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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60] 박문수 前 부사장, 반드시 해내겠다는 강한 의지로 ‘전량 판매’ 기반 다지다

[남기고싶은이야기 60] 박문수 前 부사장, 반드시 해내겠다는 강한 의지로 ‘전량 판매’ 기반 다지다

2016/01/14

조강연산 103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종합준공된 1973년 7월 3일 이후 ‘최대 생산·전량 판매’라는 박태준 사장의 경영 철칙은 초창기 포스코맨들의 어깨를 짓누른 무거운 짐이었다고 박문수 전 부사장은 회고했다. "제철소 생산부서나 판매부서, 심지어는 지원부서까지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철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조업에 들어간 생산부서에서는 설비 트러블로 인한 감산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고, 철강재 시장의 흐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판매부서에서는 국내는 물론 낯선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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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고가의 가격정책 펼친 日철강사 선점시장 공략··· 안정적 수출선 확보

– US스틸과 합작해 UPI 설립·냉연공장 신예화·· ·美 통상마찰 극복

– 기획판매제 도입·종합상사 육성·틈새시장 개척··· 전량 판매 신화 이뤄

 

조강연산 103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종합준공된 1973년 7월 3일 이후 ‘최대 생산·전량 판매’라는 박태준 사장의 경영 철칙은 초창기 포스코맨들의 어깨를 짓누른 무거운 짐이었다고 박문수 전 부사장은 회고했다.

 

"제철소 생산부서나 판매부서, 심지어는 지원부서까지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철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조업에 들어간 생산부서에서는 설비 트러블로 인한 감산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고, 철강재 시장의 흐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판매부서에서는 국내는 물론 낯선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당시 안병화 상무께서 강력한 리더십으로 직원들의 판매역량을 결집하고 초기 판매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셨어요. 행정지원부서에도 생산과 판매에 관련된 일이라면 최우선적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1973년 당시 철강재의 국내수요는 200만 톤 정도였다. 수출수요를 합하더라도 280만 톤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에 갑자기 103만 톤이란 물량이 쏟아져 나온 것은 시장에 엄청난 쇼크로 작용했다.

 

"제철소는 업스트림(upstream·상공정)에서 다운스트림(downstream·하공정)순으로 가동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공정부터 가동에 들어갔어요. 1기 설비 종합준공 전년인 1972년 7월 4일 1후판공장이 제일 먼저 준공되어 조업에 들어갔고, 10월 3일 1열연공장이 뒤를 이었어요. 상공정인 고로와 제강에서 소재가 나오지 않으니 일본으로부터 슬래브를 들여와 후판과 열연을 생산했는데, 여기서 나온 수익이 조업 초년도 흑자달성으로 이어진 겁니다."

 

모든 게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초기 생산제품은 조업경험 부족과 기술 미숙으로 실수율이 형편없이 낮았다. 1972년 가동된 1후판공장은 포항제철소 첫 조업이었기에 임직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임원회의에 보고된 내용은 대다수의 물량이 품질기준 미달로 불량 처리되고 극히 소량의 제품 생산에만 성공했다는 정도였다.

 

"1973년 인천제철에 후판을 공급했더니 당장 클레임이 제기됐습니다. 현장으로 달려가 제품에 플래시를 비춰보니까 평탄도가 엉망이었어요. 매끈해야 할 제품 표면이 울퉁불퉁한 거야. 돌아와서 기술파트에 피드백 했지만, 기술자들도 최선을 다한 게 그거였지."

 

당시 국내에서는 연합철강과 일신제강(지금의 동부제강)이 1960년대 중반부터 일본으로부터 열연코일을 수입해 냉연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국내 최대의 열연 수요가였던 것이다. 포스코로서는 어떻게든 이들이 쓰는 일본산 소재를 포스코 제품으로 대체시켜야 했다.

 

"일신제강은 상당히 호의적이었지만 연합철강은 한마디로 ‘노’였어요. 포스코가 품질에 있어 일본제품을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제강공정에서 성분 컨트롤이 안 돼 실리콘(Si) 함량이 너무 높았어요. 이게 높으면 물성이 취약해지고 도금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밀어붙였더니 써보고 괜찮으면 쓰겠으니 먼저 테스트 분량을 보내라는 거야. 그것도 엄청난 양을 요구하는 거예요. 지금이야 그들이 포스코 덕분에 큰 수익을 내고 있지만, 그땐 국내에서조차 이렇게 설움을 당했지."

 

차츰 품질이 안정되면서 처음으로 타이완에 열연코일과 후판을 수출했다. 그 해 말에는 포스코 후판이 미국에 진출했다. 미국 측의 반응도 괜찮은 편이었다. 이후 포스코의 시장 개척 정책은 일본 철강업계 선점 시장의 잠식이었다. 여기에 매우 유리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 일본의 고가정책이었다.

 

"당시 세계 철강시장 최강자였던 일본은 가격을 매우 높게 책정하고 있었어요. 팔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어. 높은 수익에 통상마찰까지 피해갈 수 있으니까. 일본은 우리나라에도 비싸게 팔았는데, 그래서 우리가 꽤 높은 가격에 팔 수가 있었지. 해외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이 개척해 놓은 시장에 조금 낮은 가격으로 야금야금 파고든 거지."

 

박 전 부사장은 한양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포스코에 입사해 2002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30년 세월을 한결같이 세일즈 엔지니어의 길을 걸었다.

 

"흔히 SE(Sales Engineer)로 불리는 세일즈 엔지니어는 전문적 상품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 고객에게 기술적 지도까지 할 수 있는 판매원 혹은 판매원에게 기술적 지식과 조언을 베푸는 사람, 또는 기술적 지식을 갖춘 프로 세일즈맨을 총칭하는 용어인데, 요즘에는 ‘세일즈 엑스퍼트(Sales Expert)’라고도 해요. 그런데 그땐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경영학적으로 확실한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었어요. 2014년 취임한 권오준 회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솔루션마케팅이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어요. 나의 경우에는 엔지니어로서의 백그라운드가 마케팅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1기 설비 종합준공 후 3개월 만인 1973년 10월 제1차 오일쇼크가 닥쳤다. 세계경제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톤당 400~500달러에 팔리던 후판 가격이 150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생산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은 ‘최대 생산·전량 판매’라는 경영 철칙을 고수했다. ‘품질이 나빠서’ 또는 ‘시황이 나빠서’ 따위의 말은 나태한 핑계로 치부되었다. 엄청난 고정비 부담을 안고 있는 철강업에서 감산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화가 크게 부족했습니다.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외화 소요가 가파르게 치솟은 거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쓰는 원료 수입과 차관원리금 상환에 소요되는 외화를 우리 손으로 벌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생산량의 30% 이상을 수출하는 정책을 고수했던 겁니다. 수출을 다그치는 박태준 사장의 호통이 야속하기도 했어요. 세계 철강생산 총량이 10억 톤에 육박하는데, 그것의 0.1%밖에 안 되는 100만 톤을 왜 못 파느냐는 거야. 언뜻 그럴듯하지만 시장상황 이모저모를 들여다보면 성립될 수 없는 말이에요. 당신께서도 왜 그걸 모르셨겠어. 모르고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지만,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그러시는데 어쩌겠어. 예, 하고 따르는 수밖에."

 

그 해 12월에는 260만 톤 규모의 2기 설비 착공이 예정되어 있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서 2기 설비 착공을 늦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박태준 사장의 대답은 한마디로 ‘안 돼’였다.

 

"불황기에 투자해서 호황기에 수익을 낸다는 포스코의 전통은 그때부터 싹텄어요. 그러나 판매 쪽에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분기 판매계획, 수주방침, 업체별 공급방침까지 사전에 철저히 결정해서 판매에 임하는 기획판매체제를 구축했어요. 포스코가 와이어로프, 못, 철선을 비롯해 강관, 컨테이너, 선박 등 철강 가공산업의 적극적인 지원에 나선 것도 바로 그 때였습니다."

 

어려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도 이듬해 포스코는 전 임직원이 합심해 수출 1억 달러 달성의 쾌거를 이뤄냈다.

 

포스코에서 처음으로 냉연제품이 나온 것은 1977년 4월이었다. 후판, 열연제품 위주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냉연제품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48만 톤 규모의 냉연공장이 2기 설비에 포함된 것이었다.

 

"냉연코일의 최대 수요처는 자동차공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초기 제품은 폭이 4자짜리로 자동차 루프(지붕) 소재로 쓸 수가 없어 일신제강의 5자짜리가 루프 소재로 쓰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공급했어요. 이후 우리가 6자짜리 제품을 개발하면서 연합철강, 일신제강과 함께 3사 경쟁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일신제강과 연합철강의 설비는 리버싱(reversing·가역식) 시스템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했고, 우리는 탠덤(tandem·연속식) 시스템이라 소품종 대량생산에 강점이 있었어요. 국내 수요업체는 일신제강이나 연합철강 제품에 익숙해져 있었고, 초기에는 품질에서도 우리가 밀렸어요. 그래서 기술자들을 거기에 보내 배우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3사 경쟁체제를 뚫기 위해 1976년 12월 설립한 냉연 전문 판매회사가 ‘제철판매’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숨 돌릴 틈도 없이 1978년 들어 박태준 사장은 100만 톤 규모의 제2냉연 건설을 지시했다. 마케팅 쪽에서는 즉각 반대했다. 4자짜리 48만 톤도 못 팔아 판매회사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생산량이 3배로 늘어나면 그걸 어디다 파느냐는 것이었다. 냉연 품질 안정화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기술 쪽에서도 반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나도 반대했어요. 그런데 청와대에서 개최된 경제인간담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포스코가 냉연제품 공급을 적게 해서 우리가 자동차 수출을 못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은 거야. 회의에서 돌아온 사장께서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냉연 건설에 반대한 사람들 전원 반성문 쓰라’고 해서 여러 사람이 반성문을 썼고, 이후 2냉연 건설을 추진하게 된 겁니다."

 

후판재의 최대 수요처인 조선업체에서는 폭, 길이 등에서 다양한 규격의 제품을 주문했다. 마케팅사이즈의 제품을 가져가서 재가공해 쓰기보다는 아예 재가공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포스코는 마케팅사이즈만 생산하고 있었다.

 

"다양한 규격의 후판을 생산하는 일본 철강사와 경쟁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일본 업체들이 담합을 통해 고가정책을 쓰는 바람에 조선업체들이 소재 가격을 내리려고 재가공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제품을 쓴 거야. 이후 우리도 다양한 규격의 제품을 개발했어요."

 

1980년 들어 서울 을지로입구에서 대단위 건설공사가 이루어졌다. 롯데호텔 건설이었다. 구관(舊館)은 100% 신일철의 건설용 후판재로 건설되었다. 이어서 신관(新館) 건설이 추진되는데 포스코도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6번이나 롯데호텔 건설본부를 찾아갔습니다. 일본인 건설 책임자는 한마디로 포스코 제품을 쓸 수 없다고 했어요. 포스코는 고층빌딩 건설용 후판을 공급한 실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더군. 밀고 당기는 중에 운영회의에서 사장께서 ‘롯데 신관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는 거야. 그간의 상황을 보고했더니 야단을 치셨어요. 서울 을지로는 사람으로 치면 코 부분인데 거기서 이뤄지는 공사에 우리 제품을 못 넣으면 회사의 체면에 문제가 된다면서 당장 롯데건설 사장을 불러오라고 했어요. 당시 롯데건설은 제철소 건설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상당한 압박이 되었겠지. 결국 강재의 절반 정도를 우리가 공급하게 되었어요."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미 수출량이 가파르게 늘었다. 미국 철강업계는 이미 경쟁력을 잃고 있었으므로 자국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국산 철강재의 국내 반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를 압박해 발동가격제(Trigger Price Mechanism)를 시행했다.

 

"발동가격제는 일정한 가격을 정해놓고 그 이하로 수입되는 외국 철강제품에 대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덤핑조사에 착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수입규제 방식인데,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미국 철강업계의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제도야.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낸 것이 UPI의 설립이었어요. 미국 US스틸과 50 대 50으로 투자해서 피츠버그의 냉연공장을 현대화한 뒤 우리가 원자재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통상마찰을 피해간 거지. US스틸을 제외한 다른 철강업체는 매우 못마땅해 했어요."

 

1989년 포스코가 스테인리스열연 생산에 들어가자 삼미특수강이 크게 반발했다. 포스코는 열연제품, 삼미특수강은 냉연제품으로 분명히 다른 공정에, 다른 제품이지만 삼미로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포스코가 스테인리스냉연설비를 갖추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고 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우려가 현실화되었지. 우리도 스테인리스냉연공장을 지었으니까. 하지만 삼미로서는 포스코로부터 100% 소재를 공급받을 수 있고, 스테인리스냉연 시장상황도 그렇게 타이트하지 않으니까 윈-윈 할 수 있었어요."

 

포스코는 처음부터 실수요자 중심의 판매정책을 펴왔다. 중간 유통과정 없이 제철소에서 수요업체에 직접 제품을 인도하는 방식이었고, 신일철 등 해외밀과의 거래도 밀투밀(mill to mill) 형태로 이뤄졌다. 그러나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수요자가 다양해지고 소량 주문이 늘어남에 따라 판매점 제도를 도입했다.

 

"사무실에 전화기만 갖춘 판매점들이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이게 큰 이권으로 인식되었어요. 그래서 정부가 바뀌면 권력층에서 판매점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권력을 동원하는 겁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판매점주들과 포스코 경영층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따져 묻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는 곧 포스코 경영층을 잠재적인 부정행위자로 보는 시각과 무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1980년대 후반에 소형 유통을 모두 폐지하고 판매점을 대형화한 것이 코일센터였어요. 아무나 대들지 못하도록 창고는 물론 가공설비인 전절단(剪切斷)설비까지 갖추도록 해 문제를 해결했어요."

 

종합상사제도를 도입한 것은 일본시장을 뚫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그러나 국내 종합상사들은 철강무역 경험이 전무했다. 일본 철강업체는 모두 종합상사를 통한 수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상사를 이용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었지만, 포스코의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사항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국내 종합상사에 철강부를 두도록 해 교육을 시키고 정보를 제공하여 역량을 키워나갔다.

 

"재일교포 중에서 철강재 판매 경험이 있는 자를 찾아서 국내 종합상사 철강부와 연결시킨 뒤 일본 시장으로 진출했어요. 그러다가 1988년 4월 25일 오사카에 PIO(POSCO International Osaka)를 개설했습니다. 일본의 심장부로 진출한 거지. 대우, 삼성 등 종합상사들이 반발했지만, PIO는 종합상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집중적으로 개척했습니다. 일본제강소(JSW)의 무로란제작소에 슬래브를 주어 후판으로 가공해서 판다거나, 열연코일을 산세처리한 후 일본시장에 내놓는 식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립 첫해부터 매출액 500억 원, 순이익 1억 원을 달성했어요"

 

1997년 11월 발생한 IMF 외환위기는 국내 철강 수요산업을 마비상태로 몰아넣었다. 금리는 20%를 넘어 30%까지 치솟았고, 내수는 급감했다. 내수에서 남아도는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길은 수출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출비중이 50%까지 늘어났다.

 

"철강기업은 엄청난 고정비 부담 때문에 한계원가만 넘으면 제품을 생산해야 합니다. 생산량을 어떻게든 수출에서 소화해야 하는데 그동안 내수에 안주하지 않고 수출선을 유지해온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98년 2700만 톤 체제에서 새로 취임한 유상부 회장께서 ‘판매·생산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해 수출을 늘리고 가공수출을 통해서 혈로를 뚫었어요. 1994년 김만제 회장 때 포스틸(現 포스코P&S)로 대폭 옮긴 판매 기능을 포스코로 원위치시킨 것도 이때였습니다.

 

모든 제품의 재고량을 일주일 이하로 유지하는 것은 창업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포스코의 철칙이었다. 그래서 각 공장의 제품 창고는 일주일 생산량 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92년 들어 우천시에도 선적작업을 할 수 있는 전천후부두를, 1997년부터 평택, 포항, 광양에 잇달아 전천후 하역 전용 부두인 로로선(RO-RO; Roll On Roll Off) 전용 부두를 준공했다.

 

"2001년 중국에서 시치둥수(西氣東輸)프로젝트가 추진되었어요.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에서 상하이까지 무려 4200km에 이르는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공사였습니다. 거기에 약 200만 톤의 API강재가 들어가는데, 프로젝트 발주처인 페트로차이나에서 포스코의 참여를 거부하는 겁니다. 포스코는 경험이 없고, API강은 신일철밖에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어요. 4번이나 상하이로 달려가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결과 입찰에 참여할 수 있었고, 포스코를 비롯해 중국 바오산강철, 일본 신일철과 스미토모금속이 강재 공급권을 따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오늘날 포스코가 세계 최고의 API강 생산밀이 될 수 있었지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박 전 부사장은 창업기에 비해서 위기의식, 도전정신, 개척정신이 많이 저하된 것 같다고 했다. 제품 설명도 못하면서 팔러 다니면서도 ‘나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했던 그 정신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2년 반마다 300만 톤씩 늘어나는 제품을 어떻게든 팔아야 하는 상황이 무려 2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혼신의 힘으로 300만 톤 판매 체제를 구축해놓고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다시 600만 톤 체제가 되어 있는 식이었지. 그런 일을 20년 동안 겪으면서 ‘포기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키울 수가 있었어요. 위기의식, 도전정신, 개척정신이 가져다 준 값진 재산이었습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장명그룹(長綿國際集團有限公司)을 비롯해 타이완 소재 스테인리스 고객사 일행 40여 명이 1992년 2월 4일부터 8일까지 포스코를 방문했다. 포항 홍보센터에서 포스코의 스테인리스 수출시장 조기 안정화에 기여한 장명그룹 진옥린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는 박문수 상무(오른쪽).

 

▶ 박문수 부사장이 1999년 3월 13일 서울대학교 LG경영관에서 열린 제7회 마케팅 프론티어상(賞) 시상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마케팅 프론티어상은 한국마케팅학회가 1993년부터 매년 국내 기업의 우수 마케팅 사례를 발굴해 수여하는 상으로, 포스코는 만족-코치-파트너십 3단계로 구분되는 ‘고객성공활동’을 높이 평가 받아 1999년 올해의 마케팅 프론티어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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