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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92] 김진주 前 부사장, “당당하고 소신있게 일하고, 지위고하 막론하고 직언했다”

[남기고싶은이야기 92] 김진주 前 부사장, “당당하고 소신있게 일하고, 지위고하 막론하고 직언했다”

2017/12/28

1975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제2제철 관련회의가 열렸다.이 회의에는 관련부처 장·차관, 태완선 한국종합제철 사장, 포항제철 고준식 부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종합제철’이름으로 추진하던 제2제철 건설계획은 백지화하여 포항제철에 흡수합병시키고, 제2제철 건설은 포항제철의 3기 건설이 끝나는 1978년 이후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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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포항 2~4기, 광양 1~4기 건설 기획에 참여한 기획通
– ‘공장화’ 아닌 ‘기업화’에 힘써야 성장기업으로 존속 가능

 

1975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 주재로 제2제철 관련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관련부처 장·차관, 태완선 한국종합제철 사장, 포항제철 고준식 부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종합제철’이름으로 추진하던 제2제철 건설계획은 백지화하여 포항제철에 흡수합병시키고, 제2제철 건설은 포항제철의 3기 건설이 끝나는 1978년 이후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제2제철 논의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1977년이었다. 제1차 오일쇼크의 충격이 의외로 빠르게 진정되면서 정부는 다시 제2종합제철을 추진하기로 했다. 제2제철 건설을 정부 주도로 할 것이냐, 민간 주도로 할 것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을 때 현대그룹이 먼저 나서 민간주도가 합당하고 자기네가 적임자라고 발표했다. 당시의 상황을 김진주 전 부사장은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2제철설명단’에서 실수요자 포항제철 당위성 논리 개발

“당시 포항제철은 포항 3, 4기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제2제철은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건설한다는 한국종합제철 흡수합병 방침에 따라 사전
준비 작업을 진행해왔어요. 그러나 중동건설 특수로 충분한 자금을 축적한 현대는 정문도 전 제2종합제철 사장을 영입해 매우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제2제철 건설에 그 어떤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고, 오직 자체 자금만으로 건설하겠다는 자금 조달 면에서의 장점을 내세웠어요. 정부의 관련부처도 항만, 철도, 용수, 전기,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성격의 사업까지 모두 자체 자금으로 추진하겠다는 현대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포항제철은 1978년 6월 12일 정부에 제2공장(포항제철은 제2제철을 ‘제2공장’ 이라 불렀다.) 건설 의사를 밝히고 ‘제2공장 제1기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계획서에는 포항제철소의 조업과 건설과정에서 축적한 기술력 우위, 차관선과의 긴밀한 유대 활용, 원료 도입원의 용이한 확보, 일부 시설 중복투자 배제를 통한 설비투자비 절감, 1사 2공장의 장점을 최대로 활용한 국제경쟁력 확보 등의 이유를 들어 제2공장 실수요자는 포항제철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현대는 6월 22일 인천제철을 인수하고 8월 18일 ‘제2종합제철 1기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제2제철의 국·민영화 논쟁’이 촉발됐다.

현대는 정부 부담이 전혀 없는 순수 민간 자본으로 추진한다는 점, 건설회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저렴하게 건설할 수 있다는 점, 아산에 이미 소요 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건설과 조업 경험, 축적한 인력과 기술을 부각했다. 주무부서인 상공부, 승인부서인 경제기획원의 입장은, 정부에는 철강산업에 더 이상 지원할 자금이 없는데다가 투자에 따른 고용효과가 낮기 때문에, 현대가 실수요자가 되는 것이 국가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했다. 더욱이 대정부 로비는 현대가 포항제철보다 월등하여 현대는, 아예’아산제철소’라는 이름까지 지어서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박태준 사장의 명에 따라 서울에 ‘제2제철설명단’이 만들어졌다. 단장은 안병화 부사장이 맡았고, 단원으로는 여상환씨, 박준민씨, 김진주 전 부사장이 참여해 대정부 설명을 담당했다.

건설·조업경험, 해외 차관 도입 우위 강조해 제2제철 실수요자 낙점

설명단은 정부 관련부처와 인사를 대상으로 포항제철이 실수요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며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심지어 설명을 듣는 것마저 회피하는 분위기였다.

정부 대상 설명이 끝나가는 시점에, 박태준 사장은 제2제철설명단에 두가지 지시를 내렸다. 하나는 제2제철 실수요자 결정에는 최종적으로 대통령의 재가가 나야 하니 대통령 면담을 신청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대통령 보고 시에 포항제철이 하는 것이 국민경제발전에 꼭 필요하다는 자료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건설경험, 조업기술, 국제경쟁력의 등의 건설이나 조업에 관련된 사안이 문제가 아니라, 예산이 부족해도 국가가 포항제철을 지원하는 것이 정부로서 올바른 선택임을 증명하는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이에 따른 산업구조의 장기적 발전전망을 보니,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되는 2000년경에는 자동차, 건설, 조선, 가전, 철강산업 등이 중심이 되는 중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변하는 것으로 조사됐어요. 이 모든 산업부문을 현대라는 1개의 기업이 독점하게 되면, 우리나라 기간산업의 집중이 극심해지고 산업구조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었어요. 더구나 산업발달의 기초소재인 철강재까지 1개의 기업이 독점을 하면 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부실화될 경우 국민경제 전체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선진국가가 발전도상에 있을 때나 선진국이 되어있는 당시에도 철강산업만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직간접으로 관리하는 산업구조로 되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의 개인기업에 산업구조가 편중되고 경제생산력의 과도한 의존은 국민경제 발전에 역행한다는 의미의 내용을 담아 자료를 만들어 드렸어요.”

제2제철 실수요자 문제는 박태준 사장의 주장을 받아들인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에 맡기기로 결단하면서 막을 내렸다. 정부는 1978년 10월 27일 제2제철 실수요자를 포항제철로 확정하고, 10월 30일 이 사실을 발표했다.

이후, 1979년 6월 아산만으로 입지가 선정되었으나, 포항제철은 항만과 용수 등의 사회간접자본 부분이 열악하여 다른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그 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서거한 후 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듬해 11월 박태준 회장, 고준식 사장 체제에서 다시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동안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던 광양만이 새로 제2공장 입지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1981년 어느 날이었어요. 박태준 회장비서실에서 당시 황경노 동부그룹 부회장을 모시고 창원에 있는 한국중공업(現 두산중공업)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1년전인 1980년쯤 박 회장의 지시로 적자가 계속된 한국중공업을 포항제철이 인수하는 작업을 비밀리에 한적이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사항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박 회장이 대우중공업 헬기로 한국중공업에 오셔서 회사 현황 보고를 받으시고, 대기하고 있던 황경노 전 회장과 나를 헬기에 타라고 하셨어요. 헬기가 남해안을 끼고 비행해 섬진강 하구에 다다르자 박 회장은 지금 광양제철소가 들어서 있는 광양만 일대를 가리키며 ‘저기가 제2제철 입지’라고 하셨어요. 박태준 회장의 마음 속에 있던 새로운 제철소 입지가 밖으로 드러나는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이곳을 추천한 사람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이맹기 전 대한해운 사장이라고 했어요. 아산만이 제철소 입지로서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고심하고 있을 때 이맹기 제독이 ‘제가 알고 있는 좋은 곳이 있습니다’하면서 광양만을 지목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아! 광양이 새로운 제철의 중심지가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냉연제품 공급해주라는 회장 지시에도 끝까지 소신 지켜

김진주 전 부사장은 1982년 11월 냉연판매부장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냉연제품은 연합철강, 일신제강 등 기존의 철강회사들과 경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동차는 현대에서 처음으로 ‘포니’라는 이름의 소형차를 생산하고 있었고, 가전제품도 수입에 의존하는 등 냉연제품의 수요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나오는 여러 부산물도 냉연판매부에서 판매하던 시기였다. 냉연제품 판매가 매우 부진하여 냉연공장만이 적자를 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장을 개척하라는 특명이 그에게 내려졌다. 몇 개의 대리점이 부도를 냈고, 몇 개의 대리점은 부도가 날 위험이 있었다.

외상판매에 따른 보증을 위한 담보율 등을 원리원칙에 입각해 처리하다 보니 김진주 전 부사장은 현실감각이 없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부장으로서 1년이 지날 무렵 발생한 1979년 2차 석유파동에서 벗어나면서 판매량도 늘어나고 수요시장이 정상을 찾아가던 어느날,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방금 박태준 회장과 함께 점심 식사하고 왔다”며 박 회장이 직접 쓴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김진주 부장 앞’으로 되어있는 메모지에는 불황에는 남아돌고 호황에는 품귀를 빚고 있는 제품의 거래물량을 몇 퍼센트 늘려주라는 내용이었다. 김진주 부장은 그 자리에서 그 메모지를 찢어버리고 당장 거래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음날 박태준 회장이 그를 불렀다.

“야, 네가 회장이냐, 내가 회장이냐?”

“제가 왜 회장입니까? 저는 부장입니다.”

“회장이 그런 지시도 못하냐?”

“그건 안됩니다. 제가 판매책임자로서 안 팔리는 제품은 끼워팔거나, 불황시에 안 팔리는 제품은 불황시 판매한 비율로 호황시에 물량을 주겠다는 약속을하고 판매를 합니다. 불황시에는 안사가고 호황시에 학연·지연·혈연이나 정관계 인맥을 동원해 청탁이 들어온 업체에 물량을 주게 되면 제가 판매부장으로서 판매를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여러수요가 가 온갖 인맥을 다동원해 물량을 더 받기 위하여 회장님에게 간다면, 판매하는 저도 어렵고 결국에는 그여파로 인해 회장님에게도 나쁜여론이 생길 수 있으니 회장님의 지시를 따를 수 없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시겠다면 회장님께서 판매부장을 하시는걸로 알고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본사 대기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감사실조사역, 다음에 경영정책실장이 되었다.

그는 1986년 무렵, 은퇴 후 포항제철 고문으로 계시던 고준식 전 사장을 모시고 연합철강경영정상화에 나섰다. 5공화국이 출범한 뒤 전두환 대통령이 재계의 골칫거리였던 연합철강의처리문제를 국회재무분과 위원장이었던 박태준 회장에게 부탁한데 따른 조치였다. 당시 연합철강은 창업자인 권철현씨와 정치적으로 인수한 동국제강 장상태씨 간의 경영권싸움과 이로 인한 계속된 파업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운 상태였다.

서울본사에는 고준식 사장, 이영부 사장과 김진주씨, 부산공장에는 박종태 부 사장과 신창식 전무가 근무하면서 1년간의 노력으로 연합철강경영을 정상화시켰다. 그 뒤 인사발령을 받고 포철로 복귀하는중에 다시 1987년 한국중공업위탁경영인으로 선정된 안병화전사장을 따라 한국중공업으로갔다. 당시 한국중공업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주도권을 놓고 한국전력과 싸우던 끝에 사장이 사임하는등 경영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 전 부사장은 안병화 사장을 도와 한국중공업 경영을 본궤도에 올려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포항제철과 한국중공업에서 각각 사장으로 재임한 안병화 사장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 초대 상공부 장관을 거쳐 한국전력 사장을 역임했다.

‘한보철강 인수 실패’, ‘신세기통신 매각’ 매우 안타까워

1997년, 그동안 위태위태한 상황을 보이던 한보철강이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철강업계에서 일어난 문제의 뒤처리는 응당 포스코 몫이었다. 포스코가 파견한 위탁경영팀의 조사에 의하면 한보철강의 투자비는 회계상 약 5조 원이었으며,
실질가치는 1조 9000억 원 정도였다.

포항제철소의 고로에 해당하는 코렉스(COREX)설비를 살리고, 압연설비 일부를 보완하여 가동하고, 생산 제품은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틸에 판매를 위탁하는 방식으로 경영하였다. 포스코는 유상부 회장 취임 이후 한보철강 위탁경영팀을 철수시켰다. 이후 재력가 권철현씨 측에서(전 연합철강 창업자) 일본 자본과 합작해 한보철강을 인수했지만, 가동할 능력이 없어 포기하고 포스코에 매각하려고 하였으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철강 경기가 좋아지면서 채권단에서 한보철강 매각 절차를 밟았다.

“포스코가 한보철강 위탁경영을 계속하든지, 기회가 왔을 때 빨리 매입하든지, 아니면 입찰에서 이길 수도 있었는데, 여러 번 기회를 놓치더니 결국은 현대에 한보철강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땅값만도 1조 원이 넘는 큰 덩어리였는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포스코가 국내외에서 철강시장지배력을 상실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진주 전 부사장은 이 문제를 시장지배력(Market Power)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흔히 독과점 문제를 들먹이지만, 철강산업이란 특성적으로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닌 국가 간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거나 도태하는 산업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시작한 철강산업이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오고, 다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와서 포스코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철강산업의 추이, 특히 시장원리에 의하여 회사간의 신설과 통합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철강산업이 자기가 소유한 생산공장에 의존하며 그것이 경영이라고 착각하는 인식에서 그러한 결정 즉 한보철강을 경쟁사에 넘기는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은 그러한 인식이 바탕이 돼 오늘날 세계 철강시장 지배력을 중국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였다.

김진주 전 부사장은 신세기통신에 대해서도 진한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신세기통신은 박태준 회장 때 시작하여 정명식 회장을 거쳐 김만제 회장이 완결을 지은 포스코 미래에 가장 희망 있는 전략사업이었다.

이동통신은 포스코가 보유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정치적으로 2대에 걸친 대통령이 관련된 통신사업자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통신사업의 실수요자로 선정된 포스코의 제2 도약을 확보한 사업이었다.

“당시 신세기통신이 채용한 CDMA 기술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최첨단 기술로서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유일한 기술이었습니다. 포스코의 자금력을 가지고 성장시켰으면 지금의 스마트폰으로 촉발된 통신시장에서 포스코가 주역이 되었을 거예요. 매각 당시 자금부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반드시 무엇을 매각해야 할 특별히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이 신세기통신 대주주권 16.6%를 2000년 1월 3일 SK텔레콤에 1조 8000억 원에 매각한 것은 대단히 아쉽습니다.”

외부인사 김만제 회장 취임··· 권한위임·파격적 복리후생제 시행

김진주 전 부사장은 김만제 회장 취임과 그의 경영철학 그리고 포스코의 변화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말을 이어갔다.

“김만제 회장은 본인이 스스로 원하여 포스코에 온 것이 아니에요. 김 회장이 포스코에 온배경에는 대통령 후보지명과 선거 기간 중에 일어난 박태준 회장과 김영삼 대표(대통령 후보) 간의 경쟁과 감정대립이 있었습니다. 박 회장이 일본으로 외유를 나간 이후, 후임으로 경영을 맡은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 사이에 발생한 잡음에 대해김영삼 정부가 책임을 물은 결과로 김 회장이 오게 된 것입니다.”

“김만제 회장은 회사의 현황을 잘 알고 있는 사장, 부사장들의 의견을 모아서 의사를 결정하는 ‘경영위원회’를 통해 중요사항을 협의했습니다. 퇴직한 회장, 사장 등 전임 임원들과의 정기적인 회의 제도를 만들어 회사경영에 자문을 받아 결정하였습니다. 자신의 권한을 사장과 부사장, 제철소장에게 대폭 위임했어요. 임직원의 숙원이었던 임금을 인상하고 휴가제를 실시해
파격적인 복리후생 정책을 시행했어요.”

▶ 김만제 회장을 비롯한 경영위원들이 1995년 무렵 포스코를 방문한 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에게 회사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용운, 이춘호, 김진주, 이동춘, 김종진 사장, 김만제 회장, 홍상복, 이형팔, 이구택, 김권식, 심재강, 조관행, 미상, 박재윤 장관, 미상.

 

“1994년 우리나라의 경제가 특히 금융시장이 나빠지고 있어서, 외화자금 부족을 예상하여 포스코 주식을 미국 뉴욕증시와 런던증시에 상장하고 해외에 낮은 금리의 사채와 차관을 도입하여 35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확보했어요. 국내에서는 제2, 3금융권이 어려워질 것과 그 후유증에 대비하여 거래를 최소화함으로써 IMF 관리체제에서도 제2, 3금융권의 부도와 도산에도 일체의 손실이 없었어요. 충분한 외화와 유동자금의 보유로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췄으며, 그 결과로 국가적으로 문제가 된 삼미특수강을 인수하고 한보철강 위탁경영에도 참여했어요.”

▶ 1994년 10월 14일 포항제철이 국내기업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3억 달러규모의 주식예탁증서를 상장했다. 뉴욕 증시 상장을 총괄했던 김진주 부사장(왼쪽 두 번째)과 실무진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 직원이 대우받는 문화 만들어야

김영삼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포스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일부 임원들이 새 경영층을 찾아가는 등 나름 살 길을 찾았다.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가 일어나면 흔히 새로운 경영진과 실세들이 입성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새로운 비전과 경영목표를 제시하고 과거와의 단절에 나서는데 이는 필요악이기도 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속담처럼 체제가 바뀌면 분위기 일신 차원에서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이 작업이 기존 체제에서 일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과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임직원을 면직하거나 혹은 퇴직시키는 독선적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저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1998년 초, 그는 대검 중수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김만제 회장 체제에서 판매, 자금, 기획조정실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임직원의 봉급을 너무 많이 올려 주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복리후생, 교육, 해외출장 등에 과대한 비용을 썼다”

“삼미특수강 인수와 관련해 돈을 받았다. 300억 원을 어디에 갔다 줬다”

이런 이유로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가 자신을 대검찰청 중수부에 고발하였다. 신문에는 ‘포스코 김진주 부사장 곧 구속될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검찰도 출처 불명의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번 조사와 고발이 자기를 통해 김만제 회장에게 책임 지우겠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먼저 검찰에 자신의 뜻부터 전했다고 했다.

▶ 1997년 9월 12일 포스코센터 앞 광장에서 열린 프랑크 스텔라 作 아마벨(AMABEL)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레너드 홀슈(Lenhard J. Holschuh) 국제철강협회(IISI) 사무총장, 심재강 전무, 김광준 전무, 박종일 전무, 프랑크 스텔라(Frank Stella) 부부, 김진주 부사장, 이춘호 부사장, 김용운 부사장, 윤석만 상무.

“나는 네 살 때 일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재직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창피해서 못하겠다. 그러니 한 일은 ‘했다’, 안 한 일은 ‘안 했다’고 말한다. 다만 아랫사람이 한 일은 내가 한 거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일지라도 아랫사람은 받아적으며 지시로 알고 한 것이니 내가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말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 말에 누군가 다칠 수 있는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으며 내가 책임을 지겠다.”

검찰 조사를 마치고 그는 ‘한 것’, ‘안 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해 도장을 찍었다. 몇 개월의 조사를 마치고 검찰은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렸고, 그는 불기소 처리되었다. 담당 검사는 철저하게 조사해야 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많은 불편을 이해하라는 인사를 하면서 “선배님께서는 나가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이번 기회에 깨끗이 신상 세탁을 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좋은 회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경영’이 있으며,

‘훌륭한 경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경영자’가 있는 것이다

김 전 부사장은
1973년 입사해서 그 해 6월 9일 포항제철소 1고로의 출선을 본 후 포항제철소 제2, 3, 4기 그리고 광양제철소 제1, 2, 3, 4기 건설기획에 참여했다. 그는 기획으로 입사하여 기획조정실장(부사장)으로 퇴직을 했다. 포스코의 경영기획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전문가이다.

“포항제철소 정문에 걸려 있는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는 슬로건과 박태준 회장의 자택에 걸려 있는 ‘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은 같은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어요. 정문 글귀는 공간적인 의미로서 ‘형이하학적 실천’의 행동 세계이고, 자택의 것은 시간적인 의미로서 ‘형이상학적 지혜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박태준 회장의 삶의 철학이며 실천이라 생각합니다.”

이어 그는 포스코를 포함한 제조업 경영자라면 꼭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공장화’가 아닌 ‘기업화’ 즉 ‘Smart Factory’가 아니라 ‘Smart Company’와 함께 이를 넘어선 ‘Smart Group’을 목표로 삼는 경영이 필요합니다. ‘좋은 회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경영’이 있는 것이며, ‘훌륭한 경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경영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2011년 12월 13일 오후 5시 20분에 돌아가신 박태준 회장에 대한 추모의 말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쳤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라를 사랑하신 박태준 회장을 깊이 존경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열정을 토해냈다.
그가 그려낸 포스코의 미래모습은 후배들이 성취할 사명이라고 말하며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용광로보다 뜨거운 포스코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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