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업계의 기본 재료로 너무 당연하게 쓰이는 철. 하지만 철이 건축 업계의 주재료로 자리 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철이 건축에서 떼놓을 수 없는 재료가 되는 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됐으며, 어떤 역사적인 에피소드를 거쳤을까.
이 의문을 답해줄 전문가를 포스코 뉴스룸에서 만나봤다. <한국 건축의 정체성> <철 건축과 근대 건축 이론의 발전>을 저술하고,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이상헌 교수. 그가 말하는 건축사에서 철이 가지는 의미, 그리고 철 건축이 도시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포스코 뉴스룸과 함께 알아보자.
철 건축물이 없는 현대도시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초고층 건축에서 동네 주차장 건물에 이르기까지 철은 현대건축과 도시를 만드는 데 필수 불가결한 재료다. 그러나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도시에서 철 구조물을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기 시대 이래 인류는 철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해 왔지만, 철을 건축 재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철은 강도가 뛰어나지만 매우 비싼 재료였고 소량만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돌, 흙, 나무와 같이 자연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지었고, 철은 꼭 필요한 연결 부재로만 사용했다.
여기에 변화가 생긴 것은 산업혁명 이후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질 좋은 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히 값도 싸졌다. 이때부터 철은 자연재료를 대체하는 건축 자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 세번(Severn)강의 콜 브룩데일 다리(Coalbrookdale Bridge, 1779년)는 최초의 철 다리다. 석탄 생산지로 철 제련산업이 발달한 이곳에 철 다리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 당시 국왕이 방문했을 정도로 큰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이후 철의 사용은 다방면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어갔다. 건축물에서 기둥, 바닥, 지붕 재료로 철이 사용되었고 급기야 전체 구조를 철로 만든 건축물이 속속 등장했다.
철 구조의 기술적 진보는 19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철은 돌의 15배 정도 압축강도를 갖기 때문에 가는 부재로 넓은 공간을 덮을 수 있었다. 철 구조는 고강도의 가는 부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수학을 이용한 근대적 구조역학의 방법이 적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돌과 나무 구조를 모방했지만, 기술자들은 점차 근대적 구조계산법을 사용한 철 구조물을 발전시켰다. 특히 현수구조와 트러스 구조의 발전으로 장 스팬(Long span) 철 구조는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트러스: 같은 평면상에서 금속이나 나무로 된 여러 개의 직선부재를 3각형 또는 5각형으로 조립한 구조재
*장 스팬(Long span)구조: 건물이나 교량 따위의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
하지만 이러한 철 구조물은 제대로 된 건축으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가는 부재들로 구성되어 고전적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던 비례와 균형, 시각적 안정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 구조가 그 자체의 미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전 미학에 바탕을 둔 전통적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어야 했다. 이러한 미학적 혁명은 20세기 초에 일어난다. 그 결정적 물꼬를 튼 것은 바로 입체파, 큐비즘이었다. 큐비즘은 대상을 묘사하는 데 고정된 시점과 시각적 안정성 같은 수백 년간 서양 미학을 지배하던 아름다움의 기준을 해체했다. 그리고 공간의 상호 관입과 중첩, 투명성, 유동성, 시공간 개념과 같은 새로운 미적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큐비즘(입체파): 20세기 초 회화, 건축, 조각, 공예 등 국제적으로 퍼져 전파될 미술 운동. 3차원적 시각을 통해 표면에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가는 부재들이 날아다니듯 조립된 철 구조물은 충분히 미학적 구조물로 받아들여질만 했다. 아니, 철 구조물이야 말로 근대사회의 새로운 미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세기에는 추한 것으로 인식되던 철 구조물이 20세기 초에는 미학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같은 철 구조물인데 인간이 이것을 어떻게 보고 경험하는가, 다시 말해서 미적 수용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건축가들은 철 구조가 정직하게 노출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철 건축이 발전하는 데는 철 생산의 기술적 발전과 함께 철의 미학적 발견이 필요했다.
철과 유리를 이용한 근대건축의 모범을 창조했다고 평가되는 건축가는 독일 태생 미국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다. 미스는 철 구조를 외관의 장식으로 정직하게 노출시키는 현대건축의 유형을 창조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Barcelona Pavilion)에서 시작하여 판스워스(Fansworth) 주택, 시그램(Seagram) 빌딩 등 미스는 철과 유리만으로 된 근대건축의 전형을 창조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서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사용되던 삼일빌딩은 미스의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한 철 건축물이다.
철 구조가 아무런 제약 없이 건축에 사용되면서 건축가들은 철 구조를 통해 현대사회와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건축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는 자본주의적 대중 소비사회로 변화했고 새로운 공공공간에 대한 요구도 생겨났다. 1964년 영국의 젊은 건축가그룹 아키그램(Archigram)은 현대도시의 역동성과 대중 소비문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도시건축으로 기계와 같이 ‘걸어 다니는 도시(Walking city)’, 부품을 교체하는 ‘플러그인 시티(Plug-in City)’를 제안했다. 1978년 파리에 건설된 퐁피두 센터는 아키그램의 건축적 아이디어가 실현된 최초의 건축으로, 고강도 철 구조를 외부에 완전히 노출함으로써 역동적이고 다양한 문화 이벤트가 도시 속에서 연출되는 파리의 새로운 문화중심이 되었다.
이후 철 구조의 구축적 형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하이테크(High-Tech) 건축은 현대건축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하이테크 건축은 철 구조를 형태적 상징뿐 아니라 공공성과 친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홍콩 상하이뱅크는 비좁은 도시에 공공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물을 들어 올려 지층을 모두 도시에 개방한 하이테크 건축의 대표 사례다. 서울 대치동에 위치한 포스코센터 역시 일반인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다.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까지 이어지는 9m 높이의 원통형 아쿠아리움, SNS에서 화제를 모으며 명소로 자리매김한 카페 테라로사 및 포스코미술관 등이 자리한 포스코센터. 한국의 새로운 건축문화를 주도한 기념비적 건축물이자 도심 속 복합 문화공간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최근 철은 구조재료로서뿐 아니라 마감 재료로도 많이 활용된다. 특히 녹슨 철을 마감 재료로 사용한 건축은 표면의 노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과거에 철 건축은 차갑고 비인간적이며 도시환경을 황량하게 만든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철이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마감재로 새롭게 발견되어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역시 또 다른 철의 미학적 발견이다.
철은 현대건축에서 필수적인 재료가 되었고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당분간 철의 사용은 확대될 것이다. 문제는 철과 인간의 소통이다. 철과 인간의 소통은 미학적인 것뿐 아니라 윤리적인 것도 포함한다. 철 건축이 미학적일 뿐 아니라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하며 도시 공공성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때 철은 도시환경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철 건축의 발전은 기술적 진보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