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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76] 이선종 前 상무이사, 국내 최초로 공장자동화 개념 도입··· 첨단 IT기술의 제철소 구현

[남기고싶은이야기 76] 이선종 前 상무이사, 국내 최초로 공장자동화 개념 도입··· 첨단 IT기술의 제철소 구현

2016/10/28

260만 톤 체제의 포항 2기 설비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75년 초여름, 정봉화 영일기업 초대회장은 포항제철 건설 현장에는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서울 집을 나서 포항으로 향했다. 벌써 몇 년째 집에 돈 한 푼 가져다 준 일이 없었던 그로서는, 어디서 났는지 부인이 손에 쥐어준 지폐 몇 장을 자존심과 함께 호주머니에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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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고로-제강-압연라인 잇는 제철소 전 공장 자동화 마스터플랜 수립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공장자동화 실현 기술력 확보에 전력투구
-미국 UPI 판파단(板破斷) 등 설비문제 발생할 때마다 해결사로 나서

 

이선종 전 상무이사 주요 경력  1944 서울 출생  1971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1971 포스코 입사 일반설비부 수배전건설반, 설비전산반장, 전산제어부 제어기술실장,  계측제어부장, 포항정비본부장  1999 포철기연 사장, 에스앤지 사장  2009 동양E&C 사장  2011 동양종합건설 부회장  2016 사회복지법인 기쁨의복재재단 이사장  상훈 1996 산업포장

70여 명의 포스코 공채 3기생들은 1971년 3월 1일 입사와 동시에 포항에서 독신료 생활을 하면서 도입교육에 들어갔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천둥벌거숭이에 진배없었던 이들에게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사명의식이 주입되고 제철 프로세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선종 전 상무이사도 공채 3기생의 일원으로 교육에 임했다.

“황량한 모래벌판 위에 고로, 제강, 열연 등의 공장 표시 말뚝만 서 있었고, 건물이래야 각부서 서브센터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가건물이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앞으로 세워질 공장 구성과 조업 개요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3개월간의 수습 교육이 끝난 뒤 일반설비부 수배전건설반에 배치되었습니다. 전기공학 전공이었으니 거기로 보냈겠죠. 154kV 수전변전소 건설이 주 업무였지만, 착공도 안 된 상태라 우선 각 공사 현장에 공사용 전력을 공급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삽으로 땅을 파고 전주를 심는 막노동꾼 일이었지. 요즘은 전부 기계로 하는 일이라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땐 로프로 전주 끝을 묶어 끌어당기고, 어깨로 받쳐서 수직을 맞추는 식이었어요.”

그해 10월 들어 당시 기술이사였던 김철우 박사는 제철소의 생산과 품질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자동화 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그 분야의 인력 양성을 강조했다. 김 박사는 면접을 통해 자동화 시스템 연수생을 뽑았다. 이덕표, 이건우, 이선종 3명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해외 기술연수를 다녀왔지만, 거의가 연수기간이 3개월 전후였어. 그런데 우리 세 사람은 1년간 해외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연수처는 일본의 야마다케 하니웰이라는 세계적인 자동제어설비 메이커였는데, 미국계 회사였어요. 그때만 해도 계장 시스템이니 프로세스 컴퓨터니 하는 용어조차 생소했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메이커 연수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기술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이 장기간의 연수를 통해 비로소 제철소 각 공장의 생산과 품질에 직결되는 수많은 계측기와 제어 시스템에 대한 원리와 이론, 실무 등을 습득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회사로부터 받은 특혜 연수를 통해 제철소 제어 분야의 전문 기술자가 되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긍지와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해외연수에서 만난 일본 기술자들 보며 큰 자극 받아···

연수기간 동안 학습 매진하며 제철소 제어 기술 지식 습득

“일본 기술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런 수준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아득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아득함이 절망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 1년 동안 공부한 양이 그 이전에 익힌 전체 지식의 양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 사람들의 기술 수준뿐만 아니라 일과 후에도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 나아가 일상생활에서의 질서의식, 정직성 등도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고로에서 제강, 압연으로 이어지는 전 제철소 자동화 ‘마스터플랜’ 작성이었다. 주요 내용은 공장별 계측기기류, 전기계장 시스템, 프로세스 컴퓨터 그리고 상위 시스템인 생산관리 컴퓨터와의 연결 등으로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했다. 노력 끝에 두꺼운 책 한 권으로 완성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철소의 각 공장 자동화 시스템 구축의 토대가 되었다.

“그때 같이 연수에 임했던 두 사람은 일찍 회사를 떠나는 바람에 나 혼자 남아서 자동화 시스템의 선두주자처럼 인식되었는데, 일본 수준에서 보면 하수 중의 하수에 불과했어요. 이후 명실상부한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포항 3, 4기 설비이고, 이전에 건설된 1, 2기 설비는 아날로그 시스템으로 조업하다가 4기 확장 이후에 이루어진 설비신예화를 통해 포항제철소의 완전 자동화가 실현되었습니다.”

포스코는 포항 1, 2기 설비를 성공적으로 준공한 후 대형 고로와 함께 3기 설비계획을 세우고 설비사양을 확정하면서 각 공장에 PLC(Programmable Logic Controller)라는 디지털 제어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PLC는 ‘단위설비 자동 제어기’로서 소형 컴퓨터의 개발에 따라 기존의 아날로그 시스템에서 콤팩트한 디지털 시스템으로 일대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아날로그 시스템은 수많은 릴레이 회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어 패널 수가 많아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디지털 시스템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저비용으로 가능했다. 다만 설비마다 메이커가 달랐기 때문에 고장이 났을 때 원인을 찾고 수정하는 작업, 이른바 트러블슈팅(trouble shooting)이 매우 어려웠다. ‘부분 제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단위설비에 적용하는 제어기이다 보니 한 공장에 30대 정도의 PLC가 설치되었고, 공장마다 메이커가 달라 슈퍼바이저도 각각의 메이커에서 파견되어 왔다. 대표적인 메이커로는 미쓰비시, 지멘스, 야마다케 등이 있었다.

“특히 1냉연공장과 2분괴공장에서 고장으로 인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요즘은 디지털이라는 게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시스템으로서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미처 도입할 생각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포스코가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었어요.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이 시스템에 대한 문의가 쏟아졌고, 급기야 김학기 제철소장께서 ‘PLC가 대체 뭐냐’며 이에 대한 대책을 지시하셨습니다. 당시 나는 제어기술실장으로서 급히 자료를 만들어 먼저 부장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점차 전 실무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전 제철소 차원의 대대적인 교육이 이루어졌어요. 이후 실무 담당자의 메이커 연수와 시운전 조정작업 등을 통해 차츰 익숙해져 갔습니다.”

1978년, 공장 전체 제어하는 프로세스 컴퓨터 도입···

신일철로부터 전산화 기술 전수받아 고도의 역량 확보

1978년 3기 설비 확장에 따라 계측설비의 고도화, PLC 시스템의 대량 도입과 함께 공장 전체를 제어하는 프로세스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PLC가 단위설비 제어 시스템이라면, 프로세스 컴퓨터는 공장 전체를 제어하는 시스템이었다. PLC는 전산 메이커가 주도하는 소프트웨어인 반면 프로세스 컴퓨터는 제철소가 주도하는 시스템으로서 제철설비 가동과 조업에 필요한 온갖 노하우가 다 녹아 들어가 있었다. 물론 제작은 전산 전문 메이커가 담당하지만, 메이커는 제철소가 제시한 설계대로 제작만 하고 운용과 소프트웨어 관련 기술은 모두 제철소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포스코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세스 컴퓨터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신일본제철의 전산 기술을 도입했다. 조직도 설비계획본부 소속의 설비자동화반에서 제철소장 산하의 전산제어부로 확대해 이국종, 김신정 초대, 2대 부장을 거쳐 그가 3대 부장을 맡았다.

“신일철로부터 기술 용역을 제공받는 과정은 제어기술의 1인자인 신일철의 이나자키 씨가 주도했는데, 우리의 눈에 그는 가히 ‘가미사마(神樣·신적인 존재)’로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열연공장의 수식 모델, 소프트웨어 설계, 하드웨어 설계, 설비개조 등의 기술을 전수해주었는데, 정말 많이 배웠어요. 이때 같이 참여했던 백기남, 신수철, 고문찬 상무 등이 이후 다른 공장 전산화에 발탁되어 탁월한 업적을 이루고 우수한 후배들을 양성해 냈습니다. 제철소 전체의 생산관리를 관장하는 비즈니스 컴퓨터와의 데이터링크가 기술적으로 확립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리하여 각 공장의 센서로부터 단위설비의 PLC 제어 시스템, 공장제어용 프로세스 컴퓨터로 이어져 공장설비가 최적화되면서 생산성의 극대화, 품질의 고도화, 생산관리의 온라인 리얼타임(On-Line Real Time)화가 달성된 것입니다.”

 

1981년 850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가 종합 준공된 이후 포스코는 최신예 광양제철소 건설에 착수했다. 전산제어부에서는 그동안 양성된 우수한 전산제어 인력을 광양에 투입, 세계 제일의 제철소 건설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포항제철소에서는 ‘오토피아(AUTOPIA) 2000’이라는 자동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물류 자동화, 운전실 통폐합, 시험분석 및 품질관리 자동화, 고온?분진 등 열악한 환경의 무인화, 기존 제어 시스템의 고도화 등을 과감히 추진해 제철소의 경쟁력 향상에 주력했다.

1992년 그는 포항제철소 정비본부장으로 보임되어 전 제철소 설비관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는 국가 경제가 급속한 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산업계는 철강재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포스코는 설비확장 공사의 공기단축과 가동 이후의 설비고장 최소화를 경영관리의 핵심 포인트로 삼고 있었다. 특히 공장 완공 후 설비가 건설팀에서 조업팀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시운전 조정 작업인 커미셔닝(commissioning)이 대단히 중요시되었다. 이 작업은 단위설비의 시운전에서부터 그룹 설비의 연동 테스트, 컴퓨터에 의한 종합 핫런(Hot Run)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시뮬레이션이 필수적이며, 설비를 가장 잘 아는 정비부서의 주관 아래 공사와 조업 부서간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메이커 측에서 도면도 안 넘겨주는, 이른바 ‘노하우’라고 하는 블랙박스가 있는데, 여기서 고장이 나는 경우 매우 난감했어요. 일례로 2열연공장의 두께 제어용 AGC(Automatic Gauge Controller)는 영국의 데이비 사가 공급한 아날로그 시스템이었는데, 잦은 고장과 제어 불량으로 조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습니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술연구소와 전산제어부가 공동으로 자력기술개발팀을 구성해 아날로그 시스템을 디지털 시스템으로 바꿔 적용함으로써 두께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포스코 자력 엔지니어링 기술을 확립했습니다. 당시에는 설비를 중요도에 따라 A, B, C급으로 구분해 관리했는데, 블랙박스처럼 장시간 또는 대형 고장을 일으킬 수 있는 설비는 특A급 설비로 분류해 간부가 직접 관리하는 등 이중, 삼중의 특별 관리 체계를 구축하기도 했어요. 제철소 전체적으로는 설비별로 예방점검 시스템, 과학적인 설비 모니터링 시스템, 마이머신 시스템 등 고도의 설비관리 전산화 시스템을 주축으로 해 운용했습니다.”

제철소 설비관리 도맡았던 정비본부장 시절, 최고의 정비경쟁력 확보

‘소 잃고 외양간 고쳐도 잘만 고치면 성공한 것’이라 생각

어느 시기, 어느 조직인들 고장에 관대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 그때는 국내 철강시장이 포스코 제품 출하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고장에 매우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설비 고장을 일으키면 죄인이 된 심정이었고, 이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는 정비부서 또한 죄인의 심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당시 정비부서에서는 스스로 위수지역(衛戍地域)을 설정해놓고 엄격히 지키면서 ‘즉각 동원 체제’를 가동했습니다. 제철소 어느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정비요원들의 삐삐에 자동으로 불이 켜지도록 되어 있었고, 즉각 출동해야 했으니 개인의 삶이라는 게 없었던 게지요. 그래서 나는 애들이 어떻게 학교를 다니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로서는 0점이었겠죠. 더 넓게 보면 비단 정비부서뿐만 아니라 당시 포스코맨들은 모두 그랬고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100% 투신(投身)의 정신이 하나의 조직문화로 응축되었던 시기였어요. 한 군데서 고장이 나면 그 설비의 복구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파악해서 다른 공장에까지 예방적으로 적용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교량붕괴나 세월호 사건 같은 국가적 재난도 포스코 같았으면 아마 예방했을 겁니다.”

회사의 정비기술 경쟁력은 정비인력 개개인의 능력의 총합이지만, 기술의 오버랩 체제가 확립되면 백업 시스템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시너지 효과가 발현되기 때문에 플러스알파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찾아보면 개선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었다.

“제철소 지하 컬버트(Culvert)에는 케이블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여기에 화재가 나면 해당 설비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전 케이블에 낚싯줄을 걸어두어 화재가 나면 먼저 끊어지도록 했습니다. 낚싯줄이 끊어지면 즉각 유인 운전실이나 전기실로 신호가 가게 해서 사전에 조치할 수 있도록 한 거지요. 지금은 포스코의 정비 능력이 몰라보게 향상되어 도입 당시 신비의 영역으로 인식했던 PLC를 정비요원들이 하드웨어만 사와서 자체 제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니 정말 대단한 거죠. 1995년경으로 생각됩니다. 제어 쪽에 김재복 기성보라는 특출한 인재가 있었는데, 당시 부도 사태로 공중에 붕 떠버린 한보철강을 살펴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회사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1980년대 중반, 포스코와 유에스스틸(US Steel)이 공동출자한 미국의 UPI 냉연공장이 조업 중에 판파단(板破斷)을 자주 일으켰다. 최고경영층은 그에게 UPI의 고질적인 설비사고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렸다.

“모두 10명의 정예요원들이 현장에 도착해 판파단 원인 규명과 개선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인 기술자들이 우리 팀을 무시하여 ‘저 사람들이 무얼 하겠느냐’는 눈빛이었으나 일주일이 지나면서 점차 개선되는 것을 보고 대화 중에 ‘Sir’를 붙이면서 우리의 기술수준을 인정하더군요. 한 달 반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했습니다.”

어느덧 퍼스트 무버 수준으로 도약한 포스코 기술력에 감동···

기본에 충실해 세계 철강기술의 개척자로 우뚝 서기를 기대

그는 현재 철강업의 꽃은 자동차강판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자동차강판의 흠 탐상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데, 표면 흠 탐상기술을 포함한 포스코의 기술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치켜세웠다.

“옛날 우리는 바닥에서부터 배우며 차츰차츰 쫓아가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의 수준에까지는 도달했었습니다. 이제 포스코는 기존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함으로써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팔로워의 눈에는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길도 훤히 보이지만, 퍼스트 무버는 목표도 나아갈 길도 스스로 찾고 개척해야 합니다. 설비도 차츰 노후화되고 세계 경제의 재편으로 경영환경도 악화되는 상황에서 선두주자의 위치는 적잖은 부담을 안겨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초창기의 포스코 정신을 되짚어보면서 기본에 충실한 포스코 고유의 팀워크를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당시 함께 했던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이선종 전 상무이사(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 1994년경 포항제철소는 ‘오토피아(AUTOPIA) 2000’ 이라는 자동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제철소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당시 함께 했던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이선종 전 상무이사(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UPI 냉연공장의 판파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포스코 개선팀과 UPI 기술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두 번째 이선종 전 상무이사의 모습.

▶ UPI 냉연공장의 판파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포스코 개선팀과 UPI 기술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두 번째 이선종 전 상무이사의 모습.

 

990년 계측제어부 발족행사에 참여한 이선종 당시 계측제어부장의 모습(동그라미).

▶ 1990년 계측제어부 발족행사에 참여한 이선종 당시 계측제어부장의 모습(동그라미).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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