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 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멋과 풍류를 잃지 않았고, 로맨티시스트로서의 면모를 견지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950년대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을 거쳐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가내공업 수준의 공장시설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이 당시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동·서·남해안 10여 도시 답사 후 제철소 입지로 ‘포항’ 건의
– 대일청구권자금 협상 주도적 참여··· 종합제철 건설자금 마련
– 최빈국에서 세계 철강대국으로 성장시킨 포스코 임직원께 감사
대한민국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 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멋과 풍류를 잃지 않았고, 로맨티시스트로서의 면모를 견지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950년대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렸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을 거쳐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가내공업 수준의 공장시설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이 당시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시중에서 파는 칫솔에 가루치약을 얹어 이를 닦으면 칫솔모가 빠져 입안에 가득했고, 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형편이었어요. 누구의 잘못이랄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그냥 우리에게 내려진 역사의 저주라 여기고 모두들 체념에 빠져 있었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궐기한 학생들의 피의 대가로 민주당 정부가 출범했지만, 사회적 혼란은 극에 달했고 심지어는 구두닦이들까지 시위를 벌이는 사회상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군부가 나선 거예요.”
제1차 경제개발 계획에서 ‘철강업’을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최우선 사업으로 선정하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우선 밥을 굶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 아래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5·16 이듬해인 1962년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87달러의 세계 최빈국이었고, 국가 세입의 절반 이상을 미국의 원조와 중앙은행 차입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민의 72%가 농어촌 인구였는데, 이른바 보릿고개로 불린 춘궁기(春窮期)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하는 절량(絶糧) 농가가 10%에 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식량 증산을 위해 비료공장을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이 공업화의 기반이 되는 종합제철공장 건설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침공의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이른바 남농북공(南農北工)을 펼친 나머지 철강, 비철금속, 발전소 등 중화학공업 시설의 90% 이상을 북쪽에 편중해서 건설했기 때문에 남쪽에는 공장다운 공장이 없었습니다. 남쪽에는 삼척의 삼화제철과 인천의 대한중공업이 있었지만, 이것마저 6·25 전쟁 중에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지요. 자유당 정부는 휴전협정 이후 철강업 재건 계획을 완성하고 파괴된 설비의 보수와 증설을 통해 1956년 부분 조업에 들어갔지만, 이걸로는 어림도 없었어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할 당시 국내 조강 총 수요는 30만 톤이었는데, 총 생산량은 15만 톤에 불과했어. 그래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철강사업을 제1차 계획의 중점사업으로 선정한 겁니다.”
그러나 1964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정, 보완 과정에서 종합제철 사업은 제외되고 말았다. 제1차 계획 수립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농업과 공업을 함께 발전시키는 농공병진(農工竝進) 정책을 선택했지만, 계획 추진 후 1년이 지나면서 농촌의 자력갱생(自力更生) 기반이 너무 취약해 부득이 수출 산업을 육성하여 우선 농촌을 발전시키는 전략으로의 수정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962년 6월 단행한 화폐개혁을 통한 내자 조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흉작으로 인한 양곡 도입이 증가하면서 여건이 변화한 것이었어. 게다가 민정이양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거나 유보되면서 정부 예산 축소가 불가피했어요. 제철사업 추진에 소요되는 외자 도입을 위해 정부와 민간 교섭단이 동분서주했으나 이 또한 성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양국 간의 회담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하는 수 없이 종합제철 사업은 제2차 5개년 계획으로 넘겨 추진하기로 한 거였어요.”
김 전 총리는 제철소 입지 선정을 위해 1962년 11월 내한한 미국 철강회사 관계자의 증언을 유심히 듣고, 국내 기술진의 연구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하는 한편, 1964년 9월에는 미국을 방문해 피츠버그, 켄사스 등지의 철강회사를 시찰하면서 제철공장 입지 조건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종합제철소는 제선, 제강, 압연 등 일관공정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데, 철광석과 원료탄의 수입, 제품의 수출을 위해서는 대형 화물선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수심(水深)이 깊은 임해지역이어야 하며 야적장과 제품 보관 창고 등 배후단지 조성이 가능하고 도로, 철도 등 기존의 교통망과도 연계되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조건을 숙지하고 있었다.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께서 피츠버그의 철강회사를 시찰한 소감을 피력하시면서, 이제 우리도 종합제철 공장을 건설해야 할 텐데 어디가 입지로 적합한지 살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해 8월 3주 동안 동해안의 삼척, 묵호, 포항, 울산, 남해안의 부산, 마산, 여수, 서해안의 목포, 군산, 장항, 비인 등지를 산업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답사했어요. 11월 20일 오후 청와대에 갔더니 박 대통령께서 바람이나 쐬러 함께 나가보자고 해서 박 대통령을 운전석 옆자리에 모시고 광나루 근처를 드라이브하던 중에 ‘제철공장을 어디에 건설했으면 좋겠어’ 하고 물으시는 거야.”
김 전 총리는 여러 곳을 답사해본 결과 서해안과 남해안은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기 때문에 역시 동해안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울산은 이미 정유, 비료, 섬유, 자동차, 조선 등이 건설되고 있거나 예정되어 있으니 좀 떨어진 포항이 적지로 생각된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보긴 제대로 본 것 같구먼’ 하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어요. 박 대통령께서도 제철소 입지 대상 후보 지역을 두고 어느 정도 검토를 마친 것으로 생각되었지. 1967년 6월 정부가 포항을 종합제철 입지로 결정할 당시 언론이나 정가에서는 내가 충청도와 인연이 있으니까 충남 비인 지구를 제철공장 부지로 적극 밀고 있다는 설을 흘리기도 했는데, 전혀 사실무근이었어요.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추측이 만들어낸 낭설이었습니다.”
포철 건설 종잣돈 마련 위해 기업인으로 구성된 외자도입 사절단 꾸려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내 대기업 사주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제철소 건설 추진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대기업 사주 11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그 당시 삼성의 이병철 사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을 찾아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최우선 과제가 경제 건설인데, 실업인들을 모두 구속하면 누구와 손을 잡고 경제를 건설하느냐며 경제인들을 석방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때 한국에 와 있던 재일 거류민단 권일 단장을 만나 일본에 들어가거든 이병철 사장을 만나 내가 책임질 테니 귀국하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1961년 6월 26일 귀국한 이병철 사장을 직접 만나 경제 건설을 위해 앞장서줄 것을 당부하고 구속 경제인 전원을 석방할 테니 일본의 경단련 같은 경제인 협회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지요. 이후 6월 2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경제인 전원을 석방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를 창립했습니다. 이병철 사장이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지요.”
한국경제인협회는 수차례 국가재건최고회의 관계부처와 협의한 후 미주반, 구주(유럽)반 두 팀으로 나누어 제1차 외자도입 사절단을 구성해 출국했다. 김 전 총리는 출국에 앞서 이들을 외교구락부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어 격려하는 한편, 미국과 서독 대사를 만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에게 기대한 가장 요긴한 것이 바로 제철소 건설 자금이었다. 1962년 2월 초 출국한 제2차 사절단은 아예 종합제철팀, 비료·화학팀이라는 명찰을 달고 나갔다.
“정부는 이들의 해외활동을 다각도로 지원하는 한편, 정부 차원에서도 서독, 미국, 일본 등과 여러 가지 경제협력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1962년 10월 31일 나는 미국을 방문해서 밴플리트 장군의 안내로 코퍼스(Koppers), 블로녹스(Blaw-knox),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의 사장을 면담했고 다음 달 26일에는 3사의 중역을 한국으로 초청해 만찬회동을 하면서 협조를 부탁했는데, 1966년 12월 6일 KISA가 발족되고 코퍼스가 주도회사가 된 씨앗이 그때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요. 일본과도 많은 접촉이 이루어졌는데,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 외상과 4시간의 담화를 이어간 끝에 ‘유상 3억 달러, 무상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알파’라는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된 것이 11월 12일 오후였습니다.”
도쿄에서 한·일 수교협정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또 2년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1965년 6월 23일이었지만, 대일청구권자금 협정 금액은 ‘김-오히라 메모’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1억 달러+알파’로 되어 있던 ‘알파’가 2억 달러로 명시되어 총액이 8억 달러로 확정된 것이었다.
한일회담 성사시키고자 해외 각지 동분서주··· 대일청구권 자금 협상 참여
“대일청구권자금 협상 과정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이었고 나는 온갖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밝힌 바 있으므로 아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알 것으로 생각해요. 그 8억 달러 중의 1억 3000만 달러가 포철 건설자금으로 쓰였던 거지. 박 대통령께서는 협상을 시작하면서부터 이 돈으로 제철소를 지어야 한다고 했어. 8억 달러. 지금 돈으로 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데 작년에 한 일간지에 나의 증언록이 연재되었는데, 기자들이 국내 물가상승률, 정부 예산, 국내 총생산 증가율 등을 기준으로 환산해서 내놓은 1965년 당시 8억 달러의 현재 가치가 적게는 7조 7900억 원, 많게는 386조 원이 된다는 거야. 모 대학 경제학 교수는 ‘실제 가치는 그 중간쯤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라면서 ‘액수보다는 이것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더군. 그런데 이 돈의 용처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나와 오히라 외상의 4시간의 마라톤 회의에서는 청구권 자금의 총 규모, 상환 방법 등의 논의는 있었으나 자금의 용도에 대해서는 협의한 바가 없습니다.”
103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 1기 설비가 준공되기 6개월 전인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추진을 천명하고 1980년 초까지 국내 철강생산 능력을 1000만 톤 규모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5월 들어 정부는 경제기획원 내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추진위는 ‘포항제철은 1980년 12월까지 연산 700만 톤 규모로 확장하고, 1976년부터 1980년 말까지 조강연산 500만 톤 규모의 제2종합제철을 낙동강 하류에 건설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추진위가 계획한 제2종합제철의 최종 규모는 연산 1000만 톤이었다.
“정부는 1973년 11월 9일 제2종합제철 사장에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임명하고 내외자 10억 4000만 달러를 투입하여 4년간의 공사를 거쳐 500만 톤 규모의 공장을 완공하고 2차로 1000만 톤까지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그해 9월 24일에는 상호를 ‘한국종합제철주식회사’로 확정하고 2대 사장에 태완선 전 부총리를 임명했는데, 태 사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을 방문해 유에스스틸(US Steel)과 한·미 간 80:20의 지분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키로 합의했어요.”
그러나 1974년에 일어난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국내 경기침체와 국제 철강시장 및 금융시장의 불황으로 제2제철 건설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에 따라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관련부처 장·차관, 태완선 한국제철 사장, 고준식 포항제철 부사장을 참석시킨 가운데 제2제철 관련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그 회의에서 3개 항이 결정되었어. 첫째, 포항제철 제3기 확장에 매진한다. 둘째, 제2제철 건설은 포항제철 550만 톤 체제 완성 후인 1978년 이후에 추진하되, 이를 포항제철의 제2공장으로 건설하며, 그때까지 유에스스틸과의 합작을 유보한다. 셋째, 한국종합제철은 해산하며 포항제철이 흡수합병한다. 이렇게 3개 항이었지. 닷새 후인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한 제2차 대책회의에서 1차 회의 결정사항을 최종 확인했어요. 다음 달에 열린 포항제철 주주총회에서 한국종합제철의 흡수합병을 결의하고 제2제철은 1978년 이후 포항제철의 제2공장으로 건설키로 한 거야. 그 뒤 내가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뒤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고 입지 선정 문제로 우여곡절을 거쳐 포항제철 제2공장으로 광양제철소가 건설된 거지.”
포항제철 지속확장 열정적으로 주장하던 박태준 사장 모습, 매우 인상적
김 전 총리는 포항제철소 건설과 조업현장을 모두 4차례 방문했다. 국무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1972년 2월 23일 이낙선 상공부장관과, 이병회 무임소장관을 대동하고 영남지역 공업단지 시찰에 나서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연합철강, 부산 항만시설 등을 돌아본 후 울산으로 옮겨 석유화학단지, 한국비료, 현대조선 등을 시찰하고 25일 오전 포항제철 건설현장에 도착했다.
“그때 박태준 사장의 안내로 건설 중인 분괴공장 등을 돌아보고 회의실에서 공사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후 ‘製鐵富國(제철부국)’이란 휘호를 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1962년 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발표할 당시 최우선으로 계획했던 사업이라 다른 어느 산업시설보다 감동적이었어요. 특히 단정한 제복 차림에 헬멧을 쓰고 현장 설명에 열을 올리던 박태준 사장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1기 설비 준공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기어이 해냈다’고 하면서 총리도 한번 내려가 보라고 했다. 다음 날 총리실에서 포철 준공식 참석차 내한한 일본 해외협력기금의 오기다 사부로(大來佐武郎) 총재를 면담하고 포항제철 건설에 협력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어 6일에는 이낙선 상공부장관, 장예준 건설부장관, 김용환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대동하고 포항제철에 도착해 박태준 사장의 안내로 공장을 둘러보고 가동현황 보고를 받았다.
“나는 박 사장에게 6월 중순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포항제철 2기 사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사실을 설명했는데, 박 사장은 2기 뿐만 아니라 3, 4기 확장사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설명하더군.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다음은 1990년 초 3당 합당이 이루어진 뒤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의 초청으로 김영삼 당대표, 박준규 국회의장, 김재순 전 국회의장, 윤길중·유학성 고문 등과 함께 포항제철을 시찰했는데,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공장시설과 규모에 감탄과 찬사를 보냈어요. 그런데 나는 그에 앞서 지난 날 포항제철 건설의 종잣돈이 걸린 한일회담 성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가 갖은 비난과 수모를 당하고 해외를 떠돌아야 했던 과거사를 회상하면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 창립자이자 최고의 공로자
김 전 총리는 종합제철 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철학과 집념이 이룩한 상징적인 사업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포항제철의 창업자이자 최고의 공로자라는 것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과 국민적 성원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포스코를 있게 한 창사 1등 공신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자금도 경험도 기술도 없이 오직 의욕만으로 제철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끝내 명예롭지 못하게 퇴진한 장기영, 박충훈 부총리 두 분, 뒤를 이어 제철사업의 성공을 위해 매진한 김학렬 부총리의 공로도 포철 역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었으면 한다고 했다.
“박태준 회장은 육사 6기생으로 나보다 7개월 앞서 임관했는데, 군 복무 시에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습니다. 5·16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배려로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최고위원을 역임했지요. 민정 이양을 앞두고 5·16에 참여한 주체들의 원대 복귀 및 민정 불참론에 동조하다가 예편한 후,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포항제철 사장 및 회장으로 회사 경영을 25년 동안 맡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이 사기업이 아닌 국영기업 경영을 이렇게 오랫동안 맡은 예가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이 그가 쌓은 업적의 바탕이 된 셈이지. 1980년 초 5공 정권 하에서 정계에 입문했고 1990년 3당 합당 후 민자당과 자민련 시대에 함께 정치를 하면서 내 뒤를 이어 자민련 총재와 국무총리까지 역임했죠. 기업 경영과는 달리 소통과 타협이 중시되는 정치권에서 만년에 시련을 겪기도 했어요.”
포스코 창립 50주년 감회 남달라··· 오늘날 성공에 숨은 공신들 기억해주길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김 전 총리는 포스코 창립 50년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느끼는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최우선 사업으로 종합제철 사업을 선정했으나 이를 추진할 돈이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민간 외자 유치단을 편성, 미국·유럽·일본 등지를 동분서주했으나 사업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 차관 상환 능력에 대한 의구심, 국내 철강 수요 등의 이유로 외면당하면서 7~8년의 세월을 허송했던 기억의 편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제철소, 그러니까 지금의 광양제철소 건설 계획까지 수립하시고 타계하셨습니다. 이후 포스코는 포항 4기 확장사업과 광양제철소 건설 사업을 성공시켰죠. 1992년 연산 2100만 톤의 생산체제를 갖추어 우리나라를 세계 3위권의 철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박 대통령의 꿈을 현실화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민간기업으로 전환되었지만 포스코는 근원적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겪은 한민족의 애환과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철학이 담긴 민족사적 기업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립 반세기를 맞아 제철보국의 창업정신을 이어받은 포스코가 창의와 혁신의 기업문화를 선도하고, 명실상부한 국민유산 1호 기업으로 영속하기를 당부하면서 포스코의 무궁한 발전을 희원(希願)합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1972년 2월 5일 김종필 총리가 박태준 사장의 안내로 포항제철소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있다(위). 김 총리는 이날 포항제철소 방문 기념으로 ‘製鐵富國(제철부국)’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김 전 총리의 휘호 ‘제철부국’은 현재 포스코역사관에 보관되어 있다. |
▶ 김종필 전 총리는 포항제철소 건설과 조업현장을 모두 4차례 방문했다. 1977년 1제강공장 화재사고 당시 포항제철소를 방문한 김종필 국회의원이 박태준 사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