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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85] 천신일 세중 회장, 포스텍에 6만 3000평 조건 없이 기부

[남기고싶은이야기 85] 천신일 세중 회장, 포스텍에 6만 3000평 조건 없이 기부

2017/04/12

서울시 성북구 대사관로 13길로 접어들자 ‘우리옛돌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신일 회장은 사무실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천 회장은 지금도 각종 기업활동, 사회활동, 체육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력적인 활동가로 주된 근무지를 우리옛돌박물관으로 삼고 있었다. “포스코에서 다른 일로 오셨겠지만, 이왕 박물관에 오셨으니 전체적으로 한번 관람하여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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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제철화학 창업, 지분 35% 제철장학회 기부 등 포철과 깊은 인연
– 포항코일센터 주식 제철장학회에 매각··· 주택단지 조경에도 참여

– 우리옛돌문화재단 운영하는 등 일본 유출 문화재 환수에도 앞장서

 

서울시 성북구 대사관로 13길로 접어들자 ‘우리옛돌박물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신일 회장은 사무실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천 회장은 지금도 각종 기업활동, 사회활동, 체육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력적인 활동가로 주된 근무지를 우리옛돌박물관으로 삼고 있었다.

 

“포스코에서 다른 일로 오셨겠지만, 이왕 박물관에 오셨으니 전체적으로 한번 관람하여 보시지요. 전문 석조유물 박물관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2000년에 용인에서 개관했다가 이리로 옮겨왔습니다. 원래 이 땅은 주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구입했었지만, 우리옛돌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부지 5500평과 건물 1000평을 재단에 기부하고 저는 현재 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따지자면 1000억 원이 넘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돈이라는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만 해석되고 맙니다. 세상에는 다른 수많은 가치도 있지 않습니까. 아마 오늘 포스텍 부지 확보 과정에서 내가 많은 땅을 기부한 이야기도 나올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것도 다 마찬가지의 판단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스틸파일 제조사 동양철관에서 포철과 첫 인연··· 기업경영에도 눈떠

그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을 졸업하고 ROTC 장교로 복무한 뒤 1968년 윤천주 국회의원 및 문교부장관의 비서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비서 생활은 1973년까지 이어졌는데, 그때 정치라는 것을 두고 진퇴에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고 했다.

“고심 중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의 정치란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일정액을 그냥 쓰겠다는 생각으로 하든지, 아니면 돈이 없는 사람이 정치를 삶의 수단으로 삼든지 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 이후 나는 오늘날까지 정치권과는 ‘불가근불가원 (不可近不可遠)’을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비서 생활을 접고 기업 쪽에서 시작한 첫 직장은 당시 박재홍 사장이 경영하고 있던 동양철관으로 그는 부평에 소재한 공장의 상무이사(공장장)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조카였던 박재홍 사장은 당시 포스코 서울사무소 행정실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동양철관은 포스코 건설현장에서 사용되는 스틸파일을 거의 독점적으로 납품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했다.

“동양철관 공장장으로 일하는 동안에 나는 기업 경영에 눈을 뜨게 됐고, 그게 제철화학을 창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철화학 설립 당시 나는 박재홍 사장으로부터 차량, 월급 등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점은 박재홍 사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그는 매우 통이 크고 대인관계에서도 여백을 넓게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천신일 회장이 포항제철과 최초의 인연을 맺은 것은 1973년 첫 직장인 동양철관 공장장으로 일하던 때로 소급되겠지만, 1974년 제철화학 창립이 더욱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

1973년 포항제철소 1기설비 준공과 함께 유연탄 가공공정인 코크스공장이 가동되었다. 유연탄은 제철의 제선공정 그러니까 용광로에서 철광석과 함께 녹으면서 열원(熱源)으로서의 기능과 환원제(還元劑)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하는 가장 중요한 제철 원료다. 그러나 분탄(粉炭)이나 입도가 고르지 못한 괴탄(塊炭)을 그냥 고로에 장입할 수 없으므로 코크스공장에서 고열로 쪄서 일정한 크기의 성형탄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산물인 콜타르오일과 라이트오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포스코는 이것의 활용은 물론 처리 방법조차 모르고 있었으므로 연료로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의 기술’ ‘민족의 자본’ ‘우리의 공장’을 모토로 제철화학 창립

“그때 내 나이가 서른하나였습니다. 패기 있는 사업 추진이 가능한 나이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세상 경험이 다분한 분들이 보기에는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했을 겁니다. 당시 나는 일본에 자주 나가서 제철소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신일본제철에는 신일본제철화학이라는 자회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런 형태는 신일철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제철소가 취하고 있는 경영 형태였어요. 자회사 체제로 하든, 직영 체제로 하든 ‘화학’이라는 분야를 사업의 한 분야로 삼고 있는 거였어요. 거기서 자료를 모으고 여러 통로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한 뒤 ‘제철화학’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업 정보가 천신일 회장의 독점물일 수는 없었다. 해당 사업의 현황과 자료를 정리하고 부지 확보에서부터 설비계획, 기술 도입 계획 등을 담은 사업계획서를 당시 부장이었던 박득표 전 사장에게 제출했더니, 박 사장의 표정이 그리 흔쾌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곳에서 사업 계획서를 제출한 나머지 경쟁이 심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포스코는 국영기업이다 보니 사업권을 떡 떼어주듯 함부로 특정인에게 넘겨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럴 수 있는 여건이었다 해도 천신일 회장에게 유리할 것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한 기업가들이었다면 만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사업계획서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여러 곳에서 제출한 사업계획서라는 것이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모두 일본의 예를 근거로 삼았을 것이고, 설비 및 기술도입 계획 또한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어요. 그런 자료로 소위 사업계획서 작성 전문가들의 손을 빌렸을 테니 거기에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었겠어요. 나는 그때 뭔가 큰 것을 하나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철장학회(現 포스코청암재단)에 회사 지분의 35%를 기부하겠다고 전격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20%로 생각하다가 35%로 단안을 내렸다. 사업에서의 투자 결정은 이렇게 과감한 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1/3에 꽉 차는 34%, 이런 것도 사실은 구차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감한 결정과 제안으로 포스코로부터 회사를 설립하라는 통보가 왔다. 천 회장은 마음 한편으로는 당시 제철장학회에 1/3이 넘는 지분을 기부하면 다른 면에서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사업권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제철화학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기술’, ‘민족의 자본’, ‘우리의 공장’이라는 세 가지 모토를 내세웠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설비와 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생각했으나, 그들은 기술을 넘겨줄 생각도 없었고, 만약 넘겨주더라도 엄청난 돈을 요구할 것이 눈에 훤히 보여 이러한 모토를 내세우고 자체 설계와 설비 국산화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실 석유화학이나 석탄화학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원유를 정제해서 휘발유에서부터 벙커C유까지 뽑아내는 것이 석유화학이라면, 원탄을 정제해서 코크스와 콜타르로 짜내는 것이 석탄화학이지요. 결국은 같은 방법입니다.

자기자본과 은행차입을 통해서 우리 기술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울산으로 내려가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의 생산부장 김찬욱 씨(3代 제철화학 사장), 석유화학부장 배전운 씨 등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국내 최고의 기간산업이었던 정유공장을 망가뜨리려는 놈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과 함께 각급 사정기관들이 옥죄어 오는 것이었다. 당시는 사정기관의 감시망에 포착되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곤욕을 치러야 하는 시절이었다. 비단 그 사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 시절이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거기에도 길이 있더군요. 포항제철 건설 초창기에 전구백 씨라는 분이 중앙정보부 경북분실장으로 와 있었는데, 그는 포항제철 초기 건설에 매우 큰 도움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반듯한 행정절차와 체계적 업무처리로만 이루어지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박태준 사장은 포항제철 건설에 따르는 제반 잡다한 문제들을 이 분에게 부탁해서 많이 해결했습니다. 나중에 은퇴 후 박태준 사장의 추천으로 제철화학 고문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나서서 사정기관들의 압박을 다 무마해 주는 바람에 1974년 5월 제철화학의 설립을 마무리했습니다. 나는 그때 오히려 제철화학 공장 설계 및 설비를 국산화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의 표창을 받았고, 이후 재계에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제철화학에 4조 3교대 도입, 직원사택 마련 등 직원 복지에 힘써

1975년 제철화학 설립 초창기 위기도 있었다. 공장 설계 자료를 얻기 위해 연일면에 파일럿플랜트를 하나 세웠는데, 직원들이 급속 승온(昇溫)을 하다가 설비가 폭발해 현장에서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하루는 서울 집에 있는데, 새벽 4시에 포항 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불길한 예감에 ‘몇 명이 사망했느냐’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바람에 전화한 직원이 대답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3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를 하더군요. 후에 들으니 젊은 사장이었던 내가 받을 쇼크를 줄이기 위해 차분히 하나씩 설명하려 했었다고 합니다. 굉장히 큰 쇼크였지만, 경영자로서 침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속골병으로 남는다는 것을 기업경영을 해본 사람들은 압니다.”

이때 사정당국에서는 사장 구속, 공장장 구속 등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무죄로 결론지어졌다.

“감옥살이를 하든 무죄로 판결이 나든 사고가 난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고, 사람이 셋이나 사망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건설이나 조업 현장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보상금으로 100만 원을 지급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한진그룹이 베트남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보상금으로 200만 원을 지급한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그때 나는 사망 보상금으로 인당 520만 원을, 전 직원에게는 상여금 100%를 지급했습니다. 돈은 또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재계에서는 젊은 놈이 돈만 올려놨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는 포항제철에서 힌트를 얻어 포항 해도 지역에 직원 사택부터 10동을 지어 주거 불편을 해소했고 출퇴근 버스를 운행하는 등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복지 제도를 도입했다. 교대근무에 4조 3교대를 도입한 것도 포스코보다 훨씬 이른 1980년대 초였다.

1977년 7월 들어 그는 제철화학을 매각하기로 했다. 포스코는 3년 간격으로 거의 300만 톤씩 증설해 나갔고, 이를 따르기 위해서는 제철화학도 그에 상응하는 설비증설을 계속 이어가야 했는데, 계속적인 은행 차입을 중소기업인이 감당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우에 10%의 지분을 넘기고 KIST에 25%를 팔아 포철장학재단 지분과 자신 소유의 지분 등 4개 주주 체제로 전환했다. 이후 대우가 경영권을 행사하면서 증자를 단행할 때마다 지분을 포기함으로써 차츰 제철화학과 멀어져 갔다.

“어느 업종이든 안전사고가 없을 수는 없지만, 제조업 특히 중화학공업에서의 안전사고는 경영자의 머리를 지끈지끈 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생각도 업종 전환의 조그만 이유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제철화학을 정리하고 분수에 맞는 걸 찾아보자고 해서 시작한 사업은 ‘동해조경’이었습니다. 당시 포항은 주택, 아파트 건설 붐이 일고 있었고 사회간접자본 확충 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경 사업의 전망을 밝게 보았던 거지요. 이후 이루어진 제철소, 포스코 영빈관, 경주보문단지, 동대구역 조경사업을 진행했습니다.”

 

포스텍 부지기증 대가로 효자동 쇼핑몰 운영권 제안 받았지만 사양

포스텍·제철장학회 기여 공로··· 명예회장 5주기 내빈으로 초청 받아

이쯤에서 그는 포스텍 부지를 기증하게 된 인연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당시 제철화학을 정리하면서 포항의 적당한 지역에 땅을 사 두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때 그가 눈 여겨 본 지역이 현재의 포스텍 부지와 그 인접한 지역까지였다.

당시 이 지역은 포스코 효자 직원주택단지 인근이었는데, 전국 최고의 학군, 최고의 주거지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우수한 교육 인프라를 갖춘 학교들이 들어서 수준 높은 교육을 하고 있고 주택단지 전체가 공원화되어 자연 속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역 인근에 주택단지를 건설할 중장기 계획을 세웠고, 당시에는 동해조경의 묘목 육성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포스코에서 기존에 건설해 놓은 교육, 문화 시설의 공동 사용을 거절할 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세간에는 동해조경의 묘목 육성장으로 소문을 내고 지금의 방사광가속기 지역에는 사자와 원숭이 등을 입식하기도 했습니다. 그 땅을 포스텍 부지로 기부하게 된 겁니다. 지금은 그때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 겁니다. 제철화학의 지분 35%를 기부한 사실, 포스텍 부지를 기부한 사실도 이제는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나 남아 있겠지요.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나의 기부 활동을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1985년 7월 문교부로부터 포스텍 설립인가를 받은 포스코는 당초 포스텍 건설 소요 부지를 10만 평 정도로 잡았다. 우선 학교 부지로 지정 고시하려면 땅 소유주의 2/3가 동의해야 했다. 사업주가 동의서를 첨부해서 문교부에 제출하면, 문교부에서 학교부지로 지정 고시해 주고 강제 수용 절차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포스코는 포항 인근의 땅을 세밀하게 훑어보았지만, 결국 효자 주택단지에 인접해 있는 천 회장 소유의 부지가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내 땅이 8만 3000평이었으니 나 한 사람만 동의해주면 되는 일이었어요. 포스코 측에서는 몸이 달아 있었습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동의서에 도장 좀 찍어달라는 거야. 나는 아무 조건 없이 도장을 찍어 줬어요. 그때 나는 2만 평에 대해서는 10억 원의 땅값을 받았고, 나머지 6만 3000평은 조건 없이 기부했습니다. 당시 돈으로 30억 원쯤 되는 돈이었습니다. 당시 지인들 중에는 포스코에서 계획한 부지에 편입되지 않은 자투리 부분은 분할해서 가지고 있으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땅 장사도 아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성격에도 맞지 않아 그냥 내가 소유한 땅 전체를 기부하기로 했던 겁니다.”

박태준 회장은 임원회의에서 “천신일 회장 땅을 뺏어 먹었으면 뭘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후 1986년 9월경 당시 이대공 상무이사를 통해서 제안이 왔다. 포스코에서 효자 주택단지에 중소형 백화점급 쇼핑센터를 하나 지어줄 테니 임대 및 운영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가를 바랐던 기부가 아니었기에 이 대목에서 매우 부끄러웠다고 했다. 결국 그는 말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사양했다.

“그 이후, 1988년 당시 포항코일센터를 건설해 초기 운영을 맡고 있던 저에게 제철장학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앞으로 포스코에서 계속 포스텍을 지원할 수가 없고, 좋은 데 투자를 해서 안정된 투자수익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수익사업을 만들어야 한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천 회장이 운영하고 있는 코일센터가 가장 적합해 보이니 코일센터 주식을 제철장학회에 매각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응했습니다. 시중 금리가 아닌 은행 이자로 쳐서 투자금액을 받았고요.”

이렇게 천 신일 회장은 한결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박물관 남쪽 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두 석조유물인데, 유일한 현대 철제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포스코에서 무려 7년간 고철을 깨온 쇳덩이(파쇄공)를 소재로 홍익대 정현 교수가 작품화한 것이라고 했다. 3층 기획전시실 입구에는 고 박태준 회장의 둘째 딸 박유아 씨가 그린 박태준 회장의 초상화가 한 점 걸려 있다고 소개했다. 포항제철소, 광양제철소, 포스텍을 배경으로 한 작업복 차림의 박 회장의 모습을 한 점 그려 달라고 해서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모두 고 박태준 회장과 포항제철에 대한 나름의 애정이라고 했다.

“2016년 12월 박태준 회장 5주기 때 포스코에서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평소에 아무 연락이 없었던 터라 웬 일인가 하고 갔는데, 포스코센터 추도식장에 자리도 주요 내빈석에 마련돼 있고, 식사 자리도 VIP 석에 배치되어 있어 매우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당시에 제철화학 주식 기부, 포스텍 부지 기부, 코일센터 주식 이양 등의 일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알려지지 않았나 싶어서 흐뭇했습니다. 공치사를 받고 싶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정성은 닦을수록 빛나고, 궂은일은 지울수록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 천신일 사장이 1976년 5월 31일 제철화학 준공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천신일 사장은 1974년 제철장학회에 지분 35% 기부를 전격 제안하며 제철화학 사업권을 확보했고, 공장 준공 과정에서 설계와 설비 국산화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 1986년 포스텍 설립부지로 6만 3000평을 내놓은 천신일 회장을 보도한 신문기사(1986.4.2 경향신문).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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