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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철물에서 쇳대박물관으로, 철을 사랑한 사나이 –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

최가철물에서 쇳대박물관으로, 철을 사랑한 사나이 –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

2016/03/03

Steel Column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  최가철물에서 쇳대박물관으로,  철을 사랑한 사나이  서울 종로구 동숭동과 이화동 골몰을 두루 다녀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았겠지만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에서 녹슨 철판으로 뒤덮인 기괴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거물 외벽에는 쇳대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다.  이 건물이 이 자리에 들어선 것은 2003년. 사람들은 이 건물의 독특한 외관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정체를 궁금해했다.

 

쇳대박물관 외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인 붉은 코르덴 강의 외벽에      타이포그래퍼 안상수가 담쟁이 넝쿨을 연상시키는 자음과 모음을 자석을 이용해 달았다.

△ 쇳대박물관 외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인 붉은 코르덴 강의 외벽에

    타이포그래퍼 안상수가 담쟁이 넝쿨을 연상시키는 자음과 모음을 자석을 이용해 달았다.

통일신라 시대에서 티베트 열쇠까지, 세상의 모든 쇳대가 모인 곳

철로 외벽을 에워싼 건물을 세우고 쇳대박물관이라 이름 붙인 이는 최홍규 관장(60)이다. 그는 열아홉 살 때부터 철물점 일을 시작한 정통 철물 장인으로 우리나라 철물점 업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쇳대박물관은 그의 철물 40년 인생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쇳대라는 말은 자물쇠와 열쇠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말하자면 쇳대박물관은 말 그대로 동서고금의 자물쇠와 열쇠를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엔 최홍규 관장이 수집한 350여 점의 쇳대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ㄷ자형, 원통형, 물상형, 함박형, 붙박이형, 빗장, 열쇠패 등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전통이 담긴 쇳대들이다. 우리의 전통 쇳대뿐만 아니라 독일과 중국,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쇳대들도 구경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 두석장 김덕용 선생의 공방도 그대로 재현했다. 선생이 자물쇠를 만들 때 직접 사용한 도구와 연장을 그대로 옮겨온 것. 박물관 소장품 외에도 최 관장이 평생 수집한 쇳대만 물경 5,000여 점에 이른다고 하니, 그가 쇳대에 들인 품과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쇳대를 수집하면서 그는 어떤 원칙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무형문화재 제64호인 두석장 김극천의 작업실. 실제 크기로 재현해서 상설 전시 중인데 소소한 소품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전시해 사실감이 넘친다.

△ 무형문화재 제64호인 두석장 김극천의 작업실. 실제 크기로 재현해서 상설 전시 중인데 소소한 소품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전시해 사실감이 넘친다.

쇳대에는 민초들의 삶과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깃들어있다

“자물쇠를 만드는 정통 장인들을 ‘두석장’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우리 두석장들은 자물쇠를 만들 때 기능적인 것만 강조한 게 아니라 거기에 주술성을 부여했어요. 자신의 바람이나 염원을 자물쇠 표현에 그림이나 글로 표현했죠. 액운을 피하고 행운을 바라는 다양한 민간신앙을 담은 거죠. 우리 선조들은 가구가 꽃이라면 자물쇠를 나비에 비유하기도 했어요. 그런 것을 이해해가면서 컬렉션을 계속 이어왔죠.”

"우리 쇳대에는 민초들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요. 서양에선 대체로 권위를 상징하는  열쇠가 발달했다면 우리나라 쇳대는 자물쇠 몸통에, 우리 선조들의 삶에  누적된 풍속이 다양한 문양으로 반영되면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어요.  우리나라 쇳대는 그리고 권위보다는 소통의 의미가 커요.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키를 쥐고 있다'는 말을 하잖아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의 의미랄까요.  그리고 쇳대는 철의 물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에요.  황동 자물쇠와 놋쇠 자물쇠의 차이를 느끼면서 철이 가진 미묘한 물성을 감지하는 거죠.  그런 것에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작가 이윤기, 김훈, 가수 이문세 등      유명인들이 기증한 열쇠를 별로 공간에 마련해 관람의 즐거움을 더하고 있다.

△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작가 이윤기, 김훈, 가수 이문세 등

    유명인들이 기증한 열쇠를 별로 공간에 마련해 관람의 즐거움을 더하고 있다.

40년간 철의 매력에 빠져있는 국내 최고의 철물 디자이너

쇳대 수집과 박물관으로 유명한 최홍규 관장이지만, 그는 철물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장인이기도 하다. 최홍규 관장이 철물 일에 뛰어든 것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졌던 1976년이다. 을지로에 있던 ‘순평금속’이란 곳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업을 했던 것.

그런데 이곳에서 최 관장은 뜻밖에 철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에 매료된다. 더욱이 당시 순평금속을 이끌던 권오상 사장은 개성 출신의 엘리트로 미군부대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키며 철 부품을 독점적으로 납품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홍규 관장은 권오상 순평금속 대표를 인생의 멘토로 삼아 철물의 제작부터 유통, 사업의 노하우까지를 하나하나 배워가며 수제자가 된다. 그 즈음 업계에서는 ‘철물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특수를 거치는 동안 다양한 주문 제작에 참여하면서 철물 디자이너로서의 입지를 굳힌 것. 그러곤 30대 초반의 나이인 1989년 강남 논현동에 제법 큰 규모의 철물점을 개업하면서 독립한다. ‘최가철물’의 시작이다.

19살에 철물 일을 시작해 1988년 최가철물점, 2003년 쇳대박물관을 세웠으며,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대장간 전'을 여는 등 국내 최고의 철물디자이너로 꼽히고 있는 최홍규 관장

△ 19살에 철물 일을 시작해 1988년 최가철물점, 2003년 쇳대박물관을 세웠으며,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대장간 전’을 여는 등 국내 최고의 철물디자이너로 꼽히고 있는 최홍규 관장.

그의 철물 작품은 디자인과 기능이 모두 우수해서 중요한 건축물에 납품되었는데, 그것은 예술에 대한 그의 뛰어난 눈썰미와 감각에 기인한 바가 크다. 1990년대 초반 그의 가게를 방문한 조성룡 선생 같은 유명한 건축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철물의 물성에 대한 이해와 작품으로서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자극받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가 주로 영감받는 것은 선조들이 쓰던 민속품이나 앤티크 제품들이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수집 취미로 나아가게 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평생을 철과 함께 해온 그가 철에서 배운 삶의 철학이라는 건 무엇일까.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돈을 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품을 만들고 쇳대를 수집할 때에도 그것의  경제적 가치나 수익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  즐거운 것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어요.  과거에는 철 제품이라고 하면 생산자나 수요자나 오래 쓸 수 있게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는데,  저는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행운도 작용해서 제가 독립할 무렵에는 철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바뀌어서 제 작업이 더 평가를 받았죠.  철은 강하고 우직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성을 가지고 있어요.  쓰임에 따라 형태와 성질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이런 자유자재의 물성이 철이 가진 매력 같아요."

그는 지금 쇳대박물관 관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최가철물’의 경영을 이끌고 있다. 최가철물에서 다양한 제품들을 제조해서 판매하고 있다. 주로 고객들의 주문을 받아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로 운영하는데, 성수동에 있던 공장을 박물관 근처인 이화동으로 옮겨온 것. 최홍규 관장은 근년 들어 쇳대박물관 운영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화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 문화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박물관이 주민들과 호흡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최근엔 그의 두 아들이 각각 경영과 디자인을 그에게서 배우고 있다. ‘최가철물’의 가업 정신이 자연스럽게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쇳대 박물관 전시품들

쇳대박물관 관람정보 : 서울 종로구 이화장길 100 / 오전 10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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