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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91] 김동식 前 상무이사, 바다 위 건설한 광양제철소 ‘경제성 세계 1위’

[남기고싶은이야기 91] 김동식 前 상무이사, 바다 위 건설한 광양제철소 ‘경제성 세계 1위’

2017/11/22

포항제철소 3기 건설 당시 제3고로 토건공사 주감독에 이어 4기에서는 소결건설과장으로서 4소결공장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김동식 전 상무이사는 1979년 12월 7일 제2제철 건설계획과장에 보임되었다. 제2제철 입지선정 및 건설계획 담당이었다. “저는 4소결공장 건설 공사를 다 끝내지도 못한 상황에서 떨어진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어요. 당시 제2제철 건설 입지는 아산만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조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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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사연 많던 제2제철 건설 입지 8년 8개월 만에 광양으로 선정
– 강추위 속에 지질조사··· 연약지반 개량공사로 최고 부지 만들어

 

포항제철소 3기 건설 당시 제3고로 토건공사 주감독에 이어 4기에서는 소결건설과장으로서 4소결공장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김동식 전 상무이사는 1979년 12월 7일 제2제철 건설계획과장에 보임되었다. 제2제철 입지선정 및 건설계획 담당이었다.

“저는 4소결공장 건설 공사를 다 끝내지도 못한 상황에서 떨어진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어요. 당시 제2제철 건설 입지는 아산만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조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

당시 포스코는 아산만 부지의 공장 레이아웃까지 어느 정도 정하고 착공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지표면과 지하암반의 성질, 암반고 등 부지와 항만의 표면과 지하의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부지위치, 안벽법선, 항로 등을 결정하는 중이었다.

“아산만은 제철소와는 유난히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입지 선정 당시부터 포항과 함께 후보지로 거론되었었고, 1974년 정부 주도의 제2제철 건설 입지로 거의 확정되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이 무산되고 민간 주도의 제2제철 건설안이 거론될 무렵인 1977년에 현대 측이 처음엔 경북의 영해를, 나중엔 충남 태안군과 서산군 사이에 있는 가로림만을 적지(適地)로 제안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1978년 6월 제2공장 사업계획서를 제시했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10월 21일 포스코에 제2제철 입지 타당성 조사를 지시하고, 23일 박태준 사장과 함께 헬기로 가로림만을 답사했다. 이때 제2가로림만(서산군과 당진군 사이)이 입지 후보로 추가되었다. 이후 제1가로림만, 제2가로림만, 아산만 등 3곳을 대상으로 한 해외 용역회사의 타당성 조사, 건설부와 청와대 경제수석 간의 갈등 등 우여곡절을 거쳐 1979년 7월 24일 최종적으로 아산만이 포스코 제2공장 건설 입지로 확정됐다.

“아산만이 제2공장 입지로 확정되자 포스코는 1979년 11월 30일 아산만 허허벌판에 제2공장 건설사무소(평택시 포승면)를 설치하였고, 12월 들어 제가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명령이 난 겁니다. 이후 1980년 1월 말까지 정밀한 지질·지형 측량·해상 및 육상 보상물 조사 등을 했는데, 아산만은 제철소 입지로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아산만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우리나라 최대 25만 톤급 원료선이 출입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이 요구되는 대규모의 갑문을 건설해야 했어요. 게다가 지질도 미세한 부유물질이 가라앉아 형성된 퇴적점토층으로서 연약지반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무렵 국내 정치 상황이 요동치는 가운데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는 등 내우외환이 겹쳐, 우리 경제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1962년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과 초긴축 경제정책을 펼쳤다. 막대한 정부 지원공사가 수반되는 데다 부지 기초조사를 통해 제철소 부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포스코는 1980년 1월 아산과 서울에 주재하던 제2공장 추진팀을 철수하였고, 4월 들어서는 팀을 해체하고 입지의 전면 재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잘 알다시피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항만·철도·도로·용수·전기 등 5가지 인프라는 철강공업육성법에 따라 정부 지원사업으로 건설했습니다. 철강공업육성법은 2제철 건설 당시에도 살아 있었어요. 우리가 아산을 입지로 해서 제2제철 건설을 추진한 것도 포항과 같은 조건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바로 이 부분에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겁니다.”

결정적인 것이 항만이었다. 동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40cm 정도로 작아 문제가 없었지만, 아산만은 무려 9m에 달해, 15만 톤의 배밖에 들어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건설부에서는 평택에서 당진까지의 방파제와 함께 갑문을 건설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방파제와 갑문 건설에 소요되는 자금을 건설부에서는 5000억 원으로 예상했지만, 우리는 1조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봤어요. 5월 들어 국보위 재정분과위원장으로 계셨던 박태준 사장께서 당시의 국가 재정상태로 봐서 5000억 원이든 1조 원이든 정부가 지원해주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저렴한 건설비로 더 빨리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입지로 광양만을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린 겁니다. 제철소를 공기 내에 지어도 정부 사업이 적기에 지원되지 않으면 가동할 수가 없으므로 박태준 사장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으로 보입니다.”

광양만, 연약지반으로 번번이 제철소 후보지에서 제외

연약지반 극복, 공기준수, 해상오염 방지 조건으로 부지 승인받아

광양만은 제철소 입지 선정 때마다 꾸준히 물망에 올랐으나 바다를 메워 부지를 조성해야 했기 때문에 연약지반(軟弱地盤)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제외된 지역이었다. 포스코 조사팀은 광양 지역의 부동산 투기를 우려해 김 장수나 대학의 학술조사단으로 가장해 비밀리에 예비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철소 입지로서 매우 양호하며 정밀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박태준 사장이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만나 제철소 입지로서 광양과 아산을 비교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 5월 들어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에 두 지역을 비교·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가 쉽사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어떻게든 지원사업을 추진했을 겁니다. 국보위에서는 건설부의 의견에 따라 원안대로 하라고 했지만, 우리가 계속 이의를 제기하니 그런 지시가 내려진 것이었어요. 1980년 6월 20일 개최된 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 보고회에서 유상부 전 회장도 양 지역을 비교해 브리핑하고 광양으로 건의했지만, 결국 7월 7일 포스코가 배제된 가운데 개최된 심의회의에서 건설부가 아산을 최적지로 보고함으로써 2제철 입지는 아산으로 재확정되었습니다.”

아산만이 광양만보다 유리하다는 결론은 잘못된 용역 결과에 기인된 것이라고 판단한 포스코는 자체 검토안을 청와대와 상공부로 발송하고 제철소 입지를 광양으로 변경해 줄 것을 재차 건의했다. 정국이 차츰 안정을 되찾자 1980년 12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관계관 회의에서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만청과 국토개발연구원에 △조력발전을 겸한 아산만 갑문식 항만(25만 톤) △아산만 15만 톤 감조식(感潮式) 항만 △광양만 25만 톤 항만 등 3가지 제철소 건설 방안에 대한 용역을 주고 그 결과에 따라 입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포스코는 용역의 원활한 수행을 지원하고 부족한 현지 자료 등을 확보해 제공하기 위해 12월 16일 유상부 부장을 반장으로 하는 ‘입지계획반’을 구성해 광양 현지의 지질 등 제반조사에 들어갔다.

“건설부는 1981년 11월 4일, 르아브르 항만청의 용역 결과를 종합 정리해 청와대에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건설부는 다시 아산만갑문식 항만을 건의하는 것으로 보고안을 확정했는데, 포스코는 건설부의 보고와 별도로 자체 검토한 의견을 건의하기로 했어요. 이후 우여곡절 끝에 부총리 보고까지 마친 건설부 보고서에 포스코의 주장을 반영해, 결론적으로 아산과 광양의 부지 조건이 경제적으로는 유사하므로 실수요자인 포스코의 의견을 감안해 결정해 주실 것을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청와대 보고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포항제철소를 이미 성공적으로 건설·가동한 포스코의 경험을 높이 사 제2제철 입지를 광양만으로 최종 확정했다. 다만 “포항제철은 연약지반에 대한 기술상의 어려움을 책임지고 해결할 것이며, 1기설비 준공 공기를 준수하고 해상 오염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했다.

1200만 톤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부지 450만 평 확보

세계 최대 25만 톤 선박 접안이 가능한 꿈의 제철소 실현

“이로써 1973년부터 논란을 거듭해 왔던 제2제철 입지 선정 드라마가 8년 8개월 만인 1981년 11월 4일 광양으로 매듭지어졌어요. 그해 12월 1일 현지에 파견한 선발대 48명으로 광양군 진월면사무소 앞마당에서 건설사무소 개소식을 가졌습니다. 이 무렵 포스코는 포항 4기설비 준공에 따른 설비안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제2제철의 조속한 건설을 위해 지질조사팀 등을 확대 구성해 12월 24일 광양 현지로 보냈어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해상의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로 사람이 해상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아침에 숙소에서 싸온 김밥이 얼어붙어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질조사팀장이었던 이명섭 차장이 추위를 견디게 하려고 소주를 반주로 권했는데, 당시 작업원들 중에는 이 때문에 위장병을 얻은 사람도 있었답니다.”

1982년 5월 30일까지 지질조사로 25개 공을 시추하고 실내시험을 마쳤다. 예상했던 대로 연약지반으로 나타나 공장 건설 지역은 추가시추 조사를 하는 등 기초조사에 만전을 기했다. 연약지반 위에 각종 설비를 건설하고 조업 중에 하중이 추가되면 침하 및 지층 붕괴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량 대상 지역의 토성을 더욱 정밀하게 분석했다.

“크게 보면 광양만은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입니다. 광양제철소가 현재의 위치로 확정되기까지는 상당 기간 동안 지속적인 연구와 조사 작업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지역은 1973년 제2제철 건설 타당성을 검토할 때 KIST가 최초로 제안했어요. 반면 건설부에서는 소당도 주변을 적지로 고려하고 있었고, 한국종합제철에서는 경남 하동군 금남면을 주로하여 전남 광양군 골약면에 이르는 지역을 정한 바 있었습니다. 1982년 4월 부지 기본 설계와 항만 기본 설계에서 부지 외곽 좌표와 항만법선(港灣法線)이 확정되면서 오늘날의 위치가 정해진 겁니다. 이후 토지 보상, 주민 이주, 어업권 보상 그리고 계속된 민원 해결 등에 얽힌 일화는 여러 관계자를 통해 많이 회자된 바와 같습니다. 특히 건설 엔지니어의 시각으로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합니다.”

광양제철소의 부지 면적은 공장부지, 수토장(受土場), 주택단지 등 총 1488만m²(450만 평)에 이른다. 광양제철소의 부지는 주로 바다를 매립해 조성해야 했기 때문에 부지 측량 등 조사 작업과 설계, 적절한 공장 배치 계획, 호안공사와 준설 매립, 연약지반 개량공사 등의 공정을 거쳐야 했다. 기준면은 평균 수준면(바닷물의 평균 높이)으로 정한다. 1981년 3월부터 1982년 2월까지 1년간 광양제철소 부지에 인접한 지진도에서 연속 조위 관측을 실시해 이때 나온 기본 수준면을 공장 기준면으로 채택하였다.

“부지 계획고는 간만의 차와 각 배수로의 홍수 시 예상 수면고(水面高)를 산정하고 여기에 부지의 여유고를 가산해 결정했습니다. 부지 여유고를 크게 할수록 홍수가 났을 때의 안정성은 커지지만 준설매립 비용이 많이 소요되므로 최소의 여유고를 가산해 가장 경제적인 부지고를 계획했어요. 그때 회사의 자금 사정이 소본부와 백운대의 칸막이벽을 블록으로 지을 정도로 매우 빠듯했는데, 지표를 1cm 올리는 데 1억 원이 소요되는 거예요. 이러한 분석 내용을 고 사장에게 보고했더니 최대한 낮추라고 했어요. 그래서 계획보다 50cm 낮췄는데, 최근 제철소를 방문했을 때 마침 저기압에 만조가 겹쳐 압연지역 일부 도로에 해수가 들어오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빨리 부지를 돋우는 보완공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82년 9월 28일에는 총연장 13.6km의 제방을 건설하는 호안축조공사가 착공되었다. 부지 내에 있는 소당도, 금당도, 비운도 등의 섬을 발파한 돌로 제방을 쌓았는데, 단단하지 못한 돌이 많아 호안 수명 등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감사팀에서는 1983년 7월 6일까지 공구별로 호안 불량 개소를 점검했는데, 박태준 회장은 7월 13일 임원회의에서 수중의 시공 상태를 특별히 확인하라고 지시했었다.

“스쿠버 경험이 많은 감사팀 직원이 수중 감사에 착수했어요. 그 과정에서 한종웅 당시 감사역은 급류에 휘말려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11월 12일 가장 난공사인 최종 물막이 공사를 완료함으로써 호안을 완전히 육로로 개통시켰어요.”

바다 위 제철소 짓는데 6000만 입방미터 준설토 매립

공유수면 매립해 평당 단가의 10분의 1로 부지 확보

바다 위에다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공유수면(公有水面)의 준설, 매립이 선행되어야 했다. 평균 매립고는 4.5m였다. 착공 초기에는 하루 24시간의 철야 공사로 준설 작업량이 하루 평균 5만m³에 달했고, 준설토 총량은 연약지반개량공사, 후기매립지공사 등이 추가되어 최종 5920만m³에 이르렀다. 이는 여의도 63빌딩 만한 건물 140동과 맞먹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공사 절정기였던 1983년 9월 들어 준설선단의 규모는 총 10개 선단, 4만 2300마력으로 우리나라 총 보유선단의 70%가 광양 현장에 투입되었다.

“당초 공장부지 270만 평 중 1, 2기 540만 톤 확장에 필요한 170만 평과 지원시설 및 주택단지로 사용될 금호도 60만 평 등 총 230만 평을 1단계로 매립해 1984년 11월 31일 완료했습니다. 이후 3, 4기 건설 지역은 1985년 4월 30일, 연관단지는 9월 20일 공사를 마쳤습니다. 지금은 공유수면을 매립하더라도 그 땅을 사업주가 그냥 가질 수가 없습니다. 공사 소요 경비와 관계없이 취득 시 인근 지역의 땅값으로 사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허가를 받아서 매립하면 사업자가 그 땅을 가질 수 있었어요. 광양도 그랬습니다. 보상비와 부지조성에 소요된 총공사비를 합산해 평당 단가를 계산해 보니 3만 5000원이었어요, 그 넓은 부지를 시가의 10분의 1 가격으로 구입한 셈이어서 이는 광양제철소 경쟁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광양제철소 부지는 섬진강 하구 남측의 저지대로서 밀물 때는 해수가 밀려들어 오고 물이 빠지면 모래언덕이 드러나는 간석지이지만,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서 섬진강 하구 정면 양질의 흙을 준설하여 조성했다. 제철소를 건설할 때 예상되는 첫 번째 문제는 원지반의 지질 구조인데, 이 지역의 지질 구조는 상부의 느슨한 모래층과 중앙부의 점토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부 중적층의 구조적 특징은 큰 함수비(含水比)와 변화율인데, 이 흙은 투수력(透水力)이 대단히 작아서 흙 속에 포함된 물이 완전히 배출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이로 인한 침하가 예상되는 흙이었다.

“연약한 땅을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양질의 부지로 바꾸는 과정을 ‘연약지반 개량’이라고 해요. 느슨한 상부 모래층의 밀도를 증대시키고 중간 점토층에는 모래말뚝 또는 모래다짐말뚝을 박은 다음 흙으로 하중을 가해 원지반 흙에 포함된 물을 강제로 외부로 배출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래 기둥을 촘촘히 세워 물이 빠지는 고속도로를 만들어주는 거지요. 국내 최초의 대규모 연약지반 개량공법을 도입하기 위해 1983년 10월 나는 직원 4명과 함께 일본 연약지반 개량 현장(홋카이도부터 히로시마까지 주요 해안 매립공사장)을 견학하고 실내 토질시험 방법을 습득하기도 했습니다.”

▶ 1984년 1월 20일 김동식 건설1부 차장(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광양제철소 연약지반 개량공사 착공식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반 개량공사는 초기에는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지도를 받기도 했다. 12대의 타설기 조립 작업이 끝난 후 1984년 1월 20일 본격적인 개량공사에 들어갔으나 바람이 불면 높이 40m에 달하는 ‘모래기둥 타설기’가 쓰러지는 등 예정대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았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바닷바람과 싸우면서 착공 4개월 만에야 작업 진도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 1984년 9월 김동식 건설1부 차장(왼쪽)이 윤의광 건설1부장과 배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

 

“연약지반개량공사를 수행하면서 기술자립도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설계, 공사, 침하안정관리 등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개발해 적용했습니다. 추가공사 때부터는 전부 자체 기술로 시행할 수 있었고, 훗날 공사 경험을 대외 판매가 가능한 기술자료로 등록시킬 만큼 기술을 축적했습니다. 그 경험을 건설기술자들의 보수교육에 소개하기도 했고, 1990년 인천공항 건설 계획 시 기술자문위원으로서 대규모 부지조성과 지반개량 경험을 전파했습니다. 또 경북대, 서라벌대, 선린대 등 관련 학과 학생들에게도 전파교육을 한 바 있습니다.”

기술자로서 선망하는 경력 모두 거쳐

그는 1971년 3월 1일 공채 3기로 입사한 후 석 달 동안 5급으로 근무했다. 포항제철소 부지 준설은 거의 끝나 있었는데, 황량한 제철소 부지 한가운데로 뚫린 중앙도로가 눈에 들어오자 제철소에 이렇게 넓은 도로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포항 1기 건설이 끝날 때까지 건설본부 제강건설과에서 근무했습니다. 2기 때는 2년 3개월간 감사실 계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실은 회사 내 다양한 부서와 연관 지어 업무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전사적인 관점에서 업무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고, 법과 규정에 따라 일하는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광양제철소로 건너뛰었다. 건설 기술자의 시각으로 볼 때 광양제철소는 세계에서 가장 콤팩트하고 효율적인 제철소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광양만 바다를 메워 소요부지를 조성했으므로 엔지니어들이 아무런 간섭 없이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레이아웃을 준비하고, 이에 맞춰 부지와 항만 설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면적과 생산능력을 비교하면 조강 톤당 0.7m²이 나옵니다. 건설 당시 세계적인 최신 제철소 레이아웃을 모두 비교하여 가장 콤팩트한 제철소를 계획했고, 서쪽에는 수토장, 동쪽에는 슬래그투기장을 두어 확장성에도 문제가 없도록 건설했습니다. 수토장은 매립에 부적합한 흙을 모아놓은 곳인데, 시간이 지난 후 여기에 CGL 등 2차 압연공장을 지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또 여수 외항으로부터 좁고 깊은 수로를 통해 20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위치한 광양항은 파도가 없고 지금은 35만 톤 대형 선박까지 접안이 가능합니다. 35만 톤 선박 한 척이 광양항에 일부 하역 후 포항항에도 하역한다면 포항제철소의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1997년 한보철강 부도 시 회생대책반을 거쳐, 그해 11월부터 5년여 동안 포스코건설 전무·부사장으로 일하다가, 2005년 다시 포스코로 돌아왔다. 2009년까지 4년 동안 해외투자 기술자문을 맡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인도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당시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지 않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합작투자 요청이 있었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철광석 광산·항만 위치 등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제철소와는 맞지 않았어요. 아마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광양제철소만큼 경쟁력 있는 입지는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양제철소 입지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제철소 확장 또는 연관 산업을 많이 발굴하여 회사 발전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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