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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90] 한수양 前 부사장, STS 일관체제 완성··· 세계적인 STS 메이커로 육성

[남기고싶은이야기 90] 한수양 前 부사장, STS 일관체제 완성··· 세계적인 STS 메이커로 육성

2017/08/28

2016년도 포스코의 스테인레스 조강생산량은 연간 326만 톤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10%에 육박한다. 매출액은 6조 5000억 원으로 포스코 국내 매출의 15% 정도이다. 이는 스테인리스 일관 조업을 시작한지 27년 만에 이룩한 성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지다. 그 보다 더 큰 의미는 포스코가 탄소강 위주의 생산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특수강 분야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 세계 철강 업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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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스테인리스 설비 도입에서부터 품질 안정화까지 일임
– 직책이 올라갈수록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2016년도 포스코의 스테인레스 조강생산량은 연간 326만 톤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10%에 육박한다. 매출액은 6조 5000억 원으로 포스코 국내 매출의 15% 정도이다. 이는 스테인리스 일관 조업을 시작한지 27년 만에 이룩한 성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지다. 그 보다 더 큰 의미는 포스코가 탄소강 위주의 생산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특수강 분야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 세계 철강 업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

한수양 전 부사장은 “스테인레스강 사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낸 후배들에게 한 없는 찬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말썽 많고 탈도 많았던 2분괴공장장, 2연주공장장을 거쳐 생산관리부차장으로 보임되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한수양 전 부사장은 다시 스테인리스사업추진반장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985년 11월 22일 박태준 회장이 직접 지시해 떨어진 명령이었다. 당시 스테인리스 설비는 경영정책실에서도 전혀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생소한 분야였다.

“포항제철에서 설비를 신설 또는 증설할 경우 경영정책실에서 검토를 거쳐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설비기술본부에서 설비 계획을 세우고 외자부에서 해외 설비 메이커에 발주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작과 건설을 맡기고 하면서 추진하는 거였어요. 그 과정은 매우 엄밀하고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요. 그런데 스테인리스 설비는 경영정책실이나 설비기술본부의 검토 거치지 않고 바로 사업 추진에 들어갔으니, 생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스테인리스 사업은 원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중공업은 독일의 유명한 스테인레스 생산업체로 설비제작도 겸하고 있던 티센에 용역을 주어 12권으로 된 용역결과보고서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창원사업소에 스테인리스 전기로와 연주기를 설치해 슬래브를 제조하고 포항제철소로 보내 압연한 후 핫코일이 만들어지면 이걸 다시 창원에 있는 삼미특수강 냉연공장으로 가져가 최종 제품을 생산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한국중공업에서 박태준 회장에게 자기들이 생산한 슬래브를 핫코일로 압연해 달라고 요청한 거에요. 잘 알다시피 박태준 회장은 ‘철강업은 운송업’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무거운 것을 창원에서 포항으로, 다시 포항에서 창원으로 옮기는 것 자체가 모두 비용인데,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이 사업은 포스코가 해야 할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관계 부서의 검토도 생략한 채 바로 저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박태준 회장 지시로 스테인리스 사업 추진 나서

한국중공업과 2강 구도··· 삼미특수강 지지로 사업권 획득

이 사업에는 한국중공업 외에 슬래브 압연설비를 갖춘 포스코, 스테인레스 냉연설비를 갖춘 삼미특수강 그리고 강원산업(현 현대제철 포항공장)이 사업다각화라는 명분으로 참여하여 4개사가 실수요자 경쟁에 뛰어 들었다.

실수요자 선정을 두고 밀고 당기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1986년 2월 경쟁 4사가 참석한 가운데 상공부 주재로 엔지니어클럽에서 마지막회의가 개최되었어요. 한국중공업과 포스코가 2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포스코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한중은 이미 사업을 상당히 진척시켜 놓은 상태였으니까요 한국중공업이 먼저 나섰어요. 그런데 묘하게도 그날 회의를 주재한 좌장이 김학기 전 부사장(2대 포항제철소장)이었습니다. 한국금속학회장 자격으로 좌장을 맡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발표에 나선 한국중공업 임원은 군 출신이었는데 매우 똑똑하게 보이는 인상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작심한 듯 일갈(一喝)을 날렸다.

– 이 자리에 여러분이 나와 계시지만, 다들 스테인리스의 ‘S’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요.

평소에 점잖은 성품으로 정평이 나있는 김학기 전 부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노기 띤 목소리로 꾸짖었다.

– 여보시오.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에서 철강에 대해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디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일순 분위기가 반전된 가운데 포스코의 발표가 이어졌다. 발표가 끝난 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삼미특수강의 윤직상 사장이 포스코를 거들고 나선 것이었다.

– 어느 회사가 생산하든 스테인리스 핫코일을 쓰는 곳은 결국 우리 삼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량 수입해서 썼는데, 국내에서 포스코가 핫코일을 생산한다면 우리는 그걸 쓰겠습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회사에서 만든 것이라면 우리는 쓰지 않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수요처에서 포스코 제품이라야 쓰겠다는데 다른 시비가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삼미는 실수요자 경쟁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냉연을 지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어요. 삼미로 봐서는 어느 모로 보나 포스코가 믿음직스러웠겠지요. 뭐가 잘못되더라도 책임을 질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스테인리스강 제품 생산은 가장 먼저 전기로에서 쇳물을 끓여 진공처리한 후 연주로 보내 슬래브를 생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슬래브는 다시 열연공장으로 보내져 핫코일로 만들어지고, 핫코일은 산세-소둔 공정을 거쳐 최종 제품인 스테인리스 냉연코일로 탄생한다.

“설비계획을 위해서는 한국중공업이 독일 티센으로부터 받아놓은 12권의 용역보고서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요긴한 일이었습니다. 그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마침 그걸 관리하고 있던 한국중공업 상무가 대학 선배였는데 흔쾌히 저희 요청을 받아 들여 주었습니다. 그걸로 공부를 하고 설비계획을 세웠습니다.”

검토 결과 독일의 티센(Thyssen)과 크루프(Krupp), 이태리의 이탤림피안티(Italimpianti), 영국의 BSC(British Steel Corporation), 미국의 엘리거니러들럼(Allegheny Ludlum) 이렇게 5개사를 설비 공급과 노하우 제공이 가능한 회사로 판단했다. 판단이 내려지자 곧 바로 5개사 방문에 나섰다. 박준민 부소장, 이윤 과장과 연주, 열연, 소둔산세 각 1명 그리고 한수양 전 부사장, 이렇게 6명으로 방문단을 꾸려 한달반 동안 기술협의를 진행했다.

“5개사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국제입찰을 준비했는데, 당시 관리실에서 편성한 스테인리스 설비 구매 예산이 매우 적었습니다. 그 돈으로 과연 설비를 구매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당시 전 세계적으로 설비 제작업체들이 일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염가로 구매할 수 있었어요. 최종적으로 전기로와 정련로는 독일의 크루프, 연주는 오스트리아의 VAI, 소둔산세는 영국의 BSC로 결정했습니다.”

스테인리스 강판 품질 절반은 열연공정이 결정

김광수, 최용준 등이 스테인리스 압연 물심양면 도와

공장 가동 후 가장 어려운 것이 포항 2열연공장에 의뢰한 압연이었다. 당시 철강 시황이 매우 좋아 판매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에 열연공장에서는 일반강을 최대 생산하면 그게 다 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열연공장은 설비 컨디션과 압연 온도를 다시 조정해야 하고 작업 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스테인리스 슬래브의 압연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압연이 끝나면 흠이 있느니 평탄도가 떨어지느니 하며 이런저런 시비가 많으니 달가워할 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편하게 일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공연히 스테인리스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힘들게 일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 1992년 1월 15일 기술력향상 결의대회를 열고 세계적인 스테인리스 기술로 도약할 것을 다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화합·동참·전진’ 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당시 한수양 스테인리스사업부장(기념비 오른쪽 첫 번째)과 직원들.

 

“스테인리스 강판의 품질은 반 이상이 열연 공정에 달렸어요. 나중에 냉연공장까지 준공되고 나서는 제강에서부터 냉연까지 모든 설비가 스테인리스 전용이었지만, 열연공정만은 기존 설비에 의뢰해야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김광수 현 스테인리스마케팅실장(전무)과 최용준 현 포항 압연부소장(상무)이 당시 열연기술과소속이었는데 적극적으로 스테인리스 압연에 달라붙어 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매우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때 이미 철강산업의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기에는 스테인리스 냉연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한 핫코일 전량을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에 공급해야 했다. 당시 삼미는 세계 최고 품질의 핫코일을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포스코가 공급하는 핫코일은 스크랩이나 다름없다면서 이걸로는 도저히 냉연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해 왔다.

“창원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삼미 사장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용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해봤자 쉽게 품질을 끌어올릴수는 없을 터이니 나더러 계속 그 자리에서 1년을 버티기 어려울 거라는 거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현장을 꼼꼼히 살피면서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스테인레스부 직원 전원과 기술연구소 요원들이 있는 힘을 다하면서 품질이 차츰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때 마침 삼미가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값비싼 수입 소재를 구매할 여력이 없어졌고, 우리가 가격을 맞춰주니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졌어요. 게다가 삼미 공장장이 포스코의 핫코일 품질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향상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우리가 삼미 현장에 가서 온갖 정성을 다한 것은 물론이고요.”

포스코가 스테인리스 사업에 손을 댈 당시 삼미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포스코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포스코가 열연만 하고 말 회사가 아니고 언젠가는 냉연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테인리스 ‘열연 → 냉연’ 진출까지···결자해지

창원특수강 부임해 종업원 승계 등 인수 진행

 

“1989년 3월 31일 포항 스테인리스 설비 준공식 때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는 냉연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삼미 경영진은 비로소 걱정을 떨쳐버리고 자축 파티까지 열었습니다. 그러나 스테인리스는 핫코일만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요. 상공정에서는 고생만 하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지. 재주는 곰이 하고 돈벌이는 누가 한다는 말 그대로예요. 그래서 박태준 회장께 냉연을 해야겠다고 보고를 드렸고 이후 사업이 신속하게 추진되었습니다.”

삼미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포스코의 독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다른 냉연업체의 반발 기류도 뚜렷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90년 7월 31일 냉연공장이 준공되고 제품이 나오기 시작하고 얼마 가지 않아 삼미가 부도가 났고 우리 회사가 1997년 2월 삼미 창원공장을 인수해 창원특수강을 설립했다. 김만제 회장은 그에게 “지금까지 당신이 스테인리스를 맡아 했으니 창원특수강으로 가서 책임경영을 하라”고 했다.

창원특수강에는 2000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었다. 그 안에는 창원 지역 노조를 쥐었다 폈다 하는 강성 인물 182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수 계약서에는 종업원을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을 받기는 받되 그냥 받을 수는 없고, 개개인의 면접을 통해 받겠다고 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면접을 거부하는 사람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골수 멤버 182명은 종업원들이 면접실에 가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다 놓았고 심지어는 섬찟한 말로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종업원들은 처음엔 주저하다가 결국 대다수가 면접에 응했어요. 그때 면접을 통해 받은 사람 수가 1700명 정도 되었습니다. 182명은 끝까지 거부해 승계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지요. 면접을 거부한 182명은 하루도 빼지 않고 시위를 계속했고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야 최종적으로 포스코의 입장이 옳다는 판결을 얻어 냈습니다. 회사로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지만 포스코의 흔들리지 않는 경영철학을 국내 산업계 전체에 확실하게 각인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한수양 창원특수강 대표이사 부사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1997년 7월 31일 김만제 회장에게 생산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창원특수강은 포스코가 1997년 2월 17일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의 봉강 및 강관설비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다.

 

그는 1971년 공채 3기로 포스코에 입사했다. 그 해 10월부터 일본 가마이시(釜石)제철소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열연부 강편공장 기술원으로 3교대 근무에 들어갔다. 초창기의 대졸 작업장이었다. 그는 1975년 열연부장에서 생산관리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세기 부장의 요청으로 생산관리부 생산계획계장을 맡아 2년간 생산계획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 뒤 한수양 전 부사장은 1977년 7월 2분괴공장장에 보임되면서 자리를 또 옮겼다. 2분괴공장은 프랑스 설비였다. 포스코에서 포항, 광양을 통틀어 프랑스 설비는 2분괴공장이 유일하다. 그때까지 포스코는 거의 모든 설비를 일본에서 들여왔고, 극히 일부만 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도입했다.

프랑스 설비는 조업요원, 정비요원 모두에게 애를 가장 많이 먹이는 대표적인 설비였다. 2분괴공장은 제강에서 보내온 잉곳(鋼塊)을 균열로에서 재가열한 뒤 압연 라인을 거쳐 슬래브와 블룸을 제조하는 공장이었다. 제강에서 보내온 개당 20~25톤 중량의 잉곳이 하룻밤만 지나도 산처럼 쌓이는데, 2분괴공장은 그걸 제대로 처리해 내지 못했다. 기계와 전기 양쪽에서 고장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조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에는 가끔 가서 속옷만 갈아 입고 나올 뿐 밤낮으로 공장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 최근주 열연2부장께서 퇴근하시면서 아예 부장차를 제게 맡기셨습니다. 밤중에 고장이 나면 효자 주택단지에 있는 슈퍼바이저를 데리고 오도록 배려하신 겁니다. 그 시절 회사문화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조치였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분이었어요. 회사 일은 근무시간 내에 열심히 하고 퇴근 후는 자기시간이라는 생각이 철저한 프랑스 기술자를 한밤중에 데리고 나온다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2분괴공장이 정상화될 때까지 4~5개월 동안 엄청난 고생을 했죠.”

100차지 연연주 도전 성공··· 직원들에게 자신감 불어넣어

2분괴공장이 차츰 안정되어 갈 무렵 잠시 분괴기술과장으로 갔다가 1982년 1월 준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2연주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생바가지만 찾아 다닌 셈이다. 연주조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주조 초기에 발생하는 브레이크아웃(Break Out), 즉 슬래브가 주조를 시작하자마자 터져 버리는 것이다. 슬래브가 터지면 쇳물이 롤러 등의 기계에 눌어붙어 굳어버리고 공장은 완전 정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제가 2연주공장장으로 일하던 2년 동안 브레이크아웃이 54회 발생했으니까 평균 2주에 한번 꼴인 셈이에요. 눌어붙은 쇳덩이를 산소 토치로 녹여서 다 떼어내려면 짧게는 8시간, 길게는 12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작업원들은 1200~1300도를 오르내리는 그 비좁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데를 비집고 들어가 정말 험난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해내야 했어요. 복구를 마치고 나오는 그들을 옆에서 보기가 민망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전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물었더니 요즘은 브레이크아웃이 일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다는 군요. 엄청난 발전이에요.”

그는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축 처져 있는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까 생각하다가 떠올린 것이 연연주(連連鑄)기록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래들에 실려오는 쇳물 1차지는 300톤, 당시 기술로 3~5차지의 연연주가 가능했다. 그는 100차지 연연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턴디시를 바꿔가면서 300톤짜리 100차지를 연속으로 주조하면 모두 3만 톤입니다. 당시 박득표 제철소장-조용선 부소장 체제였는데, 정용희 2제강공장장과 호흡을 맞춰서 진행한 결과 1983년 10월 7일 12시30분부터 10월 10일 오후 5시까지 77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드디어 100차지 연연주에 성공했습니다. 제철소장 표창과 함께 동료직원들의 환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 1983년 10월 10일 당시 한수양 2연주공장장은 정용희 2제강공장장과 협력해 100연연주를 달성했다. 당시 2연주공장은 조업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수시로 사고가 발생했고 직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복구작업에 애를 먹었다. 한수양 2연주공장장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00차지 연연주에 도전했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선진 철강사도 5차지 연연주 조업을 하던 때였는데, 이는 엄청난 성과였고 직원들은 자신감을 회복했다.

 

한수양 전 부사장은 1998년 3월 광양제철소 소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광양제철소는 포항보다 생산 규모가 컸지만 지원 시스템은 본사가 있는 포항에 비해 많이 허술했다. 포항은 본사의 총무부와 홍보실에서 대 지역, 대 언론 문제를 담당했으나, 광양의 경우 제철소장이 대외기관 그리고 지역사회 문제까지 책임 하에 모두 해결해야 했다.

“1998년 3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만 6년 동안 광양제철소장으로 일했습니다. 유상부 회장과 이구택 사장께서는 거의 모든 업무를 소장 전결로 처리하도록 해주셨어요. 잡다한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지요. 이렇게 훌륭하신 상관을 모시고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 1999년 2월 16일 유상부 회장이 설 명절에도 근무에 여념이 없는 직원들을 격려하고자 광양제철소를 찾았다. 왼쪽 세 번째부터 신성용 상무, 정용희 상무, 고문찬 상무, 한수양 광양제철소장, 유상부 회장, 유병창 상무, 이구택 사장, 김진천 상무, 최광웅 전무, 이윤 상무, 김용근 상무.

 

진정한 리더, 겸손한 자세로 사람들 마음 모을 줄 알아야

광양제철소장 6년 동안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2006년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동안 이어진 산소공장 전기 트러블이었다. 당시 광양에는 12개의 산소공장이 있었다. 제철소에서의 산소는 인체에서의 산소와 꼭 같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특히 제강공장은 산소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이다.

“12개 산소공장 중 많으면 한꺼번에 8~9개 까지도 다운되는 사고가 일곱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돼 포스코 출신전기제어 전문가라는 전문가는 퇴사한 사람까지 다 불렀고 설비를 공급한 유럽의 기술자는 물론 과거 인연이 있던 일본인 기술자, 심지어는 수맥탐지사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주택단지 내 부인회에서는 교단별로 기도회도 수없이 열었습니다. 잠이 오지도 않고 식욕도 없어서 구내식당에서 생맥주 한잔으로 식사를 대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 때문에 광양제철소가 문을 닫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철강업이 이대로 끝장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설비사고의 원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반장의 비인격적 대우에 불만을 품은 전기정비요원이 자기가 일부러 고장을 내고 자기가 수리를 하는 일을 반복한 것이었다. 이구택 사장의 아이디어로 투입한 입사동기이자 당시 선일기업 사장이던 이선종 사장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사고 6개월이 지나면서 혹시 사람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사장은 아예 그런 확신을 가지고 의심 나는 직원을 포항에 출장을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추적한 나머지 자백을 받아 낸 것이다.

그때 일을 계기로 한수양 부사장은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씹게 되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새삼 깨달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의 리더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을 줄 아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미술을 했든 음악을 했든 철학을 전공했든 동료들의 마음을 모으고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을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꼭 기술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제철소장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떤 신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

“수 많은 고생을 했지만 끝도 없이 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포스코에 재직하면서 같이 일했던 동료 한 분 한 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포스코의 젊은 엔지니어들을 만나보면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가동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흐뭇한 마음입니다.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최고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데는 2인자의 위치에 있을 때보다 수십 배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해낼 수 있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우재욱<시인·작가>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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