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1%나눔재단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비전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한 청년이 있다. 자립준비청년에서 물류센터 직원을 거쳐 포스코 인턴이 되기까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깡’을 가진 박강빈 인턴의 파란만장한 인생 개척기를 소개한다.
‘영종도’라는 섬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네 살이 되던 해 영종도의 한 보육원에 입소해 즐겁게 지내던 나는 중학교 때 사춘기가 찾아왔다. 중학교 때 매주 화요일은 섬 밖으로 나가는 날이자 심리 상담을 받는 날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과 다른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스트레스가 참 많았다.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심각한 게임중독을 경험하기도 했다.
심리 상담을 받을 때마다 인천대교를 지나서 섬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대교가 끝나가는 지점에는 항상 포스코의 손길이 묻어 있는 송도국제도시가 가장 먼저 보였다. ‘저렇게 커다란 빌딩과 아파트는 누가 지었을까? 나도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누군가 우리 시설에 ‘포스코대우’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은 상자를 보내오는 걸 발견했다. 그 상자 안에는 각종 생활용품과 간식들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솔직히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입장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내가 보호대상아동이라 가엾어서 도와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생필품 박스가 나와 포스코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만 18세가 되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전날 미리 싸 둔 짐을 챙겨서 보육원을 퇴소했다. 그때 받았던 자립 정착금 300만 원은 월세 보증금으로 사용하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물류기업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나는 여러 고객사, 영업사원, 화물기사님들과 소통하면서 전국적인 유통경로를 관리하는 직무를 맡았다. 그러다 재직 4년 차가 됐을 때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물류센터를 뒤로하고 나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곤 했다. 아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상태였던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한참을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한 달 뒤 퇴사를 결심했다. 평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내게 퇴사 후 얼마 뒤 남은 건 퇴직금 뿐이었다. 한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습관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던 중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자립 전담 선생님으로부터 포스코1%나눔재단의 두드림 지원사업을 소개받은 것이다. “두드림, 자립준비청년의 자립과 취업을 돕겠습니다” 방 안에서 나와 재기하고 싶었을 때 가장 듣고 싶던 한 마디였고, 다시 일어날 힘이 생겼다.
무사히 두드림 면접을 마치고 합격자 통지 문자를 받았을 때,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위안을 받았다. 그 이후 인터넷 강의로 여러 분야를 학습하고자 두드림의 지원금으로 노트북부터 구매하고, 프로그래밍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또 단기간 배웠던 것들을 실무에서 응용해 보려고 K계열사의 접근성팀에서 3개월간 인턴 근무를 했었다. 그 면접을 준비하면서도 두드림의 지원금으로 정장을 구매하기도 했다. 당시 접근성팀에서는 장애인 IT사용자들도 PC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프로그래밍을 지원하고 있었다. 환경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업무를 해보면서 이때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됐던 것 같다.
우선 좋은 환경을 만들려면 ‘분석과 파악’이 잘 된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겪어서 잘 알고, 잘 공감할 수 있는 분야는 ‘자립준비청년’이었다. 그래서 자립 선배로서 전국에 있는 보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당사자 캠페이너로서 미디어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먼저 보육원 강의에서는 아동양육시설 입소 후 보호대상아동 시절에 마주했던 상황과 감정들을 솔직하게 풀어내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다음 주거지 탐색, 전입신고 누락, 돈 관리 등 자립을 하면서 경험과 정보가 부족해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들을 들려주고 다양한 지원 제도에 대한 안내와 실질적인 활용방안도 소개했다.
캠페이너로서는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인식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자립준비청년’의 이전 호칭은 ‘보호종료아동’, 그 이전에는 ‘고아’였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고아는 항상 불우한 캐릭터 또는 범죄자와 같은 자극적인 캐릭터로 연출돼 왔기 때문에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부추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자립준비청년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건강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 인식 개선을 주제로 영상 콘텐츠를 촬영하기도 했다.
▼캠페이너 활동 – 이모티콘 제작 영상
또한, 이때 자립 지원에 있어 중요한 것은 금전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자립정보 격차, 심리적인 어려움, 자립교육의 미흡함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사회적인 공감대가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지금도 여러 언론사의 인터뷰, 각 기관의 FGI(Focus Group Interview) 연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건 두드림지원사업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걱정과 고민을 덜어내고 여러 가지 꿈의 모습들을 두드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았던 점은 한 달에 한 번 사례관리사 선생님을 1:1로 만나서 내 안의 결핍과 고민들을 덜어냈던 것이다. 자립은 내게 있어 항상 불안한 상황의 연속이었는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적절한 시기에 마음 돌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런 혜택을 다른 자립준비청년들도 누리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두드림 서포터즈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 기간에는 SNS를 개설하고 카드뉴스를 만들면서 우리 두드림 사업을 홍보했다. 특히 다양한 영역별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상세하게 풀어내는 카드뉴스를 제작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를 통해 현 참여자와 다음 기수 참여를 희망하는 예비 참여자들에게 상세하게 안내해 활용도를 높이고 싶었다!
두드림 사업 기간이 끝나고 청년 박강빈은 어떤 모습으로 자립하고 있었을까? 사실 나는 보육원 퇴소 후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왔다.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부족함의 이유가 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해왔다. 그 노력은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내면이 아닌 외면이 부족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누구를 만나든 식사를 대접하고 물질적인 선물을 많이 했다. 물류센터 퇴사 이후 내게 퇴직금밖에 남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경제관념과 대인관계 능력에 있어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립해 준 두드림 사업 기간이 끝나고,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을 땐 이전보단 조금 성장한 태도로 반응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립 강연과 멘토링, 서포터즈 활동 등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면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다보니 의미 있는 기회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자립준비청년을 대표해서 TV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것이었다. 처음엔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이 걱정이 많이 됐다. 미디어나 기사제목에서 내가 캠페이너로 활동했던 ‘열여덟 어른’의 이야기가 자극적인 단어들로 표현되는 사례를 많이 봤다. 그런데 유퀴즈의 작가님이 해주신 말씀을 듣고는 한결 마음을 놓은 채 방송을 출연할 수 있었다.
만 18세에 어른이 돼야 하는 ‘#열여덟 어른’이라는 키워드로 내가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거창하지 않았다. 자립과정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이 마주하는 어려움은 일상 속에서 흔히 나타난다. 어떤 집이 살기 좋은 집인지 구분할 수 있는 안목, 고지서를 내는 방법, 계약서를 작성할 때 주의할 점, 공허함을 해결하는 나만의 방법, 결혼식 축의금은 얼마를 내는 것이 적절한지 등등… 자연스럽게 알아야 할 부분에 있어서도 처음이라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사소한 것이라도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선배 어른’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살아간 선배 어른이자 멘토로서 주변의 자립준비청년들과 연대해주면 도움을 받은 멘티 또한 시간이 흘러 좋은 멘토가 될 것이라는 ‘멘토링의 선순환’을 강조하고 싶었다.
혹시 방송을 본 분들이 있다면 나의 이야기는 수많은 자립준비청년들의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니, 다양한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또한, 개인이 느끼는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이지 누구나 사연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일반인들도 때가 되면 누구나 자립을 한다는 이야기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 나의 작은 고백을 통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립준비청년들이 마음의 담력을 얻었으면 좋겠다. 방송을 보고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신 분들, 열여덟 어른의 멘토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다!
다음으로 찾아온 블록버스터급 두 번째 기회는 2월 12일에 열린 자립준비청년 청와대 오찬 간담회였다. 정부는 자립준비청년 지원강화 방안 발표 이후 일부를 법안으로 통과시켜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간담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정책적인 개선을 약속받았고, 당사자로서의 소감과 더불어 아직 개선이 필요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전국에 있는 여러 아동양육시설을 방문하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얘기했다. 시설의 규모가 영세하거나 지역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할수록 자립교육수준과 자립준비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더불어 시설 유형이나 지역별로 일률적인 자립 교육이 지원될 수 있도록 모니터링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2011년도에 마련된 자립표준화프로그램 안에서 보호연장 시점에 맞는 적절한 교육 커리큘럼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물론 그 과정에 자립준비청년 당사자 또한 함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자립준비청년 청와대 오찬 간담회
지난 2월 14일은 내가 자립을 시작한 지 딱 5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 많은 제도적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우선 내가 퇴소했을 당시에 수령했던 자립정착금 300만 원이 올해부터는 1000만 원으로 올랐다. 아울러 5년간 매월 30만 원씩 자립수당을 지급한다.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후배들의 출발을 도울 수 있어 기쁜 마음이 들었다.
또한, 이전에 만 18세가 되었다는 이유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아동양육시설을 퇴소하는 사례가 대다수였다. 대학진학, 취업준비 외에도 자립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아동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해 만 24세까지 선택적으로 보호를 연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아동복지법 개정안 통과).
마지막으로 퇴소 후 가장 먼저 마주하는 어려움은 바로 ‘집’이다. 자립준비청년들이 주거지 마련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임대주택의 유형을 다양하게 만들고 우선 당첨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심리 상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이 생기고 있다.
2021년 7월, 자립지원 강화방안 발표 이후 이렇게 빨리 법이 개정되고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지 몰랐다. 이전부터 목소리를 내며 공감을 구했던 서포터즈, 캠페이너 선배들과 이에 공감해 준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를 빌려준 수많은 당사자분들의 기여도 컸다. 앞으로도 청년 박강빈은 자립준비청년들의 사회적 안전망에 느슨한 곳이 있다면 촘촘하게 이어주면서 살아갈 것이다!
파란만장한 박강빈 인생기의 마지막 종착지는 바로 포스코 인턴 생활이다. 약 6개월간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함께해 주신 구성원들 덕분에 내가 가진 포스코의 이미지도 많이 바뀌었다. 뜨겁고 단단한 ‘고로’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온기를 나누는 ‘난로’가 떠오른다. 그만큼 많은 동료분들과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또 인턴생활을 시작하면서 MZ세대라는 이유로 많은 관심을 받기도 하고 이사회, 사무실 이전, 조직 활성화, 기업시민 특강 등 새로운 경험을 했다. 감사한 마음이 가장 크지만, 받은 만큼 회사에 기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크다!
끝으로 이곳에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위로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여러분 1%의 마음이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지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 1%가 누군가에게는 100% 이상의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 여러분은 사람을 살리고 꿈을 키우는 일에 동참하고 계신 것이다!
3월에 끝나는 인턴십의 마지막 업무가 여러분이 나눠주신 1%의 영향력을 홍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까지 포스코 지원사업의 참여자, 서포터즈 그리고 인턴의 모습으로 여러분과 연대했다. 다음에는 포스코 대학생 봉사단으로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든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함께할 것을 약속하겠다. 다시 한번 자립준비청년을 대표해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보건복지부 ‘슬기로운 자립생활’ 인터뷰 영상
칠전팔기도 고사하는 박강빈 인턴의 뜨거운 열정이 자립준비청년들에게 희망의 선물로 전해지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