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대화가 오간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별칭이 이름을 대신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가슴 속 응어리가 마음을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서로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대화는 50분간 이어진다.
2017년 서울대학교 소셜벤처경영학회 인액터스에서 출발한 이 프로그램은 빛을 완벽히 차단한 공간에서 상담사가 일반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내담자는 50분 동안 ‘마음보듬사’로 불리는 상담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저 들어주고 공감할 이가 필요했던 현대인들에게 마음보듬사는 따뜻한 위로를 선사한다.
포스코 광양제철소에도 그런 마음보듬사가 있다. 임직원들의 지친 마음을 살피는 김석미 심리상담사가 그 주인공. 택배처럼 늘 기다려지고 만나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그녀를 포스코 뉴스룸에서 만나고 왔다.
l 제철소로 간 심리학
철강 기업과 심리상담사,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안전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포스코는 임직원의 스트레스 증상을 관리하고 정신 건강을 지원하기 위해 전문 심리상담사를 두고 있다.
김석미 심리상담사가 포스코 광양제철소에 몸담은 지도 올해로 10년. 안전, 보건, 방재 업무를 담당하는 안전방재그룹에서 임직원의 정신건강을 위한 심리 상담과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상담에 있어 임직원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대개 속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석미 상담사는 “특히 제조업 작업 환경에서는 불안정한 심리가 불안한 행동으로 이어져 사고를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규범을 지키고 안전시설을 확충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작업의 주체인 임직원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해를 예방하려면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이런 인식은 자연스럽게 ‘안전심리’라는 학문의 등장을 야기했다. “하인리히(Heinrich, 1980), 버드와 제르맹(Bird & Germain, 1985) 그리고 리즌(Reason, 2007)의 산업재해 발생 이론을 종합해 보면, 사고를 일으키는 위험요소는 △조직관리 △개인의 유전적 요인과 사회적 환경 △휴먼에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위험의 모든 요소가 사람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 심리학이니 산업 현장에 심리학의 등장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죠.”
안전심리의 핵심은 작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각종 위험 요소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하여 안전을 확보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다. 김석미 상담사는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관찰해 안전한 행동을 끌어낼 뿐 아니라 안전하게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는 모든 과정”이라며 안전심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포스코는 안전한 작업 환경을 위해 다양한 안전심리 상담과 교육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게 김석미 상담사의 전언. 그는 “제조업 환경은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지만 정작 임직원들에겐 익숙한 환경이기에 위험한 환경이 오히려 안전한 환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며 “조직에서 지속적인 안전교육과 더불어 안전한 제도나 시스템을 구축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발적인 동기”라고 전했다.
l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안전심리의 중요성
김석미 상담사와 안전심리의 만남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대한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안전심리 상담과 교육을 시작한 것. 사고를 직, 간접적으로 겪은 분들과 만남을 통해 함께 울고 화내고 좌절하면서 때로는 기쁘기도 했다는 김석미 심리상담사. 직원들과 함께하는 안전 심리 프로그램을 통해 “안전심리의 필요성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절실히 느꼈다”고 전했다.
그렇게 시작한 안전심리 프로그램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장 곳곳을 뛰어다니느라 성대에 무리가 오기도 했지만, 보람은 그 이상이었다. 최근에는 상담과 강의에서 겪은 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이 책에는 안전심리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사례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 누구든 쉽게 안전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기업 최초로 안전심리를 도입한 광양제철소 이야기를 국내외로 널리 전파하고 싶었다”는 그녀는 “교육의 기회가 닿지 않는 분들께 간접적으로나마 안전심리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자 펜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많은 직원분들의 자발적인 신청으로 안전심리교육이 잘 이뤄지고는 있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계기로 안전심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작업 현장뿐 아니라 가정과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안전심리는 중요하다고 말한다.“안전심리란 전문가들이나 특정 영역에 속한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안전하고자 하는 모든 분의 관심 영역이 될 수 있죠. 안전에 대한 최종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만큼 모두가 안전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l 신뢰와 기다림으로 다가가다
산업 현장에 심리학이 왜 필요한지, 특히 안전심리의 영역 중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상담사가 해야 할 부분은 뭔지 항상 고민한다는 그녀가 상담 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내담자의 편안함’이다. 마음이 편해야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상담실을 방문하신 분들이 ‘어떤 모습이든 상황이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요. 한편으로 마음이 편하다는 건 서로 간 믿음이 생겼다는 방증이기도 하잖아요. 어떤 말을 하든 상담실 문을 나서는 순간 걱정이 되지 않게 신뢰를 드리는 상담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상담의 효과는 어떨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극적인 변화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으니까. 김석미 상담사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분들과의 소통은 정말 어렵다”면서도 “첫 만남이 유난히 두려웠던 분들이 마음을 열게 되면 참으로 좋은 친구가 된다”며 살짝 웃어 보였다.
l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변화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석미 상담사는 내담자의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하며 답을 찾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전했다. 특히 소통을 거부하고 의기소침했던 분들이 상담을 통해 일상의 활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고 한다.
“괴로운 시간을 이겨낸 내담자와 조우할 때 ‘심리상담사라 참 좋다’고 느낍니다. 예전에 어떤 분께서 ‘악몽 같은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좋은 시절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 어려움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오겠지만 그게 절망이 아니란 걸 이젠 압니다. 이겨낼 자신도 있고요. 그 힘든 시간 곁에서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최고의 칭찬에 뭉클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장이든 집이든 우리의 마음은 어디서든 흔들리고 깨진다. 때때로 찾아오는 후회는 마음을 괴롭히고 떨어진 자존감은 회복조차 쉽지 않다. 부서지고 깨진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석미 상담사는 우선 ‘나’ 스스로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 몸을 사랑해야 합니다. 몸의 감각을 잘 느끼면 마음의 움직임도 잘 느껴지거든요.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내 몸을 돌보지 않고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규칙적인 운동, 호흡, 명상 등. 여러분이 선호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잘 살펴주세요.”
‘나’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나를 알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기질을 타고났는지, 성격은 어떤지, 추구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취향은 어떤지 등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상담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
끝으로 그녀는 “나에 대해 알았다면 마음을 열고 타인과 함께 소통하라”고 조언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함께 할 때 즐겁고 성장하거든요. 타인의 마음을 수용하면 세상을 보는 많은 렌즈가 생깁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정서를 조절하는 폭도 넓어지고 마음도 더욱더 단단해질 거예요.”