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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86] 고학봉 前 부사장, “초기요원들은 국가기간산업 떠받친다는 사명감 하나로 기본에 철저했다”

[남기고싶은이야기 86] 고학봉 前 부사장, “초기요원들은 국가기간산업 떠받친다는 사명감 하나로 기본에 철저했다”

2017/04/18

1970년대, 매월 열리는 포항제철의 월례 사운영회의(社運營會議)는 항상 참석자 모두를 긴장시켰다. 박태준 사장이 직접 주재하는 이 회의에는 전 간부사원이 참석했고, 회사 경영의 어느 부문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간부들은 온갖 현황이 기록된 두툼한 자료 파일을 들고 숨을 죽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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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국가기간산업·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입사
– 회사설립 목적에 맞는 투자 우선하는 사업계획 수립

– 기획·판매·해외사업·홍보 등에서 포스코웨이 만드는데 일조

 

1970년대, 매월 열리는 포항제철의 월례 사운영회의(社運營會議)는 항상 참석자 모두를 긴장시켰다. 박태준 사장이 직접 주재하는 이 회의에는 전 간부사원이 참석했고, 회사 경영의 어느 부문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간부들은 온갖 현황이 기록된 두툼한 자료 파일을 들고 숨을 죽여야 했다. 회의는 철강경제동향, 심사분석, 건설공정에 대한 보고 순으로 진행되었다. 철강경제동향 보고는 기획실 조사통계과의 몫이었다.

 

“저는 기획실 조사과장으로 일하며 3년여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사운영회의에서 철강경제동향을 보고했습니다. 박태준 사장은 국내외 철강, 경제동향, 세계 철강업에 대한 이해와 향후 전망 등의 내용을 담은 이 보고를 건설과 조업에만 전력을 기울이던 간부들을 위한 교육의 기회로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고학봉 전 부사장은 1969년 2월 1일 포항제철에 입사했다. 그는 1968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조교로 교수수업 중이었다. 고 전 부사장은 당시 동 대학원에서 수학한 곽증, 최정렬 등 몇몇 선배들의 권유로 그해 가을부터 포항제철 인사행정제도 연구위원회에서 회사의 기초적인 제도와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 참여했다.

 

“당시는 정부가 수 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던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나라는 경제가 주도하는 체제로 갈 것이며 그중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그 기반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특히 철강은 모든 산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소재이고, 철강공업이야말로 핵심산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항제철에 몸을 담기로 결정했습니다.”

 

“입사 후 KISA에 의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 무산되고, 대일청구권자금을 종잣돈으로 하는 제철소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어요. 당시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정부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대일청구권자금을 농업근대화를 위해 농기계 구매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기초산업에 투자하여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더욱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겠지요. 그래서 포항제철은 설립 목적, 투자 자금, 사업 내용, 조직, 인사 등 모든 면에서 강력한 공공성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회사의 설립 초기부터 사명감, 근검절약, 근무윤리, 철두철미한 일 처리, 투자의 타당성, 인사의 공정성 등 모든 면에서 기본에 충실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는 독일 정부의 인재교육 프로그램(CDG)에 지원, 선발되어 독일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1972년 독일로 떠난 그는 지멘스, 만네스만 등 독일 산업체를 둘러보고 유럽 철강업계의 기술 및 서구문화를 체험하며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개인적으로 크게 성장한 기회였습니다. 귀국할 때가 되어서는 안목이 달라져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가 있었어요. 그때 보고 느끼고 익힌 많은 것들이 이후 기획 등 여러 분야의 업무를 맡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강재 수요예측 보고서를 비롯한

각종 철강통계자료집 발간 주도

1973년 5월 들어 그는 황경노 전 회장 휘하의 기획실 과장으로 보임되어 기획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1977년 경영정책실 차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기획 업무 전반을 섭렵했어요. 이 시기에 제일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들을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당시 진행되었던 신규 및 확장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사업계획서 작성 업무가 많았는데, 사업계획 수립의 기초가 되는 기술적·경제적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해야 했습니다.”

기획실에서는 KDI(한국개발연구원)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중장기철강수요예측보고서’ 두 권을 냈다. 미시적(micro) 접근 방법과 거시적(macro) 접근 방법, 각 1권씩으로 된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수요예측 자료로 매우 의미 있는 결과물이었다. 특히 사업성 검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장(market)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철강재 수요를 파악하고 전망하는 일이 필수적인데, 당시 철강 수급에 대한 통계나 자료가 전무한 상황에서 이는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이후에는 회사의 설비 확장계획이나 신규 투자계획을 수립할 때마다 기획실에서 위 모델에 따라 자체적으로 수요예측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철강통계편람’, ‘철강제품분류기준’, ‘철강용어집’ 등의 편찬 역시 일개 부서가 수행하기에는 벅찬 일이었으나,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그런 일을 할 기관이 전무했으므로 기획실이 매년 이 작업에 매달려야 했어요. 뿐만 아니라 회사는 한국철강협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어요. 동남아철강협회, 국제철강협회 가입 등도 회사의 국제화 방침에 따라 기획실이 순차적으로 추진한 일이었지요. 이러한 일들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초적으로 필요한 사항들이었습니다. 여타 부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당시 조사통계과는 얼마 되지 않는 인원으로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불철주야 일했습니다. 그때 함께 고생한 최광웅 전 부사장을 비롯하여 조은구 전 과장, 신성수 전 실장 등 여러 동료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습니다.”

포스코 최초의 사사지 ‘포항제철 7년사’ 편찬

고 전 부사장은 이따금씩 신년사, 송년사를 준비하는 일로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1976년 들어서는 ‘포항제철 7년사’ 편찬이라는 과제가 부과되었다.

“황경노 전 회장의 지침과 김철녕 실장의 지휘로 편찬 계획을 세우고 온갖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일을 시작으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종합사와 부문사로 나누어, 부문사는 해당 부서장에게 집필을 의뢰했지만 다들 건설과 조업으로 바쁘다 보니 진척이 없었어요. 직접 찾아가서 읍소를 하기도 하고, 같이 집필을 하기도 하면서 원고를 취합했습니다. 종합사는 기술과 경영일반으로 나누어 기술 쪽은 유상부 전 회장이, 나머지는 제가 최종정리를 했어요. 수많은 필름과 사진자료는 당시 이대공 홍보실장과 직원들이 잘 정리해 줬습니다. 또, 국내 최고의 사진작가로 알려진 김한용 씨를 삼고초려해 모시기도 했어요. 그때 이 분이 제철소를 배경으로 한 동해의 일출 장면, 역동적인 조업 장면, 거대한 설비의 모습 등 좋은 사진을 많이 남겨주었습니다. 팩스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부문별 원고가 완성되는 대로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 밤새 전문가의 교정을 받은 후 빨갛게 수정된 원고를 들고 새벽에 포항으로 가져오기를 수없이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결국 박태준 사장으로부터 ‘포항제철 7년사’라는 제자(題字)를 받아 편찬을 완료했어요. 포철 최초의 사사(社史)였는데 이후 10년사부터는 홍보실에서 발간하게 되었지요. 포항제철 설립 후 최초의 사사를 편찬하는 일을 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 기회를 빌어 그 당시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회사 설립목적에 맞게 수요에 대응한 맞춤형 투자계획 수립..

불황 시에는 신규투자 확대해 내수경기 활성화에 기여

1973년에는 외자부가 기획실에서 작성한 3기설비 사업계획서를 들고 차관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중에 오일쇼크가 터지는 바람에 모든 전제조건이 실제와 어긋나고 말았다. 경제성 판단에서는 변수 하나만 바뀌어도 그에 따른 작업량이 실로 방대해지는데, 환율이 요동치고 상황이 일변하면서 여러가지 전제조건을 다 바꾸어 계획서를 다시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광양제철소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는 ‘당시 세계 철강수급 전망으로는 공급이 충분하니 국내 철강업 투자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에 맞서 장시간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제기획원 투자심사부서와 함께 광양제철소 부지를 답사하며 설명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기획실의 업무 중 가장 중요했던 일이 신규 또는 확장 사업계획 수립이었다. 모든 투자 계획은 철저히 회사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며 경제적 타당성이 검증된 투자로 이루어졌다. 양질의 철강재를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공급하여 국내 수요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에 따라 회사는 단계적으로 확장사업계획을 수립하곤 했다. 또, 기획실은 수요 산업별 발전에 따라 필요한 소재를 적시에 공급하기 위한 단위 공장별 투자계획, 신기술 적용을 위한 투자의 타당성 검토 업무 등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하나의 예로, 전기강판공장은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오랜 기간 재무적인 부담이 컸던 투자였으나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한 몫이 대단했다.

“박태준 사장은 국내 경제가 어려울 때에는 그간 축적해 놓은 자금력을 활용해 대규모 신규 투자계획을 마련하기도 하며 내수경기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불요불급한 투자는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이 있었지요.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당시에는 추석부터 이듬해 설날까지 6개월간 집에서 거의 저녁을 먹어본 적이 없기도 했습니다. 모든 부서가 사정은 비슷했지만 동료 선후배와 더불어 참으로 바쁘고 보람 있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장기간의 기획실 근무를 마치고 3년간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며 글로벌 경제철강 정보수집, 미국 내 수요가 방문, 도금강판 클레임 처리, 미국내 설비제작업체 관리 등 본사와의 협력 업무를 수행했다. 1981년 귀국 후에는 홍보실장, 경영정책실장으로 보임되었다가 1년간 사무자동화(Office Automation)추진반을 맡기도 했다. 당시 박태준 회장은 PC, 팩스, 메모리디스크 장치 등 사무자동화 기기가 개발되는 추세에 맞추어 ‘페이퍼리스 오피스(Paperless Office)’를 목표로 전사적으로 사무자동화 추진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포스코는 모든 간부사원을 대상으로 PC 교육과 시험을 도입하고 사무자동화 기기를 선정하는 한편, 원료부에 시범사무실도 설치하며 기초작업도 수행했다.

“1986년에는 판매담당 임원으로 보임되었다가 그 다음해부터는 비서실까지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박태준 회장의 경영철학과 방침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제조업이 그러하듯 박태준 회장은 초창기부터 ‘판매 우선 경영방침’ 하에서 시장에 부응하는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고 품질 및 가격경쟁력 확보에 주력했습니다. 수요가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마케팅을 제공한 것입니다. 박 회장은 ‘국내 시장이 뒷받침 되어야 판매와 조업이 안정되어, 국제적으로 불황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경영을 할 수 있다’며 국내 수요기반을 확보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시기에 고 전 부사장에게 세 가지 과제가 떨어졌다. 첫째, 대리점을 가공설비를 갖춘 스틸서비스센터로 전환하라는 것, 둘째 대일 수출 전용선을 투입하라는 것, 셋째 88서울올림픽 전까지 투피스 스틸캔을 개발하여 생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포항제철 제품을 판매하는 대리점은 회사의 제품을 받아 그대로 수요가에게 판매하곤 했었습니다. 특히 냉연제품의 생산 확대에 맞춰 수요가에게 용도에 맞는 가공서비스까지 제공하여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판매점으로 바꾸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절단설비 정도만을 가지고 있어도 스틸서비스센터라고 할 수 있었으니 대리점들이 선뜻 투자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구에 있는 신라철강이 최초로 스틸서비스센터를 설립하였고 다른 대리점들이 순차적으로 스틸서비스센터로 확산하게 되었습니다.”

또, 포스코는 일본으로의 철강수출에 있어 원활한 하역과 인도를 위해 5000톤 내외 규모의 전용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차관까지 주선하며 선사들에게 권유하였지만, 대형 선사들이 투자를 주저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부산의 금양상선이 대일 수출 전용선을 건조 운영하여 일본에 대한 수출에 도움이 되었다고 고 전 부사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박태준 회장께서 기존의 녹스는 투피스 캔은 위생 문제도 있으니 회사의 고도화된 박판 기술과 소재로 알루미늄 캔과의 경쟁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투피스 캔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포스코는 시기에 맞게 소재를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대형 캔 메이커들이 개발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국내의 한 중소기업이 투피스캔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에 맞춰 스틸캔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고 전 부사장은 입사 후 인사부서에서 첫 보직을 맡았던 경험이 있었다. 훗날 비서실에서 간부 인사를 담당하면서 그는 새삼스럽게 박태준 회장의 인사(人事)가 얼마나 공정하고 철저한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포항제철은 간부인사를 비서실에서 따로 관장하여, 비서실 간부인사과가 계열사 임원을 포함한 간부 및 임원들의 인사기록을 관리하고 있었다.

“박태준 회장이 기록 이상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적재적소 배치, 신상필벌, 경력관리 원칙에 따라 엄정하고 공정하게 인력 자원을 가동하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날의 포스코가 국내외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배경에도 이 같은 탁월한 인사관리가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1992년 8월, 그는 미국 USX와 50:50으로 합작 투자한 UPI에 수석부사장으로 파견되었다. 그때는 한미 철강업계간에 무역마찰이 심화되어 양국 철강협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UPI가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였다.

“UPI의 주주사인 USX는 미국 철강업을 대표하여 한국산 열연코일의 수입을 금지하려고 총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USX와는 독립적으로 UPI의 사장과 노조, 그리고 임직원들이 한마음으로 주정부, 중앙정부, 백악관 등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위원회에 출석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무피해 판정을 받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USX측 UPI 사장을 맡고 있었던 Chuderewicz사장이 자신의 직위를 잃을 수 있는 위험까지 무릅쓰며 UPI의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 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포스코건설 재임 중, 인천 송도 신도시 건설 자부심

 

1994년 김만제 회장이 취임한 후 건설, 엔지니어링 부문과 거양개발 등을 통합한 포스코개발(現 포스코건설)이 출범하였다. 그는 해외사업 부문의 대표이사로 부임해 손근석 초대회장, 박득표 전 회장 등과 함께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포스코개발이 종합건설회사로서의 사업구조와 체계를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전 부사장은 당시 수행했던 많은 프로젝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인천 송도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였다고 회고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 매립지였던 송도가 포스코건설이 개발한 비즈니스 신도시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시 인천시가 매립 중이던 부지 일부를 미국의 개발업체 게일(Gale)사가 매입하고, 건설 파트너로 포스코건설을 초대했습니다. 신도시 마스터플랜을 보고 우리나라의 비즈니스 신도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후 여러가지로 어려운 고비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송도 신도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포스코건설은 대형 프로젝트 수행 경험과 기술력을 크게 확대하였고 대내외 위상도 제고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베트남 신도시 건설을 비롯해 국내외 대형 프로젝트를 추가로 수주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 돈으로만 환산할 수 없는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고 전 부사장은 포스코가 설립 당시의 목적, 추구하는 가치와 사명의식, 그리고 기본에 충실했다면 보다 내실 있는 자원의 배분과 경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의 성공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초기의 설립 정신으로 돌아가 성찰해 본다면 국민적 신뢰와 함께 경쟁력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임직원 모두는 포스코가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라기보다는 국가경제를 떠받치는 기간산업(basic industry)이며 이의 선량한 관리자임을 잊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우재욱<시인·작가>

 

▶ 1982년 9월 광양제철소 건설본부 앞에서 고학봉 경영정책실 부장, 유상부 건설부장, 김영태 경제기획원 투자심사국장, 심인보 상무이사(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1981년 말 광양만이 제2제철소 건설 입지로 최종 확정된 후, 고학봉 당시 경영정책실 부장(가운데)이 박태준 회장(오른쪽), 심재강 부장(왼쪽)과 함께 부지를 둘러보고 있다.

▶ 고학봉 전 부사장(오른쪽)은 1992년 미국 UPI에 수석부사장으로 파견되었다. 그 당시는 한미 간 무역마찰이 심화되어 UPI가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UPI의 파트너사인 USX측의 Chuderewicz 사장(왼쪽)은 노조원 그리고 임직원들과 힘을 모아 주 정부, 중앙정부, 백악관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무피해 판정을 이끌어냈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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