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는 지난 2014년부터 예술계의 신진 작가들을 발굴 및 지원하는 메세나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는데요. 포스코미술관을 통해 실력 있는 젊은 작가의 개인전 개최를 지원하는 ‘신진작가 공모전’이 그 일환입니다. 벌써 3회를 맞은 이 대회에, 올해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여럿 출품되었는데요. 그 본선 진출작들을 Hello, 포스코 블로그와 함께 보시죠!
제3회 포스코미술관 신진작가 공모전 개최
올해 신진작가 공모에서는 1차 포트폴리오 심사를 거쳐 순수회화부터 사진, 조각(설치)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가 11명을 선발했는데요. 이들을 대상으로 2차 본선 전시 역시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에게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함께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전해 줄 텐데요. 11명의 작가 중 최종 심사를 통해 선발되는 최종 작가에게는 2017년 포스코미술관 개인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현장에서는 기대와 긴장감이 흐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으신 분들은, 12월 30일(금)까지 서울 포스코센터 지하1층 포스코미슬관으로 찾아오시면 누구나 관람이 가능합니다.
- – 전시기간: 2016.12.07~2016.12.30
- – 관람시간: 월-금 10:00~19:00, 토 12:00~17:00(일요일 및 국공일 휴관)
- – 전시 작품수: 35점
- – 작가: 11명
작가들이 말하는 나의 작품
강주리(1982~)
돌연변이 동물과 식물을 그림으로써 저는 현대 사회 속에서의 ‘자연’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봅니다. 지금의 사회 속에서 ‘자연’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자연스러운’것일까요? 저의 작업 속에서 나타나는 주제들은 이런 정의의 애매모호함을 보여주는데요. “과연 현대 사회 속에서 어디까지가 자연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저의 어지러운 감정 역시 드러나게 됩니다.
현대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종교배, 유전공학과 같이 인간이 자연 진화 과정을 조종할 수 있고 변경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우리는 인간 진화 과정의 결과를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자연은 인간의 발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 속 작품이 자연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자연과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예술이기를 바랍니다.
권인경(1979~)
인간은 그들이 속해 있는 장소나 특정 공간, 사물에서 기억과 기대감, 그리고 추억을 만들어냅니다. 인간과 장소, 인간과 사물이 맺은 관계는 자아, 정체성, 개인사, 추억 등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들을 건드리는데요. 특정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것이 침해를 당하기 때문에 불안한 정서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자신만의 치유공간이나 대상 물건을 만들어 안식을 느끼고자 하는데요.
이는 특정한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친숙한 동네나 집, 개인의 방 혹은 특정 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장소나 물건을 통해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극복되고, 이는 기억의 버팀목이 되며 때로는 공간을, 사물을 의인화하기도 하며 기억, 추억을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내기도 합니다.
김춘재(1981~)
<강산무진>의 배경은 송도국제도시의 개발 현장입니다. 개발이라는 사건은 우리의 인식이 현실 공간을 취향에 맞게 구축시키는 과정이며, 곧 인식에 의한 세계의 구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만든, 홀로그램 같은 존재의 표면 위에서 ‘개발’이라고 명명된 세계의 구축 과정을 역사라고 부르기도 하죠. 일련의 과정을 통한 개발의 패러다임은 현실의 물질적 결핍을 자위시켜주고, 개발 현장의 공간적 황폐함은 상대적인 삶의 윤택함을 반증시켜주는 장치가 된다고, 저는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개발 이후에 올(것이라 상상하는) 편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지금의 삭막함을 자위하는 것이죠. 곧 ‘개발현장’이란 유토피아적 판타지이며 ‘발전’이라는 꿈으로 불안한 미래를 담보하는 삭막한 현실의 표상입니다.
저는 개발현장을 세계의 구축과 해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공간으로 보았습니다. 작품 속에서 현실의 풍경은 관념산수의 거대한 서사적 형식으로 전환되고 그 안에 가공된 세계의 파편들이 작위적으로 구축됩니다. 무릎 높이를 넘지 않는 흙무더기의 현장은 제가 전지적 시점으로 대지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대지를 관조하는 신적인 존재, 그 위치에서 작위적으로 구축시킨 세계의 풍경, 그것의 끝없는 전개-이것이 제가 구축시킨 세계, 강산무진입니다.
박석민(1982~)
본 작업에서 저는 사회적인 관점이 아닌 이슈와 흔적, 기능, 역할들이 조우하는 네트워크로서의 공간을 다루고자 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문맥화나 언어화할 수 없는 어떤 정보나 축적된 시간을 숨기고 있는 듯 보이는 사물의 배치 혹은 형태들을 수시로 수집하고, 누적된 사이사이에서 길을 잃은 우발적인 상상들을 작업으로 끌어들여 그것들을 재배치하고, 작가적 해석을 통하여 작업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인데요. 익숙하지 않은 감각들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발적인 상상은 단지 망상이 아니라 또 다른 감각의 여지 및 단초일 수 있죠.
이러한 과정의 ‘타인의 시간’은 서사적 문맥이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비록 한 공간에서 함께 존재하지만 장소성으로부터 고립에 놓인 개개인을 향한 불편한 응시의 구조와 일상 속에 숨어있는 숨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의 감각을 환기하게 합니다.
양승원(1984~)
작품 사진의 대상은 재개발 지역을 관찰, 분양,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생성된 전망대들, 관광명소의 전망대들, 국가의 정책에 의해 생성된 전망대들 등 각기 다른 목적으로 인해 생성된 건축물들입니다. 이러한 전망대(타워)들은 경제적인 기능들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독특한 모양들은 기능의 필요성에 의해서 결정된 것인데요.
때로는 이런 구조물들은 방랑적인 건축물들이기도 하며, 자연과 함께 생성, 소멸하게 됩니다. 이 구조물들은 일시적으로 한때 존재하는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며, 기능적인 필요 때문에 만들어낸 형태를 지니고 있죠. 사진상 대상이 된 건축물들은 제 스스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것들을 부정하기도 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세정(1988~)
제가 마드리드를 찾았을 때, 도시의 전반적인 느낌은 매우 밝고 경쾌하게 다가왔습니다. 멋진 고건축물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바로 마요르 광장이었습니다. 붉은색의 벽돌로 구축된 직사각형 모양의 광장에 들어서려면 상대적으로 좁은 골목을 통과해야 했는데, 바로크 양식의 광장에 들어선다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저택의 좁은 복도를 지나 널찍한 방이나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죠. 그곳의 붉은 벽돌은 당시 제가 느낀 마드리드라는 곳의 날씨와 분위기에 매우 잘 어울리는 색이라 생각했었고,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마드리드를 떠오르게 하는 색감은 붉은색입니다.
또 평소 여행을 가기 전 구글 지도로 위치나 이동 방법을 찾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저에게 있어 여행의 설렘을 제일 먼저 담아내는 것이 ‘지도’입니다. 여행 중에도 지도는 항상 들고 다니는 필수 지참물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지도를 보면 다녔던 곳들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고, 그곳을 떠올리게 해주어 중요한 기억의 매개체라 볼 수 있습니다.
장용선(1980~)
모든 존재는 이 위대한 자궁인 우주로부터 왔습니다. 생명도, 세포도, 별도 그렇습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의문과 물음이 세포에 주목하게 했고 우주로 귀결되게 한 것이죠. 세포가 생명의 최소단위라고 한다면 행성은 우주의 최소단위에 해당합니다. 세포가 원형물질(생명수)을 자양분 삼아 유기체의 기관(몸)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처럼 행성은 망망대해 우주의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돕니다. 우주는 말하자면 원초적 생명이 유래한 거대한 자궁이며 매트릭스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칠흑 같은 천궁에서 발광하는 별은 제가 꾸는 꿈속에서 반짝이는 별빛과 통합니다. 그렇게 저는 밤과, 어둠과, 하늘과 교신하면서 스스로가 우주에 연속된 것임을 알게 되었죠. 저는 이런 생명의 신비이자 우주의 비의를 Luminescent in Darkness, 곧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빛’이란 주제로 풀어내봤습니다.
정유미(1982~)
The wall in the mind Ⅲ는 우리 주변의 버려진 스티로폼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거나 무작위로 쌓여있던 모습에 대한 관찰로 시작된 작업입니다. 스티로폼은 매우 가볍지만, 덩어리가 크고 무엇을 임시적으로 보호하기에 유용한 물질입니다. 그렇기에 시각적으로 무엇을 감추기 위한 벽을 형성하기 쉬운데요. 하지만 큰 부피에 비해 가벼운 무게의 스티로폼은 튼튼한 경계의 벽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작품 화면 속의 덩어리는 스티로폼들이며, 쌓아져 있는 스티로폼 벽은 어느 한 부분만 건드리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이 스티로폼 시리즈 작업은 일상 속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인 경계에 대해 그리고 있습니다. 심리적 거리감은 가시적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영역이며, 그 심리적 경계는 단단하거나 부드러울 수 있고 혹은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막일 수 있습니다. 이를 스티로폼의 물성적 특성과 연결해 표현했습니다.
정지연(1984~)
‘카라트’는 결정들이 성장해 가는 하나의 인공체입니다. 이 내부에 유기체적인 형체로 결정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구체화 과정으로, 또 그 소멸의 흔적으로 우리들을 한 ‘생성’이라는 꿈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10개의 소리관과 9개의 씨앗 형체의 유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구성요소안에 빛들이 심겨져 있습니다. 유리 안에 각기 다른 종류의 소금 계열의 화학 용액이 담겨지며 빛을 중심으로 자신의 결정화가 이뤄집니다. 소리관은 저주파 발생을 일으키며 연결되어 있는 결정화 과정에 미묘한 영향을 주어 화학용액의 결정화는 다르게 변화합니다.
안과 밖 온도 차이에 기반된 끊임없이 변주되는 실시간 과정의 빛과 소리는 이 체계의 숨결을 이어가며, 어떤 한 가 상계의 생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 듯합니다.
다이아몬드와 흑연, 이 둘은 모두 같은 탄소 원소로만 이루어졌지만, 우리에게 그 둘은 완전히 다르게 인식됩니다. 이처럼 해석을 위한 말들과 알려진 일반적 가치를 이미 넘어선 곳에서, 어떤 한 물질과 그 결정화 / 생성 과정 속에 시인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의 투영을 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정지현(1979~)
저는 주변의 소소한 풍경을 사회적 이슈 혹은 기억과 연결해 작업해 왔습니다. 이 작업은 사과밭에서 일하면서 벌어지는 저의 수많은 행위들 중 하나로 화장실이 없어 벌어지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사과밭 한구석에 앉아 일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에 잠겼는데요. 저 사과나무가 생산하는 것과 제가 생산하는 것, 그리고 저의 행위를 뒤돌아보면서 저 나무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무를 잘 가꾼다는 미명 아래 나무를 못살게 굴어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 내도록 강요하고 각종 병충해를 막아준다는 구실로 독한 농약을 뿌려댑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오염된 토양과 거름으로 쓸 수도 없는 저의 생산물만 남겨놓을 뿐이죠. 나무는 그저 자연의 섭리대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실나무들은 유전형질이 바뀌어 내버려 두면 죽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0년의 수명이 다하면 생산량이 떨어져 결국 뽑혀져 밭 한구석에 버려질 것입니다. 주변 환경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결국 제가 만들어 내는 것은 오염물질뿐 최대한 오염이 적은 물질들로 작업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한경원(1985~)
대학 시절부터 저는 산수화를 그렸습니다. 동양화과에 입학하고 스승께서 계속 산을 그려오라 하셔서 산을 그렸고, 그러다 보니 흥미가 생겨 일주일에 최소 3번 산에 갔죠. 산에 오르는 것이 좋았고, 그리는 것이 좋았기에 학년이 올라가도 저 혼자만 산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통 산수화와 다를 바가 없는 작품을 계속해오던 어느 날 저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였고 과제를 태워버리게 되었습니다. 태워버린 그 과제는 여태껏 붓으로 그린 제 작품들 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고 먹감이 좋았습니다. 그을음이 가지는 재료적 질감은, 먹이 가지는 그리고 동양화가 가지는 가장 근원적인 느낌이라는 깨달음이 왔고, 무언가에서 탈피한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작품 그 자체보다 작업의 양면적 기질을 나타내기 위해 생성 시키고 소멸시키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업을 태웁니다. 그것이 타면서 제 생각도 같이 태워집니다. 다 타고나면 작업은 하나의 빈 그릇이 됩니다. 이 그릇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비어냈지만 빈 것은 아닙니다.
포스코미술관이 야심차게 이어오고 있는
신진작가 공모전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전시에 한번쯤 찾아오셔서
미래를 이끌어 갈 미술계 젊은 인재들의 작품을
직접 확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