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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88] 정용희 前 상무, 쇳물에 혼(魂)과 생명력 불어넣는 제강인의 삶 자랑스럽다

[남기고싶은이야기 88] 정용희 前 상무, 쇳물에 혼(魂)과 생명력 불어넣는 제강인의 삶 자랑스럽다

2017/07/06

포스코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온 1973년 6월 9일을 ‘철의 날’로 기억하고 있듯이 닷새 뒤 6월 14일은 포스코가 최초로 제강공장에서 첫 용강을 생산한 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정용희 전 상무. 그날은 그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그는 천생 제강인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며, 앞으로 포철인으로서 그것도 제강인으로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 날이었습니다. 포항 제강공장 준공식은 6월 15일로 예정돼 있었어요. 준공 행사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오신다고 해서 직원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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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전사 최초로 양소 제강부장 역임 등 제강 전문가 30년 보람
– 無에서 有를 창조한 포항제철 건설 참여 자부심으로 남아
– 직원 애로사항 대변하며 상생의 新 노사문화 정착에 힘 쏟아

 

포스코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온 1973년 6월 9일을 ‘철의 날’로 기억하고 있듯이 닷새 뒤 6월 14일은 포스코가 최초로 제강공장에서 첫 용강을 생산한 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정용희 전 상무. 그날은 그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그는 천생 제강인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며, 앞으로 포철인으로서 그것도 제강인으로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 날이었습니다. 포항 제강공장 준공식은 6월 15일로 예정돼 있었어요. 준공 행사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오신다고 해서 직원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전로를 이용한 제강 조업은 단군 이래 처음 경험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에’실패하면 안 된다’는 각오들이 대단했습니다.”

정용희 전 상무이사를 포함한 당시 제강공장 직원들은 불안한 마음에 준공 하루 전날인 14일 비밀리에 시험조업을 했다. 떨리는 가슴과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고 13시 58분 1고로에서 보내온 쇳물 91.1톤을 전로에 넣고 취련을 개시한 지 2시간 52분 만에 첫 출강에 성공했다.

첫 생산한 용강 100톤은 강번(鋼番)F00001으로 명명했다. 첫 출강까지의 2시간 52분은 당시 제강공장 직원들에게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극적인 시간이었다. 지금은 30분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작업이지만, 당시만 해도 포스코에 제강조업 기술을 가르쳐 준 NKK에서도 첫 출강에 7시간 정도 걸렸으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첫 용강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나라의 초석이 되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은밀히 진행한 시험조업이었으나, 어떻게 알고 몰래 현장에 오셔서 조업 전 과정을 지켜본 박태준 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계셨다.

정용희 전 상무는 1972년 3월 2일 공채 4기로 입사했다. 입사 전 1971년 11월부터 서울사무소가 있던 YWCA에서 일본어 등 사전 수습 교육을 받은 후 이듬해 3월 정식 입사 후 포항 건설현장에 곧바로 투입되었다. 현장에는 기초 공사를 위한 파일 항타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수습 교육을 받으며 따분할 것 같은 파일 항타 횟수를 헤아리는 일도 했는데, 이는 파일을 지하 암반까지 제대로 박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건설 품질을 확보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런 사소함은 후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이른바 ‘기본의 실천’을 생활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황량한 벌판에 롬멜하우스를 비롯한 가건물 몇 동만 서 있었는데,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사이렌 소리나 다름없었어요. 해풍에 날린 모래 알갱이 때문에 볼펜이 잘 구르지 않아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었고, 출퇴근 시에는 모래밭에서 갈매기 알을 줍기도 했어요. 집배원들이 허허벌판에 서 있는 공장 입간판에 편지를 붙여놓고 가던 시절이었으니, 당시의 상황이 대략 짐작이 가겠지요. 지금 그 자리에 들어선 제철소를 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수습을 마치고 제강부에 배치되었는데, 이후 30년 세월을 제강부에서 보냈습니다.”

 

1972년, 선진 제강 조업기술 배우고자 日 미즈에제철소 연수

정용희 전 상무는 입사 5개월 만인 1972년 8월 일본 NKK(日本鋼管) 미즈에(水江) 제철소로 연수를 떠났다. 연수생은 모두 26명이었다. 신광식 제강공장장이 단장이었고, 권억근 전로계장이 실질적 리더였다. 제선, 압연 부분이 신일철로 연수를 갔지만 제강 부문만 NKK로 간 것은 일본 최초로 오스트리아로부터 순산소 상취 전로형 제강공정을 도입한 제철사가 NKK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연수단은 작업 전에 절도있는 자세로 안전체조를 하고 밤늦게까지 일일 연수결과 검토 회의를 이어갔습니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면서 연수 기간을 보낼 것으로 생각했던 일본인 기술자들은 우리의 빈틈없는 행동에 감탄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짧은 연수기간에 하나라도 더 배우고 경험을 얻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연수에 임했는데, 일본인 기술자들은 조금만 중요한 부분이다 싶으면 계약에 없는 사항이라면서 잘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기본 사항에 대해서는 기초부터 철저히 가르쳐 주고 각 직무에 해당하는 기능을 몸으로 익히도록 훈련시켰습니다.”

연수가 끝날 무렵에는 그야말로 쇳물의 불꽃이나 색깔만 보아도 성분과 온도를 알아낼 수 있는 수준에 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 연수 종료 시점에는 공장 전체를 일주일 동안 연수단에 맡겨 주었기 때문에 공장을 직접 가동해 볼 수 있었고, 이는 이후 포항 초기 공장 가동에 큰 자신감으로 작용했다.

“연수 시절 내내 NKK 직원들과 함께 3교대 근무를 계속했고 귀국 후에도 초기 조업 안정화를 위해 1974년 말까지 3교대 근무를 했습니다. 당시 크게 배려해준 일본 측 책임자들을 고맙게 생각하여 2015년 5월 우리가 일본으로 가서 43년 만의 사은회를 가진 적도 있습니다.”

건설과 조업 대비에 총력 기울여··· 2제강 건설공기 단축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조업대비 업무에 투입되었다. 조업 대비는 설비의 원활한 가동을 위한 시운전과 각종 작업표준 제정, 조업 요원들의 교육 등이었다. 평소에 보지도 못했던 장비며 설비들의 시운전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공장이 워낙 방대하고 통신 설비가 충분치 않아 시운전의 애로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국가 시책으로 민간인들의 무전기 사용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국내에서는 무전기 생산이 전무했어요. 요즘처럼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작업장 곳곳에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본인 슈퍼바이저들이 사용하던 무전기를 통사정을 해서 빌려 쓸 수밖에 없었어요. 기계가 있는 현장과 이를 제어하는 조작실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시운전 물량이나 안전성 확보도 만만치 않았다. 제강공정은 다품종, 다량의 부원료를 사용하는데 이를 일일이 평량을 하여 사용하는 구조이다. 종류마다 비중 등의 차이가 있으니 실물을 몇 십 번이고 저울로 달아서 평량기의 성능을 확보하다 보면 며칠씩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또한 고압, 다량의 산소를 배관에 최초로 흘려보내는 통산(通酸) 작업은 위험하기도 해서 작업이 실시되는 날은 마음속으로 가족에게 하직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다른 제철소에서는 이 테스트를 하던 중 큰 사고가 발생해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 정용희 전 상무는 1978년 10월경 준공을 앞두고 있던 포항 2제강공장에 다량의 산소를 배관에 최초로 흘려보내는 통산(通酸) 작업을 총괄 수행했다. 가운데 안테나가 서있는 기기가 무전기이다. 앞줄 왼쪽부터 통산 작업을 수행 중인 홍상복 공장장과 정용희 부 공장장.

 

“1978년 3기설비의 핵심이었던 포항 2제강공장 건설 때의 일화입니다. 2제강공장은 철골량만도 5만톤이 넘어 1제강공장의 8배가 넘는 물량이었어요. 면적도 넓지만 높이도 70미터에 이르는 규모였는데, 박태준 사장은 공기를 단축해서 무조건 11월 30일 취련(吹鍊)을 개시하라고 엄명을 내렸어요. 회사는 특별감독, 별동대 등을 운영해 청소, 정리정돈 등을 도우면서 건설과 조업대비를 독려했고, 본사 직원들까지 현장 지원에 나서는 등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 공기단축에 부정적이었던 외국인 현장 책임자를 경질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결과 11월 30일 취련 개시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제강공장은 세계 최대급 설비로 포스코 견학 코스의 필수 방문 공장이 되었어요. 당시 본업을 뒤로 하고 공장에 와서 특별 활동을 펼치는 등 고생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조업 대비 업무에서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일은 시운전 뿐 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조업요원의 교육이었다. 교육은 무엇보다 교재가 가장 중요하다. 쇳물 경험이 전혀 없는 신입사원들에게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연수 시에 쇳물을 경험한 것은 당시로서는 포스코의 큰 자산 중의 하나였다.

“외국어로 된 취급 설명서를 번역해서 작업표준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포스코의 제품 품질에 책임을 지고 있는 기술표준서, 제강요령서를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해서 학교를 갓 졸업한 무경험 신입사원들을 가르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몰랐고, 철야를 밥 먹듯 해가며 잠시 틈을 내서 토막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2제강공장은 1제강의 3배 이상 되는 규모여서 조업 요원의 배분도 쉽지 않아 그야말로 교육 훈련에 극한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서 스테인리스 제강요원, 광양 제강요원 등을 길러내기 위해 포항 제강부는 제강요원 전문 양성소 역할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나는 2제강공장장, 차장 겸 2연주공장장, 제강부장 등을 거치며 인력 양성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미니밀, 5고로 등의 건설과 조업에 실무 책임을 맡아 새로 탄생하는 설비들을 성공적으로 가동시킬 수 있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미니밀은 핫코일의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고, 해외의 미니밀 제품이 국내 철강시장을 교란할 것에 대비해 건설한 것이었다. 포스코는 저렴한 비용으로 효율적인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그를 책임자로 선정했고, 이후 포스코는 미니밀을 통해 박(薄)슬래브 제조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분위기에 편승, 노사문제가 회사경영에도 상당한 영향 미쳐

“저는 직원이 많은 부서만 골라서 보임되었어요. 1977년 제강공장 조계계장 때는 계원이 170명이었는데, 보임 즉시 40여 명을 타 부서로 전보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신상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아무나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밤을 꼬박 새며 개인 면담을 해서 전출자를 선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어요. 2제강공장장 때에는 550명, 차장으로서 2연주공장장을 겸무할 때에는 광양 제강부, 스테인리스 요원 등 증설 설비 소요 요원들을 양성하다 보니 공장 내에 1000명이 넘는 인원이 북적이기도 했어요. 이후 부장 시절에는 광양에 1200여 명, 포항에 1800여 명으로 여하튼 인복(人福)이 많았습니다. 늘 사내에서 단위 조직 당 최대 인원이 일하는 부서만 찾아다닌 셈이었지. 인복도 복이기는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제강 부장으로 재임할 당시인 1987년에는 6.29 선언 등으로 노사문제도 심각한 사회 갈등 요소로 대두되면서 포스코에도 노동조합이 설립되는 등 직원들의 요구사항이 회사경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입사 이후 줄곧 제강부에서 근무해온 정용희 전 상무는 모든 직원들을 신입사원 때부터 지켜봐왔기에 누구보다도 직원들의 속내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적극적인 소통과 ‘인정해주기’등을 통해 인간적으로 다가갔으므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노사 갈등도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회사 최초로 포항, 광양 양 제철소를 오가며 제강부장을 맡아 그 많은 직원들과 일일이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일체감을 조성했다. 그는 지금도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면 늘 반갑지만, 인원이 너무 많고 오랜 시간이 흘러 이름이 가물가물할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금도 정용희 전 상무와 함께 근무했던 시절을 추억한다는 제강부 직원들은 언제나 직원편에 서서 희로애락을 함께 한 신망이 두터운 최고의 부장으로, 멋쟁이 부장으로, 영원한 맏형으로 자리하고 있다면서 그와 함께한 그 시간이 그립다고 했다.

‘질도 좋고 양도 많이’··· 세계 최고의 제강 조업 기술 개발

“오랜 제철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제강 기술이 개발되어 왔지만, 현재 포스코의 제강 설비와 기술은 단연 세계 최고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요. 제강공정은 제품의 최종 용도에 맞추어 용선의 성분 등을 조정, 정련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용강이 드디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제강공정을 통해 생산하는 용강(熔鋼)은 양(量)으로서 제철소의 공칭 능력을 나타내고 질(質)로서 최종 제품의 품질을 결정합니다. 포항에서 처음 조업이 시작될 때 각 공장에 슬로건을 하나씩 만들어 붙이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제강부는 ‘질도 좋고 양도 많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제강 공정을 가장 잘 함축한 슬로건이었어요.”

조업 초기 포스코는 설비를 안정시켜 가면서 생산량 증대에 힘을 쏟았다. 외국인 기술자들은 모두 정상조업도를 달성하기까지는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포스코는 이 목표를 107일 만에 달성했다. 이후 조업 각 분야에서 연일 신기록을 세워 나가는 데는 전 직원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그야말로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설비와 섭씨 1600도 이상의 고온, 눈앞을 가리는 분진 속에서 천정크레인으로 용강을 운반하는 일은 항상 대형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 어느 고위 임원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고로에서는 쇳물이 기어 다니는데, 제강에서는 날아다닌다.’ 그 말 그대로 펄펄 끓는 쇳물을 담은 래들이 항상 머리 위로 지나 다니는 등 불안전한 요소가 제철소 어느 현장보다도 많았습니다. 결국 1977년 4.24 제강사고를 겪었고 이것은 이후 제강현장이 무재해, 무사고로 가는 커다란 교훈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공장보다도 제강공장이 안전한 공장으로 철저히 요새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간 겪어온 각 종 안전 사고를 극복하며 안전 시설물을 개선하고 설비투자를 해온 결과의 하나지요. 그러나 사고란 일순간의 방심을 파고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기술개발 노력은 처절할 정도였다. 처음 조괴공정으로 출발했던 것을 연주화해 나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포스코는 연주비율(連鑄比率)을 높이기 위해 연주공장 증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술 개발 속도였는데, 이게 만만치 않았다. 조괴공정을 연주화하는 데는 특수 설비와 그에 따르는 제조 기술이 요구되었다.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어요. 하는 수 없이 미국의 유에스스틸로부터 리밴드(RIBAND)강 제조 기술을 도입했으나 재질과 용도 면에서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최고경영층까지 나서 일본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겨우 일본에서 설비만 도입할 수 있었습니다. 관련된 기술 제공은 거절 당했으나 이후 피나는 노력을 통해 연주공정으로 생산 가능한 강종의 자체 개발에 성공해, 이를 림캐스트(RIMCAST)강으로 명명했습니다. 이는 제강공장의 100% 연주화를 이루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강 작업의 핵심은 취련적중률이다. 전로에서 고순도의 산소와 각종 부원료를 사용하여 용선의 성분과 온도를 제어하는 작업이 취련인데, 약 15분 내에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 한다. 그 결과가 목표에 적중한 정도를 취련적중률이라 하는데, 이는 제철소의 가장 핵심적인 지표로서 초기에는 거의 작업자의 경험과 기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즉 속인성(屬人性)이 강한 작업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이 작업을 수행하는 취련공들을 우대하여 ‘취련사’라 불렀다.

“계산기도 없던 시절, 불과 몇 분 만에 실수율 등을 감안해 복잡한 곱셈, 나눗셈을 해서 사용량을 결정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대나무로 만든 공업용 간이 계산자가 취련사의 심벌이었죠. 초기 취련적중률은 70% 수준이었고, 강종이 다양화되면서 60%대로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이후 고온에서 작동하는 온라인 센서의 개발과 컴퓨터의 채용으로 취련적중률을 대폭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기술은 용강의 품질뿐만 아니라 노체(爐體)의 내벽(內壁)을 이루고 있는 연와의 수명 연장 등에도 기여했고, 원가절감에도 큰 역할을 했어요. 나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철강기술상 대상을 수상하는 과분한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 포항제철소 2제강공장 3호 전로가 1992년 9월 27일 노체수명 3000회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당시 포항 2제강공장은 원가측면에서도 일본의 NSC와 NKK보다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첫째줄 왼쪽 여덟 번째부터 이선종 전산제어부장, 김달현 이사, 홍상복 전무, 이춘호 포항제철소장, 김윤현 상무, 정용희 제강부장.

 

그는 주변의 일반적인 기술 개발에도 제강인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고 했다. 초창기에는 다행히 일본이라는 인접한 목표가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며 “이제는 우리가 목표가 되었으니 선두주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감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독 잔업이 많고 휴일도 없다는 이유로 한때 신입사원에게 인기없는 부서로 치부되었던 제강부에서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는 악조건 속에서도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에 무한한 보람을 느끼며, 제강인으로 기억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포스코에서는 한때 ‘신종 이산가족’이라는 말이 회자되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포항에 와 있는 직원들을 이르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포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직원들도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의 연속이다 보니 가족들 얼굴 보기가 어려워서 이산가족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비단 나만이 겪은 일은 아니지요. 초창기 요원들은 모두가 이러한 환경에서 사명감과 자긍심 하나로 버텼습니다. 당시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격려의 끈을 놓지 않은 아내 그리고 가족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포스코는 이제 세계 제철산업의 선두주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지는 동시에 산업구조의 재편과 후발국의 추격에 대한 위기감 또한 견지해야 할 것이며, 후배들은 더욱 철저한 프로의식과 주인의식으로 무장해 포스코가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꾸준히 성장과 발전을 구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로 정용희 전 상무는 이야기를 맺었다.

 

▶ 1972년 1월 18일 서울 YWCA 건물 옥상에서 정용희 전 상무(첫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를 포함한 포항종합제철 공채 4기 50명이 수습시절 기념촬영을 했다.

 

▶ 포항 제강부는 첫 용강 생산 20주년을 맞이해 1993년 6월 15일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정용희 제강부장과 직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기념비 하단에는 직원 1500여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의미를 더했다. 기념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있는 제강OB와 직원들. 왼쪽 일곱 번째부터 박종태 초대 제철소장, 윤종구 제2대 제강부장, 정용희 전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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