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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89] 최광웅 前 부사장, 경영기획·정책 외길 34년 지속성장 토대 놓아

[남기고싶은이야기 89] 최광웅 前 부사장, 경영기획·정책 외길 34년 지속성장 토대 놓아

2017/08/10

포스코 입사가 일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 “고려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한 해인 1971년 3월 포스코에 공채 3기로 입사했죠. 입사 전 제일은행에 며칠 다니던 중 포스코 입사 확정 통보를 받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스코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최광웅 전 부사장은 인생이란 태어난 후 죽을때까지 매 순간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그중에서 포스코를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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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박태준 명예회장의 제철보국 경영철학을 경영기획·정책으로 구체화
– 포스코 사회 공헌 전위대인 ‘포스코청암재단’ 기획, 초기 성장 토대 다져

 

포스코 입사가 일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

 

“고려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한 해인 1971년 3월 포스코에 공채 3기로 입사했죠. 입사 전 제일은행에 며칠 다니던 중 포스코 입사 확정 통보를 받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스코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최광웅 전 부사장은 인생이란 태어난 후 죽을때까지 매 순간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그중에서 포스코를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입사 후 첫 보직으로 포항제철건설소 건설기획실 기획예산과에서 기획·예산 실무를 맡았다. 1972년 12월 31일 본사가 포항으로 이전한 후에는 경영정책실 조사통계과에서 국내외 철강업계 동향과 철강 수요산업별 철강수요패턴 조사 업무를 했고, 한국개발연구원(원장 김만제)에 파견되어 송희연 박사와 함께 철강수요 실제예측 업무를 수행했다. 그 후 2년 반쯤 판매부에서 근무하다 다시 경영정책실 총수요관리과장으로 승진했고, 이후 심사분석과장, 예산과장, 종합기획과장, 경영조사부장, 경영정책부장 등을 거치며 경영정보분석, 기획관리, 경영정책수립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대한민국의 산업은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산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3가지 축으로 △3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KIST 설립 운영 △공무원들의 열정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포스코로 치자면 박태준 회장의 강한 리더십 하에 열정적이었던 포스코인들의 제철보국정신, 응집력 그리고 철저한 경영목표 수립과 각 부문의 목표 초과 달성의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포스코 각 부문의 장단기 목표와 달성계획을 종합 수립하고 투자경제성을 철저하게 따져 결정하는 역할을 30년 동안 수행해왔습니다.”

명예회장 등 30여 년간 여섯 분 회장 모시며 경영철학 구현

연극으로 업무적 한계에 다다른 직원들에게 전환점 마련해줘

그는 박태준 회장의 경영방침에 따라 철저한 경영목표 수립과 목표 달성을 위한 진행 관리가 포스코의 성공 요인의 하나라고 회고했다.

“저는 실무자로부터 시작해 30년 이상 경영기획, 정책 업무를 수행하며 포스코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1992년부터 2005년까지 13년간 임원으로 근무하며 박태준 명예회장, 황경노 회장, 정명식 회장, 김만제 회장, 유상부 회장, 이구택 회장까지 여섯분의 회장을 모시고 업무를 수행해왔습니다. 매월 열리는 운영회의, 경영환경변화 대응책 등 최고경영층에 보고하는 일도 많았지요. 핵심부서에서 근무하며 회사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해 스스로도 자랑스럽습니다.”

경영정책부는 회사의 싱크탱크 집단에 해당한다. 그만큼 일도 많고 업무 강도 또한 높다. 일도 매뉴얼화된 통상적인 반복 업무가 아니라, 회사의 정책이나 경영전략 등을 연구하는 일이다. 뜬구름 잡는식으로 시작해서 타당성 있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그래서 당시 최광웅 경영정책부장은 일에 빠져있는 직원들에게, 보기에 따라서는 생뚱맞기 짝이 없는 또 다른 일을 부과했다. 직원들에게 연극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다. 주제는 △고객과 포스코의 관계 △간부와 직원과의 관계 △현장과 본사와의 관계 등이었다. 연극이라는 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주제에 맞게 대본을 쓰고, 배역을 정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친 후에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직원들은 입이 한자나 나왔다. 지금 일도 바쁜데 무슨 엉뚱한 연극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장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서 조성식, 이형택, 이천석 차장 등이 주제별로 대본을 쓰고 전 직원 가족들을 관객으로 하여 공연을 했다. 임원회의에도 영상으로 보고했다.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습니다. 부장이 어찌 직원들이 바쁜지 몰랐겠어요. 사람이 일에 파묻혀 있다 보면 다른 건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짜증이 늘어나고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게 됩니다. 경영학에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법칙은 이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일도 한계에 다다르면 능률이 급격하게 떨어져요. 그때는 어떤 전환 요소를 만들어 주어야 해요. 연극 공연을 하고 나서는 연극에 빼앗긴 시간까지 합해서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되는걸 체험적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박득표 부사장, 구자영 박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득표 부사장은 겉으론 딱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유연한 분이었습니다. 웬만한건 용인해주고 믿고 맡겨주셨어요. 직장에서 그런분을 상사로 만난다는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광웅 전 부사장은 과장 시절부터 박태준 회장의 지근거리에서 일을 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국내 정치가 불안해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기본 질서가 극도로 혼란해졌습니다. 격심한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근로정신이 약화된 상황에다 급속한 원화절상 등으로 국가 경제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89년 9월 저는 경영정책부장으로서 한국경제의 위기상황이 포스코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서, 포스코의 대응방향과 포스코맨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도록 임원회의에서 보고했어요. 브리핑이 끝난 후 회장께서는 ‘잘했다’ ‘수고했다’가 아니라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내용이라며 전계열사와 협력회사에도 교육을 시키라고 하셨어요.”

그는 이렇듯 칭찬을 넘어 ‘감사하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지만, 박 명예회장께 베세머재단과 포스코청암재단의 통합 필요성을 보고드렸을 때에는 포항 청송대가 떠나갈 정도로 혼이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을 잘 보필하려면 매 순간 긴장하고 사실 왜곡 없이 철두철미해야 했으며 가치있는 일을 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박태준 회장은 해외출장을 다녀온 후 임원회의에서 어김없이 저를 불러 세워놓고 해외상황, 해외 철강사 현황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긴장되고 진땀이 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이후 그는 박태준 회장이 해외출장을 나가시면 가능한 동선을 살폈다. 누구를 만나고 어느 단체와 접촉하는지, 어느 제철소를 방문하는지를 확인해 귀국 후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에 대비했다. 사전에 예상 질문과 나름 모범답안까지 준비해 두었다가 답변했다.

“하루는 임원회의에 참석한 후 나오는데 당시 전순효 상무께서 ‘당신 회사에서 쫓겨나겠다. 회장께서는 일단 당신을 밟고 간 뒤에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또박또박 답변을 해버리면 정작 회장님은 하고 싶은 말씀을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하셨어요. 그때 그 말씀을 듣고 직장생활의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광웅 전 부사장은 예산과장, 심사분석과장, 종합기획과장, 경영정책부장 등 주로 선임 부서 직책보임자로 근무하다 보니 각 부서에 기초 자료를 받아서 종합해 기획하고 연도별 추진계획을 수립해 이를 경영상황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는 롤링플랜을 만들고 진행·관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는 자신이 책임자로 깊숙이 수행한 일들이 포스코를 성장, 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했다.

조직에서 성장하려면 상호 협력 통해 가치 있는 일 추진해야

“포스코 입사 후 경력이 쌓이면서 배우고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치 있는 일에 대해 타부서로부터 협조를 잘 받아내는 일 △서로를 잘 이해하고 상호간 도움이 되게 처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생각과 과정을 밟고 나니 어떤 어려운 이슈가 주어져도 관계자의 협조를 받아내고 동료, 부하직원과 함께 최선의 안을 도출하거나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자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토론하고, 부하들에게 미션을 적절히 부여하고, 중간중간 진행 관리를 해서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자신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그의 자세 형성과 자신감을 갖게 된 배경에는 멘토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실무자 때는 송기환 계장, 차장 때는 이구택 부장, 부장 때는 박득표 부사장, 임원 때는 황경노 부회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전북 김제 평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제가 포스코에서 목표했던 부장(당시 부장은 기사 딸린 스카우트 전용 승용차를 운행했다)을 넘어서 과분하게 부사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국민훈장 목련장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는 특히 포스코를 창업해 세계 최고 경쟁력의 철강사로 성장시킨 박태준 명예회장의 휘하에서 경영정책 업무를 수행하고, 명예회장이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계실 때에는 상임부이사장으로 직접 보필하며 재단 운영 업무를 수행했다. 명예회장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포스텍 산하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3년간 재임하면서 기초를 닦은 것이 일생의 큰 자랑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

 

포스코청암재단 설립··· 포스코 사회공헌사업 체계화

2004년 10월 이구택 회장이 그를 불렀다. 이구택 회장은 포스코장학회를 근본적으로 탈바꿈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그 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했다. 당시 포스코장학회는 650억 원의 기금으로 포항, 광양 지역 고등학생 중심의 장학 사업에 치중하고 있었다. 재단 이사진도 지역 유력인사와 포스코 관계자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최광웅 전 부사장(첫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2005년 3월 31일 광양 백운산 수련관에서 포스코청암재단 출범 태스크포스 구성원들과 함께 첫 워크숍을 가졌다.

 

“당시 저는 관리담당 부사장(CFO)으로서 임기를 5개월 앞두고 있었는데, 이구택 회장이 포스코장학회 개혁업무를 맡기셨어요. 우선 기초 자료 조사와 국내외 벤치마킹을 담당할 실무 TFT를 만들어 수시로 토의와 협의를 하며 기본 개혁안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전 워싱턴 사무소장이었던 김진욱 부장과 양재운 팀장, 성낙연 팀장, 최종균 과장, POSRI 류희숙 박사, 이미애 사원 이렇게 6명으로 구성했지요. 재단 명칭은 세계적 기업인 포스코의 사회 공헌 전위대인 만큼 사명인 ‘포스코’와 이를 일궈낸 박태준 회장의 호(號)인 ‘청암(靑巖)’을 따서 ‘포스코청암재단’으로 정했습니다. 사업은 지역 장학사업에서 글로벌 포스코에 걸맞은 다양한 사업을 검토, 추진하기로 하고 이사진도 덕망과 경륜을 갖춘 전국적인 인사를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기금도 2000억 원 수준으로 확대하고 재단 소재지도 포항에서 서울로 옮기기로 했어요.”

 

▶ 포스코청암재단이 2005년 9월 8일 출범했다. 이날 재단설립 이사회에서 이구택 회장(첫째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재단 이사장, 최광웅 전 부사장(둘째줄 왼쪽 첫 번째)이 상임부이사장에 각각 선임됐다.

 

그해 10월 그는 포스코 부사장 신분으로 포스코장학회 개혁안을 포스코 이사회에 보고하고 승인을 득했다. 재단 개혁안을 기본으로 하여 국내외 사례를 조사하고 토의를 거듭해 구체적인 추진안을 성안했다. 2005년 9월 새로이 14명으로 구성된 재단 이사회에 추진안을 보고하고 역시 승인을 득했다. 재단 이사장은 포스코 이구택 회장이, 운영은 최광웅 전 부사장이 상임부이사장 직책을 가지고 맡기로 했다. 재단 사업은 아시아펠로십, 포스코청암상, 우수학생 장학을 필두로 NGO 해외연수, 스틸아트, 간병 등 총 6개 사업이었다.

 

“포스코청암재단 사업 기본 구상 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사업은 아시아펠로십이었어요. 2005년 당시로선 아주 선도적인 사업이었죠. 아시아 각국과 무역 등 교류를 하고 동반성장 하기 위한 아시아 지역전문가 양성 사업, 아시아 우수학생들이 한국 유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처럼 이들이 장차 교수, 공무원 등 각국의 지도자로 성장했을 때 한국의 우호 세력으로 한국과 소속 국가 간 가교 역할이 되어주길 기대하는 아시아 학생 한국 유학 장학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아시아 학자들이 인문·사회과학 분야 이슈에 대해 연구하고 한자리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아시아 인문사회 연구지원 사업과 아시아 문인들이 문학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아시아 계간지 발간 사업도 마련했습니다.”

 

“포스코청암상은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를 창업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3가지 분야를 시상하기로 했어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기리는 청암봉사상, 국가 발전의 주춧돌이 되는 청암과학상 그리고 청암교육상 이렇게 3개 분야로 정했어요. 권위에 걸맞게 전문성이 있는 선정위원장과 위원들이 독립적으로 선정하도록 시스템화했어요.”

 

“포스코 창립 40주년인 2008년,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공헌사업을 더욱 확대하기로 하고 박태준 명예회장을 이사장으로 추대했습니다. 박태준 이사장은 취임 후 포스코청암재단과 베세머수상기념재단의 설립자가 동일인이고, 설립 취지가 비슷하므로 두 재단이 합병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이에 따라 2009년 2월 19일 포스코청암재단은 베세머수상기념재단이 증여한 25억 4000만 원을 기본재산에 편입함으로써 합병을 완료했습니다.”

 

“2009년부터 시작한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은 박태준 회장이 각별히 챙긴 사업으로, 과학인재 육성 차원에서 기초과학인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분야를 연구하는 박사과정 학생, 박사후 과정, 신진 교수급 젊은 과학자를 선발해 이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성장을 돕는 프로그램입니다. 40대 중반의 소장 과학자로 구성된 1차 서류 심사위원회, 50대 저명 과학자로 구성된 2차 면접 심사위원회를 통해 대상자를 선정해 선발과정에 있어서도 전문성과 공정성을 높였어요. 또한 포항, 광양지역의 우수 고등학생을 지원하는 포스코샛별장학과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포스코비전장학 사업에도 내실을 기했어요.”

 

2011년 3월 그가 재단에서 퇴임할 당시 사업은 포스코청암상, 아시아펠로십,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 포항·광양지역 장학 등 4대 사업이었다. 재단 기금은 2200억 원, 연간 장학사업 소요 예산은 100억 원 수준이었다.

 

“세계적인 기업 포스코의 사회공헌 전위대의 위상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명성에 걸맞게 사업 내용과 운영 수준을 관리해 왔고, 국내외에 널리 파급효과가 미치도록 노력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부합니다. 상임부이사장이 바뀌거나 담당 직원이 바뀌어도 지장이 없도록, 체계적인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습니다. 재단 이사로 참여한 손지열 전 대법관이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도’이렇게 표준화되고 원칙대로 하는 재단은 처음 본다’고 하시더군요. 교육부와 과학기술부에서 벤치마킹을 오기도 했으니 재단 사업 내용과 운영 수준은 단연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스코장학회가 포스코청암재단으로 확대 출범한지 올해로 12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재단이 포스코 사회공헌의 전위대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코그룹 가족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좋은 인식과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초기 6년간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했던 상임부이사장으로서의 책무와 성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기회를 주신 박태준 명예회장과 이구택 회장께 감사드립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포스코 후배들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박태준 전 회장은 투자의 타당성을 입체적으로 철저히 따져 적기에 투자를 했고, 적재적소의 공정한 인사를 했기에 오늘의 포스코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말과 함께 기본의 실천, 공존의식, 윤리의식도 영원한 포스코의 가치이자 실천이념이라면서 퇴임 후 포스코를 지켜보는 OB로서 이러한 가치를 길이 계승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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