼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계단을 쌓는다. 그렇게 높은 탑을 만든다.
명장(名匠)을 만난다. 명장과의 대화를 통해 포스코 후배들이 그 명장,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더 먼 곳,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오늘 만나는 명장은 전기의 달인,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이다.
손병락 명장에게 포스코 최고의 기능인인 ‘명장’으로서 첫손가락으로 꼽을 에피소드가 무엇인지 물었다.
“뭐니 뭐니 해도 불타서 고장 난 2열연 RM(Roughing Mill, 조압연) 전동기를 수리해냈던 일이죠. 2000년 어느 날, 과장님이 전동기를 조립해야 된다며 갑자기 부르더라고요. 알고 보니 2열연 전동기 하나가 불타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 기술자와 함께 분해를 했는데, 그 사람 말로는 한국에서는 고칠 수 없고 꼭 일본으로 가져가서 고쳐와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일본으로 보낼 수 있게 다시 조립을 해놓으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고치는 데 무려 여섯 달이나 걸린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가서 보니 우리가 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고칠 테니 이틀만 주세요.’ 그랬죠. 그 이야기를 들은 부장님이 잠시 고민하더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저도 무슨 배짱으로 해보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고 부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허락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맡긴다는 게 말이 쉽지, 막상 실제 상황에서는 그런 결심하기가 쉽지 않아요. 만약 그렇게 일을 저질러 놓고 못 고치면 이건 수습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수리를 시작하자 지켜보던 일본인 기술자들이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렇게 그 전동기를 우리가 고쳤습니다. 아까 6개월 걸린다고 했는데, 딱 나흘 걸렸죠.”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던가? 훗날 명장이 되고야 말 억척스러운 기능인 손병락은 이렇게 일찍부터 대형사고를 쳤다.
이로부터 한참 뒤인 2006년에도 손병락은 1열연 R1 보텀 모터(Bottom Motor)에 문제가 생겼을 때, 또 한번 일본 기술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도 그들이 일본에 가져가서 고쳐야 하고, 다섯 달은 족히 걸릴 거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그는 딱 열흘 만에 해결했다. 일본에서도 이 작업을 지켜보고 자신들의 작업방식을 바꿨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무모하기까지 한 도전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게 어디 저 혼자 잘나서 되는 걸까요? 생각해 보세요. 설비고장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제일 안전한 방식은 기존의 방식대로 하는 겁니다. 일본 기술자가 가져가서 고쳐오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는 것이 사실 ‘안전빵’이죠. 그런데 그걸 우리가 해보겠다고 하면 엄청난 위험부담도 함께 지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를 믿고 해보라고 맡기는 것은 정말 큰 결단이죠. 이런 도전이 가능한 것은 도전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관리자의 결단인 겁니다.” 이 말은 손병락 명장의 겸손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코에 이런 처음을, 이런 위험을 기꺼이 짊어지고 과감히 용인(容認)하는 그런 문화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고, 또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커다란 사건에 덜컥 도전을 허락한다는 것은 역시 강한 신뢰가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손병락이라는 캐릭터에 있다. 손병락은 늘 배움에 목말라하며 배우고, 익히고, 적용하는 것을 일상으로 여기는 요즘 말로 ‘찐’, ‘진짜 기능인’이기 때문이다. 손병락 명장이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어려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반딧불을 등불 삼아 책을 읽을 정도로 공부에 푹 빠져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도 많았다.
우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굳이 포철공고를 선택한 것도 당시 주변 사람들이 ‘공고 나오면 취직이 잘된다더라’ 해서 간 것이지, ‘장래 큰 기능인이 되어야지’ 하는 대단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포스코에 입사한 뒤, 대졸 직원이 부러워서 방송통신대에 다닐 때도 그랬다. 전기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느꼈지만, 전기 공부가 하기 싫어 행정학과를 지원했다. 그랬던 그가 언제부터 전기 관련 지식을 이렇게 쌓았을까?
“좀 부끄러운데, 전기라는 것을 다시 제대로 붙잡고 씨름하게 된 동기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했습니다. 한때 전기 등의 분야를 협력화한다는 루머가 사내에 퍼진 적이 있었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이러다가 밥줄 놓치겠다 싶었죠. 그래서 전기를 다시 파기 시작했고 자격증도 허겁지겁 따기 시작했죠. 그런데 신기한 게 자격증 공부를 하다 보니 실무에서 잘 모르고 하던 것들과 새로 공부한 이론들이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슬슬 재미가 붙더라고요.”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롤프 메르클레가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손병락 명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말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재도 노력가도 아니었던 사람일지라도 어떤 계기로 노력을 하다 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즐기게 되고, 즐기면 더 알고 싶어지고, 그래서 또 더욱 노력하게 되고, 결국 천재를 이기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한 이치를 몸소 깨우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히 손병락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해봐라. 재미있다.’
“후배들에게 정말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정말 포스코만큼 업무에 대한 자율권을 주는 회사가 또 있을까? 제 경우를 되돌아보면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후배들 중에는 종종 도전을 귀찮아하고 제안을 꺼리는 경우도 있죠. 제안을 하면 그 일이 결국 자신에게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어떤 문제를 제기했다는 건 그 문제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뜻이고, 그러니 일이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싫다고 하면 발전이 없겠지요. 일을 혼자 떠맡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회사에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 이런 인력이 필요하다.’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과 적극적으로 씨름하다 보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일이 많다고 불평하지 마라. 오히려 감사해라.’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그는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일도 많이 했다.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일에 대해 잘 알게 됐다. 잘 알다 보니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주변에서 맨 먼저 찾는 사람이 됐다. 그게 바로 그만이 가지고 있는 힘, 신뢰의 힘이 됐다. 동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손병락’을 찾았다. 그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도 빛이 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았고, 제일 어린 나이에 주임 자리에도 올랐다.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력이 있으니 결국 모두 그를 믿고 존중했다.
명장으로서 높은 산의 꼭대기에 오른 손병락. 그는 이제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또 새로운 봉우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조금 쉬고 싶어졌는지 궁금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일궈놓은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것입니다. 전수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첫째는 제가 알고 있는 특수한 노하우를 오롯이 전수하는 것입니다. 나름 어렵게 이룬 것들이니 그냥 사장시킬 수는 없지요. 둘째는 회사 안에서 정비 관련 여러 과정을 전수하는 것입니다. 앞의 것이 전문과정이라면 이건 일반과정이라고나 할까요? 세 번째는 대졸사원, 즉 관리자 급 인력에 대한 교육입니다. 이들은 현장 기능직원과는 달리 한 자리에 오래 있지 않고 이동하기 쉽죠. 그러니 기능적인 부분의 세부사항보다는 큰 틀에서 업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들이 단순히 전수를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지식을 또 다른 이에게 전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중요한 노하우가 하나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포스코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겠죠.”
포스코에서 기능인이라면 누구라도 현장을 끌고 가는 힘을 지닌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슴에 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명장이라는 명예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원조 명장 손병락에게 명장이 되는 비결을 물어봤다.
“우선 남다른 특기를 가져야겠죠. 그런데 그냥 특기가 아니고 주특기와 부특기, 이렇게 두 가지를 두루 가져야 합니다. 주특기는 쉽게 말하면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특기죠. 많이 공부하고, 일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실전에서 갈고닦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특기를 가지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특기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자신의 능력을 확장해나가는 부특기도 가져야 합니다. 주특기와 같이 한 분야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가지면 주변의 관심을 끌게 되고 점점 자신에게 묻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런 것에 대응하면서 부특기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혼자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으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서는 안됩니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공부를 하고, 그래도 안되면 ‘누구에게 물으면 알 수 있는지, 어떤 책이나 자료를 보면 해결할 수 있는지’ 끝까지 찾아봐야 합니다.”
“아는 것만 많다고 충분한 건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 모든 것을 알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회사는 조직입니다. 조직의 힘은 개인이 당해낼 수 없고, 강한 조직을 가진 회사가 잘 나가는 회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능력을 조직 속에서 녹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반장, 주임이 되고, 때론 능력을 인정받으며 남보다 돋보이자 혼자 잘난 줄 알고 겉돌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책임은 내가 지고, 공은 나누어라’라는 겁니다. 얼핏 손해만 보는 것 같지요? 자기가 공을 세운 일을 자랑하고 싶고,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면 변명하고 싶고, 그런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은 내가 지고 공은 나누면, 남들이 모를 것 같지만 결국 그 모든 공이 자신에게 조용히 되돌아오는 사례를 무수히 경험했어요. 더구나 한 명의 스타보다, 강인한 팀을 키워내려는 포스코 문화 속에서 이것은 정말 중요한 요소입니다.”
손병락 명장은 오늘의 자리를 쉽게 얻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늘 찢어지는 가난과 함께였다. 안동에서 연천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포항으로 내려오고, 가난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았지만, 가난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늘 저녁이면 책을 손에 들던 아버님을 본받아 책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보충수업비를 면제해준다 해서 농악부에 가입하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 열심히 살아냈다. 자칫 좌절하고, 힘없이 스러져가는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자리, 명장의 자리에 우뚝 섰다. 그의 삶에서 성공의 결정적 요소를 하나로만 규정하고자 한다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손병락 명장은 진정 명장이었다. 기능의 명장이며 조직 시너지를 끌어내는 명장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스스로를 완성형으로 여기지 않는다. 명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명장이란 후배들이 지속적으로 명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또 열린 문을 넓혀나가는 존재라고.
손병락 명장은 이미 공인이 돼 불편한 점도 있단다. 어떤 행동을 하든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다는 자기검열이 그것이다. 명장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다. 또 명장이라는 이름의 가치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늘 조금 불편하고 두렵다고 하는 그. 그는 알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런 경지까지 가지 못한 사람은 두려움에 대해 무지하다. 하룻강아지가 범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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