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만 톤 체제의 포항 2기 설비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75년 초여름, 정봉화 영일기업 초대회장은 포항제철 건설 현장에는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서울 집을 나서 포항으로 향했다. 벌써 몇 년째 집에 돈 한 푼 가져다 준 일이 없었던 그로서는, 어디서 났는지 부인이 손에 쥐어준 지폐 몇 장을 자존심과 함께 호주머니에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 후 포항행··· 강관파일 재생사업 투신해 성공
– 포스코 철강재 운송 외주파트너사 영일기업 설립하고 초대회장 역임
260만 톤 체제의 포항 2기 설비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75년 초여름, 정봉화 영일기업 초대회장은 포항제철 건설 현장에는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서울 집을 나서 포항으로 향했다. 벌써 몇 년째 집에 돈 한 푼 가져다 준 일이 없었던 그로서는, 어디서 났는지 부인이 손에 쥐어준 지폐 몇 장을 자존심과 함께 호주머니에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하계 훈련 기간에 해병대 병영에 주둔하며 도구해수욕장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은 이후 두 번째로 포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우선 송도의 작은 여인숙에 거처를 정하고, 형산강 다리를 지나 무작정 포항제철소 3문으로 찾아갔다. 그는 무턱대고 경비원에게 다가가 포철을 구경하러 왔으니 잠깐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경비원은 아무나 공장에 들여보낼 수는 없으니 혹시 포철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해서 면회를 신청하고, 허락이 나면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문득 과거 윤필용 장군 보좌관으로 있던 시절, 윤 장군이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 사장에게 ROTC 출신 한 인사의 포항제철 입사를 추천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렵게 그와 연락이 닿아 포철 직원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제철소 건설 현장에 쌓여있던 스틸파일 토막들을 접하고
재생파일 제작 사업 계획을 구상하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건설 현장 한 편에 스틸파일 도막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직원에게 저걸 왜 저렇게 쌓아 두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건설 중인 2제강공장이 완공되면 스크랩 소요량이 크게 늘어나게 되는데, 그때 고철로 녹여 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재홍 사장이 경영하는 동양철관에서 파일 제작 과정을 보았기 때문에 저걸 재생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생 파일은 수평하중에는 약하지만 수직하중에는 별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장 책임자를 찾아 파일 도막들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상부에 보고해 보겠다고 했다. 후일 알게 된 사실인데, 그때 그를 안내해준 현장 책임자는 미남에다 온화한 표정이 인상적인 유상부 전 회장이었다고 정봉화 회장은 회고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계획서를 작성해 당시 건설본부 차장으로 있던 김두하 선배님에게 가져갔습니다. 김두하 차장은 육사 11기 선배로 내가 생도 시절 전기 과목을 강의했던 분이었어요. 선배님은 내가 작성한 계획서를 보고 흐뭇해하셨지만, 다소의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군요. 스틸 파일은 전량 박재홍 사장이 납품하고 있는데, 포철이 재생 파일을 사용하게 되면 박 사장의 납품량이 그만큼 줄어들게 되니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곧장 서울로 올라가 박재홍 사장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박 사장은 양해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김두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적극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재생 파일 제작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송도에 있던 자전거 수리점 주인에게 삼겹살에 소주를 대접하면서 사흘 동안 열심히 용접 기술을 배웠다. 기초 기술을 익힌 다음 보조요원 두 사람을 채용해서 폐파일을 직경별로 구분해 재생 작업에 들어갔다.
“드디어 온갖 고생을 하며 만든 재생 파일을 어렵사리 납품하게 되었어요. 그해 나는 재생 파일 대금으로 거금 3000만 원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내 평생 처음 만져본 이 큰돈은 이후 나의 포항 정착 자금이 되었고, 내가 납품한 재생 파일은 효자 주택단지 건설에 사용되었습니다. 재생 파일 사용으로 나와 포철은 피차 이익을 보았지만, 그 과정에서 박재홍 사장에게 많은 신세를 졌고, 음으로 양으로 유상부 전 회장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박태준 사장의 제안과 배려로
제철소 내 선강지역 컨테이어벨트 낙광 수집 작업을 도맡다
포항제철소 2기 설비 준공이 가까워 지고 있을 무렵, 정봉화 회장은 파일 재생 사업을 붙들고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철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전화를 한 사람은 조말수 비서였다. 조말수 비서는 김해 대저면 사람으로 초등학교 시절에 군 시절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였던 이학봉과 1, 2등을 다툰 동창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 비서는 ‘박태준 사장께서 선강지역(銑鋼地域) 컨베이어벨트 밑에 떨어진 낙광(落鑛)을 수집하는 일을 맡아 보라는 말씀을 주셨다’고 알려 왔다.
“그는 박태준 사장께서 내 의사를 타진해보라고 했다면서, 그 일은 힘든 일이라는 사실까지 덧붙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포철 내에서 하는 일이 없었던 나에 대한 박 사장님의 배려였으며,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어떤 일인지부터 파악하기 위해 포철 현장을 방문했더니, 노무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노닥거리고 있었어요. 내막을 알고 보니 선강지역 낙광 수집 작업은 항운노조와 운수노조가 각각 반반씩 맡아 작업하면서 일보다는 패권 다툼으로 분위기가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수임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곧장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두 노조위원장을 불러 그가 받은 임무를 설명하고 두 노조에게 그가 운영하는 동양기업의 노동조합으로 합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방첩부대 출신으로서 분쟁을 일삼는 두 노조를 해체시킬 것’이라고 겁을 주며 허풍을 쳤다. 작전이 먹혀들었는지 두 노조위원장은 며칠 말미를 달라고 했다. 더 강하게 압박해 들어가자 그들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들은 항운노조, 운수노조를 탈퇴한 뒤 동양기업 노조로 합쳐 금속노조 휘하로 들어갔다. 당시는 외부 세력이 노조를 밀착 지원하던 시절로 노조 탈퇴를 요구하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해 빠르게 해치워야 했다.
“동양기업은 포철과의 계약이 인건비 하나였기 때문에 물량이나 기술비는 없었고, 단순 노무비와 약간의 행정비 정도로 수익성이 전무했습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님께서 특별히 배려해준 일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는 나의 인생 유전(流轉)의 도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낙광 수집 작업을 맡기 전 그는 박태준 사장이 자기가 포항에 와 있는 줄을 모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어떤 라인을 통해 만난다는 것도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알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박태준 사장은 그가 포항에 와서 조그만 사업을 어렵사리 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내가 박태준 회장님을 처음 만나게 된 군 복무 시절, 5·16 군사혁명에서부터 비롯된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과 박정희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투쟁, 그리고 윤필용 장군과 박태준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 등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나의 개인사(個人史)를 좀 말씀드려야겠군요. 나는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18기로 졸업했습니다. 4학년 때는 지휘관 생도로서 사관생도들의 5·16 혁명 지지 행진을 이끌어내기도 했었습니다. 임관 후 윤필용 장군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1973년, 유신헌법을 반대했다 해서 소령으로 강제 예편됐습니다.”
그는 27세의 육군 중위 초급 장교로 광주보병학교에서 후보생 교육지도를 하던 도중 발탁되어 윤필용 방첩부대장의 전속부관이 된 이후 윤 장군이 파월 맹호사단장,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줄곧 따라다니며 보좌관, 비서실장 등을 맡았다.
“내가 박태준 사장을 처음 뵌 것은 1967년 중위 시절, 윤필용 장군의 서신을 들고 명동 YWCA 인근에 있던 대한중석 사장실을 찾아갔을 때였습니다. 그분의 짙은 눈썹과 꽉 다문 입매에서 아주 엄격하고 의지가 강한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위엄 넘치는 사무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힘찬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했는데, 그런 나의 소란스러움에 약간 놀라신 듯 나를 쳐다보시며 ‘무슨 연유로 왔는가?’하고 물으셨어요. 또 군 특유의 구령 같은 목소리로 ‘윤 장군님의 서신을 갖고 왔습니다’ 했더니 반색을 하며 책상 위에 놓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다시 거수경례를 한 뒤 돌아서는데, 박 사장이 그를 불러 세워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그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관등성명을 댔다.
-자네, 윤 장군 잘 모시게.
박 사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혼잣말처럼 ‘윤 장군 전속부관 잘 뽑았네’ 하면서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이것이 박태준 사장과 그의 첫 대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제철소 건설 지시 자필 서한 받아들고
영일만 모래밭에 주저 앉아 목 놓아 운 박태준 사장
1961년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경영을 위한 재원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 정부를 접수하고는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모든 국력을 경제에 집중했다. 대일청구권 교섭의 가능성을 내다보고는 김종필을 투입했고, 당시 국내 유일의 달러박스였던 대한중석에는 박태준을 투입해 외화벌이의 첨병 역할을, 방첩대장에는 윤필용을 배치해 국가 안보의 파수꾼 역할을 맡겼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 대통령은 박태준을 예편시키고 윤필용은 현역에 머물게 했습니다. 본인의 의사를 물어야 했으나 그런 절차는 없었어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던가요. 그건 박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의 전부였기에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1대, 2대 비서실장으로서 언행까지 닮아 있었고, 대통령의 분신 같은 존재였습니다. 박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해온 인물들을 살펴보면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종필, 이후락 이런 사람들이 1급 참모였다면 윤필용, 박태준은 1급 심복이었습니다. 참모와 심복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국내외 정치는 눈부시게 이루어졌다. 월남 파병으로 한반도 내의 미군 철수를 막았고 전투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달러는 외화 소요의 숨통을 틔어주었다. 박 대통령은 외화 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월남 파병, 서독 광부 및 간호사 파견, 중동 지역 건설 인력 파견 등 일련의 외교적 결정이 모두 외화 벌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된 뒤 며칠 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을 대동하고 영일만 모래벌판에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건네주고는 바로 상경했다. 박 대통령은 표정에 결연함만 내비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포항행은 극소수의 근접 경호원만 따랐으므로 경호실 외에는 그 누구도 몰랐다. 봉투 안에는 “이곳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여 국가 경제의 기초가 되게 하길 바란다. 이 지시를 완성할 때까지 어느 누구의 압력이나 청탁도 받지 말라”는 대통령의 자필 서한이 들어 있었다. 3억 달러의 무상자금, 2억 달러의 장기 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의 상업차관으로 협정된 대일청구권자금 내역과 제철소 건설에 이 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박태준 사장은 모래밭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이건 ‘나의 운명이며 거역할 수 없는 국가의 명령이요 시대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즉각 조직 구성에 착수했다.
“포항제철이 창립되기 3년 전의 일로서, 이 사실은 내가 박태준 회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겁니다. 차차 말씀 드리겠지만, 1967년 9월 대한중석이 종합제철 실수요자로 지명되고 개발조사실이 종합제철 산실 역할을 하다가 그해 11월 중석 내에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이후 제철소 입지선정 과정에서 권력 실세들이 자기들의 연고지로 제철소를 가져가기 위해 벌인 유치전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일으킨 ‘불능미수(不能未遂)’였던 겁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의 주변에는 으레 세력 다툼이 일어나듯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주변에도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암투의 ‘암(暗)’자가 암시하듯 그런 음모는 물밑에서 어느 특정인을 겨냥해 서서히 진행되고, 한번 올가미에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1973년 초,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정봉화 소령은 방첩대 요원들에게 연행되어 당시 대공수사실로 사용되었던 서빙고로 끌려갔다. 이곳은 ‘살아 들어가서 죽어 나온다’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연행 당일부터 계급장도 없는, 신상 불명의 건장한 청년들은 그의 계급장과 명찰을 제거하고 군복을 벗긴 채 붕대를 감은 쇠파이프로 무차별적 폭행을 가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전신에 피멍이 들어 몸을 누일 수가 없는 지경이 됐어요. 무릎까지 내려온 피멍이 무릎 뒤쪽 오금에 맺혀 재래식 화장실을 쓸 수가 없었어요. 선 채로 용변을 보고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작성한 거짓 시나리오에 의하면,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장군의 비서실장인 정봉화 소령이 ‘박 대통령이 추진 중인 유신헌법을 윤필용 장군이 반대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권력 다툼이 만들어낸 참화가 명백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윤 장군과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강제 예편당하는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고 먹고 살 수단도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장조카인 박재홍 사장이 나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염치없이 계속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그러던 중 박재홍 사장으로부터 박태준 사장과 포철 관련 이야기를 듣고, 나만 바라보고 사는 가족을 위해 밥벌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975년 포항행을 결심하게 된 겁니다.”
이구택 소장에게 건의하여 제철소 구내운송 ‘육송’으로 전환···
제철소 구내에 철로와 기차 없어지면서 구내 운송비 절반 감축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1년 뒤인 1994년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가 포스코 제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김만제 회장은 윤필용 장군이 대구 방첩부대장으로 있을 때 종종 술자리를 같이하던 친구 사이였다. 정봉화 회장은 당시 윤 장군의 보좌관으로서 더러 김만제 회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김만제 회장은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큰 임무를 부여했다. 포스코의 방만한 구내운송을 통폐합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잡음 없이 신속히 추진하라는 지시에 따라 한진, 동방, 삼일, 통운 등을 포함한 8개사의 구내운송 작업 통합에 들어갔다.
“이들 중 한 업체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동시에 포스코 실무자들의 재촉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저항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빨리 해치우라는 거였지. 나로서는 자금 조달이 급선무였는데, 시중은행 차입은 나의 담보 능력 부족으로 불가해 비싼 이자를 주고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특수장비는 없었고 덤프트럭, 카고트럭 등 일반 건설장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포스코 실무자의 독촉 때문에 기존 회사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전액 주지 않고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빼앗기는 심정도 이해하라’는 포스코 실무자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달라는 대로 주고 빨리 해결하라는 것이었지. 하는 수 없이 고철이 다 된 장비들을 인수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본 손실로 이후 영일기업은 만년 적자 회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김만제 회장은 경제 전문가답게 다른 방법으로 손실을 만회하라는 힌트를 주었다. 정 회장은 수익성이 있는 사업을 찾아보라는 지시로 받아들이고 선진국 제철소 견학에 나섰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의 제철소까지 폭넓게 돌아보면서 배울 점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운반 장비였는데, 선진국 제철소들은 하나같이 안전과 인건비 절감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장비의 대형화와 분리형 운반 차량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한 만큼 받는다는 원칙에 충실했고, 경비 절감을 위해 철송(鐵送)을 육송(陸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귀국해서 곧장 이구택 제철소장에게 견학 결과를 보고하고 자신 있게 분리형, 대형화 장비로 교체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 소장은 매우 신중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기로 결심을 굳혔지만, 은행들은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제2금융권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수소문을 하던 중 분리형 중고 장비 하나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말이 저렴한 가격이지 키루나 180톤 트럭은 당시 돈으로 10억 원을 치러야 구매할 수 있는 거였습니다. 모험을 감행했어요. 두 장비를 수입한 뒤 분리형 자동차는 데몬스트레이션을 통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키루나 장비는 안전성과 180톤 적재 운반의 가능성이 입증되었습니다. 결국 이구택 소장으로 결단으로 제철소 구내에서 철로와 기차가 없어지면서 구내 운송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한번 결심하면 대단한 추진력을 발하는 이구택 전 회장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박태준 회장이 복잡하게 얽힌 국내 정치적 이유 등이 겹쳐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포스코에도 이상한 정치적 기류가 밀어닥쳤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정봉화 회장은 이즈음 가족들과 함께 뉴욕에 간 일이 있었다. 그는 그때 박태준 회장이 뉴욕에서 멀지 않은 뉴저지의 딸네 집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방문이 가능한지 미리 확인했다. 와도 좋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날 약속 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뉴저지로 향했다. 그날 마침 해저 터널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인해 한 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터널을 빠져나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박 회장은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큰길까지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차 문을 열어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집안으로 들어가 우리 네 식구가 절을 올렸더니 매우 흐뭇해하셨어요. 그리고는 ‘자네 귀국하면 여기 찾아온 일로 해서 괴로움을 당할 텐데 괜찮겠나?’ 하시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회장님,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그 무서운 서빙고 호텔에서 충분히 단련된 몸입니다’ 하고 짐짓 너스레를 떨었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리시다가 다시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시는 거였어요.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박 회장님으로부터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영일만 모래벌판에 내려갔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시더군요.”
그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두 어른이 세상을 떠난 지금, 매년 회장님께 보내드렸던 고향 뒷산에서 수확한 대홍감을 냉동실에 넣어두고만 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엔 인생무상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우재욱 <시인·작가>
▶ 정봉화 영일기업 회장은 육군 중위 장교로 광주보병학교에서 후보생 교육지도를 하던 중 윤필용 방첩부대장의 전속부관으로 보임되었다. 1965년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뒤 정봉화 중위(오른쪽)가 윤필용 소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정봉화 영일기업 회장이 1988년 2월, 영일기업 정비고에서 열린 창립 2주년 기념행사 참석해 직원들에게 격려말을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