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초만 하더라도 기업에서 ‘KS표시 허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경영진이 직접 팀장이 되어 별도 추진팀을 구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품질보증 체제’를 구축에 나서고 전사적 쇄신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KS표시 허가 획득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포항제철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담당자가 열심히 하면 되는, 하나의 작은 미션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제철소 전 공정별 설비 및 조업조건 표준화해 품질관리 체제 구축
– 광양제철소 가동 초기, 매일같이 비상근무하며 제품 품질안정 실현
– ‘생산성과 품질’ 두마리 토끼 잡기 어려워··· 연구와 학습 병행해야
1970년 초만 하더라도 기업에서 ‘KS표시 허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경영진이 직접 팀장이 되어 별도 추진팀을 구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품질보증 체제’를 구축에 나서고 전사적 쇄신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KS표시 허가 획득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포항제철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담당자가 열심히 하면 되는, 하나의 작은 미션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제철소 건설과 후판공장 가동 준비에 몰두해야 했던 당시의 여건이 그런 분위기를 부채질한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계생 전 이사는 입사하자마자 생산기술부 기술과에 배치되어 이 일을 맡았다.
“1972년 8월, 경력직으로 입사해 연수원 도입교육을 다 이수하기도 전에 품질관리 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스코 입사 전 3년 정도 부산제철소에서 일하는 동안 ‘품질관리사’라는 국가 자격증을 취득했기 때문에 그 일이 나에게 떨어진 거였어요. 당시 포스코는 후판제품 생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회사의 위상으로 볼 때 제품 생산과 동시에 KS표시 허가를 취득해야 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고, 이에 대비해 신입사원 도입교육 과정에 ‘품질관리’ 과정이 편성되어 있었던 거였어요. 후판생산에 대비해 품질관리 활동을 강화해야 했지만, 거꾸로 후판공장 가동에 집중하느라 품질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것이었지요.”
KS표시 허가를 획득하기 위한 품질관리 체제란표준화된 조업 프로세스를 거치면 자연스럽게 품질이 확보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무게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는 이후 20년이 지나서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품질체계 기준인 ISO9000(품질경영 시스템에 대한 국제규격)과 맥락을 같이한다.
초창기 품질관리 중요성 강조했더니 아무도 신경 안 써···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품질검사표준’ 매뉴얼화해 발간
“사실 회사 초창기에는 말단 직원에서 경영층에 이르기까지 품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품을 만들기만 하면 잘 팔렸으니까요. 품질에는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훈시적으로 품질을 입에 올렸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아닌 거야. 마치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의 도덕 과목 같은 거였지. 절대적 개념이긴 하지만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그런 것 있잖아요. 현장에서 품질관리를 외쳐 봤자 조업 훼방꾼 취급을 받으니 무력감이 밀려오더군. 나중에 ISO9000 인증작업을 할 때에는 TF는 물론이고 전사적인 관심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니, 과거 KS표시 허가 획득 작업을 할 때의 상황과 비교되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철공정은 일관공정(一貫工程)이기 때문에 공정이 매우 길고 복잡하다. 그중 한 군데만 잘못돼도 제품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정별로 설비조건이나 표준 매뉴얼을 만들어 그 범위에 들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여러 공정의 협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던 중, 윤종구 당시 제강부장을 찾아 협조를 구했다.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이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전사적으로 나서야 하는 일인데 자네 혼자서, 그것도 신입사원인 자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려울 텐데··· 걱정스럽구먼.’ 하시면서 염려해 주시는 거였어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그런 말씀을 들으니 말씀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어요. 그분은 마산에 소재한 한국철강이라는 전기로 제강업체에 근무할 때 KS표시 허가 취득을 추진한 경험이 있어 잘 알고 계셨어요.”
그 외에도 당시 품질관리 체제 구축에는 하나의 큰 걸림돌이 있었다. 후판공장은 오스트리아 푀스트사의 설비와 기술을 도입했고 기술 연수도 거기서 받았기 때문에, 표준서나 품질관리 시스템이 서구적이었다. 최종 제품을 체크하는 검사원은 물론이고, 중간 공정에서의 품질요소를 체크하는 직원도 생산부서가 아닌 품질부서 소속이었다. 반면에 열연 분야는 JG(Japan Group)의 기술을 도입하고 연수도 일본에서 받았기 때문에 검사업무 또한 ‘자주관리’를 기반으로 하여 생산공장에서 수행했다. 그런데 KS표시 허가 요건 중에는 ‘생산부서로부터 독립된 검사’라는 항목이 있어 회사 내에서의 업무 조정은 물론이고 한국표준협회 및 KS심사관들을 설득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일관공정이었습니다. 제강-슬래브 분괴-제품 압연으로 이어지는 제철 공정은 다른 산업의 일관공정과는 달리 중간 공정에서의 품질 확인검사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인데, 어떤 방법으로 중간제품의 품질을확인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지요. 그래서 제품의 품질설계 단계에서부터 화학적 성분,조업 및 설비 조건을 표준화하고, 이런 조건들이 자동 계측되도록 함으로써 중간 단계에서의 품질 확인 수단으로 채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73년 4월 후판제품 KS표시 허가를 획득했고, 이어서 5월에는 제철소 종합준공에 대비해 공정품질 기준, 검사 기준 등의 표준류를 종합 조정해 ‘품질검사표준’을 제정, 발간했습니다.”
일관공정 체제에서의 품질관리, 특히 자주검사 제도를 수용하고 있는 체제에서는 상하 공정 간의 다툼이 심할 수밖에 없다. 품질 기준이 회수율(回收率)이나 생산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공정(上工程)에서는조업 조건을 좌우하는 품질기준을 느슨하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고 하공정(下工程)에서는 품질 불량이이나 낮은 회수율을 상공정 탓으로 돌리는 성향이 강하다.
슬래브 장입 기준을 벗어난것을 가열로에 장입해 후공정에서 코일 폭이 미달되는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이 문제를 품질부서에서 따졌더니 폭 기준을 벗어난 슬래브를 장입하지 말라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며 마치 법조문을 따지는 변호사 같은 태도를 취했다. 자기 공장의 생산성이 손해를 보게 되니 철의 비중을 조정해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요구하는가 하면 수출 제품을 선적해야 하는데, 품질기준에 조금 벗어난다고 해서 불합격시켜 선적을 지연시키면 회사의 손실이 하루에 얼마인지나 아느냐며 도리어 호통을 치는 간부도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경험으로 볼 때 불량품이라도 일단 출하시키고 나면 10개 중 한 개도 클레임이나 불만 제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런 주장이 사실은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훨씬 수준이 높은 6시그마, 그러니까 100만 개 중 불량 3~4개로 품질을 관리하지만, 그 당시엔 100개 중 불량 1~2개인 3시그마 관리가 일반적이었거든. 그러나 3시그마 기준으로 보면 불량 제품 10개를 출하해도 문제 제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 통계적으로 수백 개를 출하해야 클레임이 제기되기 시작할 테니까.”
철강제품은 전수 검사가 불가능하고 무겁고 뜨겁기 때문에 검사원이 손쉽게 만지거나 관찰할 수가 없다. 이렇게 최종 제품검사만으로 품질을 보증하기 어려우므로 쇳물 상태에서부터 중간제품, 최종제품에 이르기까지의 전 일관공정을 정해진 기준에 맞게 통과하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제품의 품질이 확보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적용되는 화학성분, 조업 및 설비조건 그리고 가공 조건 기준을 정할 때 3시그마를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준에 모두 부합하더라도 1000개 중 한두 개는 불량품이 포함될 확률이 있는 것이다. 이때 품질기준이 잘못됐기 때문에 불량품이 나오는게 아니냐고 다그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완성 제품이라 할지라도 전수검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중간 공정에서는 직접검사가 아닌 간접검사로 통과 여부를 판정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더라도 100% 합격품을 보증할 수는 없는 체제인 겁니다. 여기에서 시그마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고, 기준을 가볍게 하면 불량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므로 당시에는 3시그마 관리가 일반적이었으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제품 경쟁력 확보를 위해 6시그마가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30% 까지 치솟았던 광양제철소 제품 불량률 낮추기 위해 동분서주
1985년 12월, 그는 광양제철소 품질관리부장으로 부임했다. 광양제철소는 전 제품이 연주(連鑄)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는 점과 품질에 민감한 냉연 제품을 생산한다는 점을 감안해, 품질관리 체계에서 제품 검사원의 소속을 어디로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지속됐다. 그러나일단 포항과 같이 현장 소속으로 두고 출발하되 이 문제는 향후 계속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동 초기 광양제철소의 품질관리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았다.
“준공일자에 쫓겨 핫런(Hot Run) 테스트 기간도 단축하고 제품 생산에 들어갔는데, 불량률이 2~3%가 아니라 20~30% 수준까지 올라간 겁니다. 당시 나는 품질관리부장으로서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뉴스에나 나올 법한 ‘라인스톱’과 같은 결단을 내리는 것이 일관공정 하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이런 결정을 할 사람이 사실상 없다는 것도 눈치 챘습니다. 품질문제는 본질적으로 라인스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았던 거지요.”
철강산업을 대형 장치산업(裝置産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산설비의 상태가 생산성은 물론이고 품질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광양제철소는 모든 제품이 연주 라인을 거쳐 생산되는 체제이므로 연주기의 세그먼트 정도(精度) 관리가 품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불량의 대부분은 세그먼트 관리 미흡으로 인한 결함(내부 중심부 균열) 때문에 발생하곤 했다. 제강부, 정비부서와도 이 문제를 두고 수없이 협의했지만 그쪽 부서들 역시 더 시급한 문제로 여력이 없는 듯했다. 다급한 나머지 결국 품질관리부에서 ‘연주 세그먼트 교체기준 설정 및 수량 확보 계획’을 세워 상부의 결심을 받아냈다. 사실 이 업무는 정비부 소관이었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품질관리부로서는 네 일, 내 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런 사건도 있었습니다. 자동 계측되는 온도가 실제 온도와 달라 불량품이 발생했어요. 열간압연 후 소재가 쿨링존(Cooling Zone)을 지나갈 때 규정된 재질을 맞추기 위한 필수요소로 ‘코일 CT온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제품의 물성(物性)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인 겁니다. 이 온도는 제품 품질설계 단계에서 결정되어 현장 작업조건에 자동으로 반영되는 관리 항목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일지 계측된 온도는 지시된 온도 범위 내에 있었지만 재질강도가 규격 미달이었고, 제품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규정 온도보다 상당히 높은 온도에서 코일링된 조직형태를 띠고 있었어요. 코일링 온도를 자동 계측하는 온도계의 작동이 의심되어 휴대용 원격 온도측정기로 측정한 결과, 고정 설치되어 있는 온도계측기에 이상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인위적인 요소 개입이 없고 에이징(Aging) 열화가 거의 없는 신예설비의 계측기 오류였기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열리는 제철소 부장회의에서 품질관리부장이 ‘급증하는 품질문제를 해결하려면, 생산과 정비부서가 조업 및 설비기준을 철저히 준수해 주어야한다’고 보고하고 관련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 당시 김종진 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품질관리부의 보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현장 순찰 시에는 품질 얘기는 빼고 생산목표 달성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때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면으로는 책임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고 박계생 전 이사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땐 품질에 큰 관계없이 잘 팔리던 시절이었으니 회사의 수익 증대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품질 부서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현장의 현실적인 문제는 또 그것대로 챙겨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었다고 해야겠지요. 나는 컴퓨터에 소질이 있는 편이어서 차장 시절에 8비트 PC로 원가계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급강 몇 종류와 일반강의 원가를 비교해 본 적이 있습니다. 결과를 소 운영회의에 보고했는데, 역시 채산성은 일반강을 최대로 생산하는 것이 최고였습니다. 고급강은 가격은 높지만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채산성이 일반강에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엄격한 품질관리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포스코 원가계산 시스템이 나오기 1년 전이었으므로 당시 이런 보고는 회사 전체로도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는 초기 가동 시에 발생되는 갖가지 문제로 매일 비상근무를 하며 이발할 시간도 내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고, 이후에도 품질안정화에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 결국 품질안정화를 달성해, 1988년 ‘철강제품 품질관리 시스템 구축’이라는 공로로 상공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해 처음 생산을 시작하여 일본으로 수출한 아연도금강판(CG)에서 클레임이 제기되어 있었는데, 이게 단순한 품질 문제로 끝나지 않고 기강문제로까지 비화되어 결국에는 스태프부서 부장들이 ‘본사근무’ 징계를 받아야 했다. 제철소에서는 품질관리부장을 비롯해 생산관리부장, 설비관리부장, 행정관리부장, 건설관리부장 등이 징계를 받았다.
기술연구소 구조조정 맡아 RIST와의 기능 중첩 문제 해결
RIST 부원장 보임 후, 연구원들의 사기와 위상 드높여
이후 제철연수원 전문교육부장, 기술본부 부본부장을 거쳐 1994년 기술연구소 부소장이 되었다. 기술본부에서 맡은 일은 연구소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포스코의 연구수행 조직으로는 사내 기술연구소와 재단법인 형태의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이 있었다. 이 둘은 연구기능이 중복되기도 했고, 연구 비전 설정에도 상충되는 면이 있었다. 따라서 철강 관련 연구기능은 사내연구소로 통합하고 신소재·환경에너지·미래지향 관련 연구는 RIST로 집중시킨다는 방침 아래 작업을 진행하였고, 구조조정이 끝난 직후 그는 사내 기술연구소 부소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3년 뒤인 1996년에는 RIST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 나는 1977년부터 6년 가까이 강재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한 바 있어 생소한 분야는 아니었습니다. 인원 재배치에 앞서 연구원들을 포함한 많은 직원들의 의견을들어보니, 연구원들의 현장적응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고, 반대로 현장에서는 연구원들을 전문가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심한 경우에는 연구원들이 현장에 다녀와서는 자존심이 엄청 상해 ‘노이로제’에 빠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장에서는 문제 해결에 연구소와 연구원들을 적극 활용하려는 생각이 없었어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처음에는 연구원들의 사기가 떨어져 이직자도 여럿 있었고, 연구소가 차지하는 사내에서의 위상도 미미했습니다.”
제품개발 업무에서 연구소의 역할이 분명치 못했던 것도 연구원 사기 저하의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품질기술부가 초기 제품개발 업무를 주도하며 개발 및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현장 투입시험 등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당시 연구원들은 이제 막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학위를 염두에 둔 연구를 마치고 나와서 현장문제를 갓 접하게 된 형편이다 보니, 현장에서 기대하는 것만큼의 권위와 해박한 지식, 경험을 갖추지 못한 게 사실이었고 제품 개발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을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초기에는 연구원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현장으로 나가게 해 조업과 설비문제를파악하고 현장 기술원들과 함께 해결방안을 마련토록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각자의 역할이 정착되었고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사내 연구소가 상용화, 실용화 연구를 수행하는 데 유리한 면이 있어 사내연구소 근무를 원하는 연구원들이 많아지게 된 겁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월이 지난 지금은 특정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연구원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고, 신기술이나 신제품 개발에 있어 연구소의 역할이 필수적인 것으로생각되면서연구원 출신들이 임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밖에 사외 평판에서도 포스코 기술연구소의 위상이 크게 높아져, 그간 떨어졌던 연구원들의 자존심이 많이 회복되었다.
“이를 통해 몇 년마다 수시로 보직이 바뀌며 관리직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현장 기술자의 약점을 전문 연구원들이 잘 보완하게 되었고,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문기술, 신기술들이 축적되어 가는 연구개발 체제가 정착되었습니다.”
공부와 연구에 대한 게으름은 엔지니어의 죄악···
끊임 없는 학습과 자기계발로 경쟁력 높여야
오랜 세월 품질관리 외길을 걸어온 그는 엔지니어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때가 경쟁력을 잃는 때라고 했다. 특히 품질관리 분야에서 공부와 연구에 대한 게으름은 스스로 살아남을 수 없는 엔지니어의 무덤이라고 강조했다. 품질관리 분야는 공부하기에 좋은 조건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술이라는 영역이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거나 눈앞의 문제만 해결한다고 되는 분야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기술의 정직함이고 엄격함입니다. 억지를 부릴 수가 없어요. 내가 틀렸으면 ‘제가 틀렸습니다’ 할 수밖에 없고, 내가 옳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할 겁니다. 공부도 이론과 현장이 결합될 때 효과가 크게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문제의식과 결합될 때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되고, 나만의 고유한 것이 됩니다.”
그는 2002년 RIST를 퇴직하면서 니콘4500 카메라를 구입하여 사진을 접한 후 D80, D7100, 소니RX10m2, D500 등을 다루면서 사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 동안 주말마다 결혼식장을 찾아다니며 촬영했고 촬영 후에는 반성문을 쓰면서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팁을 메모하기도 했다.
“취미활동으로 사진 찍기에 맛을 들인 후에는, 산책길에서도 소소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고 혼자 다니는 여행길도 무료하거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포스코 OB 모임에서 단골 사진사 역할을 하기도 했고 지인 자녀들의 결혼사진을 촬영해주며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도 포스코 현역에서 은퇴하는 후배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나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람이 실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취미를 택하여 활동하는 것이 건강하고 즐거운 노후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1979년 4월 기술연구소 제1연구동 준공기념행사에서 박계생 전 이사(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동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계생 전 이사는 당시 강재책임연구원으로 기술연구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동료 연구원들이 크게 빛을 보지 못 하던 현실이 안타까웠었다고 회상했다. |
▶ 박계생 전 이사(왼쪽 첫 번째)가 1986년 4월 광양 시험검정실 준공을 기념해 열린 안전전진대회에서 직원 대표와 안전다짐 선서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