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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66] 정윤모 전 자금부 차장, 부도위기·자금난 해결사로 동분서주··· 창립초기 회계·재무 기반 다져

[남기고싶은이야기 66] 정윤모 전 자금부 차장, 부도위기·자금난 해결사로 동분서주··· 창립초기 회계·재무 기반 다져

2016/05/09

포항제철소 1기 설비 건설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72년 한때, 정부는 한 달 동안 동안 국고 대외지출을 중단했다. 세수가 부족하여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 제철소 건설에 소요되는 정부 출자 또한 중단되어 포항제철은 진행 중인 모든 공사를 중단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공사대금으로 지급한 어음 결제일도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정윤모 전 자금부 차장(당시 기획관리부 과장)은 급히 재무부 국고과를 찾았다. 그러나 지출 업무가 중단된 국고과는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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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은행 대출 어렵던 시절··· 1기 설비 건설자금 조달업무 수행

– 연관단지 조성비용 5억··· 시중은행으로부터 100% 조달 성공

– 턱없이 부족한 정부 출자금으로 인해 늘 은행재촉에 시달려

 

포항제철소 1기 설비 건설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72년 한때, 정부는 한 달 동안 국고 대외지출을 중단했다. 세수가 부족하여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 제철소 건설에 소요되는 정부 출자 또한 중단되어 포항제철은 진행 중인 모든 공사를 중단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공사대금으로 지급한 어음 결제일도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정윤모 전 자금부 차장(당시 기획관리부 과장)은 급히 재무부 국고과를 찾았다. 그러나 지출 업무가 중단된 국고과는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전 직원이 한국은행 지하 CPX 상황실에 가 있었다.

 

"상황실까지 찾아갔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어요. 온갖 비밀스런 일들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실 출입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다가 식사하러 나오는 재무부 사무관을 붙들고 애원을 했어요. 정부 출자금이 안 나오면 포철은 부도가 난다. 내일 당장 3억 원이 돌아오는데, 정부에서 돈을 안 주면 어떡하느냐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사무관은 담당 국장을 찾아가 포철이 부도가 날 형편이니 어떻게든 막아주자고 건의했다. 국장은 그 자리에서 국세청으로 전화를 걸어 내일 돈이 얼마나 들어오느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은 국장은 내일 돈이 좀 들어온다니, 우선 당장 급한 3억 원을 끊어주라고 국고과에 지시했다.

 

"3억 원짜리 국고수표를 받아 은행에 넣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다음날 한국은행에서 전화가 왔는데, 재무부에서 발행한 3억 원 국고수표의 잔액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도를 낼까요, 아니면 찾아 가시겠어요’ 하고 물어오는 거야. 예정된 국세 수입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국고 부도를 내겠어요. 그러니 나더러 빨리 찾아가라는 거였지. 나는 곧장 한국은행으로 달려갔고 재무부 사무관까지 그리로 와서 세 사람이 이 일은 절대 비밀에 부치자고 약속하고 미제수표를 되찾아 국고에 반납했습니다. 국고 잔고가 3억 원이 안 될 정도였으니 그때 나라 사정이 짐작되시겠지요."

 

정부 출자금까지 막힌 상황에서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해야 하느냐 궁리를 거듭하고 있는 중에 박태준 사장이 그를 불렀다. ‘당신이 나서서 직접 시중은행과 접촉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박태준 사장은 대한중석 시절에 달러를 손에 쥐고 시중은행과 거래를 한 당사자가 바로 당신이었으니 그 안면이라도 내세워 마지막으로 은행 문을 다시 한 번 두드려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중은행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원할 의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은행에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영기업체는 거래은행을 재무부에서 지정해 주었는데, 우리의 거래은행은 산업은행과 중소기업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그해 업무계획이 이미 확정되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기업은행은 대기업 대출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1억 원까지는 고려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지정은행으로부터의 차입은 단념하고, 대한중석과 오랫동안 거래해온 시중은행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 서울은행을 차례로 접촉했으나 모두 여신한도가 없어 어려우니 기회를 보자는 식이었어요. 당시 시중은행의 1년 영업이익이 1억 원 정도였는데, 3억 원을 움직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어요?"

 

마지막으로 접촉한 은행이 대한중석의 주거래 은행인 한일은행(現 우리은행)이었다. 한일은행은 포항제철과 거래은행 약정이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하진수 한일은행장은 ‘대한중석 때 우리 은행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영업부장을 불러 3억 원을 끊어주라고 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우선 부도를 면하고 잠시나마 갈증을 풀게 되었다. 이는 은행의 파격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진수 행장이 평소 박태준 회장을 높이 신망하고 있었고, 포항제철 건설의 국가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후로 포항제철은 한일은행으로부터 10억 원까지 수융(受融)하게 되었고 이후 상당기간 단일거래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 일로 해서 재무당국으로부터 한일은행에 여신한도 초과에 대한 문책이 떨어졌다. 한일은행은 국책사업인 포항제철의 자금사정이 절박한데도 거래지정을 받은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이 해결해주지 않아 한일은행에 와서 긴박한 사정을 이야기하기에, 포철 건설에 차질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긴급대출을 해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진수 행장은 재무부에 대고 ‘차라리 내가 문책을 당하면 당했지, 포철이 부도가 나서야 되겠느냐’고까지 했어요. 재무부에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포철에 당시의 상황 설명과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해 왔습니다. 나는 조목조목 설명을 했습니다. 포철의 건설자금은 전적으로 정부 출자금으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지만, 1개월 동안 한 푼도 받지 못한 사실과 앞으로의 절박한 자금 계획까지 설명을 했고, 은행 차입으로 인해 이자부담이 생겼다고 해서 이자보전까지 받았습니다." 

 

정윤모 전 차장은 정부의 식량 증산을 위한 토지개량사업 추진 부서, 유엔한국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대한광업진흥공사, 대한중석을 거쳐 포항제철에 합류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미군정청은 전후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의 절박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수리시설과 토지개량사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부 기관에 관련 내용을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직원이 없어, 전국에서 50명을 선발하여 서울대 공과대학에 위탁교육을 맡겼다. 이들은 농업토목교육을 이수한 후 각 도청과 수리조합연합회에 배치되었다. 그후 대한광업진흥공사 소속으로 UN 기관이 대량으로 수입한 산업용 기자재를 관리하던 그는 유엔한국재건단이 해체되면서 1957년 대한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 후 정부 기관이 이리저리 찢어지고 합쳐지고 하면서 나는 타의에 의해 직장과 직무가 정해졌어요. 대한중석으로 옮겨 앉으면서 나는 기술계통에서 관리계통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회계, 경리 업무 담당자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금품관리와 계수(計數) 능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요. 이후 나는 본의 아니게 ‘달러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후 복구에 소요되는 외화가 매우 절실했지만,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기업이 대한중석뿐이었습니다. 그 외의 수출품이래야 해산물, 생돈(生豚) 등이었는데 푼돈에 불과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달러를 주무르는 사람으로 인식된 겁니다."

 

1964년 박태준 사장이 대한중석에 취임하고 나서 그를 불렀다. 사장이 일개 계장을 부른다는 것이 너무 이례적인 일이어서 비서실에 과장을 부른 것 아니냐고 확인해 봤지만, 분명히 담당 계장을 불렀다는 것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당시 위기에 처한 조흥은행 문제를 거론했다.

 

"사장께서 ‘여기 와서 들어보니 달러와 관련해서는 자네가 1인자라던데···’ 하면서 운을 뗐어요. 지금 당장 조흥은행이 쓰러지기 직전인데, 은행이 도산하면 혁명정부는 뭐가 되며, 국가경제는 또 어찌 되겠느냐. 현재 정부에도 다른 은행에도 돈이 없으니 조흥은행을 살릴 수 있는 데는 대한중석밖에 없다. 그러니 조흥은행에 얼마를 지원하면 급한 불을 끌 수 있겠는지, 그 정도로 지원하면 정부도 괜찮고 회사 경영에도 지장이 없겠는지, 그리고 돈을 뺀다면 어느 은행에서 빼는 것이 좋겠는지 숙고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박태준이라는 인물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성공한 이른바 혁명 주체세력으로서 국영기업체장을 하나 꿰어찬 것으로만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은 당시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5·16이 성공한 후 정권을 장악한 혁명정부는 정부 각 부처는 물론 각 시도지사, 국영기업체장까지 모두 현역 군인들로 채워 군정을 실시했습니다. 대한중석도 국영기업체였으므로 군인들 중의 한 사람이 와 있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은행의 도산이 국가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부터 금융을 비롯한 경제 전반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계셨어요. ‘대단한 분이 대한중석에 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회사 간부사원도 아닌 일개 계장의 신상까지 파악하고 계셨으니 경영자로서의 안목 또한 비범한 분이었죠. 결국 내가 보고서를 만들어 조흥은행을 지원했습니다."

 

대한중석에서 제철소 건설 관련 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7년 9월 11일, 정부가 종합제철 실수요자로 대한중석을 지명하면서부터였다. 그해 10월 20일 KISA와의 기본협정이 체결되고 10월 3일 포항시 교외 대송면에서 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 및 주민 경축행사가 열리는 등 종합제철 추진 프로젝트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11월 8일 대한중석 내에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나는 추진위 멤버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추진위 내의 회계, 경리, 세무 업무를 처리해주고 있었습니다. 당시 달러를 만질 수 있는 기업은 대한중석밖에 없었고 정부기관이나 은행에서도 외환과 관련해서는 중석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직접 핸들링하는 나에게로 직접 전화를 많이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항상 자리를 지키라고 해서 출장도 못 갔어요. 자연스럽게 재무무, 상공부 등의 공무원들도 많이 알고 있었기에 추진위의 금융, 회계 관련 일들을 내가 도울 수밖에 없었어요."

 

1968년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아예 포스코 창립 관련 업무를 하고 있었다. 회사가 아직 설립되지 않았으므로 소속은 대한중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4월 1일 포스코가 창립되고 난 뒤 시행된 첫 인사에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대한중석에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포스코 인사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5월 1일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포스코 창립멤버가 되지 못했습니다. 6월 1일부로 명령이 난 신상은 씨도 포스코 인사에서 누락되는 바람에 똑같은 일이 벌어졌지. 한마디로 과도기의 혼란이었습니다."

 

회사 창립 초창기에는 외화 사용에 대한 정부 통제가 철저해 일일이 외환심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68년 회사 창립 다음 달인 5월 일본철강연맹에 10만 달러, 미국 바텔연구소에 5만 달러의 기술용역비를 송금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어렵사리 돈을 마련했지만, 외환심의위의 승인 시간이 너무나 빠듯했다. 결국 마감일의 자정 직전에야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 자정을 넘기면 회사의 국제적 공신력이 문제가 됩니다. 고준식 부사장께서는 속이 타서 전신전화국까지 나오셔서 국제전보를 치는 것까지 확인하셨고 우리는 그 차에 편승하게 되었는데, 통금 시간에 쫓긴 나머지 운전 부주의로 내가 그만 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어요. 아현동 고갯길이었는데, 다행히 도로변 쓰레기더미에 떨어져 큰 사고를 면했습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모든 것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것을 볼 때 금석지감을 금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5년 여에 걸쳐 대일청구권자금 전용분을 제외하고 산업은행 간접출자를 포함한 정부출자 563억 원, 대한중석 출자 35억 원, 합계 598억 원의 내자로 1기 설비 준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1969년 2월에는 경상북도가 포항연관단지 조성을 위해 매입해 놓은 농경지 등 114만 4000여 평을 포항제철이 인수해야 했다. 당시 양택식 경북지사는 개발자금이 없어 단지조성 사업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으니 포철이 인수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청와대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급전을 마련해 경상북도에 5억 원을 지불해야 했는데, 포철 계획에 연관단지 관련 예산은 반영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포철 자체가 심한 자금압박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제철소 배후 연관단지 조성은 반드시 제철소 건설과 병행되어야 하므로 은행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은행 여신이 매우 어려운 때였는데 제공할 담보조차 없으니 사장 이하 전 임원들의 개인 보증을 담보로 한 신용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회의 결의대로 제일은행과 절충했지만, 담보도 없이 금액이 너무 커서 전액 지원할 수가 없다는 거야. 2억 원을 지원할 테니 나머지는 타 은행과 접촉해 보라고 해서 결국 한일은행 1억 원, 상업은행 1억 원, 조흥흔행 1억 원의 공동대출로 자금을 마련해 경상북도에 지불했습니다."

 

당시 신용대출은 상환기간이 1개월로 규정되어 있었다. 상환기간이 지나면 불량채권으로 분류, 별도의 관리부서로 이관되었다. 포철로서는 간선 도로 등 기본공사를 시공한 후 단시일 내에 입주 희망 업체에 분양해 차입금을 변제할 수밖에 없었는데, 분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체가 누적되어 은행의 상환재촉에 시달려야 했다.

 

"매월 은행을 찾아가 앞으로의 상환 계획을 설명하는 일이 수년간 이어졌습니다. 기간 연장이 안 된 상태에서 온갖 핑계를 다 댔어요. 다음 달이면 정부에서 돈이 나온다, 부지 분양이 이뤄지면 돈이 되는데 지금 한창 계약이 진행되고 있다는 등으로 거짓말을 밥 먹듯 했지. 심지어는 ‘정부 지시로 이루어진 일이니 은행에서 직접 정부에 얘기해 보라’면서 나자빠지기도 했어요. 결국 단지가 분양되는 대로 여러 해에 걸쳐서 상환했습니다. 정부 자금 한 푼 없이 단지가 조성되었으니 국내에 이런 사례는 없습니다." 

 

앞서 1968년에는 박태준 사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포항시 효자동 일대의 야산과 공동묘지 등을 주택단지로 매수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공장부지와는 달리 예산이 확보되지 않았으므로 은행 차입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은행의 주택단지 조성 자금 대출은 정부가 주택단지로 지정한 곳에만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또 은행에다 대고 떼를 썼습니다. 포항제철 건설은 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그러니 포철 주택단지 또한 정부가 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억지를 들이대며 적극적으로 절충한 결과 주택은행 등으로부터 1억 3700만 원을 저금리로 확보할 수 있었어요. 그때 시간을 끌었다면 치솟는 지가를 감당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일찍이 서둘러서 효과적으로 매입했기에 오늘날의 꿈의 동산을 꾸밀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 전 차장은 포스코를 떠날 때까지 늘 돈에 쫓기는 나날의 연속이었고, 돈을 구하러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기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정부 출자 재원의 한계, 은행여신 자금의 한계 속에서 1기 설비 건설자금 조달업무를 큰 차질 없이 수행하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들, 특히 당시 금융계 인사들에게 깊은 감사드린다고 했다.

 

1974년 그는 이종열 상무이사가 퇴직 후 설립한 삼정강업(現 포스코엠텍)에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74세까지 현역으로 원 없이 일했다고 했다. 남들보다 오래 직업전선에서 장수하게 된 배경에는 1971년부터 45년 넘게 취미로 즐긴 수석(壽石)이 있었다고 한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치밀함과 절제된 기억력, 체력을 유지하는 것은 전부 취미활동 덕분이라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혼자 할 수 있는 것 하나쯤은 찾으라는 그의 말에서 100세 시대의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한중일을 통틀어 최고의 수석 전문가 반열에 오른 그의 탐석(探石) 호기심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포스코가 ‘존경받는 회사’로 오래 남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임직원들에게 꾸준히 예절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앞으로도 포스코가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국민기업으로 오래토록 영속하길 바랍니다" 라고 당부했다.

우재욱 <시인·작가>

 

▶ 포스코 퇴직 후 삼정강업에 재직하던 당시, 일본에서 열린 ‘방청방식기술 발표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발표하고 있는 정윤모 사장의 모습

  

▶ 1998년 벤처기업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는 정윤모 전 차장.

 

▶ 평생 취미로 수석(壽石)을 즐겨온 정윤모 전 차장이 2003년 발간한 수석집 ‘운재원석풍류’. 표지의 제자(題字)는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썼다.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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