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만 톤 체제의 포항 1기 설비는 1973년 7월 3일 종합 준공되었지만, 압연라인의 중후판공장과 열연공장은 1972년 조기 준공되어 수입 슬래브로 생산에 들어갔다. 판매부서는 포항제철 최초의 제품인 후판과 핫코일을 시장에 내놓았다. 당시 국내 철강 수요산업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최대의 철강제품 수요처가 철도청과 부산의 대한조선공사였던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또 모든 수요가들이 신생 포항제철의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판매경험 전혀 없던 시절, 수요처 찾아 동분서주··· 10톤 주문에도 감동
– 수출용 도금강판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던 클레임을 포장방법 바꿔 해결
– 포스코의 경쟁력이 곧 대한민국 산업의 경쟁력, 후배들 자부심 가져주길
103만 톤 체제의 포항 1기 설비는 1973년 7월 3일 종합 준공되었지만, 압연라인의 중후판공장과 열연공장은 1972년 조기 준공되어 수입 슬래브로 생산에 들어갔다. 판매부서는 포항제철 최초의 제품인 후판과 핫코일을 시장에 내놓았다. 당시 국내 철강 수요산업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최대의 철강제품 수요처가 철도청과 부산의 대한조선공사였던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또 모든 수요가들이 신생 포항제철의 제품을 신뢰하지 않았다. 품질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매기준이 제일 까다롭던 철도청에서 사용하면 모두 믿고 사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따라서 포스코는 판매 우선목표를 철도청에 맞추고, 전사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구매사양의 120% 수준으로 공급계약을 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엄하용 전 상무이사는 당시 철도청과 처음으로 20톤의 후판 공급계약이 이뤄지던 때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1972년 11월이었어요. 판매 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수요처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철도청으로부터 후판 20톤을 구매할 테니 계약하러 오라는 전화를 받은 겁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유병렬’이라는 직원이었는데, 이 사람이 흥분한 나머지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6층에서 달려 내려가 그만 YWCA 회관의 현관 통유리 문을 들이받고 그대로 통과해 버렸어요. 얼굴을 많이 다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서 계약을 했지요. 그 친구는 12월 19일로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있었는데, 어쨌든 그해 안으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얼굴이 완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12월 31일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선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라는 게 엄 전 상무이사의 말이었다. 철강이란 시장 바닥에 앉아서 팔 수 있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수요가의 긍정적 반응만 고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걸려온 계약 요청 전화는 하늘의 복음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1971년 입사 이후 운송출하부 근무 1년 반, 해외 근무 6년여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판매 외길을 걸었다. 정식 입사 전인 1970년 말부터 시작한 사전근무도 판매조사실에서 시작했다.
“입사도 하기 전 거마비(車馬費) 정도 받으면서 사전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동기생 4명이 판매조사실에 배치되었습니다. 당시 송주헌 실장 아래 최인환 씨가 근무하고 있었어요. 주된 일은 장단기 수요예측, 제품별·용도별 규격 숙지, 가격 조사 등이었습니다. 철강시장 시스템 조사를 위해 철판 거래소의 집합지였던 청계천에 나가보면 모든 말이 일본어로 통용되고 있었어요. 뎃빵(鐵板), 사부로쿠(さぶろく·3’×6′), 시하치(しはち·4’×8′) 등의 일본어를 우리도 한동안 따라 썼습니다.”
당시 업무부 업무과장을 맡고 있던 이영 씨(후일 수출부장 역임)가 일본에서 철강재 가격표를 가져왔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철강재 가격은 기준가격(base price)+할증가격(extra price)으로 되어 있었는데, 기준가격은 시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고, 할증가격은 제품의 치수·수량 등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할증가격은 복잡하고 다양했기 때문에 아예 책자(extra price list)가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 이러한 가격체제가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는데, 국내에는 그런 용어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할증가격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 철강 생산·공급 체제는 근본적으로 주문생산(order made)이지만, 미국은 수시로 주문에 따라 계약·공급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시황을 그때그때 가격에 반영하기 용이하지만, 불황에는 생산량을 채우기 어려운 면이 있었지요. 일본은 분기별 가격과 수량을 정해 수요가에게 오퍼(offer)를 내고 주문을 받아서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즉 분기단위 판매시스템이었습니다. 시황을 계약에 반영하는 데 다소 시차가 발생하지만, 생산의 안정을 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죠. 양국 시스템의 장단점이 있었는데, 포스코는 신생 제철소의 조업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일본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내수와 수출 모두 이 방식을 채택했고, 회사 여건을 반영해 우리 방식의 프라이스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1971년 3월 1일 정식 입사 후, 포항 연수원에서 3개월간의 도입교육을 받고 다시 판매 쪽으로 발령을 받았다. 연수기간 중에는 두달 반 정도의 현장 순회교육(OJT)이 있었는데, 판매 쪽에서는 기술자도 아닌데 무슨 OJT가 필요하느냐며 빨리 부서로 복귀하라고 했지만, 그는 규정대로 OJT를 다 받았다. 그는 그때 OJT를 통해 현장감각을 익히는 한편 사람도 많이 알게 돼 이후 크게 도움이 됐다고 했다.
박태준 사장, 1기 준공 앞두고 시장조사단에 현장 핵심인력 대거 투입···
기술자들에게 ‘판매 마인드’ 심어준 박태준 사장의 혜안·통찰력에 감탄
1972년 들어 박태준 사장은 모든 국내 철강 수요산업체를 직접 방문하는 전수조사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그 조사단에는 판매요원뿐만 아니라 제철소 현장의 핵심 과장 8명을 분야별 조사팀의 팀장으로 합류시켜 같이 움직이라고 했다.
“당시 건설과 조업 쪽의 핵심 과장들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바쁜 사람들을 현장에서 빼내 시장조사단에 합류시킨 박태준 사장의 통찰력이 새삼 놀라울 뿐이지요. 후판공장과 열연공장의 가동이 눈앞에 다가와 있고 내년이면 1기 설비가 준공되는 상황에서 철강수요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물론, 기술자들에게 판매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한 조치였던 겁니다. 박 사장께는 당신 나름의 시간표와 시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돼요. 나는 그때 조상진 과장과 파트너가 되어 부산의 대한조선공사에서부터 남서해안의 조선소를 2주 넘게 훑고 다녔습니다.”
1973년에는 판매부가 만들어지고 판매조사실 업무를 이어받았다. 과 단위는 판매계획과와 판매1과로 편제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판매는 ‘수출’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예상치 못한 수출 대박이 터졌다. 미국의 국제무역상인 커트오번(Kurt Orban)사에서 무려 1500톤의 계약을 제시해온 것이었다. 당시 1500톤이면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커트오번 관계자와 우리 판매 라인은 전혀 사전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제의한 것이었어요. 판매부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철강재 몇 십 톤을 팔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판인데 제 발로 찾아와 1500톤을 사겠다니 그럴 만도 했지요.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포항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본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메이저 철강무역상으로서 확보한 풍부한 정보를 근거로 포항제철소를 직접 방문해 최신 설비, 깨끗한 공장 환경, 순조로운 공장 가동현황 등을 확인하고 선제적으로 포스코와 거래를 튼 것이었습니다. 박태준 사장께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신 ‘공원 속의 제철소’가 빛을 발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이후 종합상사가 역할을 제대로 할 때까지 커트오번은 주요 거래선으로 자리매김했지요.”
수요가와 계약이 이루어지면 판매부는 주문서를 제철소 생산관리부에만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생산관리부에서 제강·압연 등 관련부서로 보내서 생산에 들어가고 필요한 행정처리를 하는 것이 통상적인 업무절차일 텐데, 제철소에서는 모든 관련부서에 주문서를 판매부에서 직접 보내라고 요구했다.
“제철소는 그만큼 힘이 셌습니다. 당시 권한이 막강했어요. 판매 쪽에서는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복사기도, PC도 없었던 시절이라 서류 사이사이에 먹지를 넣고 무려 9장의 복사본을 기계식 타자기로 힘껏 내리쳐서 만들어야 했는데, 이 일로 타이피스트들의 어깨가 고장이 나기도 하고 손가락이 아프다고 우는 일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판매부에서는 여직원들을 밤늦게까지 잡아둔 경우에는 잡아둔 사람이 알아서 귀가시키는 게 관행화되어 있었는데, 간신히 집에 데려다 주고 나서 정작 자기는 통행금지에 걸려 주위의 여관을 이용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어요.”
내수 판매에서 대형 수요가와는 직거래를 하고, 소형 수요가와는 대리점을 이용하는 체제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1975년 들어 수출에서는 종합상사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전까지는 흔히 오퍼상이라고 하는 국제무역상을 이용해 왔다. 처음 참여한 국내 종합상사는 대우·쌍용·삼성·효성·반도 등 5개사였는데, 반도는 교육만 받고 한참 있다가 나중에 LG로 이름이 바뀐 뒤에 새로 참여했다. 그때까지 국내 종합상사들은 철강을 취급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각 상사의 담당자들을 불러 제품별 규격과 용도 같은 기초적인 교육을 했다. 이후 포스코 제품을 취급하는 국내 종합상사에는 철강부가 생겼고, 한동안 국내 종합상사 신입사원들의 제1지망이 철강부였다. 2000년대에는 철강본부장 출신들이 각 종합상사의 사장으로 승진하는 사례가 많았다.
“미국·일본·동남아가 주된 수출선(輸出先)이었는데, 같은 지역을 놓고 상사끼리 시장 쟁탈전을 벌이면서 여러 가지 폐해가 노출되는 바람에 지역별로 1개 업체를 선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질서는 잡혔는데 나태해지는 거야. 그래서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1지역 2개사 체제로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지역분담 체제를 완전히 없애고 100% 자유경쟁 체제로 되돌렸어요. 다만 수요처는 처음 개척한 상사가 계속 맡는 기득권 보장 체제를 운영했습니다. 종합상사를 이용하는 것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수수료 부담이라는 분명한 단점이 있는 반면, B2B(Business to Business)체제의 철강 거래에서 수요가가 메이커에, 또는 메이커가 수요가에게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마련인데, 그 부분의 완충역을 상사가 해 줄 수 있는 거죠.”
1975년, 초대 상파울루사무소장으로 보임되어 브라질로 건너가다
1970년대만 해도 해외시장의 정보를 그때그때 보내줄 수 있는 통신수단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텔렉스(Telex)가 있었지만 이걸로는 많은 정보를 실어나를 수 없어서 결국 우편이나 철강 전문 정기간행물 등에 의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시장과 수출시장간 시황 변화가 3~5개월의 시차가 있음을 알게 돼 초기 시황대응에 이러한 매체들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러던 중 1974년 처음으로 브라질행 수송선에 후판 선적이 이뤄지면서, 이에 고무되어 이듬해 서둘러 상파울루사무소를 개설한 것도 이 때의 시장정보 수집 및 분석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곧 세계 5대 강국이 된다는 장밋빛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브라질에서 포스코의 후판을 사갔으니 앞으로 더 큰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이 앞섰던 것이다. 당시까지 포스코의 해외사무소는 도쿄·뉴욕·뒤셀도르프 3곳 밖에 없었다. 1975년 들어 싱가포르와 상파울루 사무소가 추가되었다.
“갑작스럽게 상파울루사무소장 명령을 받고 11월 단신부임으로 현지에 도착해 보니 브라질은 포스코 제품이 발을 붙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브라질에는 CSN, 고지파(Cosipa), 우지미나스(Usiminas) 등 3개 제철소가 한창 건설되고 있었어요. 이듬해인 1976년에 3개 제철소가 모두 준공됐는데, 소당 300만 톤 정도의 캐파(capacity)였으므로 브라질도 바로 그해에 수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74년에 우리 후판을 사간 것은 갑작스런 조선용 후판 수요의 증가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국제 정보에 어두웠는지를 잘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포스코는 그동안 인도와 호주산 철광석을 사용해 왔는데, 마침 그때 고(故) 최주선 원료담당 이사가 브라질을 방문해 브라질 국영 철광석 수출회사인 CVRD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상파울루사무소의 기능은 자연스레 원료 구매가 주업무로 되어갔다.
“혼자 사무소를 지키다가 1년 뒤 김현식 씨가 부임하면서 2인 사무소로 운영했습니다. 브라질로 나가기 전 박태준 사장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6개월 내로 포르투갈어를 하는 직원을 보내주겠다’고 하셨어요. 이후 채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978년 귀국할 때까지 그 직원은 오지 않았는데, 귀국해 보니 판매부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홍주영이라는 직원이었는데 판매부에서도 요긴하게 쓸 데가 있었기에 붙잡아 두었겠지.”
그는 2년 4개월의 브라질 체류기간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날의 세상은 정보가 실시간 국경을 넘나들고 세상의 온갖 일들이 전파에 실려 있어 너나없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현지에 가보면 문화충격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남미 면적의 거의 절반을 브라질이 차지하고 있고 포르투갈어가 공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스페인어권이지요. 두 언어 사이의 혈연관계는 2.5촌쯤 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2년여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나는 그들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바쁜 게 없고 낙천적이며, 내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호 비(非)간섭주의’랄까요. 그러니 싸울 일이 없겠지요. 당시 나는 본사 보고를 텔렉스나 우편으로 했는데, 우체국에 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면 ‘5시가 되었으니 오늘 근무가 끝났다’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책상 정리를 하는 겁니다. 세상에는 온갖 문화와 관행이 존재합니다. 그걸 인정해야 세계시민이 되는 거예요. 말은 쉽지만 막상 겪어보면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국제적인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세상이기에 참고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1978년 그는 판매관리부 판매계획과장으로 귀국했다. 이후 1983년까지 판매1부 판매1과장, 판매2부 수출3과장, 수출부 냉연수출과장을 거쳤다. 냉연수출과장 당시 1냉연공장이 가동되면서 냉연제품을 수출했는데, 클레임 처리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대표적인 냉연제품인 아연도금강판과 석도원판(BP; Black Plate)을 수출하면 운송과정에서 100% 화이트 러스트(white rust) 아니면 블랙 스테인(black stain)이 발생했다. 해송으로 미국이나 동남아로 수출했는데, 항로가 열대 해양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온도 차에 따른 이슬맺힘에 의해 흰 반점이나 검은 반점이 발생한 것이었다.
“문제는 제품 포장이었는데, 냉연제품은 6~7단계로 포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포장에 숨은 노하우가 있었어요. 당시 BP를 처음 인도로 수출했는데, 상담을 하려고 현지로 출장을 갔습니다. 거기서 일본 제품을 해체해가면서 포장 순서를 확인하고, 포장 재료를 전부 가져와서 제철소에 넘겼습니다. 제품이 인도에 하역되면 다시 철송(鐵送)으로 일주일을 가는데, 일본 제품은 우기에 1주일 내내 비를 맞고 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제철소에서 내가 넘긴 샘플과 동급의 포장 재료와 포장 순서로 시험 포장하여 일주일 동안 물을 뿌려가며 시험을 하고, 바닷물에 깊이 담가보기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결국 그 방법을 찾아내 문제를 해결했어요. 1년쯤 뒤 고 고준식 사장께서 인도에서 국제회의에 참석하셨는데, 거기서 인도 SAIL(우리나라 조달청 같은 철강수입 독점 정부기관)의 총재를 만나셨답니다. 그 총재로부터 ‘일본 제품에 비해도 전혀 손색 없는 훌륭한 제품을 공급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전사 운영위원회 석상에서 제철소와 관련부서를 치하하셨는데, 그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해외 마케팅 업무 수행 당시, 미국 보호무역주의로 늘 긴장 상태
한결같이 자국 철강재 애용하던 미국·일본 국민성에 부러움 느껴
1986년부터 1993년 임원으로 승진하기까지 수출1, 2부장을 거치면서 그가 가장 고심했던 것이 미국과의 통상마찰이었다. 미 상무부는 위기에 처한 미국 철강업을 보호하기 위해 철강수출자율규제(VRA), 발동가격제(TPM), 상계관세, 슈퍼301조 등 이중삼중의 규제 조치를 잇달아 취하고 있었다. 미국 철강업은 경제적으로는 끌어안고 있을 수도 없고 정책적으로는 버릴 수도 없는, 미국 정부의 골칫거리 중 골칫거리였다. 그러한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에스스틸(US Steel)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스스로 ‘우리가 미국’이라고 할 만큼 미국의 상징적인 기업이었지만 이제는 계륵(鷄肋)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미국 정부는 수출국이 특정 수출산업에 장려금이나 보조금을 지급하여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일 경우, 보조금액에 해당하는 만큼의 관세를 부과하는 상계관세, 일정 수준 이하의 가격으로 수입되는 철강제품에 대해 자동적으로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발동가격제, 교역대상국에 대해 차별적인 보복을 가능하도록 한 슈퍼301조 등을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었어요. 우리로서는 UPI 등을 통한 우회 수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통한 맞대응 등으로 늘 긴장 상태에 있어야 했습니다. ‘포스코는 덤핑으로 국제 철강시장을 교란하는 기업’이라는 오명은 피해야 한다는 최고경영층의 뜻을 받들어 전 관련부서가 한마음으로 적극 대처함으로써 통상마찰의 파고를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러한 규제와 규제 폐지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보여준 GM의 태도였다고 엄 전 상무이사는 힘주어 말했다. GM은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이므로, 자기들은 가격에 관계없이 자국산 철강재를 써야 한다는 것이 회사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강국 미국민의 시민의식과 사명감, 자부심이 묻어나는 대목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도 5대 제철소가 세계 최고의 품질과 경쟁력으로 일본 국내는 물론 국제 철강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철강 수요가는 모두 일본 철강메이커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포스코 제품은 지금과는 달리 품질과 규격 면에서 수요가의 요구를 100%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품질향상에 힘쓴 제철소의 노력과 시장 틈새를 파고드는 마케팅 활동의 성과로 닛산·혼다 등 대부분의 일본 자동차 메이커와 자동차 본체 소재 직거래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토요타만은 본체 소재 직거래 계약을 못했는데, 그때도 그들로부터 GM과 같은 말을 들어야 했어요. 일본을 대표하는 토요타는 자국산 철강재를 써야한다는 것을 불문율로 지키고 있다는 거야. 지금은 미국·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들도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있지만, 아무튼 매우 부러운 국민 의식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체 임직원들의 의식 수준이 이 정도였다면 우리도 진작 선진국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최고 경영층에서는 일본 자동차 메이커에 대한 공급 실적을 품질·납기 등과 함께 회사의 경쟁력 지표 중의 하나로 판단하고 수출부를 독려했다. 제철소를 포함한 관련부서들이 협조해 작은 것부터 개선해 나갔고, 수출부는 수요가의 품질 요구사항, 시장에서의 니즈 변화, 마켓 트렌드, 경쟁사의 품질 동향, 정책방향 등을 정확히 파악해 생산부서에 피드백했다.
당시의 사내외 규범이나 인식에서 수출부가 가장 대처하기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는 경쟁사들의 품질 덤핑 또는 규격·치수 덤핑이라 불렸던 일종의 게릴라 전법이었다. 그러니까 계약서보다 좋은 품질, 비싼 규격과 치수의 제품을 거래 쌍방 외에는 비밀에 붙인 채 은밀히 공급하는 일종의 불황 대응전략이었는데, 일본 철강업체들은 사기업인데다 오랜 경험 누적으로 시행이 비교적 쉬웠으나 포스코로서는 이런 시도가 불가능했다.
“해외 주요 수출지역이나 향후 유망지역에 가보면 유럽과 일본의 밀(mill)이나 종합상사에는 10~20년 이상 체류한 장기 주재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 지역에 오래 근무하면서 수요가는 물론이고 정부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으면서 자국과 자사에 유용한 정보를 획득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어요. 이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주재원 교체 시에도 선·후임자가 3~6개월을 같이 근무하면서 공적인 것을 물론 사적인 부분까지 세세하게 인수인계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로서는 매우 부러운 운영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는 1995년 연말 포스코 미주법인인 포스코아메리카(POSAM) 사장으로 나가 3년 정도 근무하는 것으로 포스코 생활 27년을 마쳤다. 당시 POSAM의 주된 업무는 원료 관련과 UPI에 핫코일을 공급하는 일이었지만 이후 뉴욕·워싱턴·로스앤젤레스·휴스턴 4개 사무소를 흡수하면서 매월 그들에게 줄 월급을 마련하는 일이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 마땅한 수익사업이 없는 POSAM이 포스코로부터 월급 줄 돈을 받기 위해서는 증자를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증자라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포스코의 UPI 투자는 직접 투자가 아닌 POSAM을 통한 투자였기 때문에 UPI로부터 배당을 받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1996·1997년 2년 연속으로 미국 철강경기가 활황을 보이면서 UPI가 돈을 상당히 벌었습니다. 유에스스틸에서는 증자를 하거나 사내 유보금으로 처리하려 했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배당을 요구해 2년 동안 200만 달러씩 배당을 받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의견 부딪히는 상사와의 문제는 ‘진정성’으로 해결하라
진심어린 설득으로 꾸준히 다가가면 두터운 신뢰 쌓을 수 있어
이야기가 마무리 단계로 이어지면서 그는 수출부장 때의 일을 떠올렸다. 수출가격은 지역상황에 따라 결정되는데, 지역별로 크게는 톤당 300달러까지 차이가 났다. 지역상황이란 경쟁업체 동향 등 오랜 수출업무의 경험에서 얻은 수많은 팩트와 판매 감각으로 판단하는 것이지만, 항상 유동적이고 순간적인 변화에도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때 수출 경험이 전혀 없는 분이 판매담당 부사장으로 오셨는데, 지역별 수출가를 결정하는 공식을 만들라고 했어요. 그걸 만들 수 있으면 왜 그때까지 안 만들고 있었겠어요. 그래서 그럴 수 없는 까닭을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인 겁니다. 급기야 당일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돌아가신 모 재벌 회장의 경영철학을 인용했어요. ‘용인불의 의인불용(用人不疑 擬人不用)’. 저와 우리 직원이 못 미더우시면 사람을 바꾸세요, 하면서 다시 정성을 다해 설명을 드린 결과 해결된 일이 있었습니다. 상사(上司)와 의견이 달라도 내가 옳다고 판단될 경우, 진정성 있는 설득으로 꾸준히 다가가면 당장엔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으나, 나중에 사실이 증명되면 오히려 신뢰가 두터워짐은 물론 그 뒤로는 나의 강력한 지원군이 되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김만제 회장 취임 이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김 회장이 박문수 당시 내수담당 임원을 찾았으나 마침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엄 전 상무이사가 회장실에 올라갔다. 김 회장은 “삼성중공업에 후판 50만 톤을 빨리 공급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이 지시를 당시 내수판매 담당인 이천석 부장에게 전했다. 이천석 부장이 대답했다. “후판 이거 우리 것 아닙니다. 입도선매(立稻先賣)된 벼를 수확기까지 우리 논에서 키우고 있는 겁니다. 분기 공급량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천석 부장의 대답이 정확합니다. 분기별·수요가별 공급 물량은 사전계약에 의거해 결정되고 나서 생산에 들어가는 거지요. 수요가별 물량 결정은 포스코, 상공부 제철과, 조선협회, 철강협회가 한 자리에 모여 결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시황의 대활황(大活況)으로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수입가격과 당사 공급가격 사이에 톤당 약 100달러의 괴리가 있었으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꼭 주려면 제철소에서 생산량을 늘리는 수 밖에 없는데, 당시 이미 최대 생산 가동 중이었으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공급 부족 시에는 각 정부기관과 국회의원을 통한 청탁 압력이 심했습니다. 일일이 병풍식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설명을 하고 무마시켰으나,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을 이해시키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의 경제발전, 산업발전은 포스코를 빼고는 설명될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조선, 자동차, 건설 등은 양질의 철강재를 안정적인 가격으로 공급해온 포스코에 의해 경쟁력을 확보한 대표적인 산업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철강산업의 경쟁력은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후배들이 잊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대한 멀리 보고 넓게 생각하기를 바란다면서 만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재욱 <시인·작가>
▶ 등산을 취미로 즐겼다는 엄하용 전 상무이사(왼쪽)는 재직 당시 서울사무소 산악회장을 맡았었다고 회고했다. 사진은 1990년경, 서울사무소와 포항제철소 산악회 직원들이 계룡산 동반산행에 나서 기념품을 교환하고 있는 모습. 엄 전 상무이사의 오른쪽은 포스코 물류개선반장(부장)을 역임하고 전남드래곤즈 사장을 지낸 박성주 씨다. |
▶ 엄하용 전 상무이사(왼쪽)가 수출2부장으로 재직하던 1990년 6월 1일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스틸의 소토로(Soetoro) 사장과 슬래브 장기공급 계약을 체결한 후 악수하고 있다. |
▶ 엄하용 전 상무이사(앞줄 왼쪽 두 번째)가 1990년대 중반 광양제철소를 방문한 미국 유에스스틸(US Steel) 빌헬름 사장(앞줄 왼쪽 네 번째)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