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1970년대 까다로운 품질 요구 모두 맞춰준 포스코에 감사
– 일본·프랑스에서 수입하던 소재 1978년 포스코재로 교체
– 세계 최고 품질의 포스코 BP, 미국 공장 사용량 지속 확대
조강연산 550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 3기 설비가 준공된 1978년 12월이었다. 준공식 참석차 포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에게 포항 연관단지 입주 업체 중에 가볼 만한 공장을 소개하라고 했다. 박태준 사장은 주저 없이 동양석판(現 TCC동양)을 추천했고, 대통령 일행은 곧바로 연관단지에 위치한 동양석판으로 향했다.
"제 아버지이신 손열호 명예회장(1921~2013, TCC동양 창업주)께서 경영 일선에 계실 때입니다.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대통령 일행이 도착하신 겁니다. 신설 공장이었고 선대 회장께서 현장관리에 매우 꼼꼼하셨기 때문에 깨끗하고 잘 정돈된 생산 라인을 대통령께 보여드릴 수 있었어요. 공장 시찰을 마치고 앞마당에서 기념식수와 기념촬영이 있었습니다. 그때 촬영한 사진을 보면 배경에 조업 소재인 석도원판 코일이 쌓여 있는데, 그게 포스코산(産)도 아니고 일본산도 아닌 프랑스 솔락제철소 제품이었습니다. 차차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그때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동양석판이 첫 출범을 알린 것은 1959년이었다. 현재 동양타워가 들어서 있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생산거점을 마련했다. 1962년 한국 최초의 석판이 당산동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석판 산업의 선두주자가 된 동양석판은 매년 30~40%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국내 경제는 1973년 하반기부터 가중된 경기 침체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기업 경영에도 큰 고통을 안겼다. 1976년이 되어서야 국내 경제는 오일쇼크의 악몽을 극복하고 15%를 상회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국내 산업은 산업구조의 건전·자립화와 경제 규모의 확대를 추구하고 있었다. 동양석판 또한 석판 사업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시설 규모를 국제화시켜 수출 전략산업으로 육성,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당시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으로 공장을 이전하기로 한 겁니다. 그때까지 100% 수입에만 의존해온 조업소재 석도원판을 포스코가 1977년부터 연간 6만 톤 이상 공급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시기에 맞추어 가동할 수 있도록 영등포 공장을 포항 연관단지로 이전, 확장한 것이죠. 1975년 4월부터 2년 여의 공사를 거쳐 1977년 7월 연산 12만 5000톤의 대단위 석도강판 설비를 준공했습니다."
포항 공장 건설의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손봉락 회장은 직접적인 동기와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 설명했다. 첫째, 생산시설을 포항제철의 연관단지 내에 두게 됨으로써 원자재의 조달을 원활히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강공업의 계열화로 산업의 전문화를 도모할 수 있고, 둘째로 분당 150미터의 도금시설을 300미터의 전기석도금 시설로 증설, 대체함으로써 수요 증가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품의 시장성 문제가 해결되어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시장에서까지도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외화 획득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초 동양석판은 인천으로 공장을 옮기기로 하고 부지까지 확보해 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선대 회장께서 박태준 포스코 사장과 의논하여 인천을 포기하고 포항에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박태준 사장께서는 연관단지 내에 두 군데의 부지를 추천하시면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어요. 1974년 12월에 현재의 공장부지 약 10만m²를 매입한 뒤 공사를 추진했습니다."
초기 포스코의 냉연제품은 조업 소재로 쓸 수 없을 만큼 문제가 많았다고 손봉락 회장은 털어놓았다. 동양석판은 이전까지 최고 품질의 일본산 제품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포스코의 제품은 외형과 재질 양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포스코에서는 제품 품질에 관한 한 어떠한 문제 제기도 흔쾌히 다 받아줬다고 했다.
"우리가 클레임을 제기하면 판매와 기술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두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꼼꼼하게 체크해 놓은 많은 자료를 넘겨주었지요. 그 자료가 포스코의 제강공장과 냉연공장으로 전달되고 이후의 조업에 반영된 걸로 압니다. 포스코 냉연부로부터 ‘동양석판 덕분에 품질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말을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 포스코에는 도금라인이 없었으므로 우리가 포스코 제품의 시험 설비가 되어준 셈이죠. 당시 손열호 선대 회장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포스코에 문제점은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주되, 절대 불평을 늘어놓지는 말라는 것이었어요. 다른 회사가 아니라 같은 회사의 선공정, 후공정으로 생각하고 서로 협조하다 보면, 포스코의 저력으로 볼 때 머지않아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석판은 1962년 석도강판 상업 생산을 시작한 이래로 일본의 신일본제철, 가와사키제철, 일본강관, 동양강판 4개사로부터 소재를 공급받아 왔다. 그런데 일본의 고로 메이커들은 분기별로 가격을 인상할 뿐만 아니라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 공급물량을 제한하기도 했다. 한때는 소재를 대줄 수 없다며 공급을 끊은 적도 있었다. 1977년부터 포스코가 석도원판을 시험생산 함에 따라 국내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석도원판은 기계적 성질과 성형 특성, 항복 현상, 방향성, 내식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금속용기의 원재료로써 용도에 따라 품질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포스코의 초기 제품은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었다.
"결국 원판의 안정적인 조달을 위해서 수입선을 다변화했습니다.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에 걸쳐 프랑스 솔락과 유지노 양 제철소로부터 3만 톤의 원판을 들여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포항공장에 오셨을 때 찍은 기념사진 배경에 솔락 제품이 들어간 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후 기술개발과 품질향상을 위한 포스코와 동양석판의 긴밀한 협력이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1980년에는 소재 수입물량의 30%, 1982년에는 70% 이상으로 국산화율을 높이면서 수요가 충족되어 갔습니다. 결국 동양석판의 다양한 요구는 포스코 석도원판의 품질을 끌어올렸고, 포스코의 품질향상이 동양석판의 발전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품질 안정이 이루어졌지만, 1985년까지도 완전히 만족할 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절반 이상의 소재를 일본으로부터 들여와야 했다. 요구 만족도를 달성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신일본제철의 제품과 대등한 수준에 도달하면서 100% 포스코 소재 사용으로 전환했다. 냉연이 철강의 꽃이라면 블랙플레이트(석도원판)는 냉연의 꽃이라고 손 회장은 단언했다. 석도강판의 소재인 블랙플레이트가 완성되는 단계가 곧 냉연 기술이 정점에 도달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기술 발전이야 끝이 없겠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포스코의 석도원판은 세계 최고의 품질이고, 따라서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철강사라는 것이었다.
"1988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철강업계에 투피스캔 개발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떨어졌는데, 이는 제철소, 도금업체, 캔 제조업체가 함께 수행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철이 알루미늄의 영역을 잠식하는 프로젝트였지요. 제철소에서 재질은 제강부, 외형은 냉연부에서 컨트롤해야 할 과제였는데, 냉연부보다는 제강부에서 더 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결국 포스코에서 소재를 만들어 냈고, 1990년 초에 투피스캔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해외 시황이 괜찮아서 동남아, 미국, 유럽 시장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내수 기반이 취약하고 가격경쟁력에서 밀려 이후 알루미늄에 다시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캔 메이커사는 가공성이 뛰어난 알루미늄을 선호했고, 철광석 가격의 급등으로 인해 가격도 알루미늄이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흔히 톤당 가격으로 따지면 철이 더 저렴한 소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중량에서 알루미늄이 철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철강 소재의 값을 알루미늄의 3분의 1 이하로 떨어뜨려야 하는 문제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지금은 포스코의 제품 품질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2차 가공업체로서는 어려움 없이 조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국내 공장은 거의 100% 포스코 생산 소재를 쓰고 있고, 일본과의 관계 유지 때문에 약간의 물량만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는 미국 오하이오에 위치한 합작공장 OCC 역시 포스코 제품을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전년 대비 1만 4000톤 많은 10만 톤 가량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포스코와 미국의 아르셀로미탈 제철소가 소재 공급을 반분하면서 경쟁체제가 확립될 것입니다."
이야기는 포스코가 도산한 일신제강(現 동부제철)을 인수하여 가동하던 시절로 돌아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전과 이후의 시기가 되는 1977년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은 동양석판의 성장기였다. 하지만 정치적 불안이 이어진 이 시기는 동양석판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특히 1982년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에 연루되어 도산한 일신제강을 포스코가 인수한 뒤 사명을 동진제강으로 바꾸어 정상 가동시킴에 따라, 우리의 주력 생산제품인 석도강판과 TFS(Tin Free Steel·주석을 사용하지 않는 캔용 표면처리강판) 판매시장의 경쟁이 심화되었습니다. 당시 포스코가 일신제강을 인수한 것은 포스코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경위야 어떠했든 동진제강이라는 이름으로 포스코라는 거인이 우리의 주력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큰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활기를 띤 해외 시장이 동양석판에 활로를 개척해 주었다. 수출 물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1982년과 1983년에 각각 1000만 달러와 2000만 달러 수출탑을 동양석판에 안겨준 것이었다. 수출증가 추세에 힘입어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동양석판의 생산량은 연평균 9만 8000톤을 상회했고, 1986년 한 해 제품 생산량이 11만 톤에 육박함으로써 연간 제품생산 실적이 처음으로 10만 톤을 넘어섰다. 1987년 8월에는 1962년 제품 생산을 개시한 이래 총생산 100만 톤을 달성했으며, 2012년에는 수출 2억불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후장대한 철강산업 전체에서 본다면 이런 실적이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관제철소가 아니고 석도강판을 주종으로 하는 표면처리강판 생산업체로서는 매우 큰 업적입니다. 이에 따라 1987년 석도라인 가동률이 90%를 넘어섰고, 국내외의 수요 증가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었습니다. 특히 세계 35개국에 이르는 해외 거래선으로부터 주문이 밀리면서 수출 전용라인을 신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사내의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기도 했지요. 어려움이 있으면 또 다른 좋은 일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TCC동양은 현재 주석도금뿐만 아니라 크롬, 니켈, 동, 라미네이트 등 연간 32만 톤의 각종 표면처리강판 생산 체제를 갖추고, 생산 제품의 60~70%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그 외 무역회사, 엔지니어링사, 코일센터, 포스코의 정비 용역 회사인 TCC한진, 미국 현지의 합작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해외 차관을 얻어다 공장을 건설하고 이후 빚 갚느라 허리가 휘고 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노동시장, 임금 등의 문제로 그간 중국 등지로 생산시설을 많이 옮겼습니다. 이제는 중국에서도 못 견디고 다른 지역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원화 환율이 너무 높습니다. 환율이라는 게 시장 기능에 맡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100% 시장에 맡겨놓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부가 개입하는 거지요. 다소의 인플레이션을 각오하고서라도 정부가 발권력을 동원해서 환율을 좀 유연하게 관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손봉락 회장은 철강업체는 물론 철강 수요업체 또한 소형 업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잘못 되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면서, 올해 전 세계적으로 경영 여건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므로 모두들 힘을 내어 심기일전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재욱 <시인·작가>
▶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12월 8일 포항 3기 종합준공식에 참석한 후 포항연관단지내 동양석판(현 TCC동양) 포항공장을 둘러보고 임직원을 격려하고 있다. |
▶ 1962년 5월 7일, 동양석판 열지식(熱漬式) 석도금기 설비 준공식에 참석한 임직원과 내외빈의 모습. 앞줄 왼쪽 세 번째가 TCC동양의 창업주인 故 손열호 명예회장이다. |
▶ 1972년 6월, 동양석판은 연속광폭전기 석도금 설비(사진)를 신규 설치하고 준공함으로써 국제 규격에 맞는 광폭 석도강판 공급 체제를 갖추었다. |
▶ 1977년부터 포스코와 거래를 시작한 TCC동양은 현재 주석도금강판 분야에서 국내 시장점유율 40%를 차지하는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